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1 대 왕(1392∼1398). 성은 이(李),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본관은 전주(全州). 즉위 후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대담하고 궁술에 뛰어났다. 선조들이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에서 원(元)나라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 자춘도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천호(千戶)로 있었다. 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內應)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61년 금오위상장군·동북면상만호(金吾衛上將軍 東北面上萬戶)가 되어 독로강만호(禿禿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홍건적에게 유린된 개경(開京)을 62년 적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그해 원나라 나하추[納哈出]의 침입을 함흥평야에서 격퇴시켰고, 64년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여 원병(元兵) 1만 명으로 평안도에 침입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에서 모두 물리쳤다. 이어 여진족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침입을 격퇴, 동북면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그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68년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77년(우왕 3) 경상도·지리산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쳤고, 80년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基拔都;阿只拔都]가 이끌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격파하였다. 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던 여진인 호바투[胡拔都]를, 84년 함주(咸州;지금의 咸興)에 쳐들어 온 왜구를 소탕하였다. 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고, 명(明)나라 철령위 설치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우군도통사가 되어 정벌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정치적·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 90년 8도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91년 다시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92년 마지막 반대세력인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남은(南誾)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내쫓고, 수창궁(壽昌宮)에서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고려라는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고려의 것을 따랐으나, 93년(태조 2) 3월 15일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바꾸었다. 또한 건국이념으로 사대교린정책·숭유배불정책·농본민생정책 등 3대정책을 내세웠다. 93년 9월 왕사(王師) 무학(無學)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에 새 왕성 건설을 시작, 94년 10월 천도하였고 96년 9월에 4대문(肅靖門·興仁門·崇禮門·敦義門)과 4소문(光熙門·昭德門·彰義門·弘化門)을 갖춘 궁성의 규모를 완성하였다.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경제육전(經濟六典)》 등 각종 법전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뒤 계비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결정하였으나 정비 소생 방원(芳遠)이 불만을 품어 98년 제 1 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의 요청대로 방과(芳果;定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조 2) 방원이 세자로 책립되고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이 상왕으로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태조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증오심으로 함주로 가 지내다가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한양에 돌아왔다. 태조가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問安) 차사(差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함흥차사>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고, 1408년 5월 24일 창덕궁에서 죽었다. 묘호는 태조, 능호은 건원릉(健元陵).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참조:
우왕(禑王)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이다.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하여 낳은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처형된 다음 궁중에 들어가, 1373년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때를 같이 하여 명덕태후(明德太后)의 명으로 궁인(宮人) 한씨(韓氏)의 소생으로 발표하였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으로 10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명덕태후가 죽은 다음 사냥 ·음주가무 ·엽색 등 방탕에 빠져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여기에다 국왕을 믿고 권력을 휘두른 이인임이 최영(崔塋) ·이성계(李成桂) 등으로부터 미움받아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됨에 따라,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었다. 1388년(우왕 14)에 명(明)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고하여 오자, 크게 분개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이 실현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이성계에 의하여 최영이 실각함과 동시에 폐위되어 강화도로 안치되었다. 즉, 1388년 6월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되었다. 그뒤 여흥군(驪興郡: 지금의 驪州)으로 이치(移置) 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우왕 ·창왕은 모두 폐위되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왕으로서의 시호를 받지 못하여 폐왕 우, 폐왕 창으로 기록되었다.
