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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사 장절 신공 신도비명(高麗太師壯節申公神道碑銘) - 金祖淳
춘천부(春川府) 치소의 북쪽에 ‘소양(昭陽)’이란 강이 있고, 강의 북쪽 6, 7리에 ‘비방(悲方)’이란 골짜기가 있으니, 바로 고려(高麗) 태조를 대신해 죽은 공신(功臣) 태사(太師) 신공(申公)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 세 무덤이 둥그렇게 솟아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로는 태사가 전쟁 중에 머리를 잃자, 왕이 금으로 태사의 얼굴을 만들어 몸에 붙여서 장사를 지내고, 남들이 몰래 무덤을 열까 두려워 봉분 세 개를 만들어서 어느 무덤인지 모르게 하였다고 한다.
혹자는 태사가 본래 부인이 있어서 합장한 것으로 의심하기도 한다. 연대가 멀고 문헌을 고찰할 수 없으므로 대체로 제향과 성묘를 행할 때엔 가운데 무덤에서 거행하니, 그 무겁게 여김을 볼 수 있을 뿐, 실상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은 휘(諱)가 숭겸(崇謙)으로 처음 휘는 능산(能山)이다. 그 선대는 백제 욕내군(欲乃郡)에서 나왔는데, 역사서에서는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라 칭한다. 욕내군은 곧 지금 곡성현(谷城縣)이고 광해주는 바로 춘천(春川)이니, 아마도 곡성에서 춘천으로 옮긴 듯하다.
신라의 정치가 쇠잔해지자,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후백제(後百濟)라 칭하고,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도읍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공은 처음에 궁예를 모시며 기병장(騎兵將)이 되었는데, 얼마 뒤에 궁예가 난폭하고 무도하여 날마다 사람을 도륙하기를 일삼자, 그의 처 강씨(康氏)는 이를 간언하다가 죽음을 당하고 그의 두 아들까지 죽음을 당하니, 백성들이 벌벌 떨며 그 해독을 견뎌내지 못하였다.
이때 고려 태조(太祖) 신성왕(神聖王)이 송악(崧嶽)에서 일어나, 너그럽고 어질며 넓은 도량으로 난세를 바로잡고 백성을 안정시킬 뜻을 품었는데, 수차례 큰 공을 세워 시중(侍中)이 되고 백선장군(百船將軍)이 되자, 위엄과 덕망이 날로 높아져 인심이 흡족히 여겨 쏠리게 되었다.
공은 천명(天命)이 있는 곳을 알고서, 이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함께 신성왕을 추대하고자 은밀히 도모하니, 이 세 사람도 모두 기장(騎將,기병의 장수)이었다. 밤에 신성왕(神聖王:고려 태조 王建)의 집에 찾아가 고하기를
“삼한(三韓)이 분열된 뒤부터 지금 왕(궁예)이 팔을 들고 한 번 호령하여 초야의 도적을 쓸어 없애고 요좌(遼左)의 우리나라를 삼분하여 그 태반을 다 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무리를 잘하지 못하여 음란과 포악을 자행하여 처자식을 도륙하고 신료들을 주살하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원수처럼 그를 미워합니다.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의 악행도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대의(大義)이니, 청컨대 공께서는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일을 행하소서.”
라고 하였다.
신성왕이 정색을 하고 굳게 거절하자, 공 등이 말하기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어찌 하늘의 뜻을 어겨 독부(獨夫 민심을 잃은 군주)의 손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가 장막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신성왕에게 말하기를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악한 임금을 바꾸는 것은 예부터 그랬습니다. 지금 여러 장수의 말을 들으니 신첩의 마음에도 격발이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이겠습니까.”
라고 하고서 손수 철갑옷을 가져다 입혀주었다.
공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신성왕을 옹위하고 밖으로 나와서 동이 틀 무렵 곡식 더미 위에 앉힌 다음, 늘어서서 절을 하고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기마병으로 하여금 달리면서 외치기를 “왕공께서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셨다.”라고 하니, 귀부한 백성이 즉시 수만 명이 되었다.
궁예가 놀라 암곡(巖谷) 사이로 달아났다가 부양현(斧壤縣)의 백성에게 살해되니, 실로 후량(後梁) 정명(貞明) 4년(918년) 여름 6월이었다.
신성왕(神聖王)이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곧이어 추대한 공을 책록하여 공과 홍유[洪儒,?~936년(태조 19)]ㆍ배현경[裵玄慶,?~936년(태조 19)]ㆍ복지겸(卜智謙,?~?) 을 모두 1등으로 책록하고, 조서를 내려 표창하고, 금과 은으로 만든 기물, 비단, 수놓은 비단이불을 하사하였다. 이로부터 매번 정벌이 있을 때마다 모두 공을 의지하였다.
