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짧은 교육을 마치고 내려오던 기차안, 나는 전날
새벽까지 노가리를 까고 노느라 밤을 꼴딱 세웠던 관계로 기차를
타자마자 기절해 버렸다. 이상한 것은 대전에서 부산까지라
해봐야 채 3시간이 안되는 거리인데 한참을 자고 일어 났는데도
아직 기차안이더라는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경부선 기차가
난데없이 '안동역'을 들러 가더라는 것이다. 내가 기차를 잘 못
탔나, 기차가 납치됐나, 인질극이 벌어지나, 별 생각을 다하고
있다가 그냥 또 잠이 들었다. 다시 잠을 깼는데 기차를 탄지
무려 5시간이 지나 있는 것이다. 기차 안 분위기도 이상하고
하길래 옆에 앉은 아가씨한테 슬쩍 물어 봤다. 아가씨 왈, "우리
앞에 가던 기차가 청도역에서 탈선됬데요, 그래서 빙 둘러가는
거라고 하던데요" 라고 한다. 부산역에 도착하니 기차 탈선 소식과
그 후 도착기차가 줄줄이 연착 되면서 놀란 가족들이 대합실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어떤 아줌마는 무사히 나오는 아들을
붙잡고 "아이고 이 새끼야, 니 별 일 없나, 엄마 뉴스 보고 놀래서
뛰 나왔다" 라며 펑펑 우는 것이다. 부산역 대합실은 사고소식에
놀란 가족들로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 와중에서도 잠이 덜 깬 나는
뻘쭘하게 하품만 하며 인파를 뚫고 나왔다.
사람들이 꽤 불안했었나 보다. 바로 앞 차가 탈선되어 까딱하면
우리 기차가 뒤에서 추돌하여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 사지에서도 세상모르고 잠만 자고 하품만 하던 나는 뭘까,
생각하니 괜히 더 뻘쭘해져서 지하철을 타고오며 머리를 뻑뻑
긁었다. 집에와서 인터넷에 들어가니 네이버 초기화면에 그
사고소식이 뜬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한다. 와, 꽤
큰 사고였나 보네, 싶어서 또 머리를 뻑뻑 긁는다.
........
사지에서 돌아온 이 날, 뭐라도 기념해야 겠다, 싶어 집에서
저녁을 먹고 그냥 밍숭맹숭하게 잠들기도 뭣해서 그토록 기다리던
<살인의 추억>을 밤 12시에 털래털래 보러갔다. 황홀한 영화였다.
충무로는 단 두편의 장편 영화만으로 진짜 스타일리스트의 대열에
또 한 명의 이름을 등재시켰다. 그의 이름, 봉준호. 나는 박찬욱과
함께 이 새로운 감독의 미래를 무조건 지지하겠다. <살인의 추억>에
대한 단 한마디의 감상문. "그냥 보러 가세요". 나는 이 말보다 더
확실한 영화평은 잘 모르겠다.
.....
최근 5년안의 한국영화중에 반드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는
영화는 <플란다스의 개>,<친구>,<챔피언>,<봄날은 간다>,라고
굳게 믿는다. 특히나 봉준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하게 묻혀버린 우리 시대의 걸작이다. 위대한 감독은
평범한 배우의 정수를 발견해주는 법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배두나를 보라. 누군들 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 김상경 또한 그들 연기의 엑기스만
뽑아서 전시해주었다. 송강호의 저 명절날 종합선물셋트같은
명연기를 보라. 이 배우의 영화를 실시간으로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우리 시대의 축복이다.
.......
(경고 : 아래부터 스포일러 있음)
127분의 러닝타임 내내 이 매력적인 농촌스릴러에 푹 빠진후,
집에 걸어오다가 문득 제목을 생각해봤다. 이 영화의 제목은
'살인의 추억'이다. 즉, (후세의 사람들이) 살인을 추억, 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추억인 것이다. 즉, 살인'이' 추억한다는
것이다. 살인이,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을, 사건이 어떤 사건을
추억한다는 것,이다. ('추억'이라는 말이 풍기는 스산함은 또
어떠한가) 송강호와 김상경은 물론 위대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정작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 '80년대 농촌'이라는 장소 그
자체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농촌을
낭만적인 사람의 공간으로 동경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
평화로운 갈대밭과 대나무숲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인간들의
짐승같은 욕망과 살인에의 충동과 딸딸이의 유혹과 비루한
불신들이 숨어 있단 말인가.
듣자하니 봉준호가 그랬다고 한다. "끝내 잡히지 않은 그 범인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겠죠"라고 말이다. 라스트씬,
범인에게 자조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송강호,"너 어디있니,
밥은 챙겨 먹고 다니니?" 라는 대사는 가히 올해 충무로의 한 마디,
라 할 수 있다. 엔딩 씬, 클로즈업된 송강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영화가 끝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 한가지 더, 이 영화에서 싸운드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영화를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스크린의 크기때문이 아니다.
홈시어터의 주요 구성품이 앰프와 스피커라는 사실은, DVD의
화질만큼이나 그 싸운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작년 4월에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아직까지도 약빨이 남아
있는데 올 4월에 <살인의 추억>이라는 걸작을 보게 되니 한 1년은
더 버틸 수 있겠다. 재미있는게 <복수는 나의 것>도 오프닝 씬이
라디오에서 청취자의 엽서를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 엽서가
제일 중요한 단서가 되는데 <살인의 추억> 또한 라디오 방송에
보낸 엽서가 후반부 전개의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박찬욱,
봉준호, 참 다르면서도 비슷한데가 많다. 내 생각에 의하면,
박찬욱이 정말로 사람 말려 죽일듯 스크린에서 감정을 모조리
빼내버리며 초 건조한 분위기를 연출해낸다면 봉준호는 어떤
종류의 긴장의 동선을 끊임없이 유지해나가는 사람이다. 나는
이 둘의 언어가, 이 둘의 감수성이,이 둘의 취향이, 정말로
사랑스럽다.
......
아, 영화 시작전에 마침내(!) 매트릭스 리로디드,의 예고편을
보여주더라. 한 3분정도만 봤는데 아마도, 그 위력적인 화면과
엄청난 스케일과 사람 미치게 만드는 초-스피디함이 영화의
신세기를 열어버린, 시각예술의 한계를 한단계 더 밀어버린,
역사적인 작품이 나오는 구나, 싶더라. 예고편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다니. 아아,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
눈으로 글 구경만 하는 회원입니다. 좀전에 후샤오시엔 영화제 보러
갔다왔지요. 영화 혼자 보는거 좋아하지만 가끔은 씨네마떼끄에도
한 2~3명씩 무리지어 놀러가는 것도 즐겁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음에
같이 후샤오시엔 영화제 보러 갔으면 좋겠네요. 가끔 살아가는 얘기들
올려도 되겠지요? 씨네마떼끄에 혼자 영화 보러 오는 분들의 뒷모습을
보면 괜히 가슴이 설레입니다. 이상한 연민, 어설픈 동지애, 등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_^ 다음에 영화 보실때 저도 좀 끼어도 되지요? 헤헤.
첫댓글 아~ 대전... 저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가고싶네요. 대전역 지나서 철길을 따라가면 울 학교 보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