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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지식이나 소질을 달란트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천연자원입니다. 천연자원을 달란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죠. 마태복음25장의 달란트는 우리 신랑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한 편이 되었을
때에 그분이 나의 달란트가 되십니다. 이게 진정한 달란트입니다. 천연적인 것은
사람들에게는 유익할지 몰라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 전자
장비나 악기들이 들어오면서 기술자들이 우대를 받다가 그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전문지식이나 기술이나 문화콘텐츠가 두각을 나타내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뒷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려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홍역을 통해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만 의뢰하려 하심이라’(고후1:9)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든지 신앙의 홍역이 옵니다. 이 홍역이 젊어서 오면 복입니다.
그러나 늙어서 오면 그 사람의 말은 이치에 딱딱 맞지만 평생 믿은 걸 포기하는 게
아까워서 포기를 못해요. 참 어려워요 이런 사람들은 욥처럼 길게 끌려갑니다.
제게는 이 홍역이 빨리 왔습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철학적 고민이 빨리 왔습니다.
홍역이 빨리 오므로 ‘나는 없어요 제 존재는 주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저는 아무것도 없는 자입니다’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교지에서 I am nothing, I have nothing 하면 그들이 의아하게 봅니다.
나는 주님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배수의 진인데 그들은 소유를 보는 거지요.
해 아래에선 새것이 없는 겁니다. 있는 것이 반복해서 돌고 돕니다.
옛날에 있었던 것이 계속 돌아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영원을 향하여 계속 직진합니다. 계속해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집니다.
그분이 주신 것만이 내게 영원합니다. 그분이 주신 것만이 나의 달란트입니다.
그것만 사용하므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남은 바램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나를 아낄 필요도 없고,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남이 가져가서
안 될 것도 하나도 없는 겁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 어차피 신앙의
홍역은 한번 오는 것은 필연인데 예방 주사를 먼저 맞아야 해요. 예방 주사를
맞아서 홍역을 짧게 앓고 끝내야 됩니다. 욥처럼 홍역을 앓으려면 욕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가려움을 긁어야 하고, 아내도 하나님을 욕하고 욥더러
죽어버려라 욕하고 가출해 버리는 그런 홍역은 절대 안 됩니다.
홍역이 딴 게 아닙니다. 내가 주의 영광을 바라고 십자가 그 너머에 주님이
주신 복을 내가 받고는 이전의 나는 지나갔으니 이전에 좋던 것 다 필요 없다.
세상이 주는 것 다 소용이 없다. 내가 오직 주님 주신 복만 주님이 주신
생명의 능력만 사모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좇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은 분리 곧 세례가 분명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의 청산 곧 자기 부인이 안 된 탓입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쉽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힘이 듭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들은 내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야곱처럼 말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는 세상에서도 할 만큼 했고 신학교에 가서도
세상 즐거움과 자랑 다 버렸기 때문에 참 괜찮은 사람인줄 여겼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건방진 것 네가 버렸나 내가 버리게 했지’ 이렇게 나오십니다.
그래서 나중에 주님 알겠습니다. 다시는 제가 버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버리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이 나를 버리므로 나도 귀찮아서 버렸음에도
그것이 좋고 내게 달콤한 맛을 주지만 내가 그걸 다 버리고 주님께 왔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합니다. 천하장사입니다. 훌륭합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셨는지는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다 그 놈들이 속 썩이고
나를 귀찮게 하고 골탕 먹이고 괴롭혀서 에이 갈라면 가라 나는 주님께
가겠다고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음탕한 고멜과 같은 저라는 겁니다.
욥기서 뒤에 시편이 나오는데 욥기서의 홍역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시편이 옵니다.
왜냐하면 욥기서는 바른 말 이치에 합당한 말은 있어도 찬양이 없어요. 율법적인
신앙 곧 자기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신앙은 어디가나 늘 바른 말만 합니다.
사람들은 바른 말 할 때는 아주 용감합니다. 확실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든
안 맞든 아주 세게 나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는 명분주의자들이 많습니다.
근본주의가 많습니다. 자신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없다는 둘째 문제고 여하튼
잘못된 사람에게 큰 소리부터 치는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회에 가보세요.
과거 노회에서 노회비도 안 내는 한 목사가 얼마나 말이 많은지 어이 O목사
개구리는 말이야 황소처럼 크게 소리를 내도 쟁기도 끌지 못하고 그 가죽으로
구두도 만들지 못하는 거야 이제 작작해요. 하고 핀잔을 준 적이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음악은 좋아해도 찬양이 없다는 겁니다.
찬송이 없습니다. 주님의 성호를 찬양하는 것이 없습니다.
