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변하면 사람들의 가치관도 따라 변한다.
그런데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이 변하고 어떤 것이 변하지 않는가?
만유(萬有)는 변하는 것이 없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인식, 가치관뿐이다.
위의 사진은 서산 도비산 부석사 일주문 후면의 편액이다.
일주문 뒤편에 걸린 6자 이 글귀는 글씨체가 요상하여
이해하는 데 한참 애를 먹었다.
앞의 4글자는 요리조리 머리를 굴리면 이해가 가는데
뒤의 2글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앞의 4글자는
<자경문(自警文)>에 나오는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에서
“삼일수심”을 따온 것이고, 뒤의 2글자 “도량(道場)”은 “場”을
“土”와 “易:을 도치시켜 놓은 것이다.
지금의 디지털 시대의 청년들이 이를 본다면
쉬운 글 놓아두고 사찰에서 무슨 ”글자 게임”을 하느냐고 할 것이다.
서산 도비산(都飛山 또는 島飛山) 부석사(浮石寺)는
영주 봉황산 부석사와 창건 설화도 같고, 창건주도 같아
이설이 있는 사찰인데 다만 영주 부석사는 고승들도 많이 배출되고
보유 문화재도 많아서 잘 알려졌지만
서산 부석사는 고승도 그렇고, 문화재라고는
단지 금동관음보살좌상인데 하나인데 그나마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소장주인 일본 관음사와 소송 중이라고 한다.
원래 이 금동관음보살좌상은 1330년(충혜왕 17)에
도비산 부석사에서 조성하여 봉안한 것인데,
고려 말에 왜구에게 약탈당하여 일본 관음사(觀音寺) 소장되어 있었는데
밀렵꾼에 의해 한국에 반입되어 몰래 들어왔다가 문화재관리국에 적발되어
현재 일본과 부석사 간의 반환 소송이 걸려 있는 불상이다.
보도로는 패소되어 다시 일본으로 귀환 조치 되었다고 한다.
현재 도비산 부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이며,
영주 봉황산 부석사는 제16교구 고운사의 말사 소속이다.
도둑맞은 물건은 주인이 나오면 돌려주어야 하는 그것이 우리네 상식인데
문화재는 귀한 것이라서 그런지 다른 모양이다.
하긴 좋다가도 싫으면 금방 100가지 이유를 붙여 멀어지고
싫다가도 좋으면 금방 100가지 이유를 붙여
호들갑 떠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법도 닮아 가는 모양이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이는 최영 장군의 말이다.
요즘 이런 말을 했다가는 의사 처방 없이 바로 정신병원 직행이다.
지금 금값이 얼마인데,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느냐? 라고 할 것이다.
황금은 광석의 일종이다. 광석은 곧 돌멩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돌멩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돌멩이는 귀하고 천한 것에 무관하지만
사람의 인식에 따라 그 가치가 부여되고 달라지는 것뿐이다.
@심리학에서 인간의 속성을 정의한 말 가운데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시체 애호증(愛好症)’이란 뜻인데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것보다 죽은 것을 더 좋아한다는 의미다.
시간(屍姦)이란 부정적인, 비윤리적인 행위를 일컫는 면도 있지만
이는 무기력한, 무저항적인 시신(屍身)에 쾌락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죽은 사람의 시신(屍身)은 신성한 것으로 여겼다.
두려움보다도 신성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 일례로
인도네시아 토라지족은 망자(亡者)를 무덤에서 꺼내어 옷을 입히고
가족들과 함께 일정한 시간을 보낸 뒤 다시 무덤에 묻는다고 한다.
생전에 어떠한 죄를 지었던 사후(死後)의 그 시신만큼은 경건하고도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장례문화가 발전한 것이다.
오늘날 관(棺)문화나 옛적의 옹기관 등은 처음부터 시행된 것이 아니고
야생동물에 의한 시신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이용된 것이다.
고인돌 같은 문화는 일종의 신성한 지역을 정해놓고 그곳에 자연 그대로
시신을 모신 것이다. 그것이 발전하여 여러 장례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겪게 된 것이다.
문명사회에서는 매장(埋葬)에서 화장(火葬)으로 옮겨가는 추세지만
옛적에는 조장(鳥葬)이나, 수장(水葬)도 행해졌는데
여기에 종교적인 의미가 더해짐으로 더 성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수장(水葬)은 신성시하는 강물에 시신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지금도 화장(火葬)한 후 이런 풍습이 인도에서는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
조장(鳥葬)은 산 정상에 시신을 올려놓으면
독수리 등 하늘을 나는 조류들이 날아와 먹는다.
