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직(李萬稷)
[본 관] 한산(韓山)
[진사] 숙종(肅宗) 25년(16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進士) 2등(二等) 13위(18/100)
[생졸년] 1654년(효종 5)~1727년(영조 3) / 향년 45세
[거주지] 공주(公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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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감사 이공 묘지명(監司李公墓誌銘)
공은 휘가 만직(萬稷)이고 자가 자장(子長)이니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태연(泰淵)의 아들이다. 근세의 인재는 영릉(寧陵 효종) 시절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으나, 지방관의 치적을 논할 때면 반드시 관찰공을 우선적으로 꼽는다. 공이 젊었을 적에는 낙척하여 불우하게 지내다가 숙종 기묘년(己卯年,1699, 숙종 25)에 진사에 합격하고 2년 뒤에 비로소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당시 공의 나이가 50을 앞두고 있었는데 사대부들이 모두 공을 지목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음관으로 감사에 이를 것이다.”
하였다.
이는 공이 침착하고 강직하며 차분하고 신중하여 정승의 기량이 있었고 또 관찰공을 부친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공은 처음에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지냈는데 미미한 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전설사 별검에 제수되었다. 가례도감(嘉禮都監)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활인서 별제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감찰, 공조 좌랑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임피 현령(臨陂縣令), 영천 군수(永川郡守),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지냈다. 중간에 선혜청 낭관을 거쳐 외직으로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선혜청의 일을 잘 한다고 해서 도로 잉임(仍任)되었다. 또 나주(羅州)와 원주(原州) 두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고을을 다스림이 항상 여러 고을에서 으뜸이었다.
감사 및 어사들이 계속해서 포상을 아뢰어 은총이 내려졌으니, 통정대부에 오른 것은 나주에 있을 때 진휼한 공로 때문이었다. 대신이 일찍이 공이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해서 천거하여 기해년(己亥年,1719, 숙종 45)에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발탁되었다. 임기가 만료되고서도 1년 더 유임시켰다.
임인년(壬寅年,1722, 경종 2)에 역당들이 정권을 잡자 곧장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지금 성상 원년(元年, 1725, 영조 1)에 공을 불러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제수하였고, 조정에 돌아와서는 장례원 판결사, 형조 참의를 지냈다.
공이 시행한 정사는 너그러우면서도 해이하지 않으며 위엄이 있으면서도 지나치지 않으며 상세하면서도 까다롭지 않았다. 또 눈앞의 공은 구하지 않고 작은 은혜를 베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부임하는 곳마다 크게 잘 다스려졌다. 매일 겹겹의 문을 활짝 열면 공문서가 사방에서 모여들었으나 전광석화처럼 모두 처리하였다.
삼가고 조심하며 법을 잘 지켰는데 송사(訟事)에는 더욱 신중하여 ‘지공(至公)’ 두 글자로 향을 피우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또 곧바로 판결하고 지체시키지 않았으며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맨 먼저 실토하는 자는 용서해 주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통렬하게 법을 집행하였다.
이러하니 간사하고 교활한 이는 두려워 엎드리고 백성 또한 절로 원망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재화를 모으는 데 노력하지 않아도 재정이 저절로 충족되고 조세상 감면을 일삼지 않아도 민력(民力)의 부담이 저절로 줄어들었다. 일을 벌일 때는 반드시 민심과 소통하고 여러 의견을 모아 크게는 성지(城池)와 병장기, 작게는 창고와 관사에 이르기까지 일체 정비하였으나 공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편안하였다.
호남(湖南)에 보리가 큰 풍년이 들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풍년이 든 후에는 반드시 큰 흉년이 뒤따른다.”
하고, 미리 수천 섬을 사다가 대비하였는데 가을에 과연 흉년이 들었다.
공이 다시 관가의 곡식을 모두 덜어내어 마음을 다해 구휼하였으며, 멀리 떨어진 섬과 궁벽한 포구에 이르기까지 또한 곡식을 배로 싣고 가서 먹여 온 지역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었으니 모두 부모처럼 공을 떠받들었다. 감사로 있을 적에는 벼슬이 높다고 해서 조금도 나태하지 않고 더욱 대체를 부지하여 폐단을 없애고 이로운 일을 일으키기를 마치 기욕(嗜慾)을 따르듯이 하였다.