참조:
정도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로서 본관은 봉화(奉化)이며 자는 종지(宗之)이다. 그리고 호는 삼봉(三峰)이며,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2년(공민왕 11) 진사, 이듬해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결국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1394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를 찬진했다. 한편 태조가 세자로 책봉한 강비(康妃) 소생 방석(芳碩)의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그해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 (高麗國史)》를, 6월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임무와 실례를 논하고 방침을 제시한 《경제문감(經濟文鑑)》을 찬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공료(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 표전문(表箋文)을 트집 잡아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했다. 1397년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화(禍)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유(游)가 살해되고, 담(湛)은 집에서 자살했다.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한편, 정도전의 개혁사상은 고려말 국가적인 시련과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양인(良人)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건설과 자주국가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례(周禮)를 기본모델로 하여 성리학 사상을 받아들였다. 고려말 사회의 모순은 인간 상호간 증오심의 격화, 즉 윤리의 타락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윤리의 재건이 필요하며, 윤리를 실현하는 수단이 정치이고, 그 전제조건이 경제의 안정이었다. 그는 상하(上下)·존비(尊卑)·귀천(貴賤)의 명분이 바로 서고, 인간마다 자기의 분을 지키면 사회 질서가 확립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하질서의 확립을 위한 윤리도덕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다. 이를 위한 사상질서로서 성리학만이 유일한 정학(正學)이고 실학(實學)이라는 신념으로 불교가 현실을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종교이며 농장주의 공리(功利)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사상체계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인류를 금수로 몰아넣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도덕윤리의 실현과정으로서 정치는 인간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정치의 주체로 윤리도덕을 체득한 자를 설정했다. 그러한 자격자가 성리학자인 사(士)로서, 진정한 사는 윤리·도덕가일 뿐만 아니라 성리철학자여야 하고 천문·의학·지리·복서(卜筮) 등 기술적인 학문에도 능통해야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고 역사가이며,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는 고정된 세습신분이 아니라 자질이 뛰어난 자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아서 사가 될 수 있으며, 농사를 겸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역설했다. 통치체제로 민의 보호를 위해 지방토호에 의한 자의적인 지배를 배제하고 중앙정부에 의한 전국적 지배를 강화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했으며, 그 중심은 군주였다. 군주는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전국의 토지와 민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재상중심체제를 지향했으며, 통치자의 부정·독재를 막기 위해 감찰권과 언권(言權)의 강화를 중시했다. 통치윤리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형벌은 보조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본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부국강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병농일치를 통한 국방체제의 강화와 중앙군의 증대를 통한 수도치안의 강화를 지향했다.
이러한 체제의 확립은 경제생활의 안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물질적 기초로서 국가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업생산이 진흥되어야 하고, 또한 토지소유관계가 재조정되어야 했다. 고려말 사회적 모순의 가장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극단적인 불평등에 있으므로 먼저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삼대(三代)의 공전제(公田制)에 이상을 둔 철저한 전제개혁을 통한 계민수전(計民授田)에 의한 자작농의 창출과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부세의 공정과 부담 완화를 강조했다. 부세는 1/10세를 기준으로 법정세율 이상의 수취를 배격하고, 균등한 부세수취를 위하여 호적제도의 정비와 군현제도의 정비, 수령의 엄격한 선발 등을 요구했다. 빈민구제를 위한 정책으로서 의창(義倉) 및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제도가 도입되어야 하며, 전쟁이나 흉년을 대비하기 위하여 최소한 3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三峰集)》 《경제육전(經濟六典)》 《경제문감(經濟文鑑)》 《심기리편(心氣理篇)》 《불씨잡변(佛氏雜辨)》 《심문천답(心問天答)》 《진법서(陳法書)》 《금남잡제(錦南雜題)》 등이 있고, 작품에 〈납씨가(納氏歌)〉 〈정동방곡(靖東方曲)〉 〈문덕곡〉 〈신도가(新都歌)〉 등이 있다.
