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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갑(羅萬甲)
[생졸년] 1592년(선조 25) ~ 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정(安定). 자는 몽뢰(夢賚), 호는 구포(鷗浦).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학유(學諭) 나윤침(羅允忱)이고, 아버지는 세자시강원보덕 나급(羅級), 어머니는 한성참군(漢城參軍) 김호선(金好善)의 딸이다. 정엽(鄭曄)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권세에 아부하는 원생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사건(西宮幽閉事件)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귀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고 통덕랑으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수찬이 되었다. 1625년 교리가 되었을 때 서인(西人)인 김류(金鎏)가 북인(北人) 남이공(南以恭)을 등용하자 소서(少西)로서 이를 반대하다가 강동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귀(李貴)의 도움으로 강등된 관직을 되찾게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이 되어 왕을 따라 강화도에 가서 풍기를 바르게 하고 도민을 서로 경계하게 해 범죄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듬해 환도해 병조정랑·수찬·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포로 문제가 일어나 김류 등의 탄핵을 받고 귀양가게 되었다.
그 뒤 1631년 부수찬·헌납이 되었으며, 1634년 홍주목사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참의에 올랐으나 시폐(時弊)에 대한 상소를 하다가 파직당하고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단신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왕을 모시고 공조참의·병조참지로서 관향사(管餉使)가 되어 군량 공급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강화 후 무고를 받아 영해로 귀양갔다가 1639년 풀려나와 영천(榮川: 지금의 榮州)에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병자록(丙子錄)』과 『구포집(鷗浦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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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참의(刑曹參議) 나공 만갑(羅公萬甲) 신도비명 병서 - 金尙憲 撰
뜻이 호방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범상치 않아 좋아할 만한 인재가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잘되고 잘못된 것을 서로 견주어 보면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한 운명이 있는 것이다. 하늘이 실로 인재를 내고도 또 빼앗아 가며, 사람들은 인재를 아끼는 듯하지만 도리어 시기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 능력을 다 펴지 못하고서 재주를 품은 채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예컨대 구포(鷗浦) 나공과 같은 분은 어찌 이른바 범상치 않아 좋아할 만한 인재가 아니겠으며, 시운을 만나지 못해 그 능력을 다 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만갑(萬甲)이고, 자는 몽뢰(夢賚)이다. 나씨(羅氏)는 본래 나주(羅州)에서 나왔는데,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천서(天瑞)가 공신(功臣)이 되어 안정(安定)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드디어 안정인(安定人)이 되었다. 안정은 곧 지금의 비안현(比安縣)이다.
고조 세걸(世傑)은 창릉 참봉(昌陵參奉)을 지내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증조 익(瀷)은 한림(翰林)으로 있다가 폄직(貶職)되어 적성 현감(積城縣監)으로 있었으며, 돌아가신 뒤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추증되었는데, 식(湜)과 숙(淑) 두 형과 함께 현직(顯職)에 있으면서 모두 바른 도(道)로써 하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입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선비들이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할아버지 윤침(允忱)은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다. 아버지 휘 급(級)은 일찍이 대인의 뜻을 품어 벼슬길에 있으면서 승진하는 데 급급하지 않아 관직이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그쳤는데, 공이 종훈(從勳)에 참여됨에 따라 여러 차례 추증되어 의정부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어머니는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김호선(金好善)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 25)에 태어났다. 이보다 앞서 의정공(議政公)이 맏아들을 잃었으므로 대를 이을 자식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꿈에 신령한 사람이 공을 낳을 것임을 알려 주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과연 아들을 얻었으므로 드디어 명해준 바로써 이름을 삼고, 자(字)를 뇌(賚)라고 하여 기쁨을 표시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라 호협(豪俠)한 행동을 스스로 기뻐하였다. 놀이하며 노는 것도 군사놀이를 좋아하여 여러 아이들을 지휘하였는데, 나이와 힘이 비록 공보다 더 많은 아이라도 두려워하면서 감히 명을 듣지 않는 아이가 없으니, 장로(長老)들이 보고는 기특하게 여겼다. 겨우 이를 갈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시를 지어 읊으매 사조(詞藻)가 월등히 뛰어났으므로 감상가(鑑賞家)들이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라는 뜻인 ‘천리족(千里足)’이라고 칭찬하였다.
