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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4.23(금)
인도네시아 여행기① 자카르타를 떠나며
이춘아 한밭문화마당 대표
아는 만큼 보인다, 고 했으니 이번만큼은 예습을 하고 가리라 작정을 하고 인도네시아로 출발하기 전날까지 ‘또 다른 문화적 충격을 즐기게 될 인도네시아를 찾아’라는 글을 썼었다. 여러 책자를 참조한 정보성의 글이었다. 11박12일 일정의 인도네시아 여행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사전학습의 효과가 있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저 그랬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정리해간 정보는 문자 또는 사진을 통해 내 상상속에 만들어진 일종의 편견을 형성했었는데, 현장에서 그 편견을 애써 지우는데 시간이 더 들어갔다.
문자로 정리해간 정보는 박물관 등 가이드들의 영어해설을 조금 빨리 이해하는데 도움 되었을 뿐이다. 가이드 역시 문자적 정보에 따른 시대적 흐름을 설명해야하므로 해박한 정보로 설명을 하는데, 대충이나마 정리해본 것이 영어해설을 듣는데는 다소 도움되었지만 사전 정보로 형성된 이미지가 현장에 발딛는 순간 핀트가 어긋났음을 느꼈다.
이슬람 회교권 방문은 처음이어서 무슨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사람들, 또는 무슬림 복장의 엄중함 등이 평소 나의 강한 인상이었으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이 사는 모습에 이게 뭐야, 뭐 특별한 문화적 충격을 받을 줄 알았는데..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 저녁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24시간 운영하는 KFC에서 종이컵에 담긴 닭튀김을 얹은 스파게티를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가방을 메고 가는 무슬림 여학생, 시간이 좀 지나니 다양한 색상의 히잡이 패션으로 보였다)
족자카르타 도착 다음날 아침 새벽을 울리는 마이크 소리에 잠을 깼다. 약 20여분 가량을 그 소리와 관련된 꿈을 이미 꾼 다음이었다.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였다. 새벽4시부터 거의 40여분 이상을 동네마이크로 기도를 하는데 숙소 바로 앞이 마이크 방송하는 곳이었는데, 다행히 그곳서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에서 돌아가면서 마이크 기도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이었다. 하루 5번씩 기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새벽은 조용하기에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운율이 있어 그런대로 들을 만 했지만 숙소 가까이에서 계속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족자카르타에서 묵었던 숙소 ‘CHORUS Hotel' 호텔이라기보다 민박집 분위기인데, 이곳에는 이런 형태의 작은 호텔이 많다. 족자카르타는 경주같은 고도이자 교육도시로 대학교만 20여개가 있어 호텔 주변에 하숙집들이 많았다)
첫날의 인상은 ‘아! 기도하는 나라’였다. 기도를 이렇게 하는 나라였다. 85~90%가 무슬림인 나라 인도네시아는 새벽기도로 시작하였다. 마이크 소리는 튀는 소리였지만 집집에서 웅얼거리며 기도하는 소리, 닭 울음 소리, 새소리가 어울리며 마음에 스며들었다. 3일째 되는 날 새벽 기도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날이 밝아서야 눈을 떴다. 3일째 되는 날부터 화장실 이용도 원활하게 되었다. 몸이 적응하는 기간 3일. 족자카르타에서 5일 머문 다음 인구 1천3백만의 자카르타로 이동했다. 자카르타에서의 첫새벽 환청처럼 들리는 기도소리에 잠을 깨어 밖으로 나갔다. 역시 기도소리였다. 대도시의 새벽은 아스라한 기도소리였고 마이크소리도 있긴 했지만 소리는 작았다. 환청처럼 들리는 기도소리였다.
기도소리로 무슬림권역임은 확실히 알 수 있었으나, 또 다르게 핀트가 어긋난 것은 곳곳마다 모스크가 보일 줄 알았으나, 하루종일 다녀도 이렇다할 모스크는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일반 주택이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가 예배처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생활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생활 그 자체였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시골로 가면 둥근 돔형의 모스크가 눈에 띄곤 했다.
(족자카르타의 힌두교유적지인 프롬바난 사원 길 건너편 이슬람 사원)
10년전 ‘문화적 감수성’을 제대로 내 속에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내가 배웠던 모든 학습된 것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갈 때만이 진정한 문화적 감수성이 생길 수 있겠다고 정리한 적이 있다. 알량한 지식들(물론 그것조차 없으면 안되겠지만)에 의한 편견, 우리도 변한만큼 그들도 변해있는 것은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면 빨리 전환이 안되는 편견덩어리. 한정된 시간은 흘러가는데, 보고 듣는 것들이 문화적 감수성으로 소화되지 않고 편견일 수 있는 선입견과 다르면 ‘이게 아닌데’를 연발하고 있는 나를 멍청하게 쳐다보면서 시간이 흘러가 소화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
2010.5.2
인도네시아 여행기② 문화유적
이춘아
공부의 핵심은 무엇인가, 답을 찾았다. ‘상징’을 배우는 것이라고. 인도네시아에 가기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인도, 동남아시아 특별전’ 포스터를 보고는 박물관에 들렸다갔으면 했으나 차일피일하다가 결국 인도네시아를 다녀온 며칠 후 짬을 내어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을 나오면서 우리가 공부해야하는 많은, 대부분의 것들은 결국 ‘상징’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하게 되었다.