참조:
우연
이글은 정도전의 외가와 출생에 대한 최근 한영우의 잘못된 분석으로 마치 사실처럼 인식되어 일부 몰지각한 학자들이 재인용하여 매우 참담한 지경이다. 그래서 잘못을 바로 잡고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올린 것이다. 편집자 정병철
1. 정도전의 어머니
공리와 원칙에 철저하여 강직한 훌륭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정도전은 자신의 능력으로 벼슬길을 달려나갔지만, 그의 학문과 경세에 대한 이상과 위망이 높아갈 수록 시기와 경계의 수위는 그만큼 높았던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의 신분을 흠집 내어 정치적으로 매몰 시키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외가를 빙자하여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정도전의 출신을 공식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공양왕대부터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공양왕 3년 9월 성헌(省憲)의 관리들은 정도전을 탄핵하면서 "정도전의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밝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그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듬해 4월에도 간관(諫官) 김진양·이확·이래·이감·권홍·유기 등이 연합 상소를 올려 정도전 등을 탄핵하면서 "정도전은 천지(賤地)에서 몸을 일으켜, 높은 벼슬에 올랐다"고 공격하였다. 이때 그들은 정도전뿐만 아니라, 조준·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 이성계 일파를 한꺼번에 공격했는데, 유독 정도전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험구하였다. 그만큼 당시 정도전의 역활과 비중이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여기서 정도전의 가풍(家風)이나 파계(派系)가 천하고 분명하지 않다는 말은 한사람의 인격을 극도로 폄하 하는 것으로 시세말로 상스런 욕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정도전을 결함이 있는 인물로 여론을 몰아 제거하기 위한 속셈이 내포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도 정도전을 살해하여 정권을 잡은 이방원은 정도전과 반대 입장에 있던 고려 구신세력을 거의 포용하였고, 하륜,변계량 등에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한편 이방원은 정도전에 관한 기사는 손수 철저히 검열하여 의식적으로 자신과 고려 구신들이 목적하는바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혹독하게 결함 인물로 만들었다. 먼저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卒記)를 보기로 한다.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요 호는 삼봉이다. ……그의 외조 우연(禹延)의 처 부 김전(金전)은 일찍이 중이 되었다. 김전은 수이(樹伊)라는 종의 아내를 간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이 여자가 도전의 외할머니이다. 현보(禹玄寶)의 자손은 김전과 인척으로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정도전이 처음에 벼슬길에 오를 때 대간에서 고신(告身, 신분증)을 지연시키자,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손이 소문을 퍼뜨려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원한을 품었다. 그러다가 뜻을 이루게 되자 현보 집안을 무함(誣陷)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씨의 죄를 만들어 황거정(黃居正) 등으로 하여금 세 아들을 죽이게 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의 외할아버지는 우연(禹延)이라는 사람이고, 외할머니는 김전(金전)이라는 승려가 자기 종의 아내와 관계를 맺어 낳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단양 출신의 유학자인 우현보의 세 아들이 세상에 퍼뜨리고 정도전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를 때 고신을 선뜻 내주지 않았으므로 정도전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개국 뒤에 우현보의 세 아들에게 보복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현보의 세 아들은 홍수(洪壽)·홍득(洪得)·홍명(洪命)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정도전이 벼슬길에 나아갈 당시에 나이가 어려 직접 정도전의 고신을 취급할 처지가 못될뿐더러 소문을 퍼뜨릴 정도도 지각이 성숙되지도 않았다. 정도전이 1360년 고시관 이교에 의하여 국자감시에 선발되었으며, 1362년 고시관 홍언박과 유숙에 의해 급제 하였다. 이때 우현보의 아들 5형제 중 맏이 홍수가 1355년생으로 5~7세, 둘째 홍부가 홍수와 연년생(1356)이라 하드라도 4~6세, 셋째 홍강이 1357년생으로 3~5세, 넷쩨 홍득이 홍강과 두 살 터울로 보면 1359년생으로 1~3세, 막내 홍명이 1361년생으로 갓난 아이었다.
