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삼덩굴
생텍쥐페리가 지은 <어린왕자>에는 바오밥나무가 등장한다. 이 나무는 막 돋아나는 어린 순이 연약하지만 점차 자라면서 그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사람의 손으로는 제거할 수가 없게 된다. ‘어린 왕자’가 살던 별은 너무나 작아서 바오밥나무를 어린 순일 때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뿌리가 그 별 전체를 휘감아서 망가뜨리는 무서운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옷을 입는 습관처럼 어린 바오밥나무를 찾아서 뽑아주는 것이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지키는 길임을 말하고 있다.
환삼덩굴이란 풀이 있다. 한삼덩굴이라고도 하며 한약재로는 율초(葎草)로도 불리는 이 잡초는 우리나라 전역, 주로 하천, 밭, 길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많이 자생한다. 쉽게 말해 지천으로 늘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풀은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다른 식물을 자신의 줄기와 잎으로 덮쳐 눌러 그 식물을 고사(枯死) 단계까지 이르게 하는 생태교란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풀은 줄기와 잎에 잔가시가 나 있는데. 이 가시가 보통 억센 것이 아니어서 ‘깔깔이풀’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이 가시에 살갗이 긁히면 붉은 줄의 생채기가 나서 핏방울이 맺힌다. 또 긁힌 부위는 가렵고도 따가운 통증이 한참 동안 지속된다. 이 가시와 관련된 아픈 과거사가 나에게 있어 여기 소개한다.
내 처가는 전북 남원의 운봉이다. 지리산 자락의 산 좋고 물 맑은 곳이다. 그곳은 민물고기 중 중피리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뭐 중(스님)과 관련된 슬픈 전설이 있어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연유로 시냇가에 나가면 큼직한 중피리들이 떼를 지어 물속을 누비고 있었다. 나는 처가에 갈 때면 으레 물고기를 잡을 반도와 매운탕의 맛을 더할 제피가루를 준비해 갔다. 그리고 운봉 개천의 중피리는 모두 내 것인 양 천렵하기에 바빴다. 한번은 반바지 차림으로 환삼넝쿨이 뒤덮인 곳에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나중에 보니 종아리에 가시에 긁힌 선명한 자국이 그물망처럼 그어져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스님의 슬픈 사연을 무시하고 금기를 깬 댓가(?)로 밤새 따가운 통증에 끙긍거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내가 경작하는 밭뙈기에도 환삼덩굴은 어김없이 있다. 텃밭에 다양한 채소를 심어 놓지만, 7월쯤 되면 예의 이 덩굴에 의해 뒤덮이게 된다. 처음에는 이 덩굴을 제거하려 노력도 했지만 으레 포기하고 말았다. 다 자란 넝쿨은 기세가 왕성하여 잘 벗겨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벗겨지는 서슬에 그 잔가시에 채소도 찢겨져 농작물을 망치게 되기 일쑤였다. 또 직장이 있는 처지로 일주일에 서너 시간의 노력으로는 이 덩굴의 제거가 어림 턱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나는 정년퇴직을 했고 텃밭에 할애할 시간도 많이 늘어났다. 따라서 환삼덩굴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달라졌다. 이놈을 어린싹일 때 뽑아내야 한다. 이놈의 기세를 살려주면 나중에 뒷감당이 안 된다. 초전박살이다. 어린 왕자가 바오밥나무의 어린 순을 보는 즉시 제거하였듯이 아예 후환을 없애야 한다. 이놈의 처음 여리게 올라오는 싹은 참으로 앙증맞고 귀엽다. 시금치 싹 같기도 하고 코스모스 싹 같기도 하다. 싹을 들어 올리면 쑥 뽑혀 올라온다. 어린순을 뽑아내기가 잠시 망설여진다. 그러나 이런 약한 마음은 금물이다. 뒷일을 생각해야 한다. 이놈이 나중에 그 무지막지하고 민폐 덩어리의 가시덩굴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나는 올해 들어 환삼덩굴의 새순을 볼 때마다 보이는 족족 뽑아내기로 결심했다. 십여 년 이 덩굴이 지배했던 텃밭에는 보이는 것이 모두 그놈의 싹인 듯했다. 호미를 가지러 가다가도, 물을 마시다가도, 채소 모종을 심다가도, 밭이랑을 만들다가도 이놈의 새순이 보이면 바로 허리를 굽혀 뽑아내었다. 모든 밭일에 우선하는 것이 바로 이놈의 싹을 없애는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처음에는 밭일의 진척이 더뎌진 면도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잘못된 게 있으면 그 단초부터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 생각에는 늘 변함이 없다.
이제 유월의 초순이다. 나는 고추, 가지, 당근, 감자, 양파 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텃밭을 뒷짐을 지고 유유히 걷는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매의 눈이 되어 아직도 환삼덩굴을 찾고 있다. 이젠 웬만큼 뽑은 모양, 그 덩굴의 모습은 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 간혹 이놈의 덩굴이 보이기라도 할라치면 만사 제쳐두고 그쪽으로 가서 그놈의 목덜미를 잡고 냉큼 뽑아 올린다. 이제 제법 자라 1미터도 족히 되는 것=도 있지만, 이놈들도 나의 의중을 간파하고 맥을 못 추고 잡초 속에 몸을 숨기고 사는 듯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의 나쁜 습관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쁜 습관인 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결국에는 저 ‘바오밥나무’처럼 ‘환삼덩굴’처럼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마는 것은 아닐는지…….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우리네 속담이 그냥 허투루 생긴 말은 아닌 것이다. 부모가 보았을 때 자식의 언행도 눈에 거슬릴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자식을 불러서 훈계하려다가도 아직은 어려서, 생일이라서, 시험 기간이라서, 고3이라서 등등 온갖 상황을 고려하다가 정작 그 시기를 놓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는 없었는가? 어디 자식뿐이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교사로서 학생과의 관계에서도 모두 적용되는 진리인 것은 아닐까? (2023. 6.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