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홀리조이 님이 {양무리 마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셨습니다.
홀리조이 님 댓글에서 제가 배경색을 칠한 문장에 관심을 두고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OgJY/339
존 머레이의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구절 (영어원문 대조)
holyjoy 2013.09.21. 08:49
존 머레이 {구속: 구속의 성취와 그 적용} 장호준 역, (서울: 복 있는 사람, 2011) 142~143쪽,
4. 부르심의 우선성. 전술한 바와 같이, 거듭남이 부르심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고 해도 신학적으로나 석의적으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구속이 적용되는 순서에서 부르심이 가장 우선한다고 여길 만한 이유가 있다.
The Priority. As was stated already no great issue of theological or exegetical consequence would be at stake if regeneration were regarded as logically prior to calling. But there are reasons of thinking that calling is the first step in the application of redemption.
첫째, 실제적으로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성경은 부르심이라고 한다(참조. 고전 1:9). 물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하는 하나님의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하게 된다. 거듭남은 이 구원하는 은혜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출발점이다.
1. It is calling that is represented in Scripture as that act of God by which we are actually united to Christ(cf. I Cor.1:9). And surely union with Christ is that which unites us to the inwardly operative grace of God. Regeneration is the beginning of inwardly operative saving grace.
둘째, 부르심은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부름 받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의 반응에 따라 부르심을 정의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고 필요한 반응을 보일 수 있도록, 우리 내면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거듭남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출생은 부르심 이후, 우리의 반응 이전에 일어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반응을 이어주는 고리이다.
2. Calling is a soverign act of God alone and we must not define it in terms of the response which is elicited in the heart and mind and will of the person called. When this is taken into account, it is more reasonable to construe regeneration as that which is wrought inwardly by God's grace in order that we may yield to God's call the appropriate and necessary response. In that case new birth would come after the call and prior to the response on our part. It provides the link between the call and the response on the part of the person called.
댓글
holyjoy 09:02
위의 글에서 분명하게 보여지듯이, 머레이 교수는 regeneration을 new birth와 일치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효과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그의 개념과 논리에 의하면 불가피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연중론에서는, 이 처음의 regeneation을 수태 과정으로 보고 new birth와 구분합니다. 남성의 씨가 뿌려지는 순간이 이 수태 과정이라면, 여성이 아기를 응애하고 출산하게 되는 순간을 new birth로 보면서 이 과정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물론 안 걸릴 수도 있지만)고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낳는 것을 to beget이라고 하고, 어머니가 자녀를 낳는 것을 to give birth to라거나 to bear라고 해서 아버지의 낳음과 어머니의 낳음을 구분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구분을 머레이 교수는 하지 않고, 후크마 교수는 하고 있습니다. 연중론을 비판하는 이들이 왜 이런 차이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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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머레이 목사님 → “새로운 출생(new birth)은 부르심 이후, 우리의 반응 이전에 일어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홀리조이 님 → “여성이 아기를 응애하고 출산하게 되는 순간을 new birth”라고 한다.
‘새 창조인 영적 탄생을 자연의 탄생인 수태→임신→출산이라는 육적 탄생으로 비유할 수 없음’을 지난해 여름 {연중론 토론}에서 밝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영적 탄생 순간 중생을 열 달이라는 육적 탄생으로 비유하는 종족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홀리조이 님······.
홀리조이 님이 존 머레이 목사님 {구속}에서 인용하신 위 글에서, 20세기 개혁신학의 거목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는 “새로운 출생은 우리의 반응 이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홀리조이 님 댓글에서 인용한 위 문장을 약간 변형해, 존 머레이 목사님 이 말씀을 홀리조이 님 댓글로 바꾸자면 “새로운 출생은 여성이 아기를 출산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입니다. 물론, “여성이”를 ‘하나님께서’로 바꿔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로 바꿀 때는 “출산하는”은 ‘출산하시는’으로 바꿔야 합니다.
