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대사의 마지막 제자, 언기(彦機) 스님
언기(彦機) 스님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마지막 제자로서
대사가 입적할 당시 24세에 불과했으나 총명하고 수행력이 깊어
선지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스님의 속성은 장씨(張氏), 법호는 편양(鞭羊), 법명은 언기(彦機)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장박(張珀)이고, 어머니는 이(李)씨였으며,
선조 14년(1581)에 경기 안성 죽주현(竹州縣, 竹山)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12세 나이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현빈(玄賓) 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
출가하던 해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왜구가 강산을 짓밟던 8년 동안은
은사의 슬하에서 삼장(三藏)을 이수하며 티 없이 자랐다.
왜란이 가라앉자,
사교입선(捨敎入禪)해서, 제방으로 다니면서 여러 선지식을 찾았다.
선사는 19세 때 칠통(漆桶)을 타파하고 보임(保任)하면서
평안도 어느 목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편양당(鞭羊堂)이라는 법호를 갖게 됐다.
※칠통(漆桶)---옻을 담은 통, 검은 옻이 가득 담긴 통.
좌선을 하다가 칠통에 빠진 것은 혼침이요,
참선에서 혼침에 빠진 무리를 칠통배(漆桶輩)라 한다.
22세에 묘향산의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에게
입실하고 3년을 시봉하면서, 이때 스승의 진수를 체달해
사법제자(嗣法弟子)가 돼, 서산대사의 법을 이었다.
사명 대사(泗溟大師, 1544~1610)와 같은 뻬어난 제자들이
면전에 즐비했었는데, 하필 막내인 언기 스님에게 법을 전수한 것에 대해
후일 이런 저런 말이 전하고 있다.
아래는 이에 관한 어떤 스님의 물음에 대한 서암(西庵) 스님의 답변이다.
(문)
사명 대사(泗溟大師)는 서산 대사 휴정(西山大師休靜)의
뛰어난 제자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명 대사께서 임진왜란 때 왜군의 격퇴를 위해
칼을 들었기 때문에 서산 대사께서 법을
편양 언기(鞭羊彦機) 스님한테 주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우리에게 미운 마음이 없어도
어떤 다툼이 있었을 경우 법을 전수받는데 하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물음에 대해 제8대 조계종 종정 등을 역임하신
서암(西庵, 1917∼2003) 선사께서 하신 답을 들어보자.
수행의 지침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답)
『한마디로 사명 스님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워서
법을 전수받지 못했으니 억울한 것 아닌가 하는 그런 말인가요?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된 물음입니다.
왜냐? 참마음의 행복은 무사무려(無思無慮)인데,
법을 전수받으면 뭐 하고 주면 또 뭐 할 건가요?
그런 말은 다 중생심에서 나온 소리입니다.
‘법을 전수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보통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럴 듯하고 옳은 소리처럼 들려요.
그러나 정신이 바로 든 사람이 들으면 그건 꿈같은 소리지요.
그리고 설령 서산 스님이 제자인 사명 스님에게 법을 전해줬다 해도
그게 또 사명 스님에게 좋을 건 뭐 있겠어요?
나는 내 부처이고 너는 네 부처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쳤잖아요? 법을 전수하는 전통이니 하는 것은
다 가치 없는 수작입니다. 법제자로 인정받으면 뭐가 좋겠어요?
서산 스님의 법제자로 인정받았다고 해서 그게 사명 스님의
인생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요? 자기가 한 그대로 공헌이 있는 것이지,
누가 인정해 준다고 더 나아질 게 뭐가 있겠으며,
사명 스님이 언기 스님보다 못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명 스님은 인정을 안 받아 가면서 많은 생명을 건지고
이 나라의 권위를 보호했으니 그야말로 다른 사람보다
몇 배 낫다고 말해도 누가 뭐라 말하겠어요?
전통적인 법의 전수도 마다하고 모든 허물을 다 덮어쓰고
민생을 구하기 위해 칼을 들었다면 그 보다
더 훌륭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옳다는 그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우스운 소리입니다.
불교에는 그런 게 없어요.