공은 몸이 장대하고 기지(機智)가 있었으며 활을 잘 쏘았다. 일찍이 신성왕을 따라 황해도 평산(平山)을 유람할 때,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 지나가자 신성왕이 여러 장수를 돌아보면서 누가 쏠 수 있는지 물었다. 공이 즉시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쏘겠습니다. 몇 번째 기러기를 맞히리까?”
라고 하자, 신성왕이 웃으면서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활시위를 놓자 기러기가 떨어졌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신성왕이 탄복해 마지않고서 드디어 세 마리 기러기가 지나가던 땅을 경계로 획정하여 공에게 하사하였다. 이어 평산을 공의 관향으로 삼아주니, 자손들이 지금까지 대대로 지켜오고 있으며 그 전답을 ‘궁위전(弓位田)’이라 불렀다.
신성왕 10년(927) 가을 9월에, 견훤(甄萱,857~936)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 경애왕(景哀王,?~927)이 사신을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신성왕이 말하기를
“신라는 우방국이므로 구원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고서 시중 공훤(公萱) 등에게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달려가게 하였다. 그러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갑자기 계림(鷄林 경주)에 들어가서 드디어 경애왕을 시해하고 김부(金傅,신라 56대 경순왕)를 임금으로 세우고서 군사들을 풀어 대대적으로 노략질을 벌였다.
신성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고서, 친히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과 김락(金樂)을 대장으로 삼아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전투를 벌였으나 형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견훤(甄萱,867~936)의 군대가 신성왕을 매우 급하게 포위하자, 공은 용모가 신성왕과 흡사하였는데 형세가 곤궁하여 벗어날 수 없음을 헤아리고, 자신이 왕의 행세를 하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신성왕을 우거진 수풀에 숨기고, 드디어 신성왕의 수레를 타고 김락과 함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견훤의 군사가 공을 신성왕으로 여겨 그 머리를 잘라 창에 꿰어 돌아가자 포위가 비로소 풀렸다.
신성왕이 죽음을 모면하고서 다시 싸우던 곳으로 돌아와 공의 시신을 찾았으나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공의 왼쪽 발에 북두칠성처럼 일곱 개 점이 있었으므로 이를 증거로 시신을 찾아냈다. 이에 공인(工人)을 시켜 머리와 얼굴을 새겨 만들어 제자리에 얹고서 몹시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주고 제전(祭田) 9천 보(步)를 하사하고 수총(守塚) 30호를 두었으며, 그의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장(申甫藏)을 모두 원윤(元尹, 태봉의 벼슬 이름)으로 삼았다. 얼마 뒤에 또 동수에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상주하자, 공을 벽상 호기위 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翊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으로 윤허하고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정하여 어필로 크게 써서 중서문하성에 내렸다.
사제(賜祭)의 교서에는 ‘광익효절헌양(匡翊效節獻襄)’을 더하고, 나중에 신성왕의 묘정에 배향하여 고려 시대 끝까지 이어왔다. 조선에 이르러 우리 문종대왕(文宗大王)께서 공이 임금을 위하여 대신 순절한 절의가 우리나라 백세의 강상(綱常 기강과 윤리)을 열어주었으니,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민멸되어선 안 된다 하여, 마전군(麻田郡)의 숭의전(崇義殿)에 모시고 제향을 올리도록 명하였고, 유사에게 명하여 공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되, 비록 지손과 서자라도 군적(軍籍)에 넣거나 잡역을 부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역대의 임금들이 이어 준행하였는데, 우리 선왕 정종(正宗) 장효대왕(莊孝大王)께서 20년 병진년(1796)에 이르러, 황해도 평산의 태백산성(太白山城)에 공과 배현경ㆍ복지겸 및 유 태사(庾太師) 검필(黔弼)을 주조한 상(像)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보호하며 제사를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서, 선왕께서 탄식하며 감회를 일으켜
“삼한을 통합한 공을 도와 이룬 자는 장절공 등 여러 태사이다.”
라고 하였다.
선왕이 이에 친히 글을 지어 공의 후손으로서 이전에 대장(大將)을 지낸 신대현(申大顯)에게 명하여, 제수로 말술과 생돼지고기를 가지고 사당 아래에 나아가서 북과 징을 치고 나팔을 불며 제향을 돕게 하였다. 예조에서는 편액을 논의하여
“기공(紀功)”
이라고 올리자, 선왕께서
“사태사사(四太師祠)”
로 고쳐 명명하였다.
아! 공의 충정과 공렬은 천고의 역사를 헤아려보아도 오직 기신(紀信?~기원전 240)만이 비슷할 뿐이고, 그밖에 누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공은 기신보다 두 가지 훌륭한 점이 있다. 기신은 한(漢)나라의 평범한 장수였는데, 공은 국가의 왕업을 개창한 큰 공을 세웠으니, 이는 살아 있을 때 훌륭한 점이다.