그리고 현보의 아들 중 가장 먼저 관리가 된 넷째 홍득이 1376년(우왕2) 17세로 홍중선이 지공거로 치른 병진방에서 급제하였다. 물론 홍득은 관리로 진출하여사헌부 집의를 거쳐 전교부령의 직에 있다가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된 후 강원도로 귀양 갔다가, 7월 조선이 개창된 뒤 현지에서 죽었다. 그리고 맏아들 홍수와 셋째 홍강이 1377에 급제하였고, 둘재 홍부가 1382년에 급제하였고, 막내 홍명이 1383년 정몽주의 고시관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이 급제 하여 관로에 진출할 즈음 삼봉은 이미 성균관제주 지제교라는 정4품 관직으로 있다가, 친원파 이인임의 미움을 받아 나주유배 중이거나 해배되어 종편허락으로 유랑생활 중에 있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삼봉이 과거에 급제할 당시에 현보의 아들들은 어린아이거나 갓난아이 이었다. 곧 하륜이 쓴 실록 기사처럼 이들이 삼봉의 치부를 인식하고 소문을 퍼뜨리거나 경멸할 수 없었으며, 또한 고신에 서명할 처지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다. 따라서 삼봉이 처음 벼슬길에 오를 때 우현보의 아들들이 모두 그를 경멸(輕蔑)하였다거나, 또 삼봉이 매번 관직을 옮기고 임명될 때마다 그들이 대성(臺省)의 관리로서 고신(告身)에 서명하지 않아, 삼봉이 관로 진출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또 ‘삼봉이 조선개국 후 이들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하여 무함하고 죄를 만들어 황거정을 시켜 모두 죽였다,’ 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우현보의 아들 중 죽은 사람은 우홍득,우홍명과 손자 우성범등 단 세 사람이다. 홍득은 이른바 박자량 사건에 연루 되었고, 홍명은 尹彛·李初 사건 즉 이성계가 명을 침공한다는 밀고 사건과 김저의 사건(우왕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죽었다. 따라서 이들이 죽은 것은 명분과 이유가 분명하였다. 이로보면 위 기록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대간들에게 소문을 퍼뜨릴 수 있는 나이에 있었다는 것은 허위이다. 다만 공양4년 이색,우현보,정몽주를 필두로한 세력과 정쟁이 치열할 때라면 수긍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때 우현보의 아들이 관리의 고신 취급하는 대간의 직책을 맡고 있던 것이기때문이다. 그런데 《태조실록》원년 8월 임신조에 거듭 정도전의 신분을 한층더 첨가 왜곡 폄하하여 기사화 하였다. 그 기록을 다음에 옮겨본다.
우현보의 족인(族人)에 김전(金전)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었는데, 자기의 종[奴]인 수이의 아내와 몰래 정을 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전의 족인들은 모두 수이의 딸이라고 말하였으나, 김전은 홀로 자기의 딸이라고 주장하면서 은밀히 그 딸을 사랑하였다. 뒤에 김전은 환속하여 수이를 내쫓고 수이의 처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그 딸을 사인(士人)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고, 노비와 전택(田宅)을 모두 주었다. 우연은 딸 하나를 낳아서 공생(貢生)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보냈다. 운경은 벼슬을 하여 관직이 형부상서에까지 올랐으며, 아들 셋을 두었다. 정도전이 바로 그 맏아들이다. 정도전은 처음에 벼슬길에 오를 때 우현보의 아들들이 모두 정도전을 경멸하였고, 정도전의 벼슬이 승진할 때마다 대성(臺省, 사헌부)에서 고신에 서경(署經, 사인)을 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제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생각하고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공양왕이 등극하여 우흥수의 아들 우성범이 왕의 사위가 되자 정도전은 우성범 등이 세를 타고 자신의 근원을 밝힐까 두려워 우현보 집안을 모함하는 일을 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한 《태조실록》의 두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인가. 위의 실록기사는 정도전을 역적으로 몰아 죽인 태종시대에 편찬된 것이므로, 정도전을 헐뜯기 위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세종의 강력한 요구로 무려 7차례의 개수와 수정을 거쳐 문종대에 편찬된 《고려사》 는 대부분 정도전에 관한 기록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한 세종의 뜻에 따라 태조실록의 기사와 같은 내용을 실은 것이다.