다음 글은 벌코프 {조직신학} 716쪽에 있는 글입니다. 설명하기 쉽게 제가 문단을 나누고 제가 번호 ‘①, ②’를 씁니다. ①번 문장에서 ‘(regeneration)’은 제가 써 넣었습니다. 벌코프 {조직신학} 영어 원본이 저에게 없는 까닭으로 “중생”으로 번역된 단어가 ‘regeneration’인가는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①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regeneration)’이라는 단어를 더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regeneration)’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②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새명의 첫 번째 발현과는 구분해, 단지 영혼 안에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위 벌코프 목사님 글 ①에 비춰, 우리는 존 머레이 목사님 “새로운 출생(new birth)은 부르심 이후 우리의 반응 이전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라는 말씀을 ‘중생과 회심에서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하신 말씀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출산(new birth)하셔야 만이 우리가 반응(회심)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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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생의 정의. 현재 사용되는 중생에 관한 상기 진술로부터 중생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중생을 “새 생명의 원소를 인간에게 심으시고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 Regeneration is that act of God by which the principle of the new life is implanted in man, and the governing disposition of soul is made holy.”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재발생’의 개념뿐 아니라 ‘새 출생’의 개념을 포함하기 위해서 본 정의에 “이러한 새로운 성향의 최초의 거룩한 활동이 확보돼 있다.”라는 문장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 벌코프 {조직신학} 권수경, 이상원 역 (고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년 증쇄판) 718쪽. *
첫댓글 윗글에서 드러나듯이 ‘고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보다는 개혁신학을 다시 공부해야 할 홀리조이 님’이 드디어 {양무리 마을}에 “강퇴나 활동 중지된 분들이 다른 아뒤로 반복해서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운영자 승인을 받은 뒤 카페 가입할 수 있도록 조치합니다.”고 선언한 게시글을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이 게시글 댓글란에 “준회원으로 인정해 주는 것조차도 고마운 줄 모른 채”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이단들이 자신들 거짓 가르침으로 어린 신자들을 미혹하는 놀이터’인 {양무리 마을}, {양무리 마을} 준회원이 무슨 큰 혜택, 은혜라고, ‘연중론 교주’다운 말입니다. ㅠㅠ.
제가 지난 봄 {양무리 마을}에서 ‘봉화’라는 별명으로 활동하게 된 까닭은 홀리조이 님과 ‘예수의 증인’이라는 ‘여호와의 증인’ 때문이었습니다.
{양무리 마을} 회원 분들이 홀리조이 님에게 “예증 님을 강퇴하십시오”라고 수차례 부탁드리셨습니다. 그러함에도 “연구 대상”이라며 예증 님 글들을 방치해 두는 홀리조이 님을 보며 저는 ‘{양무리 마을}이 이단들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구나. 예증 님 글에 미혹당하는 어린 신자들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봉화’로 활동한 며칠 뒤 {양무리 마을} {준회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 있었습니다. <기독 카페 - 이단과 거짓 가르침의 전파 경로>라는 글이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양무리 마을}을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들 놀이터로 방치해 두고 있는 홀리조이 님의 행위와 ‘난독증’으로 존 머레이 목사님을 ‘매도’하기에 바쁜 홀리조이 님 행위, ‘하나님의 명예’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명예’에만 관심이 있는 이 두 행위를 근거로 ‘홀리조이 님에게 회심의 증거가 있는가?’를 고민해 봐야 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3.09.21 16:53
겸손 님, 작년 봄이 아니라 지난 봄, 즉 올해 봄입니다.^^
지난해 여름 {연중론 비평} 때 홀리조이 님이 강퇴하시면 강퇴당한 아이디를 Daum에서 탈퇴하고 다른 아이디로 재가입해 {양무리 마을}에 글을 남기자 ‘타인의 주민등록 도용’이라며 제 ‘도덕성’을 운운한 회원분도 계셨지요.