11세 때 의정공의 상(喪)을 당하여 상례(喪禮)를 행하기를 성인과 같이 하였다. 어머니가 공이 지나치게 야윈 것을 근심하여 여러모로 타일렀으나, 끝내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삼년상을 마치자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날로 피어올랐는데, 수몽(守夢) 정 선생 엽(鄭先生曄)이 공을 한 번 보고는 나라의 그릇감으로 인정하고 따님을 시집보냈다. 공도 성심으로 스승으로 섬겨 장인과 사위 간에 서로 지기(知己)가 되었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입격하였다. 처음 성균관에 들어갈 때 예전부터 전해 오는 풍습에 신구(新舊)의 진사(進士)들이 서로 볼 적에 한 번 읍을 하는 것이 예였다. 이때 상상(上庠)에 있는 사람들이 권간(權奸)의 사특한 논의에 가담하였는데, 공은 그들을 추하게 여겨 서로 더불어 읍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함께 과거에 입격했던 사람들이 머뭇거리다가 모두 물러나니, 이 일로 해서 이름이 드러났으며 또한 이 일로 인해서 간악한 무리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자 승중(承重)하여 상복을 입고서 상제(喪制)를 끝마쳤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께서 바야흐로 서궁(西宮)에 유폐되는 곤욕을 당하고 있었는데, 공이 어머니께 말하기를, “삼강(三綱)이 끊어졌으니 떠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는, 곧바로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다음 공거(公車)에 나가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면서, 문을 닫고 들어앉아 마음을 기르면서 오직 옛 전적들로 스스로 즐겼다. 오랜 뒤에 정사(靖社)의 계책을 알려 주는 사람이 있어 함께 가기를 요청하였는데, 공이 사양하고 가지 않으니 듣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금상(今上)께서 즉위한 다음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알성시(謁聖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보임되었으며,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추천을 받아 사관(史館)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고, 대교(待敎)와 봉교(奉敎)를 역임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전보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으며, 또다시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옮겨졌다. 호조는 본디 ‘아전들의 소굴’이라고 불려졌다. 이때 마침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상께서 출행(出幸)하게 되었으므로 기무(機務)가 백 배는 더 많았다.
그러자 장관(長官)이 공을 재주가 있다고 여겨 여러 어려운 일을 모두 공에게 위임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역적이 패한 뒤 환도(還都)하여서는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공적인 일로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다.
얼마 안 되어 다시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을 세 번, 교리(校理)를 두 번, 문학(文學)과 헌납(獻納)을 각각 한 번씩 하니, 명성이 자자하게 피어올랐다. 상을 모시고 강론하는 자리에서는 상을 바로잡는 데 마음을 힘썼으며, 상께서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하였으며, 성심(誠心)으로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을 급하게 여기도록 하였다.
또 상께서 경연(經筵)에 드물게 나오고 대간(臺諫)을 가볍게 보는 것을 경계하여 간하기를 매우 간절하게 하니, 상께서 자못 귀를 기울여 들었다. 이에 공은 더욱더 스스로의 뜻을 펴 일을 만나면 반드시 말하였는데, 용맹하게 나아가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전부터 집정(執政)한 자가 본래 이미 공을 못마땅하게 여겨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이공(南以恭)을 갑자기 도어사(都御史)로 제수하였다. 남이공은 본래 혼조(昏朝) 때 척리(戚里)의 문객(門客)이라서 청의(淸議)가 허여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공이 홍문관의 동료 관원들과 함께 그의 죄상을 들어 탄핵하자, 집정이 공 등의 무리가 붕당을 지어 일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한다고 지목하였다. 상께서 공을 외직(外職)으로 보임하라는 명을 내리자, 조정의 신하들이 쟁론하였으나 상의 뜻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에 세 사람이 모두 먼 고을로 폄직(貶職)되었는데, 공은 강동 현감(江東縣監)이 되었다. 지위가 높은 신하 중에 집정과 서로 사이가 나쁜 사람이 공을 힘껏 구제하다가 말이 지나치게 과격하여 상께서 진노해 장차 더 먼 곳으로 귀양 보내려고 하였는데, 대신(大臣)의 말에 힘입어 그치게 되었다.
