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김시민 장군, 가부기에서 공포의 화신이다
정경시사 Focous, 202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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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섭(명지대 명예교수)
임진년 1592년 5월 23일, 임진왜란(1592~1598)이 시작되었다. 조선, 중국, 일본이 참여한 동아시아 7년 전쟁이라고도 하지만, 실제 열전을 치른 기간은 1592년부터 1593년까지 약 1년 정도이었고, 몇 년 동안은 명나라와 일본의 지루한 협상 기간이었다.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에서 왜군을 격퇴하였다. 김시민은 일찍이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 했을 때에 병조판서에게 군사를 훈련시켜야 한다고 탄원서를 올렸다가 번번히 무시당하자 그 자리에서 군모를 벗어 던지고 병조판서 앞에서 발로 짓밟고는 사직서를 냈다.
그 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서 세월을 보내다 1583년 여진족 이탕개의 난(尼湯介亂)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김시민 장군이 진주판관에 부임하게 되고 그 후 1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진주목사 이경(李璥)이 피신하고 병사하자 그 후임으로 김시민이 진주목사가 되었다. 김시민은 취임하자 곧바로 염초 150여 근과 총통 70여 병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왜군의 진주성 공략이 시작되자 김시민은 고을 안에 사는 백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부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 여자는 모두 남장을 시키고 싸움에 임했다. 1592년 10월, 6일 동안 이어진 치열한 혈투 끝에 결국 왜군을 격퇴시켰다. 진주성은 일본이 장악한 경상도 남부에서 호남으로 가는 길목의 거점이었다. 일본이 진주성을 함락하면 손쉽게 호남까지 뻗어갈 수 있었지만, 패전으로 육로를 통해 호남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고, 조선은 곡창지대인 호남 내륙을 보호했다.
이러한 진주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 권율의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은 조선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당시 38세였던 김시민 장군은 왜군이 쏜 유탄에 왼쪽 이마에 맞고 9일간 사경을 헤매다 돌아가셨다.
진주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다른 특징이 있다. 두 대첩은 하루 동안 싸웠지만 진주대첩은 무려 6일 동안 싸웠다. 그리고 전쟁 초기 일본은 바다와 달리 육지에선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는데 진주성에서의 패배는 육군 최강이라 자부했던 왜군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만약 진주성이 뚫려 일본군의 보급을 노린 곡창지대 전라도가 점령당했다면 임진왜란의 판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주대첩은 임진왜란을 조선의 승리로 결정지은 대단히 중요한 전투이었다. 3000 여명 규모의 조선군이 10배에 가까운 3만에 달하는 일본군을 이긴 것은 왜군을 심리적으로 공포에 떨게 만든 그야말로 대첩인 것이다. 일본이 명과 강화 협상할 때도 진주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어 철수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이었고, 이후 왜군은 김시민 목사를 모쿠소라고 부르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일본은 치욕적인 패전의 설욕을 위해 재침한 2차 진주성 전투에는 모쿠소(김시민 목사)를 반드시 잡겠다고 10만에 가까운 대군을 동원하고 당시 일본 최고의 장수였던 다테마사무네(伊達政宗)까지 참전하는 장수진을 꾸려서 재침하였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3년 진주성 재공격을 명하면서 철저한 보복을 지시했다.
진주성에서 당한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전 병력을 동원하였고, 진주목사의 목을 베어올 것이며, 진주성 내의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라고 하였다. 2차 전투는 패전으로 이어졌다. 1차 전투의 대승으로 진주성은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식되어 배성들의 성안으로 들어왔으므로 2차 전투의 패전은 민간인 몰살과 같은 참극으로 이어졌다. 논개의 분사도 이때에 일어났다.
당시 토요토미히데요시는 김시민 장군의 전사를 알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재공격 때는 물론 임란 후에도 김시민 장군의 죽음을 몰론 이순신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일본에 김시민의 전사와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비로소 알려진 것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인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전황들을 기록한 수기인 징비록(懲毖錄, 1604년 완간)이 교토에서 일본판 '조선징비록'으로 간행된(1695) 이후이다.