본래 다 부처인데 누구한테 인정받고 누구한테 법을 넘긴다는
그런 못난 소리가 어디 있어요? 그
건 중생이 책에 쓴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책에 도를 인정받았다고 적혀 있다고 해서 뭐가 좋을 게 있나요?
부처가 인정해도 그것은 네 부처라는 소리입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쳤어요. 자기 안에 있는 부처를 깨치라고.
참으로 그건 어린애 같은 소리입니다.
중생들이 워낙 어리석으니까 방편으로 그렇게 써놓은 것이지요.
모든 사람이 다 부처입니다. 부처가 와도 부처는 네 부처입니다.
거기(찾아온 부처)에 의지하는 게 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불교는 자기 안에 있는 본래 부처를 찾으라 했습니다.
어디에도 의지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래 ‘장부가 스스로 하늘을 뚫을 기운이 있으니
여래가 간 곳을 따르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을 의지하는 것도 병든 소리라는 말입니다.
불교는 다만 법을 의지할 뿐이지,
그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서산 대사의 법통을 잇게 된 편양 선사는
그의 법을 풍담 의심(楓潭義諶)에게 전수했으며,
풍담은 다시 월담 설제(月潭雪霽)에게로,
월담은 환성 지안(喚惺志安)에게 전해 편양 선사가 입적한 지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한국 승려 중 95% 이상이
모두 편양 문손에 속하게 됐다.
편양 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 81인 가운데 가장 막내였다.
한 산중을 거느리는 조실(祖室) 자리에 앉은 도인들이 즐비했으니
이 중에서도 사명(四溟), 소요(逍遙), 정관(靜觀), 편양(鞭羊)의
4대 문중을 이른바 ‘서산 문하의 4대 문파’라고 했다.
청허 휴정(淸虛休靜)은 조선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뛰어난 고승이자
임진왜란 때 구국에 앞장 선 승군장(僧軍將)으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청허 휴정은 조선후기 불교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했으며,
그의 제자인 사명 유정(四溟惟政), 편양 언기(鞭羊彦機),
소요 태능(逍遙太能), 정관 일선(靜觀一禪) 등이 배출한
수많은 문도들은 조선후기 불교계를 이끌어 나갔다.
이런 이유로 청허 휴정은 각 문도의 근간이 되는 가장 존경받는 스님으로 숭배됐고,
여러 사찰에서 앞 다퉈 그의 진영을 봉안했다.
이 중 양평 용문사에 모셔진 청허 스님의 진영은 불교 사상가이자 승병장이었던
그의 인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용문사 청허 휴정의 진영은 조선후기 진영 중 드물게
정면으로 선사의 모습을 표현했다.
제작연대와 화승은 기록돼있지 않지만 선사의 얼굴,
장삼과 가사 표현, 채색과 음영처리 등으로 미루어 보아
운암 보화(雲巖輔華) 스님 진영과 같은 시기(1829)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용문사의 기일록(忌日錄)에는 창건주인 두운 선사에 이어
두 번째로 청허 휴정이 올라 있을 정도로 용문사에서 그의 위상은 높다.
어떻든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청허 휴정 대사의 제자들인
사명, 소요, 정관 등 3대 문파는 그 대가 끊긴 지 오래이나
현재는 오직 편양 문손만이 크게 성해서 우리나라
전체 승려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편양 선사의 어느 면이 그토록 장하기에 선사의 문하만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선사가 3년간의 양치기 생활과
평양성 내에서의 보살행의 공덕이 아닌가 한다.
양치기 생활은 어떤 보수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보림하는 가운데 양떼들을 돌 본 것이었다.
선사는 양떼들을 자신보다 낮은 축생으로 다룬 것이 아니고
인간과 구별함이 없이 마치 적자(赤子:어린아이)와 같이 여겨
그들의 보호자가 되고 선도자가 되어준 것이었다.
또 평양성에서의 보살행이란 선사가 보림하면서
평양성 내의 모란봉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성 내에 사는 걸인들 삼백 여명을 한 곳에 모아 그들을 보살펴 주었다.
선사 자신이 문전걸식하는 형편인데도 수백 명의 걸인들을
친 권속같이 보살펴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사로서는 걸인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일이
수행의 한 방편인 두타행일 수밖에 없었지만,
선사는 눈이 오나 비가 내리나 가리지 않고 근 10년을 헌신했다.