족자카르타 인근의 세계문화유산인 보로부두르 불교 유적지를 찾아온 여학생들.
인도네시아의 문화유적들, 7~8세기에 지어진 보로부두르 불교 사원과 프롬바난 힌두교 사원을 다녀오면서 그리고 유적지 외에 삶 곳곳에 담겨져 있는 바틱작품 등에서 기본이 되는 이미지들,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한국에 와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인도 유물과 설명을 보면서 인도네시아에서 보았던 문화유적들이 결국은 인도의 간다라 양식이 거의 유사하게 옮겨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 인도의 각종 문화가 육지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이동하여 그것이 인도네시아에서는 보로부두르 사원과 프롬바난 사원,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경주의 석굴암으로 왔다. 그 속에 담겨진 형상과 이미지는 인도의 간다라 양식이 갖는 상징적 개념에서 발원되었음을 느꼈다. 그 상징이 담고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로 변형되어 나라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상징으로 처리되는 핵심적 개념은 거의 동일하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있는 작품 ‘녹야원에서의 첫 설법’.
이러한 형태의 이야기 부조는 간다라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원래 불교사원의 성소(聖所)와
스투파의 표면을 장식했던 것. 현존하는 유물에는 대략 10가지의 본생(本生)과 70가지의
불전(佛傳)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부처의 가르침과 보살(菩薩行)의 중요성을
신도들에게 재미있고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 간혹 묻게 되는데 이제 좀더 분명히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오랜 시간 축적된 것을 정리하고자 할 때는 그것을 개념화하여 문자로 만들거나 형상화하여 그림형태로 만들어 전달하고자 한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처리된다. 상징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문자이다. 상징의 단어들을 처음에는 하나씩 배우다가 나아가면서 복합적으로 연결된 것들을 배운다. 배움에는 반복적으로 외워야하는 것이 많다. 이것을 왜 외워야하는지 몰랐다. 우격다짐하지 않았다면 좀 달라졌을까만 나는 거부하는 것으로 반항했다.
보로부두르 사원 벽면의 이야기 부조
[블랙]이라는 영화를 보면 헬렌 켈러 같은 아이에게 선생은 단어를 익히게 한다. water 라는 단어 등 몇 개의 단어를 익히게 한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은 공포의 ‘블랙’ 상태에서 아이는 저항한다. 선생이 반복해주는 워터라는 발음을 아이는 손바닥을 통해 발음이 나오는 입모양와 입김, 그리고 실제 물의 느낌을 반복을 통해 느끼게 된다. 물 이외에 몇 개의 단어도 반복한다. 심한 저항 속에 어느 날 아이는 분수대에 빠지면서 물의 개념을 바로 그 순간 깨치게 되고 기뻐한다. 그 순간 다른 개념들도 동시에 이해하게 된다. 왜 선생이 그토록 반복해서 입게 대고 발음하고 느끼게 했던지. 그 때 아이는 왜 공부해야하는지 깨닫고 일취월장하게 되어 지난한 세월을 견딘 후 대학을 졸업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힌두교유적인 프람바난 사원-이곳에도 수많은 이야기 부조와 조각물들이
크게 하나의 탑형태를 이루고 있다.
프람바난 사원 입구에서 사진 한 장 찍다. 이곳은 보로부두르에 비해 관광객들이
현저하게 적어 한가해서 좋았다.
