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서광범)과 미니 스커트(윤복희)의 착용자 효시(嚆矢)
1. 양복의 최초 착복자 서광범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은 김홍집의 주장으로 고종 18년 1881년 4월~7월까지 약 4개월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문물시찰단으로 박정양(朴定陽)・어윤중(魚允中)・조준영(趙準永)・홍영식(洪英植)・엄세영(嚴世永)・강문형(姜文馨)・조병직(趙秉稷)・민종묵(閔種黙)・이헌영(李憲榮)・이원회(李元會)・심상학(沈相學)・김용원(金鏞元) 등 12명의 정식위원 조사와 각조에서 이들을 보조하는 수원(隨員. 윤치호, 유길준 등) 2명・통사(通事) 1명・종인(從人) 1명 등 5명으로 총 60명으로 편성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개화에 반감을 가진 세력을 무마하고 목적을 숨기기 위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시찰단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조사시찰단은 동래부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메이지유신(明治維新)뒤 일본에 나타난 개혁의 실태와 국정을 살펴보았다. 일본 정부의 각 부처와 군대, 군사 학교, 무기 제조 공장, 세관, 도서관・박물관 등 문화 시설 등을 나눠 맡아 시찰한 뒤 이를 여행기인 문견기와 시찰 보고서로 작성하여 고종에게 제출하였다. 여행 견문기는 이후 국내에서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882년 1월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조사 시찰단 12명은 해당 부서의 요직에 임명되어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사시찰단 일원인 서광범(徐光範. 1859년 11월 8일 ~ 1897년 7월 17일 또는 8월. 자 서구(敍九), 아호 위산(緯山), 본관 달성(達城). 사후 추서 시호 익헌(翼獻). 미국식 이름 케네스 서(Kenneth Suh))은 일본에서 이곳저곳에서 선진 문물을 시찰하다 요코하마의 한 양복점에 들어가서 개화복(開化服)을 보고 즉석에서 구입한 후 개화복을 입고 귀국한 것이 우리나라 양복의 효시(嚆矢)이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인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도 두루마기를 벗고 잇따라 양복을 입게 되는데 당시의 양복은 라펠이 작고 앞단추가 3∼4개 달린 풍성한 실루엣의 색코트(sack coat)였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후 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양복착용도 공인되었다.
1896년 광화문 우체국 앞에 일본인 하마다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양복점하마다 양복점(하마다 양복점)이 생기고 조선인 양복재단사들이 양성됐고 마침내 1903년 조선인이 설립한 최초의 양복점(한흥양복점)이 등장한다.
현재 가장 오래된 종로양복점은 1916년 종각 근처에서 이두용(李斗鎔.1882~1942)이 창업했으니 올해로 역사가 99년 되었고 종로양복점은 창업주 이두용(李斗鎔.1882~1942)에서 4남 이해주(李海注.1914~1996)에 이어 지금은 손자인 이경주(李景柱.1945~)씨가 꿋꿋이 지켜가고 있다고 한다.
2. 청바지의 발명자 Levi Strauß
청바지는 독일 출신 천막천 판매업자 Levi Strauß(1829~)가 1853년에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Levi Strauß는 1829년 독일 남부 Bavaria에서 태어나 18세때인 1847년 American dream을 꿈꾸고 미국 New York으로 건너가서 미국에서 의류사업을 하는 형을 도왔다.
24세가 되던 해 새로운 시장창출을 위해 서부 개척시대의 mecca였던 San Francisco로 이주한다. 그 당시 San Francisco에서는 황금이 많이 나왔다. 금을 캐려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gold rush를 이루었고 그들이 묵는 천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Strauß가 들고 온 사업 밑천은 당연히 천막 천이었고 Strauß는 천막 천과 함께 천막 완제품도 팔았다. 다른 업자에 비해 천을 싸게 구입할 수 있어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이것은 화를 불러 들였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군납용 천막을 대량으로 생산했다가 그만 납품할 길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부도가 났다.