공은 고을에 부임한 뒤에 좌천된 사람으로 자처하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위로하였으니, 묵은 병폐가 씻은 듯이 제거되었다. 가뭄과 누리의 피해를 당하였을 적에는 경건하게 기도하여 단비를 내리게 해 누리의 재앙이 사라지게 했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마치 다시 살아난 듯이 기뻐하였다.
정사를 보는 틈틈이 교육 행정을 크게 닦아 고무시키고 감화시키니, 선비들이 다투어 떨치고 일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찬란하게 성취되어 볼만하였다. 이로부터 그 고을에서 연속해서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나오자, 이웃 고을들이 이전에 보지 못하였던 일이라고 흠모하면서 칭송하였다.
공이 병으로 인해 고을을 버리고 떠나가자, 공을 그리워하면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기렸다. 뒤에 공이 해주(海州)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맛있는 음식을 보내어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을 도왔으며, 어머니가 죽었을 때에는 천리 먼 길을 앞 다투어 달려와서 부의(賻儀)하였다.
다음 해인 정묘년(1627, 인조 5)에 서쪽 오랑캐가 깊이 쳐들어오매 상께서 황망히 강화(江華)로 행행하였다. 공은 뒤따라 강화로 들어갔다가 오랑캐가 물러난 뒤에 시골로 돌아갔다. 무진년(1628)에 직강(直講)과 지제교(知製敎)와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제수되었고, 수찬(修撰)과 지평(持平)으로 여러 번 옮겨졌는데, 풍속과 기강을 진작시키고 신칙하였다.
그러자 도성의 백성들이 서로 주의하여 감히 금령을 범하는 사람이 없어 일시에 엄숙하게 되었다. 공이 이조 정랑에 천거되자 집정(執政)이 여전히 예전에 미워했던 마음을 가지고 공을 헐뜯는 말을 올리니, 상께서 공을 미워하여 대신에게 묻고서 장차 멀리 유배 보낼 작정이었으나 대신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하여 명을 고쳐 중도부처(中道付處)하였다.
다음 해에 사면(赦免)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다시 홍문관(弘文館)과 사간원(司諫院)에 들어가서는 임금의 노여움과 미움에 조금치도 꺾이지 않은 채, 제사(諸司)에서 이익을 취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불러오고 벼슬아치들이 염치의 도리가 밝지 못한 것에 대해 극력 진달하였다.
특히 훈귀(勳貴)와 척리(戚里)들이 사치 풍조에 물들어 제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해 지적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인척(姻戚)의 하찮은 무리들로 하여금 인물을 전형(銓衡)하는 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훈귀와 척리들이 몹시 미워하여 눈을 흘겨보았다.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상을 당하여 상례(喪禮)를 거행하는 것을 관장했는데, 덜고 보탬을 예에 알맞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검상(檢詳)과 사인(舍人)과 보덕(輔德)을 역임하였으며, 산릉(山陵)의 역사를 마치고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보임되었다. 안동의 백성들이 평소에 공의 위엄과 명성을 들었으므로 다투어 서로 하례(賀禮)하였으며, 간리(奸吏)와 거족(巨族)으로서 교만하고 방자하게 굴던 자들은 손을 움츠리고 혀를 빼물고는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명령에 따르니, 한 달도 채 못 되는 사이에 정사(政事)의 교화가 크게 행해졌다.
온 도내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었는데, 공이 기도하자 강동(江東)에서와 마찬가지로 비가 쏟아져 안동 경내만 유독 비가 내리는 은택을 입으니, 백성들이 “사군(使君)께서 능히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앞 다투어 말하였다. 농사철에 규정을 어기고 어머니를 봉양한 것 때문에 죄를 입어 파직되었다.