외국여행을 하고 돌아올 때면 우리나라 산천과 문화유적 등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을 갖게 된다. 그것은 여행가기전 내가 알고 있었던 것과 여행 후 내가 바뀐 시선이 무엇인지 확인해보고자 함이다. 상징을 알고 나면 아는 만큼 보인다. 전 세계의 문화유산은 상징 덩어리이다. 상징의 이해는 반복해서 개념을 외움으로써 터득될 때도 있고, 다양한 상징들을 비교분석하여 봄으로써 상징의 핵심을 파악할 때도 있다. 이미지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지는 상징의 함축이기에 상징이 만들어진 과정과 문자로 정리되어진 개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겉핥기가 된다. 그래서 공부하라고 하는 것이다. ☯
2010.5.7
인도네시아 여행기③ 먹거리
이춘아 한밭문화마당 대표
여름이면 수박을 많이 먹게 된다. 시원한 수박을 쩍쩍 잘라 한 입 베어 먹을 때 기분이 좋다. 특유의 사각거리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 아이가 어릴 때 어느 날 부엌 싱크대에 서서 뭘 먹고 있길래 뭐하나 보았더니 수박을 먹고 있었다. 수박물이 떨어지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박씨를 휙휙 뱉어내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시골 마당의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으면서 씨를 마당으로 휙휙 뱉어낼 때가 생각났다. 아이가 부엌 싱크대에서 그러고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의 본능 같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 수박 먹을 때는 신문지를 깔아놓고 수박씨 멀리 날리기 시합을 해볼까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씨 뱉기도 싫고 그냥 시원하게 수박을 쥬스로 들이키고 싶을 때 왜 수박은 쥬스로 만들어 먹지 않을까 가끔 생각했다. 그랬는데 인도네시아에서 수박 쥬스를 먹어보았다. 그래 뭐든 해볼 수 있는데 왜 시도를 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반가운 마음에 한 컵 따라 먹어보았는데 맛은 그저 그랬다. 먹을 수는 있지만 역시 수박은 사각거리는 질감이 한 몫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숙소 아침식단 음료로 물, 오렌지쥬스, 수박쥬스가 기본으로 있었다.
족자카르타에서 머문 숙소는 주택단지 내에 있어 그곳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새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자전거는 간단한 아침거리를 파는 신호. 내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이른 아침 ‘재첩국 사이소’ 하며 팔러다니는 아줌마의 신호체계와 비슷한거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리어카에 이동용 부식가게에서 찬거리를 팔고 있었다. 생선, 닭고기 등을 봉지에 주렁주렁 달아 걸고 야채거리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되냐고 하니까 웃으며 포즈를 잡아준다. 이곳 사람들의 웃음에는 선량함이 있다. 인구 80만의 족자카르타에서 인구 1천3백만의 자카르타로 옮겨가니 그러한 선량한 웃음을 보기 힘들었다.
아침 산책길에 만난 이동형 부식가게 - 주로 주택가를 다니며 팔고 있는데,
애채외에 생선, 닭고기 등을 비닐에 매달아 판다.
족자카르타 숙소 가까운 곳에 새벽 재래시장이 열리고 있음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구경 갔다. 대전 역 바로 옆 새벽시장의 느낌과 비슷했다. 신선한 기운, 요리되기 직전의 생명력과 싱싱함, 그리고 찬란한 빛깔, 흥정이 오가는 긴장관계 그러한 분위기들이 나를 들뜨게 한다. 떡 같은 것을 석쇠에 구워 팔기에 자세히 보니 코코넛 떡이다. 천루피아(우리 돈 100원 가량)를 들이대니 2조각을 준다. 그것을 먹으며 구경하다보니 아쉬워 나중 요깃거리로 4조각을 더 샀다. 노란 바나나만 보았는데 시커먼 상태이지만 금방 따온 것 같은 바나나도 맛보기 위해 샀다. 떫었는데 다음날 숙성된 후 떫은 맛은 사라지고 달콤한 맛만 남아 맛있었다. 지금도 코코넛 떡과 바나나가 먹고 싶다.
코코넛떡구이 2개 1천루피아(백원 가량) 맛있다. 코코넛 속 과육을
갈아 네모지게 석쇠에 구었다.
바나나 종류, 전날 따서 아침 일찍 자전거로 실어온듯. 야생의 느낌이 난다.
생선은 잎상자에 두 마리씩 넣어 파는데, 생선의 신선도를 좀더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선판매는 무슨 잎인지 모르겠으나 잎 상자에 두 마리씩 넣어 팔고 있었다. 육류는 생선과 닭고기가 대세. 돼지고기나 쇠고기 요리를 먹으려면 중국음식점에나 가야 먹을 수 있다. 한 끼 식사로 가장 싸게 먹었던 것은 접시 하나에 밥, 튀긴 닭고기 한조각, 양배추 몇조각, 두부요리 조금, 양배추 찍어먹을 수 있는 쌈장, 그리고 홍차 한잔해서 우리 돈으로 1천2백원 정도. 길가에 지붕은 있지만 노천 형태의 식당이었는데 인터넷 이용도 가능해 들어갔는데, 모기 때문에 오래 앉아있을 수 없었지만 5일 있는 동안 2번 이용했다.
고추는 작은데 청양고추보다 훨씬 맵다. 피클형태로 또는 그냥 생고추가
반찬으로 나오는데 볶음밥 등 느끼한 음식과 함께 먹으면 눈물이 날만큼
맵지만 개운맛에 먹는다.