천막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빚 독촉은 심해졌다. 직원들도 급여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Strauß는 싸게라도 팔아서 밀린 빚과 직원들의 급여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막대한 양을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광부들의 바지가 쉽게 찢어지는 알게 된 Strauß는 천막용 천이 천막 전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Strauß스는 튼튼한 천막 천으로 바지를 만들어 광부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청바지의 효시(嚆矢)이다. 이 바지의 수요는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Strauß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았다.
1860년부터는 천막 천 대신 뻣뻣하지 않은 데님(Denim)이라는 직물로 청바지를 만들었다. 1960년대에는 진(Jean)이라고 불리게 되고,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상복·휴양복으로 널리 입게 된다. 우리나라에 청바지가 들어온 건 청바지 나이 100세가 넘은 1950년대 이후라고 한다.
3. 미니 스커트의 창안자
최초의 짧은 바지는 고대 로마에서 튜닉(tunic)의 일부로 입었고 군인·검투사와 노예들도 입었다.
중세 유럽에는 갑옷의 허벅지 부분을 가리는 짧은 철갑 치마도 입었다. 오랫동안 미니스커트는 남성의 의상으로 중세 이후까지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멀었다.
1925년 프랑스 디자이너 폴 포와레가 아주 짧은 치마를 선보였다. 당시로선 신체의 은밀한 부위로 여겨졌던 무릎을 드러내 충격을 줬다. 역풍이 거세 폴 포와레의 짧은 치마는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뒤 프랑스 의상가 앙드레 쿠라주(André Courrèges 1929~)이 미니스커트를 만들었지만 상품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미니스커트를 디자인해 대중 속으로 파고 든 사람은 영국의 디자이너 Mary Quant(메리 퀀트)이다. 1934년 영국에서 태어난 Mary Quant는 London Goldsmith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남편 Alexander와 함께 ‘Bazaar(바자)’라는 옷가게를 열었다.
Mary Quant는 단순하고 깔끔하며 다소 아동복 같은 의복과 액세서리 등을 선보여 짭짤한 재미를 보았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Mary Quant는 보다 더 파격적인 여성 옷을 선보이기로 하고 디자인에 몰두하면서 여성의 신체부위와 더불어 남성 심리까지 분석했다. 당시 영국은 작고 짧은 것이 유행이었다. Mary Quant가 아끼는 자동차도 미니쿠퍼였다. 아찔하게 짧은 스커트를 만들어 몸매를 자랑하게 하자는 생각을 하고 미니 스커트를 내놓았다.
그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여성이 무릎 위를 노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Mary Quant의 생각은 먹혔다.
1964년 탄생한 미니스커트는 도덕성을 잘라낸 옷이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영국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젊음과 활동성, 참신함에 그 시대의 정신과 어우러져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해괴한 옷으로 국민정서를 해친다며 못마땅해 하던 영국 정부도 입이 딱 벌어지는 인기와 수출고를 인정하고 Mary Quant에게 훈장을 주기로 한다. Mary Quant가 1966년 영국왕실에서 수여하는 대영제국훈장을 받으러 버킹엄 궁전에 갔을 때도 미니스커트 차림이었다.
4. 미니 스커트의 최초 착용자 윤복희
우리나라에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도입한 사람은 윤항기의 동생 가수 윤복희였다. 윤복희는 1967년 1월 6일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공항에 나타났다.
윤복희는 우리나라 미니스커트 착복자의 효시(嚆矢)이다.
효시(嚆矢)
嚆 울 효. 矢 화살 시
효시(嚆矢)는 우는 화살이라는 뜻인데 옛날에 전투를 개시할 때 우는 화살을 쏘아서 시작했으므로 최초. 처음이라는 의미이다.
효시(嚆矢)와 같은 뜻은 남상(濫觴), 권여(權輿)이다.
[예]
고등학교때 배운 조선 성종 때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가사인 상춘곡(賞春曲)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효시(嚆矢)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