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6-8).
사도는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고 말씀했습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를 설명해 나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셨느니라”(8) 하고 말씀합니다.
①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합니다.
㉠ 6절, 8절, 10절에는 모두 우리의 상태(狀態)를 나타내는 “때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는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을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하면,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상),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상),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10상) 합니다.
㉡ 우리가 “연약할 때”라는 말은 우리가 약(弱)할 때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노예에서 자력(自力)으로 해방될 수가 있었는가? 바벨론 포로에서 자력으로 귀환할 수가 있었는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자력(自力)으로 살아나올 수가 있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아직 연약(軟弱)할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 그런데 연약한 것만이 아니라,
㉮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합니다. 이는 “연약”보다 더 나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연약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밥 먹듯 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 한걸음 더 나아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합니다. 이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1:28) 하는 상태, 즉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골 1:21)를 가리킵니다.
㉰ 이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의도는, 연약(軟弱)할 때에서, 죄인(罪人)되었을 때로, 그리고 원수(怨讐)되었을 때로 더욱 악화되어,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최악의 상태를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그런 상태(狀態)에 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 6절, 8절, 10절에는 모두 “죽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죽으셨다는 말인가?
㉮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
㉰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10) 하고 말씀합니다.
㉡ 그러면 누가, 왜 이렇게 하도록 주도(主導)하셨는가? “기약(期約)대로”(6중)라는 표현이 말씀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때가 찬 경륜 가운데 이렇게 행해주셨다는 것입니다.
㉢ 이렇게 말씀하는 중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7) 합니다. 이는 우리 상식(常識)에 호소하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또는 은인을 위해서” 용감히 죽는 자도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③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8) 합니다.
㉠ “확증”(確證)하셨다는 말은, 확실히 증명하여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랑이란 아름답고 좋은 것이기는 하나,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면 가장 막연한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 4:9) 하고, “사랑”은 구체적(具體的)으로 나타나야 하고, 확증되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하고, 말씀만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연약, 죄인, 원수 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8)는 말씀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확실히 증명하여 보여주신 “확증된 사랑”인 것입니다.
④ 우리들은 자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사 49:14),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말 1:2) 하고 말합니다.
㉠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지 아느냐” 하시고, 결정적(決定的)인 증거를 제시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 앞에서 우리의 가슴이 저려옵니까?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시렵니까? 이 후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보다” 하고 말하겠습니까?
㉡ 형제여,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죄인 되고 심지어 원수 되었던 우리들에게 이렇게 해주시지 아니하면 아니 될 무슨 신세라도 지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이렇게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부은바가 되었습니다.
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고 말씀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영광의 보좌를 떠나 이 땅에까지 찾아 오셨습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말구유에 나셨습니다. 목수의 집안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이려는 음모가 있었습니다. 33년 동안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영광을 떠나 이 땅에 오신 만왕의 왕께서 이런 대접을 받으시다니…
㉡ 그것은 망극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영광의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렇게 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 주님이 이 땅에 내려 오셨다가만 가셨다면 그 분은 이 지구상을 거쳐 간 많은 영웅 중의 한 분으로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 우리 주님은 많은 교훈을 주셨습니다.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탕자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등, 그 모든 말씀이 귀하고 보배롭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말씀들이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교훈으로 가능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그렇게 임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교훈만을 남기고 가셨다면 성인(聖人)의 한 분으로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 주님께서는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이를 깨끗케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창세 이후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돌보다 더 굳은 완악한 우리들의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에게 그렇게 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기사와 이적만을 행하시고 가셨다면 그 분은 능력을 행하는 신비주의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⑥ 우리의 구원은,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代贖)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 말씀하신 대로, 대속적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여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 아니 성자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시다니! 우리 주님께서는 이 쪽 주머니 저 쪽 주머니에서 자신이 가지고 오신 그 무엇을 주시고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生命)이 없느니라”(요 6:53) 말씀하십니다.
⑦ 설교자인 제게 어느 날 큰 깨달음이 왔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면서도 새삼스럽게 “설교(說敎)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입니다.
㉠ 설교자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만 한다면, 설교의 주제(主題)가 무엇이든 간에 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오게 되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반성으로 다가 왔습니다. “너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아니었느냐?
㉡ 깨달음을 받은 연후에 만물을 바라보았을 때에 하늘과 땅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9),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과일 한 개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계시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⑧ 하물며 특별계시인 성경(聖經)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농축이 되어 있겠는가? 그런 성경을 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한다고 하면서 그 많은 시간들을 무슨 말씀으로 허비했단 말인가?
㉠ 주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은 없나니”(요 15:13)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믿지 못한다면 도대체 당신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이 사랑 앞에서도 녹아지지 않는단 말이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더 보여줄 하나님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