욥처럼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기에는 찬양이 없습니다. 이치에 합당한 말로 서로 아옹다옹할 뿐
어느 누구도 찬양을 안 합니다. 욥도 당연히 찬양을 안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찬양의 은사가 없어 하면서도 남에게 찬양을 하라고 잘도 가르칩니다.
혀 짧은 서당선생이 나는 바담풍 하더라도 너희들은 바담풍하라고 가르치듯...
찬양을 한다는 말은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께 배운 것이 있다는 겁니다.
간증이 있다 이 말입니다. 신앙고백이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6장은 율법에 대해 good-bye인사입니다. 옛 육체가
그대로 있으면 율법이란 이 무시무시한 감독자가 와서 늘 집적거립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옛사람을 그냥 두면 율법이
계속 집적거려서 양심에 가책이 계속 옵니다. 수고와 무거운 짐이 벗어지질 않아요.
만약 율법과 완전히 이별하지 아니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율법이
그 값을 계속 받으러 옵니다(롬6:23) 사망의 값을 계속 받으러 옵니다.
아침마다 청구하고 저녁마다 청구합니다. 그래서 사망의 종이 됩니다.
옛사람이 그대로면 계속해서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행위를 가다듬고 어찌하든지 내가 바른 생활을 해야지 하며
수고에 수고를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브레이크와 엑셀레이트를 번갈아 밟습니다.
도무지 복으로 살 수가 없어요. 겹겹이 덧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옥합을
철저히 꾸밀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겉 사람을 치장하고선 누군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약점을 지적하면 속에서 부르르하고 올라오고 맙니다.
급발진이죠. 그게 율법과 이별하지 못한 어린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 장사 지낸바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십니다' 시인합니다.
로마서적인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신 일을 그 말씀을
통하여 자세히 들어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다’하시면 예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살았다’ 예 알았습니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예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돼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알았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가 없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언젠가는 몸의 구속을 이룰거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알았냐?’하면 예 알겠습니다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적인 믿음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믿어 순종케 하려함이라(롬1:5)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어놓은 일을 듣고 믿어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옳다 하시고 성령으로 인을 치시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 눈이 환해집니다. 난 거듭났다는 환희와 감격이 솟아납니다.
‘찬송을 부르며 큰 소리 외쳐 아멘 아멘 영광 속에서 기뻐 뛰놀며 난 거듭났네’
우리가 거듭났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거듭났다는 말은 그 지긋지긋한
사망과 어둠의 그 옛사람이 완전히 청산이 된 내가 되었다, 내가 아담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마귀에게서
하나님에게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믿고 아는 겁니다. 다만 지금 남은 것은 아담의
타락한 형상으로 말미암아 나의 악성과 악습이 남아 있습니다.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존재는 이미 생명과 소망과 빛 안에서 어둠과 사망의 38선을 넘어와 버렸다는 겁니다.
그걸 그대로 믿음으로 따라오는 건데 그 믿음으로 따라 올 때 반드시 자기를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되는 겁니다.
그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가 실재가 됩니다.
성령 안에서 그 피난처와 방패 안에, 반석 안에 우리 자신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홍역을 치러야 되는 겁니다. 드디어 로마서 8장 안에 있는
그 감격, 그 자유가 옵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확정이 오고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는 확정이 오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아무도 나를 끊을 수 없는 확정이 와요. 그래서 로마서 8장은 바로
창세기의 길잡이입니다. 로마서 8장은 시편적인 노래입니다. 바로 찬양입니다.
반드시 그 복이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실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신약은
영적인 개념 곧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그래서
일단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보라는 말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영적인 존재에
대한 확신이 서서히 자신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가 왜 중요하냐
히브리서를 가만히 듣고 그 진행방향에 내 존재를 얹어 따라가다 보면 내가 안식의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새 언약 안에 들어가 버립니다. 내가 주님 앞에
드려지는 십일조가 되어 갑니다. 이게 바로 먼저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행한다는 겁니다.
근데 많은 사람들 중에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로마서 1.2.3장을 들어보고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 우리는 희망이 없는 존재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율법 외에 다른 한 “의”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피 안에서 구속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으로 난 의, 차별이 없는 의뿐이구나 복창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이 뭔가 그 믿음의 결과가 뭐냐 아담 안에 있던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사망 안에 있던 나를 생명으로, 죄 안에 있던 나를 의안으로 주께서 뽑아 내셨구나
그래서 내가 그 사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됐어' 하시는구나
이게 바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자 되었느니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걸 믿기만 했는데 성령께서 '맞아 너 제대로 된 거야' 이렇게 인정해 주십니다.
이렇게 시인하고 고백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욥처럼 자기 의가
있어서 기어코 자신이 해보겠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기가 가진 열쇠를
있는 대로 다 사용해 봐야 입이 막힙니다. 그래서 자기 처리기간이 길어집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