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이론이 많은 기자 동래설의 주인공인 기자능 참봉 차첩 및 기자능 개수시 감동자 가자 칙명(勅命) 등
1. 문헌에 의하면 기자(箕子)는 중국 고대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에게 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고, 주나라 무왕에 의해 은나라
가 멸망되자 풀려 나와 무왕에게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인 홍범(洪範)을 가르켜 주어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했다는 설임.
(중국문헌 : 죽서기년, 상서대전,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등)
2. 기자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식
가. 구당서 고려전(고려는 고구려를 뜻함)에는 고구려가 기자를 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숭배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통일
신라때는 기자를 중요시 여긴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고, 다만 당나라에 유학한 최치원이 기자가 동으로 와서 교화를 베푼
것은 인정하나 기자 조선이라는 실체는 인정하지 않았음.
나. 고려 시대에 와서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동방 유학의 始原으로 기자를 생각하여 숙종 7년(1102년) 평양에
기자 사당을 세워 국가적으로 공식 제사를 지내고, 명종 8년(1178년) 기자 묘까지 설치함.
다. 조선왕조 개국때 鄭道傳은 "조선경국전" 에서 조선이 기자 조선의 계승자임을 천명하였고.
- 유교적 가치관이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리자 윤두수의 기자지, 이이의 기자 실기, 한백겸의 기자 유제설, 서명응의 기자 외기,
이가환의 기자 전고등 기자에 대한 저술이 많았으며 성리학의 발달로 도학정치가 대두되어 기자에 대한 숭앙심이 고조됨.
라. 조선말기 외세의 간섭이 심하자 三韓의 정통성을 내세워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기자를 중흥 군주로 강조하기 위하
여 기자가 주나라 무왕으로 부터 조선왕으로 책봉 받았다는 설을 부정하고, 백성들이 추대 하였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중국
으로 부터 자주성을 강조 하였음.
* 필자가 조사한바에 의하면 조선시대 까지는 기자묘로 사용하던 것을 대한제국(고종말기)에 능(陵號)으로 승격 사용하였음.
마. 구한말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종래의 중국의 선진 유교적 정치 제도는 후진성에 불과 하므로 기자의 동래설을 부인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고, 현재는 제왕운기의 前조선의 시조를 단군으로, 後조선의 시조를 기자로 한 내용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음.
* 기자에 대한 내용은 중국 고대 문헌 여러곳에 나타 나고, 단군에 대한 기록은 720여년전 고려 충열왕때 國
尊 일연의 삼국유사 에서 처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조선초 태종때는 기자 사당에 단군을 배향 시켰었고, 세종
때 와서 단군 사당을 별도로 지었다. 이런한 기록으로 볼때 단군과 기자에 대한 문제는 우리 고대사에서 풀어
야 할 큰 숙제로 사료된다.
1) 기자능 참봉 차첩
◎ 해제 : 000 임 기자능 참봉 서판임관 8등자. 광무 8년7월12일. "궁내부대신서리 궁내부협판 박용화" (1904년 고종41년)
* 차첩을 받은 사람의 성명이 지워져 아쉬움.(후대에 매물 과정에서 후손이 조상의 이름을 지은것으로 보임)

2) 기자능 석물 및 정자각 수개시 감동으로 가자된 칙명
◎ 해제 : 칙명 민영화 승 정3품 통정대부자. 광무 6년9월19일 "기자능 석물급 정자각 수개시 감동 가자사봉" 칙
(1902년 고종39년)

3) 기자릉 엽서(일제강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