한번은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선교사님이 뜨끈한 국물이 있는 식사를 하러가자고 하셔서 갔더니 허름해 보이는 길가 식당이었는데 신선로 같은 곳에 넣은 탕 종류. 정말 뜨끈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화학조미료를 너무 많이 사용한다고 하였다. 인도네시아 가기 전 읽어본 책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진 백색의 화학조미료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에 엄청 수출되는데, 음식할 때 과다하게 넣는다 하였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동안 내내 머리가 좀 아팠는데 그 때문이 아닌지 의심쩍어 했다.
또 한번은 인도네시아 현지분의 안내로 들어간 식당은 오리고기 전문. 베벡이란 곳이었는데 체인점인듯 했다. 구운 오리고기와 밥, 그리고 쌈야채와 쌈장.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사람들 식으로 손으로 밥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계속 그렇게 먹어볼까 했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내 편하게 먹었다. 마실 것으로는 그 분이 권유해주는 것을 먹었는데 알고 보니 아보카드 쥬스였다. 아보카드 쥬스는 그곳에서 약간 비싼 편.
볶음밥과 짜파게티 같은 맛의 국수, 계란후라이, 매운고추 피클
자카르타 숙소 아침은 간단 뷔페 형식. 밥은 그냥 횐밥과 볶은 밥으로 나뉘며 볶은 밥은 계란 등 넣고 노르스름하게 볶은 밥과 짜장 같은 맛이 나게 검은 색나는 볶은 밥 두 종류가 번갈아 가며 나왔고, 라면 같은 것을 짜장 맛나게 볶은 것도 있었는데 누구는 그것을 짜파게티 맛이 난다했는데 맛이 비슷한 것 같긴 했지만 훨씬 맛있었다. 계란 후라이는 거의 매일 나왔는데 계란이 우리나라보다는 엄청 큰지 후라이가 컸다.
양념하여 오븐에 구은 생선요리와 밥.
낮에 구경다니다 괜찮겠다 싶은 식당이 있어 들어갔더니 소위 인도네시아식 뷔페라 골라먹을 수 있었다. 생선요리가 먹음직스러워 골랐다. 생선요리는 튀긴 것, 구운 것, 찐 것 세 종류, 그 외 나물류가 있었는데 나물류의 종류가 다양했다. 하나를 골라 달라했더니 굉장히 쓰다하면서 그래도 괜찮겠냐 확인시키며 코코넛 잎 나물이라했다. 과연 쓴 맛이 우리나라 머위 맛과 비슷했다. 국종류가 있길래 시켰더니 꼬리곰탕이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이것저것 골라 쌈까지 싸먹고 나오니 이제까지 먹었던 것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지불한듯 했다. 구운 생선 한 마리에 우리나라 돈으로 5천원가량, 꼬리곰탕 한그릇 4천원 가량 그 외의 것은 싼 편. 그래도 메뉴 보지 않고 현물을 골라먹으니 흐뭇했다.
2010.5.17
인도네시아 여행기④ 이동 수단
이춘아 한밭문화마당 대표
중학교 2학년 무렵 우리 집은 버스 종점 부근의 변두리로 이사 갔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통학하며 학교를 다녔다. 하루 2시간은 꼬박 버스 안에 있었다. 버스에서 졸기, 생각하기, 단어외우기, 버스에서 틀어주는 라디오 노래듣기, 차창 밖 변화하는 도시의 풍경 보기, 그리고 누구를 좋아하기 등 사춘기를 지배한 많은 부분이 버스 안에서 일어났다. 그 당시 버스는 앞 뒤 출입구에 차장이 있었다. 차장은 차비를 받는 일 외에 출퇴근 통학시간 사람들을 안으로 밀어 넣는 것도 큰 몫이었다. 남자차장들이 그 역할을 했다.
고등학교 갈 즈음 여자차장도 생겼고, 그들은 안내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람을 안으로 밀어 넣고 버스를 탕탕 치면서 오라잇 하는 남자 버스 차장이 멋있어 보였다. 좋아하는 버스 차장이 생겼다. 그 차장이 있는 버스를 타게 되면 운 좋은 날이라 여겼고, 때로는 그 버스 차장이 있는 차를 타기 위해 무작정 기다려보기도 했다
자전거에 이러한 형태의 대바구니를 걸고 물건을 넣어 실어나르는 모습을 시골로 가면
볼 수 있다. 집집을 방문하여 생활용품을 파는 아주머니.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버스를 탔다. 남자 버스 차장이 있었다. 반가웠다. 버스차장을 좋아한 몇십년 전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웃음이 났다. 그 버스차장을 만나면 인사만 꾸벅하고는 말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사춘기 소녀의 첫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트랜스 족자카르타 시내버스 내부. 버스차장은 제복을,
앞쪽 운전수는 넥타이 정장을 하고 운전한다.
인도네시아 역시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다.