망증 님과 싸웠던 ‘봉화’가 저로 밝혀지고 ‘봉화’라는 별명을 쓰는 아이디를 강퇴하기 전에 홀리조이 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양무리 마을에서 활동하려면 연중론을 반대한 것 정중하게 사과하고 활동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는. ㅠㅠ. 홀리조이 님 심장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아닌 ‘연중론’인 것입니다.
제가 사과를 거부하자 홀리조이 님은 ‘봉화’를 강퇴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홀리조이 님에게 “이제 저는 손성은 목사님께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접고자 합니다.”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즉, 제가 지난해 여름 {연중론 비평} 때 홀리조이 님 희롱의 말들을 업그레이드해 홀리조이 님에게 되돌려 드릴 때는 홀리조이 님께 대한 존경하는 마음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존경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로 님 지적이 있었음에도, 홀리조이 님을 두고 쓰고 싶은 말을 마음껏 쓰는 것입니다. 물론, 명예훼손 문제에 걸리지 않으려면 사실을 근거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지난해 여름 {연중론 비평} 때 홀리조이 님에게 “홀리조이 님, 저를 막는 방법은 첫째 {양무리 마을}을 폐쇄하는 방법입니다. 둘째 새로 가입하는 회원들에게 ‘당신은 박채동이 아님을 맹세합니까?’ 질문한 뒤 가입승낙을 하는 방법입니다.” 권면 드렸는데, 홀리조이 님이 둘째 방법을 택하셨나 봅니다.
풀핏님....비판하시는 것은 좋은데, 너무 인격모독적인 용어는 자제하면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무리 진리적으로 옳다고 한다하더라도 상대방을 너무 몰아세우면서 비판하는 것은 그 본질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순중론을 지지한다고 해도, 풀핏님처럼은 모두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대표자격으로 그렇게 하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게요.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홀리조이 님은 제가 지난해 여름 {연중론 비평} 때 ‘홀리조이 님, 연중론이라는 바벨탑 꼭대기에서 내려오십시오.’라는 원폭 같은 말을 투하했어도 끄덕도 않은 분이시고, 저에게서 연중론은 ‘교회를 축내려고 가만히 기어들어온 쥐새끼와 같은 신학’이어서 연중론자들이 연중론을 포기할 때까지 ‘사실을 근거로 하는 용어’ 사용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실을 근거로 하는 용어 사용이 아니면, 그야말로 인신공격, 명예훼손이겠지요. 더군다나 저는 지난해 여름 {연중론 토론} 때부터 똥물을 뒤집어쓰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만, 이런 권면은 {양무리 마을} 빗장을 걸어 잠그신 홀리조이 님, 하나로 님이 존경하시는 홀리조이 님에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양무리 마을} 빗장을 걸어 잠그며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분에 대해서 불가피한 조치인 것을 아시고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신 홀리조이 님······.
“끊임없이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이단, ‘끊임없는 같은 이야기로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는 이단’에게는 ‘관대’한 홀리조이 님에게 권면하시는 김에 “홀리조이 님을 모독(?)하는 풀핏 님 글만 삭제하지 마시고, 풀핏 님만 강퇴하지 마시고, 예수님은 피조물이다며 예수님을 모독하는 망증 님 글들도 삭제하시고 망증 님도 강퇴하십시오. {양무리 마을}에 쥐새끼 같이 기어들어와 어린 신자들을 미혹하는 이단들도 강퇴해 주십시오.”라고 권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은 저런 영성과 난독증을 가진 분을 교수로 삼아 신학생들에게 {경건과 영성} 과목을 가르치게 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해 여름부터 “후크마는 연중론자다.” 앵무새와 같이 외치시는 홀리조이 님에게서 이른바 “문법”은 ‘연중론의 오류’나 ‘홀리조이 님의 오류’를 밝히는 제 글들을 삭제하고 저를 강퇴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