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의 시무복(視務服)인 곤룡포(袞龍袍) 착용은 1444년(세종 26)부터인데, 그때 명나라는 처음 익선관(翼善冠) 하나, 포복(袍服) 세 벌, 옥대(玉帶) 하나, 조록피화(皁鹿皮靴) 한 쌍을 보내왔다. 중종 때는 곤룡포 한 벌을 보내왔고, 선조와 인조 때는 옷감만을 보내왔는데, 1644년(현종 5) 명나라가 망한 뒤 우리 고유의 문화와 풍토 속에서 자주성을 보이면서 우리 풍속으로 되었다.
그리고 곤룡포엔 신분과 직급을 나타내는 장식으로 왕의 곤룡포엔 가슴, 배, 어깨에 새겨진 무늬를 보(補)라 하고 신하인 문무관의 관복 가슴에 새겨진 무늬를 흉배(胸背)라고 한다.
▲영조어진(英祖御眞)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적의 보(翟衣補)
황후 적의(皇后 翟衣) 중 부분 / 세종대학교 소장. /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보(補)는 왕과 왕세자의 곤룡포(袞龍袍), 왕비와 왕세자의 원삼과 적의 등에 다는 용무늬
장식으로, 신하들의 관복의 흉배에 해당한다.
보는 둥근 원형으로 용을 도안하여 가슴, 등, 양어깨까지 네 곳에 장식하였다.
본래 직조하거나 옷 자체에 수를 놓는 식이었지만 별도의 천에 수를 놓아 부착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곤룡포의 수놓은 보의 모습은 <영조어진>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정탁 초상화(鄭琢 肖像畵 ) /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흉배(胸背)는 문무관의 관복에서 문양으로 직급을 나타내는 네모난 장식이다.
흉배는 1454년(단종 2) 양성지(梁誠之, 1415~1482)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常服에 붙이게 되었다.
▲박유명 초상(朴惟明 肖像畵) /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때 대군(大君)은 기린(麒麟) 문양.
○대사헌(大司憲)은 해치(獬豸: 해태) 문양.
○도통사(都統使)는 사자(獅子) 문양.
○왕자군(王子君)은 백택白澤) 문양.
○문관의 1품은 공작(孔雀) 문양.
○문관의 2품은 운안(雲雁 : 구름 속 기러기) 문양.
○문관의 3품은 백한(白鷳 : 흰 솔개) 문양.
○무관의 1·2품은 호표(虎豹) 문양.
○무관의 3품은 웅비(熊羆 : 곰)를 달도록 정하였다.
이는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뜬 것이다.
▲흥선대원군 기린흉배(興宣大院君 麒麟胸背)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
화유산포털
이러한 조선 전기의 흉배는 실물로 전하는 것은 매우 드물지만 대신의 공신 초상화에서는 그 모습
을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1505년(연산군 11)부터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사용하게 되면서 문양도 명나라와
는 전혀 다른 사슴·돼지·거위·기러기 등의 독특한 문양으로 바뀌었다.
▲쌍학흉배(雙鶴胸背)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조선 시대 문관 당상관(堂上官), 왕의 부마(駙馬)·종친이 착용하던 두 마리의 학을 수놓은 흉배이다.
북청색 운문단(雲紋緞) 바탕 위에 양날개를 펴고 구름 속을 날고 있는 쌍학을 중심으로 삼산(三山),
바위, 불로초, 물결 등의 장생문(長生紋)을 수놓는다.
임진왜란 이후 문란해진 흉배 제도는 1734년(영조 10)에 와서 재정비되었는데, 이때부터 간단하게
문관의 당상관(堂上官 : 정3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관리는 운학흉배(雲鶴胸背), 당하관은 백학
흉배(白鶴胸背), 무관은 백호흉배(白虎胸背)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1871년(고종 8)에는 문관의 당상관은 쌍학흉배(雙鶴胸背), 당하관은 단학흉배(單鶴胸背),
무관의 당상관은 쌍호흉배(雙虎胸背), 당하관은 단호흉배(單虎胸背)로 간명하게 바뀌었다.
▲쌍호흉배(雙虎胸背) /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
조선 초의 흉배는 관복에 직접 수를 놓는 식이었고, 가슴 전부를 차지할 정도로 컸으나 이내 부착식
으로 바뀌고 후기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져서 흉배를 관복의 중앙에 두는 정도로 되었다.
흉배의 도안은 계급의 표시가 되는 주문양을 중심으로 구름 · 여의주 · 파도 · 바위 · 물결 · 불로초 ·
꽃 · 장생 등의 종속문양이 빼곡히 곁들여 있어 회화미가 아니라 장식미가 강조되어 있다.
글 - 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6』, ㈜눌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