족자카르타에서 프람바난 사원으로 가기 위해 처음으로 버스를 이용하였다. 숙소의 아가씨가 택시도 좋지만 버스를 타고 가는 것도 좋다고 권유해서이다. 대중교통편이 좋지 않아서인지 책자에서도 버스 타라는 내용은 없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택시를 이용한다. 프람바난 사원도 택시를 이용할 작정이었다. 숙소 근처의 버스정류장을 안내받아 갔더니 번듯한 정류장에서 버스비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고, 버스 차장은 차비받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에서 넥타이 멘 정장차림은 아마도 버스 운전사 뿐이지 싶다. 버스 차장도 제복을 갖추어 입는다. 모든 버스가 그런 것은 아니고 이러한 시스템을 갖춘 버스는 정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것인지 trans 라는 단어를 붙여 족자카르타에서는 transyogyakarta 라고 쓰여 있고, 자카르타에서는 transjakarta 라고 쓰여 있다. 그 외 버스는 마을버스이거나 외곽운영 버스로 그야말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보았던 시커먼 연기 날리며 버스차장이 사람이 태우고 탕탕 치며 출발 신호하는 작은 버스들이다. 그 버스는 인도네시아를 모르면 탈 수 없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주요 이동수단은 오토바이. 도로의 절반은 오토바이일 정도로 많이 이용한다.
저녁시간에 젊은 남녀가 함께타고 데이트를 즐긴다. 교통사고가 많을 것 같은데, 접촉사고로 싱갱이 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다. 음주운전이 거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수퍼마켓에서 맥주조차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인구 1천3백만의 거대도시 자카르타는 교통난으로 악명이 높은 곳. 지반이 약해 지하철을 놓을 수 없다했다. 출퇴근 시간대 외에도 늘 도로사정은 좋지 않다. 자동차, 오토바이로 도로는 늘 꽉차있는 편이다. 유일한 해결책이 버스전용도로를 만들어 지하철을 대신하고 있었다. 자카르타 관광 시에는 transjakarta를 이용하길 권하고 싶다. 3500루피아(우리돈 350원)만 내면 버스를 갈아타면서 웬만한 곳은 다 다닐 수 있다. 일시적인 관광객은 그 루트를 몰라서 택시를 탈 수밖에 없고, 택시비도 만만치 않고 거스름도 잘 주지 않아 싱갱이 하며 기분 나빠 하느니 트랜스자카르타 버스를 이용하면 속편하고 저렴하며 막히지도 않고 시가지를 조망하며 볼 수 있어 좋다. 더구나 자가용과 택시는 밀리며 서있는데 버스전용도로에서 유유히 가고 있을 때 통쾌감까지 있다. 색으로 구분된 8호선까지 있는 버스 노선은 지하철 연결망처럼 보인다.
길가다 흔히 볼 수 있는 장면. 패트병에 무엇을 넣어팔길래 자세히 보았더니 기름.
주로 오토바이용이다.
문제는 외부 관광객이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체가 없다. 버스노선에 대한 간단한 리플렛을 마지막 날까지 찾지 못했고, 버스노선안내 포스타를 어느 정류장에서 보고는 너무 반가와 얼른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지도와 대조해보며 그리기를 해보았다.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으니 어디서 어디로 가는 지명을 알아야 목적지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노선을 실제 그려보니 자카르타 시내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나라가 버스노선표 하나 없는 나라가 있나 싶었다. 지하철 대신 버스전용도로가 있고 버스노선 색깔까지 있으면서 그 정보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자카르타 시내의 버스노선표, 도로 차선 하나는 버스 전용길이라 막히지 않고 저렴하여 이용하면
좋으나 노선표를 알기 어렵다. 버스정류장에 거의 유일하게 붙은 포스터라 반가운마음에 사진
찍어와 지도와 대조하며 버스 노선을 익혔다.
우리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지역마다 변변한 관광안내 리플렛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있다 해도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었다. 요즘 고속도로 휴게실 안내소에 누구나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꽂혀있는 지역안내 리플렛을 보면 감개무량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컬러 리플렛 인쇄비는 여전히 비싼 편이지만 관광에 대한 인식과 기본 생활여유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GDP 3만불 시대를 나를 그렇게 실감하고 있다.
태국만 가도 공항에서 무료 관광안내지도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인도네시아는 어느 곳을 가도 무상의 지도는 야박할 정도로 없다.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 갔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리플렛이 없냐고 물으면 간신히 꺼내주고 그 리플렛이 사실 박물관을 이해하는데 별 도움도 안되고 인쇄상태도 별로 좋지 않다. 다른 문화시설이나 관광지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알려져 있고 해외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많이 오는 보로부두르 사원에서도 입장료 15미국달러(그곳 물가로 상당히 높은 편)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단색의 복사지 같은 리플렛이 있을 뿐이고 어설픈 인쇄물로 호객 행위하며 따라붙는 잡상인들에게 시달림을 받았다.