고을에 재임한 기간이 겨우 70일밖에 안 되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사모하고 송덕하기를 강동에 있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 13)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이때 목릉(穆陵)에 폭우가 쏟아져 무너졌는데 혹 벼락에 맞았다는 말이 떠돌았으며, 원종대왕(元宗大王)을 부묘(祔廟)하는 일이 마침 이때 있게 되어 서로 공교롭게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인심이 불안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그에 대해 논하면서 아뢰기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가리기에 급급하여 천재지변(天災地變)을 숨기려고 합니다.”라고까지 하였으며, 이어 궁위(宮闈)가 엄하지 않은 것과 시정(時政)의 궐실(闕失)에 대해 수천 마디의 말로 논하였는데, 모두 다른 사람들로서는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러자 상께서 매우 분노하여 엄한 뜻으로 전지를 내리고 파직시켰다. 이에 공은 강가로 나가 은거한 채 꽃을 심고 채소밭을 가꾸면서 한가롭고 느긋하게 노후를 마칠 계획을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 14) 겨울에 금(金)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와 상께서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들어갔다.
공은 밭 사이에서 울면서 어머니와 이별하고 한 필의 말을 타고 난리에 나아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오랑캐가 거짓으로 화친을 약속하면서 세자 저하를 볼모로 보내라고 하였다는데, 조정에서 만약 그것을 허락한다면 신은 먼저 말 앞에서 머리를 찧어 죽을 것입니다.
적들은 멀리까지 달려와서 피로하고 궁핍할 것이니, 병사를 모집해서 떨쳐 일어나 공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곤란하게 여겨 그 계책이 실행되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식량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여 공을 천거하여 식량을 주관하게 하니, 공을 공조 참의에 제수하였다.
상께서 공을 인견(引見)하여 위로하면서 격려하자, 공은 명을 받은 데 대해 감격하여,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애를 쓰면서 온 마음을 다해 식량을 조달해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다시 병조 참지로 옮겨졌다. 적들이 척화(斥和)한 신하를 보내라고 요구하자, 일을 주관하는 자들이 이를 달갑게 받아들이면서 정온(鄭蘊)과 윤황(尹煌) 등 10여 명을 지명하여 화를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대신들을 보고 말하기를, “제공들께서는 평소에 자부하는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런 짓을 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후세의 의논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화를 면한 사람들이 많았다.
처음에 오랑캐가 거만한 글을 보내어 우리를 시험하였을 적에는 사람들마다 오랑캐와 단절해야 한다고 큰소리를 쳤으나, 공은 믿어 의지할 곳도 없으면서 자만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동료들이 공의 나약함을 꾸짖었다.
그런데 포위를 당하게 되어서는 지난날에 큰소리를 쳤던 사람들이 도리어 화의(和議)에 붙었으나 공은 항상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자는 뜻을 폈다. 어떤 사람이 의아해하며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기미책(羈縻策)을 써서 백성들의 삶을 보전하거나 강상(綱常)을 지켜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거나 하는 것은 모두 때에 따라 권도를 좇는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공의 재량에 감복하였다.
화친이 이미 정해지고 난 뒤에 공이 상 앞에 나아가 이전의 의논을 더욱 굳게 고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이 물러 나와 조정에서 말하기를, “설령 성 아래로 내려가 강화하더라도 명나라에서 하사한 고명(誥命)과 국새(國璽)를 주어서는 안 되며, 피도(皮島)에 머물러 있는 천자의 군대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면서, 강개하여 마지않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화의를 힘써 부르짖은 사람들이 비웃으며 말하기를, “왜 저들에게 가서 직접 말하지 않는가?” 하니, 공이 의연히 말하기를, “조정에서 나를 재주가 없다고 여기지 않고 사신의 행차에 끼워 준다면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하였다.
오랑캐들이 세자를 데리고 심양(瀋陽)으로 갈 때에 미쳐서는 공이 말고삐를 잡고 통곡하였는데, 옷소매가 모두 젖었다. 세자께서 따스한 말로 이르기를, “그대의 노모께서는 화를 면하셨는가? 빨리 가서 뵙는 것이 마땅하나, 잠시 동안만 늦추고서 나를 교외(郊外)에까지 나가 전송해 달라.” 하였는데, 간절하고 애틋한 뜻이 넘쳐흘러 옛 여러 궁료(宮僚)들 가운데에서 가장 두터운 은혜를 보이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어머니가 섬에서 남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공이 호서(湖西)로 모시고 간 뒤 얼마 안 되어 돌아가셨다. 공은 난리를 당한 뒤끝이었는데도 스스로의 정성을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얼마 뒤에 섬에 적이 침입해 왔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수영(水營)의 낡은 배를 빌려서 피난할 계획을 하였다가 헛소문임을 알고는 곧바로 되돌아왔는데, 공을 좋아하지 않고 있던 사람이 수영의 일을 대신 맡게 되어서는 이것을 이용하여 공을 헐뜯어 드디어 그럴듯하게 죄를 꾸몄다.