남궁(南宮)의 연회에서 한 고조(漢高祖)가 세 영웅의 능력만 칭찬하고 기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공은 신성왕이 애통해하며 슬퍼함이 저와 같았고, 천 년 뒤에도 우리 두 임금께서 감동을 일으켜 융숭하게 보답함이 또 이와 같았으니, 이는 죽은 뒤에 훌륭한 점이다.
하물며 그 높은 명성과 훌륭한 사적이 태평 시대 모든 선비가 우러러 추앙하는 바가 되어, 저 고향 마을로부터 공적을 세우고 위용을 떨친 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두(俎豆)를 갖춰 받들고 학문을 익히며 칭송하여, 세대가 오래될수록 은택이 더욱 새로워지니, 이는 또 한때의 강개함으로 명성을 이룬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아, 위대하도다! 참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이 쌓은 덕과 끼쳐준 경사가 후손에게 전해 내려와, 평산 신씨(平山申氏)가 우리나라에 두루 퍼져 이름 있고 빼어난 분들이 줄을 이어 배출되었다. 족보 백여 권이 세상에 전하므로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는다.
또 살펴보건대, 공이 죽은 뒤에 정령(精靈)이 매우 기이하여《해동명신행적(海東名臣行蹟)》에는
“고려 태조가 팔관회(八關會)를 베풀 때에, 공과 김락을 추념하여 풀을 엮어 형상을 만들어서 반열 위에 늘어세우고 술과 밥을 하사하자, 술이 문득 절로 마르고 풀로 만든 형상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나중에 예종(睿宗)이 서도(西都 평양)를 순행하고 팔관회를 베풀 때에 두 가상(假像)이 홀을 꽂고 붉은 관복을 입고서 말을 타고 뛰어 달리는 일이 있었다. 예종이 괴이하게 여겨 묻자 좌우에서 그 연유를 아뢰었다. 예종이 그 때문에 감개하여 김락의 손자와 공의 현손 신경(申勁)에게 벼슬을 내려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여지승람(輿地勝覺)》에는
“공이 죽어서 곡성(谷城)의 성황신이 되었다.”
라고 하였고, 그의 자손들 또한
“묘를 지키는 자가 간혹 조심하지 않으면 그때마다 재앙이 생겼다.”
라고 하였다.
세상의 군자들이 이에 대해 간혹 의심이 없을 수 없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부열(傅說)이 죽어서 열성(列星)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자후(子厚) 유종원(柳宗元,773~819/중국 당나라의 시인)는 귀양 가서 죽었는데, 그의 신령이 고을에 내려와 나지(羅池)의 사당에서 제향을 받았다. 이의(李儀)란 자가 술에 취하여 신을 모독하다가 갑자기 죽으니, 퇴지(退之 한유(韓愈,768~824)가 이를 비문에 적었다.
그밖에 오자서(伍子胥,중국 초나라의 명문가문)나 관장무[關壯繆: 관우(關羽)]의 뚜렷이 드러난 신이한 일들처럼 전기(傳記) 가운데 섞여 나오는 것들을 모두 무시할 수는 없다. 대체로 사람이 태어나서 빼어난 위엄과 대단한 기백이 있는 자가 비명(非命)에 죽게 되면, 그 정신이 실의에 차서 억울해하여 육체를 따라서 소멸하지 않고 종종 황홀하게 변화하여 산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하니, 이 또한 사리에 없을 수 없는 바이다. 비록 그렇지만 공과 같은 분은 본래 천지를 뒤덮고 우주를 꿰뚫을만 한 민멸되지 않을 공적이 있으니, 또 어찌 구구하게 이런 것을 논할 것이 있겠는가.