인도네시아를 떠나기 며칠 전 가지고 다니던 지도에서 버스 노선을 발견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색만으로 알 수 있을 뿐. 그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언을 확인하며 씁쓸하게 떠나왔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호화 리플렛을 가져와 그대로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가 버리는 수준이 된 우리의 시선은 그런 것 하나로 인도네시아를 우리나라 70년대로 치부해버리는 졸부가 되었다.
숙소 복도에 걸려있는 바틱 천에 염색하여 만든 액자.
서구화되기 전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렸다.
버스타고 다니며 찾아다니는 것도 고단하여 큰 호텔로 들어가 외곽 관광할 수 있는 코스를 안내받아 인근의 보고르라는 곳을 갔다. 영어안내 가이드는 한국인들을 꽤 알고 있는 듯, 자기 나라사람들도 한국인만큼 부지런히 일했다면,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오늘날 이렇게는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인도네시아 등 열대지방 사람들이 게으른 편이라고 하지만 열흘 살아보니 몇 시간 다니면 더위 먹은 것 같아 오후는 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오래 살려면 쉬엄쉬엄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대학에 와서 사회과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매력적인 부분은 복잡한 사회현상을 조사하여 예측가능하게 한다는 대목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예측가능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예측불가능의 시대를 살아온 셈이다. 요즘 대전에도 버스정류장에 버스대기시간을 알려주는 기계가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몇분 기다리면 온다는 믿음으로 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다. 지하철을 타면 약속장소에 언제 도착할 것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한 자잘하지만 결코 간단히 볼 수 없는 것들이 우리를 신뢰사회로 이끌어가고 있다. 몇 년 전 스위스 제네바 버스정류장에 버스 도착 시간표가 붙어져 있는데 거의 정확하게 도착한다는 것에 놀랐고 버스표를 검사하는 사람도 없다는데 두 번 놀랐다. 물론 불시에 검문하여 걸리면 몇 배를 물어내야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나라 예술의전당 같은 공연장 앞에서 전통공연 리허설을 하다가 쉬고 있는 모습.
최근 우리나라 기차역도 기차표를 점검하지 않는다. 다른 빈자리에 앉아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확인하러 온다. 공공기관의 담장을 허무는 작업도 꽤 많이 진척되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중심가에 모나스 라는 탑을 구경하려면 출입구를 제대로 찾아가야한다. 그 넓은 공원 한가운데 있는 곳을 찾아가기 위해 얼마나 돌아가야 하는지 그나마 출입구 문을 조금만 열어 사람들이 오토바이 등을 끌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 통제사회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역시 그러하였다. 터널을 통과해오니 그 사회가 얼마나 불신과 통제, 억압의 사회였는지 새삼스럽다. 정말 우리는 선진의 단계로 돌입해 있는 것인가.
2010. 4.11
또 다른 문화적 충격을 만나게 될 인도네시아를 향해
이춘아
국명: 인도네시아공화국
수도: 자카르타
인구: 2억3천만8백만(2008년)
면적: 191만9440m2 (한반도의 9배)
기후: 열대성 몬순기후, 고온다습(연평균 25~28도, 습도 73~87%)
정부형태: 대통령중심제
행정구역: 33개주(자카르타, 족자카르타, 아쩨, 파푸아, 서파푸아 5개 특별 주 포함)
일인당GDP: $3,900(2008년)
화폐: 루피아
환율: 100루피아=12.44원(2010.4 기준)
공용어: 인도네시아어
약사
1세기경: 인도상인 통해 힌두교 문화유입
644년: 몰라유 힌두교 왕국 성립
689년: 수마트라에 스리위자야 불교왕국 건설
1292년: 동부 자바에 마자빠힛 힌두교 왕국 성립
13세기 초: 이슬람교 유입
15세기: 말라까, 반담, 마따람 등 이슬람 왕국 성립
1511년: 포르투갈, 말라까 왕국 점령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설립
1942년: 일본 군정 실시
1945년: 일본 항복, 인도네시아공화국 독립선언/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취임, 4년간의 네덜란드 무력항쟁 시작
1949년: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독립 승인/인도네시아연방공화국 수립
1950년: 인도네시아공화국으로 복귀
1968년: 수하르토 집권
1998년: 수하르토 퇴진, 하비비 부통령에게 대통령직 이양
1999년: 압두르라만 와히드 대통령 취임
2001년: 메가와티 대통령 취임(수하르토 딸)
2004년: 최초의 민선 대통령 유도요노 취임
내가 가게 될 상황이 되어서야 찾아보니 인도네시아는 어마어마한 땅덩어리다. 아니 어마어마한 땅넓이를 갖고 있는 섬들이다. 17,508개의 섬(섬의 개수도 책마다 조금씩 다름)으로 이루어진 도서(島嶼)국이라 한다. 국토면적은 1,904,569Km2(책마다 숫자가 조금씩 다름) 면적 숫자는 가늠하기 어려우나 나라의 가로길이가 5천Km이고 세로길이가 2천Km에 한반도의 9배라고 하니 감이 잡힌다. 가로 200km 세로 400km 범위에 살던 사람이 사실 감잡힌다는 말도 거짓이다. 단일민족이 최고인줄 알고 살아왔는데 최근 다문화 다민족 등의 단어를 억지로 받아들여야하는 우리로서는 인도네시아가 300 이상의 종족에다 200여종이 지역어를 사용하는 나라라고 하는데 어떻게 감을 잡을 수 있을까?