상께서 정위(廷尉)에게 내려 문초(問招)하게 하고는 마침내 법으로 얽어 멀리 영해(嶺海)로 유배하였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모두 말하기를, “벌이 너무 무겁고 공평하지 못하다.” 하였다. 공은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길을 가 백 번 쓰러지는 중에 겨우 한 번 살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제사를 지낼 적에는 반드시 몸소 전(奠)을 올리고, 곡을 할 적에는 반드시 슬픔을 다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에 여러 아들들이 울면서 예법대로만 하기를 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상께서 치욕을 당하였는데도 죽지 못하였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상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였다. 그러니 무슨 낯으로 살겠는가.” 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 17)에 삼년상을 마치고 다음 해에 사면을 받아 영천(榮川)으로 옮겨가 우거하였다. 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심양(瀋陽)을 돕는다는 소식을 들을 적마다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300년 동안이나 지켜온 군신(君臣)의 의리가 지금에 이르러 끊어지게 되었다.” 하였다.
그리고는 밤낮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고 분개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병세가 점점 위독해져 임오년(1642) 윤11월 병오일에 영천의 우사(寓舍)에서 졸하니, 향년 51세였다. 역책(易簀)하기 이틀 전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제문을 지었는데, 정신과 기력이 평소와 같았다.
관찰사가 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뢰자, 상께서 작위를 회복시키고 의례(儀禮)에 따라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전에 호종했던 공로로써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키라고 명하였으며, 또 정사 공신(靖社功臣) 등의 종훈(從勳)으로써 의정부 좌의정을 추증하라고 명하셨다.
다음 해인 계미년(1643) 3월에 선영(先塋)이 있는 광주(廣州) 북방리(北坊里) 건지산(乾芝山)의 신향(辛向) 산등성이에 반장(反葬)하였다. 공은 사람됨이 굳세고 지혜가 많았으며 기개를 숭상하고 담론(談論)을 잘하여 우뚝이 국사(國士)의 풍모가 있었다.
비록 선비의 절개에 있어서는 꿋꿋하였으나 집안에 있을 때에는 몹시 자애로웠으니, 부모를 섬기고 선조를 받들며 종족을 대접하고 재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로서는 미치기 어려운 바가 많았다. 공은 어머니가 연로하여 실명하자 즐거워하고 기뻐하도록 봉양함에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외조모와 홀로 사는 여러 고모들을 섬김에 있어서는 함께 산 지 10여 년 동안에 종시토록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어 온 집안이 화목하기만 하였다. 모든 길사와 흉사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를 아는 사람을 본받아서 행하였다. 사람들과 사귐에 있어서는 위급할 때 의지할 만하였으므로 수몽(守夢) 선생이 항상 ‘6척의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다.’라고 칭찬하였다.
공은 종일토록 손님을 마주 대해 있어도 객이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은 뜻에 마땅치 않은 일을 보게 되면 문득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일이 지나간 뒤에는 다시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때때로 뜻을 굽혀 좋은 말을 받아들였는바, 이 때문에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직임을 맡아 수행하고 있는 자리에서는 법을 지켜 위세에 저항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나 임금의 뜻을 거슬렀으나, 뒤에는 또한 공의 재주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 번 배척을 당하여 돌아오지 못하고 마침내 졸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군자가 이르기를, “공이 비록 지위가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고 수명도 길지 못하였지만, 충직한 명성은 마땅히 강하(江河)와 더불어 영원히 흐를 것이니, 공의 유감이 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이에 시대에 구차스럽게 영합하지 않은 것이 후세에 인정을 받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인은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지낸 정엽(鄭曄)의 따님인데, 정엽은 바로 수몽공(守夢公)이다. 부인은 일찍이 가정에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남편을 섬기는 데 있어 덕을 어김이 없었다. 공은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성두(星斗)로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이고, 차남은 성한(星漢)이고, 삼남은 성원(星遠)이고, 사남은 성위(星緯)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다.