묘소에는 본래 비석이 없었는데, 올해 갑자년(1804)에 신대현이 비로소 그의 문중 사람들과 계획을 세우고서 나에게 비명(碑銘)을 청하니, 내가 외손이기 때문이었다. 아! 공이 돌아가신 지 이제 천 년이 되어가니, 이것은 혹시 기다림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사양하려 해도 허락을 받지 못하였고, 또한 한사코 사양할 수도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신씨 가문이 이어져 오니 / 申係緜緜(신계면면)
곡성에서 선조가 나왔도다. / 谷云出先(곡운출선)
역사서에는 광해주라 하였으니 / 史著光海(사저광해)
아마도 나중에 옮긴 것이리라. / 或後式遷(혹후식천)
평산을 관향으로 하여 지금에 이르니 / 籍平於今(적평어금)
하사받은 땅도 가지고 있네. / 厥有賚田(궐유뢰전)
거룩하신 태사는 / 烈烈太師(열열태사)
하늘이 고려를 위해 내신 분이로다. / 天爲有麗(천위유려)
활과 화살로 위용을 드러내고 / 弧矢維威(호시유위)
나라의 방패와 성이 될 자질 지니셨네. / 干城維姿(간성유자)
궁예가 학정으로 스스로 천명을 끊자 / 弓淫自絶(궁음자절)
공격을 철원에서 시작하였네. / 造攻于鐵(조공우철)
태사께서 기미(機微)에 밝으시어 / 太師炳機(태사병기)
갑자기 번개가 치듯 하였네. / 歘發電掣(훌발전체)
신성왕을 추대하여 / 翊戴神聖(익대신성)
학정을 구제하러 나아가셨네. / 而往割正(이왕할정)
왼쪽엔 홍유, 오른쪽엔 복지겸이었고 / 左洪右卜(좌홍우복)
배현경도 뜻을 합하였네. / 同德玄慶(동덕현경)
닭을 잡고 오리를 쳐서 / 操鷄搏鴨(조계박압)
왕업의 터전을 도와 열었네. / 贊基肇命(찬기조명)
신라는 국운이 다해 쓰러지고 / 羅顚以革(나전이혁)
견훤은 참람하게 반역을 하니 / 甄僭肆逆(견참사역)
종거가 옮겨지고 / 鍾簴動移(종거동이)
홀과 면류관도 바뀌었도다. / 圭冕改易(규면개역)
임금이 태사에게 말씀하기를 / 王謂太師(왕위태사)
우방국이 액운을 당하였도다. / 與邦其厄(여방기액)
내가 나아가 싸울 것이니 / 予其卽戎(여기즉융)
대의 출정이 중도에 맞아 길할 것이다. / 汝吉師中(여길사중)
날랜 기병 오천으로 / 輕騎五千(경기오천)
저 팔공산에서 싸웠는데, / 鏖彼八公(오피팔공)
때가 이롭지 못하여 / 時乎不利(시호불리)
힘은 부족하고 지략은 곤궁했네. / 力屈智窮(역굴지궁)
봉축보(逢丑父)가 제나라 임금을 닮았듯 / 逢類齊君(봉류제군)
기신이 초나라 항우를 속이듯 / 紀誑重瞳(기광중동)
머리를 잃어도 개의치 않는 것이 용맹이고 / 喪元爲勇(상원이용)
몸을 내던지는 것을 충성이라 하네. / 捐軀曰忠(연구왈충)
태조께서 태사를 측은히 여겨 / 王隱太師(왕은태사)
죽은 뒤에 큰 공적을 더욱 기렸네. / 死愈元功(사유원공)
선진의 잘린 머리처럼 생동하였고 / 肖軫如生(초진여생)
범려를 주조한 상처럼 정교하였네. / 鑄蠡惟工(주려유공)
새긴 머리를 몸에 합하여 / 合其遺體(합기유례)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네. / 窀穸以禮(둔석이례)
세 봉분이 우뚝 일어나니 / 三封屹起 (삼봉흘기)
비방동의 언덕이로다. / 悲方之坻(비방지저)
태사께서 살아서 신하로 있을 때엔 / 太師爲臣(태사위신)
씩씩한 무용이 빼어났고, / 桓桓絶倫(환환절윤)
태사께서 돌아가신 뒤엔 / 太師云亡(태사운망)
그 신령이 늠름하였도다. / 凜凜其神(늠름기신)
오자서가 전당강 조수로 달려오고 / 吳胥驅潮(오서구조)
한수정후가 고을을 돌봐주었듯이 / 漢壽司巡(한수사순)
황홀하고 눈부시게 / 怳惚赫翕(황홀혁흡)
생민들을 보우하시도다. / 顯護生民(현호생민)
태사께서 끼친 경사가 불어나 / 太師衍慶(태사연경)
십 대를 내려와 조선에서도 창성하였네. / 十世其昌(십세기창)
그 수가 많고도 많아 / 振振不億(진진불억)
팔방에 흩어져 가득/ 도다. / 彌散八方(미산팔방)
서민이 되고 청빈한 선비도 되며 / 爲庶爲淸(위서위청)
더러는 조정의 벼슬아치도 되었네. / 或賓于王(혹빈우왕)
기린 같고 봉황 같으니 / 其麟其鳳(기린기봉)
태평 시대의 광채로다. / 昭代之光 (소대지광)
빛을 드러내고 덕업을 서술하여 / 摛光述德(이광술덕)
큰 글자로 깊이 새기도다. / 大書深刻(대서심각)
까마득한 이 외손은 / 遙遙外昆(요요외곤)
서적을 관리하는 직책이로다. / 金匱之職(금궤지직)
높은 명성을 상상하니 / 想像風聲(상상풍성)
천 년의 일을 오늘 다시 보는 듯하도다. / 千載如卽(천재여즉)
태사께서 불후하시리니 / 太師不朽(태사불후)
나의 영광도 끝이 없으리로다. / 我榮無極(아영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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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1] 고려 …… 신도비명 :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궁예와 전투를 벌이던 중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申崇謙, ?~927)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1804년
(순조4)에 신숭겸의 후손 신대현(申大顯)의 요청으로 지은 것으로 이듬해 10월에 서매수(徐邁修)가 전액(篆額)을 쓰고 신위(申緯)
가 비문을 써서 세웠는데, 현재 춘천의 장절공묘역에 남아 있다.