게다가 적도를 중심으로 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에 있다고 하는데, 적도는 우리 한국 사람에게 어떤 느낌의 단어일까. 남반구와 북반구의 경계선, 일년 내내 덥다는 것 등. (적도(赤道), equator: 위키백과에 따르면 ..... 적도는 위도의 기준이 되며, 정의상 적도의 위도는 0도이다. 그러므로 적도의 북쪽을 북반구라하며, 남쪽은 남반구가 된다. 적도는 태양의 직사광선이 많이 받는 일이 많아 상승기류가 생기고, 적도무풍대를 형성하여 높은 온도와 습기가 많은 열대우림기후가 생긴다. 적도는 14개 나라의 영토 또는 영해를 지나간다. - 14개나라 중 인도네시아가 있다)
칙칙한 정글, 늪, 호수, 짧은 강, 열대우림 기후대, 강우량 많고, 습도 높다. 3모작, 4모작까지 가능한 쌀 산지. 그나마 겨울도 있는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보았던 한쪽에서 벼를 베고 한쪽에서 모심기를 하는 곳과도 또 좀 다르다. 일년 내내 심고 베고 가능하다. 사시사철이라는 단어가 불필요한 곳.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 지나면 가을이 오고 이어 겨울이 오며 겨울 지나면 한해가 마무리되는 곳에서 절기 따라 사는 것을 진실인 것처럼 알아왔는데, 일년의 구분도 크게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문화를 갖게 될까? 그러한 것들이 궁금해진다.
2003년 충남대 박물관에서 함께 갔던 실크로드 답사는 중국 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따라가는 대륙간 이동경로에 남겨진 문화적 흔적을 보았다면, 이번 인도네시아 여행은 바다를 통한 문화의 흔적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륙간 실크로드에서는 불교문화 이동경로를 볼 수 있었다면, 바다를 통한 실크로드는 다양한 종교문화의 번성과 쇠퇴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나를 긴장되게 만든다. 대승불교에 의한 불교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이제까지 보았던 형태와는 다르다. 그리고 힌두교, 이슬람종교문화, 기독교문화가 혼재되어 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이동에 따른 문화적 차이는 분명하고 그 유적과 종교적 문화의 차이를 보는 재미도 상당히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진실인 것으로 알아왔던 4계절의 변화가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진실 또는 진리는 어떠한 것일까?
인도네시아의 지도를 보면 서쪽 지역이 수마트라, 중간이 자바, 오른쪽 동쪽이 이리안 자야. 책에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표현을 과거 자바Jawa, 현재 Sumatra, 미래 Irian Jaya 라 한다. 시대적 번성의 순서를 말한다.
나는 과거에 속하는 자바섬으로 간다. 우리나라의 경주처럼 고도(古都)에 해당하는 족자카르타(Yogjakarta)에서 5일,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5일 머물 예정이다.
우리나라 서점에서 인도네시아와 관련한 관광책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발리 책자는 출판사마다 발간되어 있지만, 인도네시아라는 제목의 관광안내서는 없다. 도서관에서 동남아시아 전공 대학생들이 볼 듯한 개론서에 해당하는 [인도네시아 사회와 문화](양승윤 외)와 여행책자 [천만가지 이야기가 있는 나라 인도네시아](임진숙), [별나 외교관의 여행법](박용만), [인도네시아의 명소와 명문대학](차종환 외) 등을 빌려 읽고 참조하였다.
인도네시아라는 이름은 인도와 관련된 서구적 관점의 나라이름이다. 인도+군도(群島)가 조합된 이름이 인도네시아라 한다. 기원후 인도네시아 역사를 보면 끊임없는 외래문명의 유입이 있었다. 1~2세기 인도의 상인들이 들어오면서 불교, 힌두교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 13세기에 이슬람이 전파된 이후 오늘날 전체 인구의 88%가 무슬림으로 세계최대의 이슬람교인이 많은 나라이지만 국교는 아니라 한다. 전체 인구 2억으로 추산할 경우 1억7천만이 무슬림인 셈이다. 그 다음이 기독교(5.35%), 카톨릭(2.51%), 힌두교(2.05%), 불교(0.96%) 순이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가 11%로 올라갔다.