'조선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1705년 동시 간행된 '조선군기대전'과 '조선태평기'에는 이순신, 김시민 등 용맹한 조선 장수들이 비로소 등장한다. 어쩌면 토요토미 정권이 의도적으로 조선장수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하도록 금지조치를 취했을 수도 있다. 일본측 사문서와 일기, 서간 등에도 이순신의 이름이 거의 없지만, 김시민은 이름보다는 목사라고 알려졌다. 이순신은 무서운 조선수군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면서 이름은 잊혔을 수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수많은 일본의 임란 관련 기록물에는 조선인 장수들의 지명을 자국어로 음차해서 기록한 게 거의 없지만 그나마 당대 기록 중 김시민이 언급되어 있긴 한데 그나마도 ‘모쿠소’라고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근세 일본 작가들이 김시민과 이순신을 영웅시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김시덕은 ‘그들이 본 임진왜란’(학고재; 문화일보, 2012.1.20)에서 "이순신과 같은 조선 영웅을 이긴 일본 장군은 더 위대하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김시민 장군이 어쩌면 이순신보다 더 유명한 장군으로, 공포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며, 일본 문학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조선의 장수이다. 물론 음악, 무용, 기예가 어울리는 일본 전통연극인 가부키(歌舞伎)에서도 김시민 장군이 나온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의 필사적 항전은 왜군에게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때문에 당시 왜군들은 김시민을 '모쿠소'라고 불렀다. 이때의 모쿠소는 '진주목사' 할 때 목사(牧使)의 일본식 발음이고, 일본식 표기는 '木曾'으로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저서인 '다이코키'(太閤記, 1626)에 '모쿠소'가 실리면서 일본 전역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그 영향으로 모쿠소는 가부키에서 조선군의 맹장이자 충신이면서,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冤鬼)의 캐릭터로 그려지게 됐다. 모쿠소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가부키 작품은 지카마츠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혼쵸산고쿠시(本朝三國志, 1719)이다. 거기에서 모쿠소는 조선에서 가장 신뢰받는 장군으로, 나중에는 일본군에게 비참히 살해당하는 장군으로 그려져 있다.
또 우메노가후(梅野下風)의 히코산곤겐치카이노스케타치(彦山權現誓助劍,1786)에도 모쿠소호간(木曾判官)이 등장한다. 거기에서 모쿠소호간은 환술로서 일본의 신덕(神德)과 대항하지만 패하고 수행자로 변장한다(충북일보, 2014.10.23).
대표적인 가부키 작품으로, 18세기에 일본에서는 에도시대 유명한 작가 쓰루야난보쿠(鶴屋南北)의 소설인 텐지쿠도쿠베에 이국이야기(天竺德兵衛韓)가 있다. 두꺼비를 타고 도술을 부리며 일본국 전복을 노리는 반역자 텐지쿠도쿠베에(모쿠소호간의 외아들)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나오는 두꺼비 요괴 지라이야(自来也, 児雷也)의 정체는 바로 '조선의 악마 모쿠소호간의 아들'이다. 김시민 장군의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에 나타난 복수의 화신인 것이다.
텐지쿠도쿠베에 이국이야기(天竺徳兵衛 韓噺)에서 텐지쿠도쿠베에(天竺徳兵衛, 天徳)는 다른 나라 이야기(韓噺)를 재미있게 하고, 요괴(大蝦蟇, 大ガマ)의 도술을 사용해 일본국을 점령하려는 기상천외하고 매력적인 가부기의 주인공이다. 텐지쿠도쿠베에는 네덜란드상인을 따라다니든 무역 상인으로 실제 인물이었다. 텐지쿠도쿠베에의 일반전인 줄거리를 보자.
일본인들이 겨우겨우 모쿠소호간(김시민 장군)을 잡고 칼로 목을 베려고 할 때 김시민이 죽기직전 처형을 구경하는 주인공인 덴지쿠도쿠베에를 보고 ‘내가 네 아버지고, 넌 사실 조선인이다. 일본에 복수를 하라’고 하고 죽는다. 이를 보고 아버지의 죽음과 출생의 비밀을 알면서 각성한다. 덴지쿠도쿠베에는 그대로 천축(인도)으로 가서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기독교 마법과 도술을 이용해 온갖 요괴들을 불러내고 가장 두려운 존재인 날아다니는 거대한 두꺼비 요괴 지라이야를 타고 일본 전역에서 학살극을 벌이며 아버지의 복수를 한다.
일본은 엄청난 위협과 공포 속에서 어떻게든 저항해보긴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과 기독교 매직과 도술 때문에 무참하게 털릴 뿐이다. 일본군이 산에서 머물다 가려고 하면, 갑자기 커다란 괴물이 솟아나서 일본군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두꺼비 술사는 뱀에 의해 도술이 파괴되어 복수는 미완으로 그치게 된다. 최후의 전투에서 패배한 도쿠베에는 아버지인 모쿠소호간의 원한을 풀어주어 복수를 하지 못한 것을 원통해하며 스스로의 목을 베어 자살하면서 극은 끝나게 된다.
출처 : 정경시사 FOCUS(http://www.yjb0802.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