장녀는 이가상(李嘉相)에게 시집갔는데 이가상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차녀는 박세주(朴世柱)에게 시집갔다. 성두는 대사헌 김남중(金南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명좌(明佐)이고, 다음은 어리며, 딸은 진사 김수항(金壽恒)에게 시집갔다.
성한은 사인(士人) 이종배(李宗培)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성원은 직장(直長) 권순창(權順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성위는 승지(承旨) 신익량(申翊亮)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내외(內外) 손자가 모두 약간 명이 있다. 공을 장사 지내고 몇 년이 지난 뒤에 부인이 성두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서 네 아버지와 잘 알고 지내면서 서로 간에 뜻을 허여해 준 분으로는 오직 김씨 어른이 계실 뿐인데, 연세가 이미 팔십이다.
그러니 너는 빨리 가서 명(銘)을 청하고 뒤로 미루지 말라.” 하였다. 그러자 성두가 명을 받들어 참의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매우 정성스럽게 청하였다. 이에 내가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 늙었음을 헤아리지 않고 간략히 순서대로 적고서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꿋꿋하고 꿋꿋했던 우리 나공은 / 蹇蹇羅公
진정으로 우리 임금 신하였다네 / 允矣王臣
돈독하게 힘을 쓰고 지조 숭상해 / 篤厲操尙
이 세상에 인재 있다 칭해졌다네 / 稱世有人
만난 시절 아름다운 때였었건만 / 遭時之美
괴로움과 고생 온통 다 겪었다네 / 餉以苦辛
자기 자신 몸에다가 성실 쌓으며 / 積誠于躬
말이 시행 안 됨 수치스러워했네 / 恥言不伸
우리 도가 글러지게 되었을 때는 / 吾道非耶
더더욱 더 자신의 몸 다 바치었네 / 益殫厥身
제사 지내 하늘의 맘 감동시켰고 / 祭則格天
정사 펴서 백성들을 교화시켰네 / 政行化民
오직 충성스럽고 또 정직했거니 / 惟忠惟直
귀신에게 질정해도 될 만하였네 / 可質鬼神
어느 누가 화의 계제 만들었던가 / 誰爲厲階
바닷가로 끝내 귀양 가고 말았네 / 竟竄海濱
살아서는 진창에서 욕 당했으나 / 生辱泥塗
죽어서는 저 별들과 나란히 됐네 / 死列星辰
거짓된 건 한때에만 행해지지만 / 一時之贋
참된 거는 만대토록 영원하다네 / 萬世之眞
태사들이 역사책에 여러 번 쓰고 / 太史屢書
패사에서 정성스레 기술하였네 / 稗史誠陳
여러 사람 하는 말을 주워 모아서 / 採之公言
글을 지어 이 빗돌에 새기었다네 / 刻此貞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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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刑曹參議羅公神道碑銘 竝書 - 金尙憲 撰