한편 정도전 자신은 자기 외가의 신분을 어떻게 썼을까. 정도전이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行狀)에는 "부인 우씨(禹氏)는 ……영주의 사족(士族)인 산원(散員) 영천우씨(榮川禹氏) 우연(禹淵)의 딸이다"라고 하여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산원 우연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기록을 앞의 실록기사와 비교해 보면 정도전의 외할아버지의 한자 이름이 우연(禹淵)으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도전의 출생을 전해주는 기록에는 또 《차문절공유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세조1년 박팽년, 하위지 등이 고려유신 차원부(車原부)의 죽음에 얽힌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그 속에 차원부와 관련 없는 정도전의 족보를 기록한 것이 다. 이 기록에 따르면, 목천우씨(木川禹氏) 우연(禹淵)은 중랑장 차공윤(車公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실록에는 단양우씨 우연(禹延)이 김전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되어 있고, 《차문절공유사》에는 목천우씨 우연(禹淵)이 차씨와 혼인한 것으로 되어 있어 내용이 서로 다르다. 발음이 같아 언뜻 우연이 두 아내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한자의 글자가 다르고 각각 우연의 본관과 생존연대가 같지 않기때문에 실록의 기사가 터무니 없이 조작된 것라는 것이 명백하다. 차원부는 조선개국을 반대한 인물인 까닭에 정도전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고, 따라서 박팽년, 하위지 등은 세종이 아끼던 신하였고, 이들은 선왕의 뜻을 반영 차문절공설원기에 정도전의 출생을 왜곡하여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충청북도 단양지방에는 예로부터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정운경이 젊었을 때 어느 관상가(觀相家)를 만났는데, 관상가는 정운경이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 수 있다고 예언하였다. 이 말을 믿은 정운경은 10년간 금강산에 들어가 수양하고 고향인 봉화로 돌아오던 길에 단양 삼봉에 이르러 어느 초가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정운경은 이곳에서 우씨 여자를 만나 정을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곧 정도전이라는 것이다. 그는 과연 관상가의 예언대로 훗날 재상이 되었다. 정도전의 호가 삼봉(三峯)이라는 것도 단양 삼봉을 가리키는 것이고, 도전(道傳)이라는 이름은 길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단양지방에 내려오는 위 전설은 아마도 정도전에게 보복을 당한 단양우씨(丹陽禹氏) 집안이나 후세인들이 사실을 과장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에는 진실과 거짓이 함께 섞여 있다. 정운경이 금강산을 갔다는 이야기는 사실에 맞는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에 가정 이곡(稼亭 李穀)과 더불어 동방[관동지방]을 여행했다는 기록이 정도전이 쓴 <정운경행장>에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도전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상당 부분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정운경은 홍복도감이라는 중견 관리 직에다 나이 38세에 맏아들 정도전을 얻었다. 이 사실은 10년 뒤에 결혼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는다는 관상가의 예언과 또한 정도전의 어머니가 우씨라는 사실도 기록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는 전설이다. 아버지 정운경이 정도전을 낳을 때는 수행인이 따르는 사회적 신분으로 혼자 이동을 할 수 없고, 그는 공리와 원칙에 입각한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임이 정도전이 쓴 행장과 고려사 양리전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위 전설은 세간의 속물들이나 하는 행위로 밖에 볼 수 없고, 정운경의 대쪽같은 성격과 비교해 볼때 진실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정도전의 이름이나 호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느껴진다. 도전이라는 이름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도(道)를 전한다는 유교적인 뜻이 담긴 것이고, 삼봉(三峯)이라는 호는 정도전이 1370년 현실 정치에 회의을 느껴 그의 옛집 삼각산(三角山)에 낙향 학문에 몰두하고 있을때, 그를 아끼는 친구들이 학문과 경세에 최고봉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자(字) 종지(宗之)는 으뜸이라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삼봉이라는 호와 괘를 같이 하여 학문과 경세에 으뜸이 되겠다는 의지가 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정도전의 출생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것은 한 집안의 내력을 흥미 위주로 캐보려는 뜻이 있어서도 아니요, 정도전의 집안을 흠집내기 위함도 아니다. 조성왕조의 개국을 전후한 시기에 신구 세력간의 갈등 속에서 정도전이라는 한 인물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비중이 높았던가를 이해하기 위함이다. 더욱이 정도전이 조선건국이라는 혁명의 불길을 지폈을때, 구가세력의 반발은 그 주동자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 왕위세습과 관련한 이방원의 불만은 결국 기습 살해라는 최후 수단을 동원한 것과 이후 철저하고도 냉혹하게 매몰하였을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첫댓글 위 내용은 야후검색에서 옮김((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