혹자는 이를 자연과의 동화(同化) 라고 본다.
불을 숭상하는 조로아스터교도 신성한 시신을
단지 화장할 수 없다고 여겨 시신의 영혼을 저 먼 천국의 하늘로
올려보내야 한다고 여겨 허공을 나는 조류들을 이용하여
먼 영혼의 나라로 올려보내기 위해 조장(鳥葬)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자이나교의 장례문화를 보면 자이나교의 수행자들은
임종이 가까워지면 스스로 <카나>라는 자이나교들만의 이용할 수 있는
공동묘지로 가서 그곳에서 음료수는 물론 일체 음식을 단식하며
오로지 명상하면서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이를 자이나교의 <살레카나(santhara)>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해서 생명을 마치면 그 시신을 토막 내 조장을 치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인도의 한 순례자가 우연히 만난 어느 자이나교도의 신도 중 한 명이
그렇게 임종을 맞이한 자기 아내의 조장(鳥葬)를 보고 인생의 무상을 느껴
전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라 온 적도 있다. 지금도 그러한 죽음의 장례는
이어지고 있는데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자이나교의 율법상
특정 가족에 한해서만, 그것도 먼발치에서만 보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조장(鳥葬) 풍습은 고대로부터
인류가 무리를 지어 생활한 시기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괴베클리테페 (Gobekli Tepe)라는
거대한 돌기둥으로 축조한 고대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다.
괴베클리테페는 터기와 시리아 국경지대 위치한 지역으로 이 돌기둥 건축은
BC 9,000~1만 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조사 결과 밝혀졌다.
튀르크어로 '배 모양의 언덕'을 뜻하는 <괴베클리테페>는
T자 모양의 석회암 거석들이 원형을 이루고 있다.
그 거석들 중 일부는 높이가 5m가 넘고 무게가 50t 이상 나간다.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알려진 스톤헨지보다 시기적으로
6,000년가량 앞서는 괴베클리테페는 1960년대에 처음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당시에는 중세 묘지로 간주되었다. 1990년대에 다시 발굴이 시작되어,
그 축조 시기가 제대로 밝혀졌다. 그러나 쓰레기 구덩이나 난로,
기타 다른 주거생활의 흔적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거주지역이 아니었을 것으로 판명되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이곳을 제식(祭式)용 장소로 파악하고 있으며,
특히 조장(鳥葬)을 했던 곳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모든 살이 있는 동물의 생명은 신성한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생명은 그 어느 것보다 신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인간의 시신(屍身) 또한 신성한 것으로
여긴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죄를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죄를 지었다면 그 처벌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지만 동물이 다니는 길이 있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 따로 있다.
살생이란 이 길은 사람의 길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중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에 대하여 죽여야 한다고,
사형시켜야 한다고 외친다.
무기징역과 같은 중형은 이미 사회에서 매장된 것이다.
살아 있지만 죽은 시체와 다름없다.
개인의 감정, 원(怨)함, 복수, 앙갚음 등에 동조하여
사형제도가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형제도는 죽은 시체를 다시 죽이는 것이다.
마치 옛날 역적(逆賊)이나 역린(逆鱗)을 범한 죄인을 사후에도
부관참시(剖棺斬屍)하듯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개인의 앙갚음 내지 복수 외에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독수리는 높이 날지만 찾는 것은 죽어 있는 시체다.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정글의 약탈자 하이에나도 즐기는 것은 시체다.
정글은 정글의 법칙이 있고, 사람 사는 사회도 법칙이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성(理性)이라는 법칙이 있다.
정글의 동물은 생존을 위해 살생을 하지만
인간은 복수나 쾌감을 얻기 위해 살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인간으로서 이성(理性)의 길이 아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원한은 또 다른 원한을 불러온다.
이것은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그 고리를 끊는 것이 사람의 이성이다.
인간의 본연지심(本然之心) 그것이 사람의 이성이다.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관념을 가져야 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까지 미워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행위를 즐긴다면 이는 어쩜 인간의 심층 의식에 숨어 있는
네크로피아적 속성이 발동한 것이 아닌지 의심을 버릴 수 없다.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죽이는 일과 같은 행위는 멈추어야 할 것이다.
영악하다는 뱀도 죽은 것은 먹지 않는다.
미물인 모기도 죽은 사람은 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