俶儻儁偉非常可喜之士。世未嘗無人。而長短互見。遇不遇有命。天實生之。而又奪之。人若惜之。而反忌之。未究厥施。含用而逝者多矣。若鷗浦羅公。豈非所謂非常可喜之士。時命不偶。未究而逝者歟。謹按公諱萬甲。字夢賚。羅氏本出羅州。高麗時侍中天瑞。以功食采於安定。遂爲安定人。安定卽今之比安縣也。高祖世傑。 昌陵參奉。 贈司憲府持平。曾祖瀷。以翰林貶。官積城縣監。卒 贈弘文館校理。與二兄湜。淑俱顯仕。俱以直道。俱被奸臣誣枉。至今爲士類所稱。大父允忱。成均學諭。考諱級。早抱大人志。不汲汲於進取。官止侍講院輔德。以公之從勳。累 贈議政府領議政。妣光州金氏。漢城參軍好善之女。萬曆壬辰生公。先是議政公喪伯子。以繼嗣爲憂。夢神人有報。已而果得子。遂以其所命者爲名。而字之曰賚以志喜。幼而不類凡兒。豪擧自喜。其游嬉。好爲軍陣之事。指使群童。年力雖出己上者。畏讋不敢不聽。長老見而異之。甫齓。試賦韻語。藻思驟長。鑑賞家稱爲千里足。十一。遭議政公憂。執喪如成人。母夫人愍其過毀。備諭之。竟不能奪志。服除。才名日起。守夢鄭先生。一見許以國器。歸以其子。公亦誠心師事。舅甥間相爲知己。癸丑。中進士第一人。初入太學。故事新舊進士。相見一揖爲禮。時居上庠者傅會權奸邪論。公醜之。不與相揖。於是一榜逡巡俱退。以此著名。亦以此大忤奸黨。王母夫人卒。承重持制。制畢。母后方在幽辱。公白母夫人。三綱絶可去矣。卽奉歸田舍。不赴公車。不與時人交。闔門養靜。唯以墳典自娛。久之。有以靖 社謀告者。要與同往。公謝不行。聞者韙之。癸亥。 今上卽位。拜 順陵參奉。登謁 聖丙科。補承文院權知正字。陞著作。薦入史館爲檢閱。歷待敎奉敎。轉成均典籍。移司憲府監察。又移戶曹佐郞。度支素號吏藪。適李适叛。 上將出幸。機務百倍。長官才公。諸難事悉以委之。無不立辦。賊敗還都。爲騎省郞。公譴坐罷。尋入玉堂。三爲修撰。再爲校理。爲文學爲獻納。聲譽藉甚。侍講席。銳意匡翌。勸 上立聖志勤聖學。誠心求賢爲急。且以罕御 經筵。輕視臺諫。規箴甚切。 上頗傾聽。公益自發舒。遇事必言。勇往不護。前執政固已目攝之。會南以恭驟除都御史。其人本昏朝戚里客。不爲淸議所與。公偕館僚擧劾之。執政指公等朋比喜事。 上下補外之命。廷臣爭不得。於是三人皆貶遠邑。公爲江東縣監。貴臣有與執政相軋者力救之。語激 天怒。將加竄逐。賴有大臣言得寢。旣之官。不以遷客自居。竱心撫摩。宿瘼如洗。遇旱蝗。虔禱澍應。蝗不爲災。邑人懽若更生。以其暇。大修學政。鼓舞風動。士爭興起。未幾彬彬可觀。自是連擧於鄕。旁邑慕稱以爲前此未見也。以病去官。追思頌德。後聞公謫海西。爲輸旨甘。以助親膳。及歿。爭致千里賻。明年。西虜深入。 上猝幸江都。公追赴之。虜解還里。戊辰。拜直講知製 敎,兵曹正郞。屢遷修撰持平。振飭風紀。都民相戒。毋敢犯禁。一時凜然稱肅。薦擬天官郞。執政猶用前忤進毀言。 上惡之。問諸大臣將遠貶。皆以爲不可。改命中道。明年宥還。復入玉堂諫垣。不以震撼少沮。極陳諸司聚利斂怨。薦紳廉恥不明。尤斥勳貴戚里奢侈踰制。又言姻婭瑣類。不宜使居銓地。勳戚側目視之。 仁穆王后喪。監掌廞儀。損益適宜。人多稱之。歷檢詳舍人輔德。 山陵訖。陞通政兵曹參知。爲養出補安東。民素聞公威聲爭相賀。而奸吏鉅族驕橫者。斂手吐舌。傾耳待令。旬月之間。政化大行。道內久旱。公禱應如江東時。環一境獨蒙霈澤。爭言使君能感天。以農月違制奉親坐罷。在官僅七十日。而人無不思慕頌德如江東云。乙亥。拜刑曹參議。 穆陵雨塌或言遇震。 元宗祔廟。適與相値。衆口讙譁。