[주2] 시중(侍中)이 …… 되자 :
왕건(王建)은 896년에 수군장군 파진찬 시중(水軍將軍波珍餐侍中)이 되었고, 914년 3월에 백선장군(百船將軍)이 되었다.
《益齋亂稿 卷9上 世家 有元贈敦信明義……》 《東史綱目 第5下 甲戌》
[주3] 밤에 …… 고하기를 :
고려 태조가 등극하기 하루 전인 918년 6월 을묘일이다. 《高麗史節要 卷1 太祖神聖大王》
[주4] 은(殷)나라와 주(周)나라의 일 :
은나라의 탕왕(湯王)이 걸(傑)을 추방하고,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한 역성혁명을 가리킨다.
[주5]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
고려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다. 본관은 정주(貞州)이고, 아버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유천궁(柳天弓)이다.
[주6] 부양현(斧壤縣) :
강원도 평강현(平康縣)의 고구려 때 이름으로 부양현(釜壤縣)이라고도 한다.
[주7] 신성왕이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
왕건이 철원에 있는 궁예의 궁궐 포정전에서 즉위하니, 918년 6월 병진일이다. 《高麗史節要 卷1 太祖神聖大王》
[주8] 공산(公山)의 동수(桐藪) :
동수는 대구부(大邱府) 북쪽 해안현(解顔縣)에 있던 지명이다.《退溪先生文集攷證 卷7 第四十二卷序記 安東府三功臣廟增修
記》현재 경상북도 대구의 팔공산을 가리키는데, 팔공산의 별칭에 동수산(桐藪山)이란 이름도 있다.
[주9] 원윤(元尹) :
고려 때 왕실의 종친이나 공훈을 세운 자에게 주던 벼슬로 2품의 등급에 해당한다.
[주10] 더하고 :
저본에는 ‘가(可)’로 되어 있으나,《상촌고(象村稿)》권27에 실린〈고려태사 장절공 신공 충렬비(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
의 기록에 ‘가(加)’로 되어 있어 이를 따라 번역하였다.
[주11] 마전군(麻田郡)의 숭의전(崇義殿) :
조선 시대에 건립되어 고려 태조와 7왕을 제사 지내던 사당으로 현재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에 있다. 1397년(태조6)에 조선
태조의 명으로 사당을 세워 고려 태조를 모셨다가 1399년(정종1)에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선종, 목종, 현종의 7왕의 위패를 더 봉
안하였다.
1451년(문종1)에 숭의전이라 이름을 짓고,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배향하였다. 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다가 6ㆍ25로 전각이
소실되었고, 그 뒤 1973년부터 후손의 노력으로 차차 복구되었다.
[주12] 선왕께서 …… 명명하였다 :
1796년(정조 20) 8월 4일에 정조의 명으로 평산 태백산성에 있는 신숭겸, 유검필, 복지겸의 사당에 ‘삼태사사(三太師祠)’라고 사
액하고, 이어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이듬해 8월 1일에 예조 판서 이시수(李時秀)가 상주하여 배현경이 제향에서 빠진 것이
부당함을 아뢰자, 정조가 ‘태사사(太師祠)’로만 쓰고 배현경도 함께 제향하도록 명하였다. 《正祖實錄》 여기서 ‘사태사사’라고 한
것은 풍고가 일부러 쓴 듯하다.
[주13] 기신(紀信) :
한(漢)나라 초기의 장군이다. 한나라 유방(劉邦)이 초(楚)나라 항우(項羽)에게 형양(滎陽)에서 포위당했을 때, 기신이 유방처럼 꾸
미고서 항우에게 항복하여 초나라 군대의 이목을 끌었고, 그사이 유방은 몇 사람과 함께 조용히 탈출하였다. 항우가 뒤늦게 사태를
깨닫고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漢書 卷1 高帝本紀上》
[주14] 남궁(南宮)의 …… 칭찬하고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주연을 베풀다가 장량(張良), 소하(蕭何), 한신(韓信)의 능력
을 칭찬하고 “이 세 사람은 모두가 인걸이다. 내가 이들을 쓸 수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此三者
皆人傑也. 吾能用之, 此吾所以取天下也.]”라고 말한 일이 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15] 부열(傅說)이 …… 되었다 :
《장자(莊子)》〈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말이다. 부열은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으로 은나라를 중흥시킨 공을 세웠다.