임진왜란으로 집과 부모를 잃은 삼백 여명의 거지 떼를 보살피는
거지 왕초가 됐으며, 때로는 걸식하고 때로는
숯장수와 물장수를 했기 때문에 평양 인근 사람들은
그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뭣고’ 화두를 놓치지 않고 되뇌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이를 ‘이 먹고’로 알아들어서
‘이 먹고 노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작복행(作福行)을 실천궁행한 공덕으로
오늘날 전체 승려의 조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산대사 문하에는
81인의 오도제자(悟道弟子)가 있었고,
이 중에서 한 산중의 조실이 된 분만도 50여 명이나 됐다.
그 분들 모두가 편양 선사보다 법랍이 높은 선배들이었지만
그들의 후복(後福)이 편양 선사보다 못한 것은
편양 선사만큼 큰 복을 못 지었기 때문이리라.
평양성에서의 이타행을 끝내고 묘향산으로 돌아와서
선사는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백성유방필(百城遊方畢) ― 많은 성에서 노닐기를 마친 뒤
향악반운한(香岳伴雲閑) ― 묘향산에서 구름과 벗해 한가롭구나.
독좌향심야(獨坐向深夜) ― 홀로 앉아 밤은 깊어 가는데
전봉월색한(前峰月色寒) ― 앞 봉우리 달빛은 마냥 차갑구나.
선사는 귀산 후 묘향산의 천수암과 금강산의 천덕사 등에서
후학을 위해 개당 강법하며 널리 교를 선양했다.
선사는 선을 닦아 깨친 도인이면서 전등(傳燈), 화엄(華嚴) 등
삼장을 강설했으므로 선자(禪者)에게는 본분종사(本分宗師)이고,
교학자에게는 대강백(大講伯)이었다.
이렇듯 선과 교를 쌍수(雙修)하고 함께 밝힌 것은
당시의 불교가 선교양종인 탓도 있겠지만
서산대사의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편양 선사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선에 주안점을 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서산대사 문하 편양파(鞭羊派)의 개조이고, 선교일치를 내건
서산대사의 사상을 그대로 이으면서 승속과 선교(禪敎)를
모두 아우르는 편양당의 가르침은 수많은 제자들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금강산 천덕사(天德寺), 구룡산 대승암(大乘庵),
묘향산 천수암(天授庵) 등에 머물며 교법을 강설하고
널리 선교(禪敎)를 펼쳤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저서 <심검설(尋劍說)>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경절문ㆍ원돈문ㆍ염불문으로 나눈 뒤
경절문을 최상의 법문으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불교의 선 수행에서도
이 경절문 법문이 중요시되고 있다.
경절문(徑截門)이란 빙~ 돌아가는 게 아니라 바로
이 지름길로 치고 들어가는 그런 문이다.
그래서 경절문을 활구라 한다.
인조 22년(1644) 5월 어느 날 편양 선사는 세연을 거두었다.
묘향산 내원(內院)은 선사의 스승이신 서산 대사께서
입적하신 암자로서 스승의 최후를 지켜본 편양 자신이 또한
이 절에서 좌화(坐化)했다.
임종에 이르러 제자 풍담의심(楓潭義諶)에게 후사를 유촉하고,
오되 오심이 없이 오고 가되 가심이 없이 그렇게 가셨다.
선사의 세수는 64세이고 법랍은 53세였으며
은색 사리 5과를 수습한 제자들은
묘향산과 금강산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에 <편양당집(鞭羊堂集)>이 있다. 그의 교화 행적은
<편양당집>의 시문(詩文)이나 선교(禪敎)에 대한 법문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의 글은 대중이나 학승들을 의식한 듯 쉬우면서도 매우 간결하다.
아래는 언기 스님이 남긴 선시이다.
운주천무동(雲走天無動) ― 구름은 달려가도 하늘은 가만히 있고
주행안불이(舟行岸不移) ― 배는 흘러가도 언덕은 그냥 있네.
본시무일물(本是無一物) ― 근본을 살피면 아무것도 없건만
하처기환비(何處起歡悲) ― 어디에 기쁨과 슬픔 있겠는가?
출처 :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