人心不安。公抗疏論之。至云上下相蒙。欲諱災異。仍及宮闈不嚴。時政闕失數千言。皆人所不敢言。 上甚恚。嚴旨罷官。公屛居江外。蒔花灌圃。悠然有終老計。丙子冬。金兵大至。 上避入南漢。公自田間泣辭大夫人。匹馬赴難請對。虜詐言約和。要質 儲君。朝廷若許之則臣先碎首馬前。賊遠來疲乏。募士奮擊。可以得志。諸將多難之。計不行。衆虞食。擧公主餽。拜工曹參議。 上引見勞勉。公受命感激。夙宵劌心隨調毋乏。移兵曹參知。賊要得斥和臣甘心用事者。指名鄭蘊,尹煌十餘輩以塞禍。公見大臣言曰。諸公平日。自許何如。而今欲爲此擧。獨不畏後世議乎。由是多得免者。始虜遺慢書試我。人人大言虜可絶。公以爲無挾自大。非計也。儔輩誚公選愞。及在圍中。前日大言者反附和議。公每陳死守之義。或疑問。公對視羈縻保民生。守綱常全節義。皆隨時從道也。人服其有裁。和旣定。公至 上前。持前議益堅。 不納。退言於朝堂曰。設令城下。 皇朝所賜誥命國章。不可與。皮島所留 天兵。不可犯。慷慨不已。座中力倡和議者。嗤謂何不詣彼自言。公毅然曰。朝廷不以我爲駑。使備行人。何敢辭也。及虜以 世子西行。公執鞚痛哭。衣袖盡濕。 世子溫語君之老母免乎。宜速往見。第少須。送余出郊。丁寧眷顧之意。視舊諸僚最爲恩渥。聞者莫不感動。大夫人寄寓海島。公奉往湖西。尋遇大故。喪亂之餘。自盡無憾。亡何誤聞島警。賃水營退舫爲避亂計。已覺其誤。卽反之。不悅者代事。乘而齮之。遂成萋斐。 上下廷尉問。竟用拗法。遠竄嶺海。士大夫皆言其罰太重不平者。公銜荼跋涉。百瘁一生。猶祭必躬奠。哭必盡哀。幾於滅性。諸子泣請如禮。輒拒之曰。主辱不能死。母歿不能喪。何以生爲。己卯服除。明年遇赦。移寓榮川。每聞 國家助兵瀋陽。歎曰。三百年君臣之義。到今絶矣。日夜涕泣。悲憤不自勝。病遂漸篤。壬午閏十一月丙午。卒于榮川寓舍。得年五十有一。易簀前二日。爲人作祭文。神氣如平生。道臣以 聞。命復爵賜賻如儀。前以扈從勞。進嘉善。又用靖 社等從勳。 贈議政府左議政。明年癸未三月。反葬廣州先兆北坊里乾芝山辛向之原。公爲人。抗爽多智。尙氣槩善談論。居然國士風。雖厲於士節乎。然其居家絶慈良。事親奉先。待宗族處財賄。多人所難及。大夫人老而失明。奉養娛悅。靡不曲盡。奉外王母及嫠居諸姑姊。同居十餘年。終始無間言。閨門之內雍雍如也。凡有吉凶之事。必倣於知禮者行之。與人交。緩急可仗。守夢先生常稱六尺可托。終日對客。不能刱一佞辭。所覯不當意。輒面責之。至頰赤不止。然過後不復留。時時屈意受善言。以此見多。所在擧職。至持法抗勢。屢拂人主意。後亦不能不思其才也。一斥不復。卒以擯死。嗚呼惜哉。君子謂公雖位不大顯。壽不永年。忠直之名。當與江河同流。不足爲公憾也。乃知不苟合乎時者。所以合乎後世也。夫人草溪鄭氏。議政府參贊諱曄之女。卽守夢公。夫人蚤承家訓。事君子無違德。有四男二女。男長星斗。翊衛司侍直。次星漢。次星遠。次星緯。俱向學。長女壻李嘉相。登第蚤歿。次女壻朴世柱。星斗娶大司憲金南重女。生二男一女。男明佐。次幼。女適進士金壽恒。星漢娶士人李宗培女。星遠娶直長權順昌女。星緯娶承旨申翊亮女。內外孫若干。公葬有年。夫人命星斗曰。今世上與汝父知而許其志者。惟金丈在。年今八十矣。汝急往乞銘毋後。星斗承命。以參議趙君錫胤狀來請甚勤。義不可辭。不揆老耄。略爲序次而系之銘。銘曰。
蹇蹇羅公。允矣王臣。篤厲操尙。稱世有人。遭時之美。餉以苦辛。積誠于躬。恥言不伸。吾道非耶。益殫厥身。祭則格天。政行化民。惟忠惟直。可質鬼神。誰爲厲階。竟竄海濱。生辱泥塗列星辰。一時之贋。萬世之眞。太史屢書。椑史誠陳。採之公言。刻此貞珉。<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