별 중에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사이에 있는 별을 부열성(傅說星)이라 한다.
[주16] 자후(子厚)는 …… 적었다 :
자후는 유종원의 자인데, 유주 자사(柳州刺使)로 좌천되어 부임한 뒤에 그곳에서 죽어 나지(羅池)의 귀신이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곳 사당에 큰 제사를 지낼 때에 이의(李儀)라는 사람이 들렀다가 술에 취해 당상(堂上)에서 귀신을 모독하다가 병이 나서 부축을
받고 사당문을 나서자마자 즉사하였다고 한다. 《昌黎集 卷31 柳州羅池廟碑》
[주17] 오자서(伍子胥)나 …… 일들처럼 :
오자서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오(吳)나라에 망명하여 오왕(吳王)을 위해 월(越)나라를 급히 치라고 극간하다가 태재 비
(太宰嚭)의 참소로 죽음을 당하여 강에 버려졌다. 그 뒤로 오자서의 영혼이 전당강(錢塘江)의 물귀신이 되어 거세게 파도를 일으키
는가 하면, 가끔 흰 수레와 말을 타고 물결 위에 나타나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전
설이 전한다.
《太平廣記 卷291 伍子胥條 引 錢塘志》관장무(關壯繆)는 촉나라 관우(關羽)를 가리키는데, 장무(壯繆)는 송나라 고종(高宗)이
추증한 봉호이다.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 진종(真宗) 상부(祥符) 연간에 해주(解州)의 염지(鹽池)가 마르는 재변이 생겼는데, 이것이
치우신(蚩尤神)의 소행임을 알고 관우(關羽)의 혼령을 불러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天中記 卷46》
[주18] 내가 외손이기 때문이었다 :
풍고의 모친이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다.
[주19] 닭을 …… 쳐서 :
원문은 ‘操鷄搏鴨’인데, 당(唐)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궁예(弓裔)에게 바친 옛 거울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친다.[先操鷄後搏鴨.]”
라는 예언이 적혀 있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먼저 계림의 신라를 정복하고 뒤에 압록강을 취하게 됨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
다.《三國史記 卷50 弓裔列傳》.《高麗史 太祖世家》
[주20] 종거(鍾簴)가 …… 바뀌었도다 :
종거는 종묘에 설치한 종 틀인데, 이것이 옮겨졌다는 것은 나라가 멸망한 것을 의미한다. 홀과 면류관이 바뀌었다는 것은 견훤(甄
萱)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그 족제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운 것을 말한다.
[주21] 그대의 …… 것이다 :
원문은 ‘汝吉師中’인데,《주역》〈사괘(師卦) 구이(九二)〉에 “군진에서 중도를 행함에 길하고 허물이 없는지라, 임금이 세 차례
나 총애하는 명을 내리도다.[在師, 中吉, 無咎, 王三錫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22] 봉축보(逢丑父)가 …… 닮았듯 :
봉축보는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경공(頃公)의 수레에 오른쪽에 타는 용사였다. 경공이 진(晉)의 안(鞍) 땅에서 싸우다가
불리해지자 봉축보가 경공과 수레를 바꾸어 타고 달아나다 사마(司馬) 한궐(韓厥)에게 잡힌 일이 있다.《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23] 머리를 …… 용맹이고 :
춘추 시대 제(齊)나라 경공(景公)의 원유(苑囿)를 관리하는 우인(虞人)이 본분을 굳게 지키자, 공자가 이를 찬탄하며 “지사는 곤궁
하게 살다가 죽어서 골짜기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사는 싸우다가 그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
忘喪其元.]”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下》
[주24] 선진(先軫)의 …… 정교하였네 :
왕건이 신숭겸의 사라진 머리를 정교하게 주조하여 붙인 것을 가리킨다. 선진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의 이름이다.《춘추좌씨
전》희공(僖公) 33년에
“선진이 갑주(甲冑)를 벗고 적(狄)의 군대에 뛰어들어가 죽자, 적인(狄人)이 그의 머리를 돌려주었는데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과 같았다.”
라고 하였다.
범려(范蠡)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신하인데, 구천이 은퇴한 범려의 형상을 주조하여 좌우에 놓고 조석으로 정사를 논하였다고
한다.《吳越春秋 卷6 句踐伐吳外傳》
[주25] 오자서(伍子胥)가 …… 돌봐주었듯이 :
오자서는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오(吳)나라에 망명하여 오왕(吳王)을 위해 월(越)나라를 급히 치라고 극간하다가 태재 비
(太宰嚭)의 참소로 죽음을 당하여 강에 버려졌다. 그 뒤로 오자서의 영혼이 전당강(錢塘江)의 물귀신이 되어 거세게 파도를 일으키
는가 하면, 가끔 흰 수레와 말을 타고 물결 위에 나타나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는 전
설이 전한다.