세계최대 이슬람교인이 많은 나라답게 전국에 52만5천여개의 이슬람사원이 있다.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이지만, 일찍부터 유럽 네덜란드 식민지(1609~1942)였다. 300여년의 식민통치하에 있으면서 가톨릭과 기독교권에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 같은데 그에 비해 교세는 약한 편이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은 네덜란드보다 먼저 인도네시아로 진출하여 향신료 등의 물자교역을 하였는데, 그 당시 금1g과 향신료1g이 같은 가격으로 유통되었다한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기독교를 인도네시아에 전파하려했으나 포교가 잘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500년대 당시 이미 일본과의 교류, 남아메리카 진출로 인해 인도네시아를 포기하게 되고 이어 네덜란드가 진출하게 된다.
1602년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 설립하여 향료와 커피 수출 독점권을 따내고 자카르타를 Batavia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식민지 경영의 본거지로 만들어버린다. 1811년 5년간 영국에게 잠시 지배권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는 30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해왔다. 그러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에도 반식민지 독립운동이 퍼지게 되었고,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네덜란드가 위축되면서 독립운동이 확산되나 1940년 2차대전으로 일본 군사 정권이 들어선다. 1945년 8월14일 해방, 8월17일 독립선언, 1949년12월27일 정식 독립국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나라와 시기적으로 유사하다.
1~2세기경 인도로부터 유입되어온 힌두교와 불교가 6~8세기에 가장 번성하였다가 13세기경 이슬람교가 유입되면서 서서히 힌두교와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15세기에 최초로 이슬람 왕국이 탄생하고 힌두교는 발리섬으로 쫓겨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데 현재 발리섬에 힌두유적이 가장 많이 몰려있다고 한다.
(1~2세기경 인도는 해상 이동이 많아 동남아시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인도 아유타 공화국의 공주는 48년에 배를 타고 우리나라 가야로 들어와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허황옥 왕후가 되었고 김해 허씨라는 성씨를 만들었다. 허황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결혼이민자라는 표현도 요즘 사용되고 있다. 그 당시 허황옥은 불교와 차 씨앗을 싣고 붉은 돛배를 타고 남해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
300여종족과 200여종 언어권의 인도네시아를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우를 수 있었던 이슬람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것도 궁금해진다.
서구열강 침입과 통치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의 사회적 현상은 서구적 잣대로 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 사회조직social fabric에 대한 이해가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필수요소라고도 한다.
인도네시아인들의 정신세계는 뭐든지 이해하려하고, 참을 줄 알고, 기다릴 줄 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화를 내고 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문법보다는 정황에 따른 피해자 자신이나 주변 인물들에 행해지는 Main Hukum 이 통용된다. 자연이 인간에 우선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모두 신의 섭리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표현된다.
겉으로는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나라처럼 보이지만, 생활 전반에 배어있는 풍속은 이슬람교 이전의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슬람교로 상징되는 자바 섬과 힌두교로 상징되는 발리 섬의 풍속은 다른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흡사하다고 한다.
이슬람교식 선악기준을 갖고 있기에 초조, 노여움, 피곤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평온자체가 규정이므로 거칠고 위험을 도모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글에는 여성들은 비교적 현실적이나 남성들은 하루종일 농담으로 지낸다고 한다. 외부 관광객들은 '여유있는 사람‘이어서 ’곤란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어 줄 것을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웠던 쟈바원인(1936년 네덜란드 고고학자가 중부 쟈바지역에서 50만년전 사람의 선조인 자바원인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 화석을 발굴. 빙하기부터 삶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이 나왔다고 하는 쟈바섬, 문명의 이동에 의한 토착민과의 결합된 결과로서 유무형의 문화유산들, 그리고 폐해들, 이제까지 내가 알아왔던 것과는 또 다른 버전의 문화적 충격을 만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향한다.
2003년 실크로드 답사를 앞두고 썼던 글은 ‘오아시스를 기다리며’ 였다. 답사 후 첫 글은 ‘오아시스는 없다’ 였다. 내가 생각했던 이발소 그림같은 오아시스가 아니었다는 표현이었다. 비록 7박8일의 답사였지만 공항에서 대전으로 내려오는 차창 밖으로 본 우리나라는 전국이 오아시스였음을 감사드렸던 기억이 난다. ☯
첫댓글 인도네시아 이야기 반갑네요. 저는 KOICA단원으로 반둥위쪽 렘방이라는 곳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자카르타, 족자, 보고르... 익숙한 이름, 익숙한 지명입니다. 저희 부부는 신혼여행도 인도네시아를 다녀왔는데... 글을 보니 옛생각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