왕왕 조정의 의론에 막히기도 했으나 백성에게 미친 이로움과 은택은 또한 깊었다. 공은 정사에 뛰어났는데 늙어서는 더욱 숙련되어 온갖 일이 조리가 있어 공적을 많이 남겼다. 이는 대체로 한결같이 관찰공의 법도에 근본한 것이었다. 판서 황귀하(黃龜河)가 일찍이 어사로서 남쪽에서 돌아와 나에게 공의 치적에 대해 극찬하였는데, 내가 감탄하며 말하기를,
“군사를 지휘하는 것에 비유하자면 아마도 이른바 당당한 진용(陣容)과 질서정연한 깃발이리라. 아! 이 또한 오늘날 이른바 능력이 있다는 이와는 다르다.”
하였다.
정미년(丁未年,1727, 영조 3)에 시사(時事)가 일변하자 공은 또 벼슬의 뜻을 완전히 접고 돌아갔으며 이해 11월 28일에 공주(公州)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공이 태어난 갑오년(甲午年,1654, 효종 5)으로부터 74년이다. 공주의 줄동(茁洞)에 안장하였다. 공은 한산(韓山) 사람이니 목은(牧隱) 선생 색(穡)의 후손이다.
집의에 추증된 계(洎), 승지에 추증된 도(濤), 의금부 도사를 지낸 덕사(德泗)가 관찰공의 윗대 3세이다. 관찰공의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그 부친이 관찰사 경집(景緝)이다. 공은 총 세 번 장가들었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참의 재대(載岱)의 딸이요 영의정 태화(太和)의 손녀이다.
정숙하고 겸손하여 자못 부녀자의 덕이 있었는데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공과 같은 곳에 묻되 봉분은 따로 하였다. 반남 박씨(潘南朴氏)와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별도로 묘지문이 있다. 아들 수보(秀輔)는 정씨 소생으로 목사를 지냈다. 참봉 수득(秀得) 그리고 부사 홍진유(洪晉猷)와 사인 신필우(愼必遇)의 아내는 김씨 소생이다.
측실 소생의 두 딸은 각기 유복기(柳福基), 박신원(朴新源)에게 시집갔다. 장남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사중(思重)은 참봉을 지냈고 사홍(思弘)은 차남의 후사가 되었으며 딸 한 명은 사인 김형택에게 시집갔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사중(思重)의 아들은 규영(奎英)이다.
공은 사람됨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며 가정에서의 행실이 자못 갖추어졌다. 늘 어릴 적 고아가 된 것을 지극히 애통해하여 부친처럼 형을 섬기고 모친처럼 형수를 섬겼다. 선조를 받드는 데 독실하고 남들을 대할 적에는 공손하였으며 친족들에게 후덕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정사(政事)의 근본일 것이다.
한(漢)나라 때는 순리(循吏)로 조정에 진출하여 재상이 된 경우가 많았는데, 공과 같은 경우는 쓰여지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쓰여져도 그 재능을 다 펼치지 못하였으니 안타깝도다! 그러나 인가(人家)의 자제가 그 선대의 직임을 계승한 것은 본디 쉬운 일이 아닐 뿐더러 그 법도까지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법인데, 하물며 공처럼 겸비한 경우에랴.
이것이 바로 유중영(柳仲郢)의 가법이 주자(朱子)의《소학(小學)》책에 실려 있는 이유이다. 이로써 보건대, 관찰공은 참으로 훌륭한 아들을 두었고 공은 자식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만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옛적 순량한 관리를 나는 보았으니 / 吾猶及古之循良兮
이곳에 묻혔도다 / 此其藏
아, 후인들이여 / 嗟後之人兮
손상시키지 말지어다 / 無或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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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감사 이공 묘지 :
저자가 이만직(李萬稷, 1654~1727)을 위해 쓴 묘지명이다.
[주02] 당당한 …… 깃발 :
《손자(孫子)》〈군쟁(軍爭)〉에 “질서정연한 적의 깃발을 맞아 싸우지 말고 당당한 적의 진용을 공격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변화를
다스리는 것이다.[無邀正正之旗, 勿擊堂堂之陳, 此治變者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3] 별도로 묘지문이 있다 :
본서 제44권에 수록되어 있는 〈증 정부인 반남 박씨 묘지(贈貞夫人潘南朴氏墓誌)〉와 〈정부인 광산 김씨 묘지(貞夫人光山金
氏墓誌)〉를 가리킨다.
[주04] 유중영(柳仲郢)의 …… 있는 :
유중영은 부친 유공작(柳公綽)이 남긴 가법(家法)을 잘 준수하여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소학(小學)》〈가언(嘉言)〉에
는 유중영이 준수한 가법 십여 조목을 구체적으로 실어놓았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