《太平廣記 卷291 伍子胥條 引 錢塘志》한수정후(漢壽亭侯)는 관우(關羽)의 봉호이다.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 진종(眞宗) 상부
(祥符) 연간에 해주(解州)의 염지(鹽池)가 마르는 재변이 생겼는데, 이것이 치우신(蚩尤神)의 소행임을 알고 관우(關羽)의 혼령을
불러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天中記 巻46》
[주26] 서민이 …… 되었네 :
신숭겸의 후손이 서민에서 벼슬아치까지 두루 퍼졌다는 의미이다. 두보(杜甫)의〈단청인(丹靑引)〉에
“장군은 위 무제의 자손인데, 지금은 서민이 되어 청빈한 가문이 되었네. 영웅이 할거하던 시대 이미 지났으나, 문채와 풍류는 지금
까지 남았네.[將軍魏武之子孫, 於今爲庶爲淸門. 英雄割據雖已矣, 文彩風流今尙存.]”
라 하여 조조(曹操)의 후손으로 그림을 잘 그렸던 조패(曹覇)를 읊은 일이 있다.
원문의 ‘빈우왕(賓于王)’은《주역》〈관괘(觀卦) 육사(六四)〉에
“나라의 빛남을 봄이니, 왕에게 손님이 됨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
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는데, 상국에 사신을 가거나 조정의 벼슬아치가 됨을 가리킨다.
[주27] 서적을 관리하는 직책이로다 :
이 신도비명을 지은 1804년(순조 4)경에 풍고는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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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太師壯節申公神道碑銘。
春川府治之北。有江曰昭陽。江之北六七里。有洞曰悲方。卽高麗代死功臣太師申公體魄之所安也。三塋穹然。世傳太師戰亡喪元。王鑄金爲太師面。合體而葬。懼人之竊啓也。三其封以疑之。或者疑太師自有夫人祔焉。年代遠。文獻無稽。故凡祭享省拜。中塋而行事。視其重而已。其實或左或右。皆不可度也。謹按公諱崇謙。舊諱能山。其先出百濟欲乃郡。而史稱 光海州人。欲乃今谷城縣。光海卽春川。或自谷而遷於春也。新羅政衰。甄萱據完山。稱後百濟。弓裔都鐵原。號泰封。公始從弓裔。爲騎將。旣而裔凶暴無道。日事誅戮。其妻康氏諫而被殺。及其二子。國人惴惴。不堪其毒。而高麗太祖神聖王起自崧嶽。寬仁大度。有撥亂安民之志。屢立大功。爲侍中百船將軍。威德日盛。人心洽然傾嚮。公知天命有在。乃與洪儒,裴玄慶,卜智謙。密謀推戴。三人者亦騎將也。夜詣神聖邸。告曰。自三韓分裂。今王奮臂一呼。芟掃草寇。三分遼左。奄有太半。乃不克終。淫虐以逞。殺妻戮子。夷滅臣僚。民墜塗炭。疾如仇讎。桀紂之惡。何以加焉。廢昏立明。天下之大義也。請公行殷周之事。王作色固拒。公等曰。天與不取。反受其咎。豈可違天。死於獨夫之手乎。神惠王后柳氏。從帳後竊聽之。出語王曰。擧義代虐。自古而然。今聞諸將言。妾心猶奮。况大丈夫乎。手提金甲而被之。公與諸將。擁而出。黎明坐王積穀上。羅拜呼萬歲。令騎馳。且呼曰。王公擧義矣。國人歸者立數萬人。弓裔驚竄巖谷間。爲斧壤民所害。實梁貞明四年夏六月也。王卽位於布政殿。尋策推戴功。以公及儒,玄慶智謙皆一等。下詔褒美。賜金銀器幣錦繡綺被褥。自是每有征伐。悉以倚公。公長大有機智。善射命中。常從王遊平山。有三雁飛過。王顧諸將。誰可射。公卽拜曰。臣請射。射何中。王笑曰。第三而左翼。弦開而墜。果然。王嘉歎不已。遂宮三雁所經之地。賜之。仍以平山爲公鄕。子孫至今世守。名其田曰弓位。神聖王十年秋九月。甄萱犯新羅。新羅景哀王遣使告急。王曰。新羅與國也。不可不救。遣侍中公萱等。以兵一萬赴之。未至。萱猝入鷄林。遂弑王而立金傅。縱兵大掠。王聞之。大怒。遣使弔祭。親率精騎五千。以公及金樂。爲大將。邀萱於公山之桐藪。大戰不利。萱兵圍 王甚急。公貌類王。度勢窮不可脫。請以身代。匿王於礙藪。遂乘王車。與金樂力戰而亡。萱兵以爲王也。取其頭。貫槊而歸。圍乃解。王旣免。還至戰處。覓公屍。莫可辨。公左足有七黑子如斗。驗而得。命工雕造頭面。置諸位。哭之甚慟。備禮以葬。賜祭田九千步。置守塚三十戶。以其弟能吉,子甫藏。並爲元尹。旣又刱智妙寺於桐藪。以薦冥福。中書門下,奏公可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翊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諡壯節。御筆大書中書門下,祭敎可匡翊,效節獻襄。後配食神聖廟庭。訖于麗世。及本朝。我文宗大王。以公爲君代死之節。啓東土百世綱常。不可以異代泯沒。命躋享于麻田之崇義殿。飭有司錄用其子孫。雖支庶。毋得籍軍充役。自是以來。列聖繼遵。亦粤我寧考正宗莊孝大王二十年丙辰。聞平山之太白山城。有公與裴,卜及庾太師黔弼鑄像。邑人葆祀之。上喟然興感。若曰。贊成統合三韓之功者。壯節諸太師也。親撰文。命公裔孫前大將大顯。以斗酒生彘。至祠下。擊鼓鐃吹以侑之。禮曹議祠額曰紀功。上改命四太師祠。嗚呼。公之忠之烈。歷數千古。惟紀信似之。其他余不知也。然公之於信有二勝。信漢氏之凡將。而公刱基之元功。生而勝也。南宮之宴。高祖獨稱三傑之力。而不及於信。公爲神聖所隱悼如彼。而千載之後。獲遭我兩聖人曠感而崇報之又如此。死而勝也。况其風聲義問。爲昭代士林之所景仰。自夫鄕貫井閭。以至著功之所立慬之地。皆俎豆以奉之。藏修以誦之。世彌遠而澤彌新。則又非一時慷慨成名之人所可企也。嗚呼偉哉。不其顯哉。公之積德衍慶。流于後昆。平山之申。遍於海東。名公碩人。磊落相望。有譜百餘卷。行于世。玆不槩及。又按公歿而精靈絶異。海東名臣行蹟云。王設八關會。慨 念公與金樂。結草爲像列班。上賜以酒食。酒輒自乾。草像起舞。後睿宗省西都設會。有二假像。簪笏服紫。騎馬踴躍。王怪問之。左右告之。故王爲之感慨。官金樂孫及公玄孫勁。又輿地勝覽云。公死爲谷城城隍之神。而其子孫亦謂守墓者。或不謹。輒有咎。世之君子。或不能無疑。余竊謂不然。昔莊子云。傅說死爲列星。子厚謫死。其神降於州。廟食羅池。李儀以醉慢暴死。退之載諸其碑。其他如伍子胥,關壯繆之赫奕靈異。襍出傳記者。皆不可誣。蓋人之生而有威靈氣,燄者。死非其命。其精爽傺侘怫欝。不隨以滅。往往怳惚 變化。驚動生人。是亦理之所不能無者。雖然。若公自有敝天壤窮宇宙而不泯者存。又何足區區論此哉。墓本無碑。今年甲子。大顯始與其宗人。謀屬銘於祖淳。謂祖淳外裔也。嗚呼。公之歿。今且千年。玆或有待而然歟。辭不獲。亦不敢固。銘曰。
申係緜緜。谷云出先。史著光海。或後式遷。籍平於今。厥有賚田。烈烈太師。天爲有麗。弧矢維威。干城維姿。弓淫自絶。
造攻于鐵。太師炳機。歘發電掣。翊戴神聖。而往割正。左洪右卜。同德玄慶。操鷄搏鴨。贊基肇命。羅顚以革。甄僭肆逆。
鍾簴動移。圭冕改易。王謂太師。 與邦其厄。予其卽戎。汝吉師中。輕騎五千。鏖彼八公。時乎不利。力屈智窮。逢類齊君。
紀誑重瞳。喪元爲勇。捐軀曰忠。王隱太師。死愈元功。肖軫如生。鑄蠡惟工。合其遺體。窀穸以禮。三封屹起。悲方之坻。
太師爲臣。桓桓絶倫。太師云亡。凜凜其神。吳胥驅潮。漢壽司巡。怳惚赫翕。顯護生民。太師衍慶。十世其昌。振振不億。
彌散八方。爲庶爲淸。或賓于王。其麟其鳳。昭代之光。摛光述德。大書深刻。遙遙外昆。金匱之職。想像風聲。千載如卽。
太師不朽。我榮無極。<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