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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욕(榮辱)의 통정공 형제들 1392년 공양왕 4년 ◇4월-정몽주(鄭夢周) 피살됨 ◇단양군 우성범(禹成範)과 진원군(晉原君) 강회계(姜淮季)를 회빈문(會貧門) 밖에서 참하였다. ◇고려 34대 475년 만에 망하다. 1392년 태조 1년 태조 즉위 교서 ◇7월-강회백(姜淮伯), 강여(康餘)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귀양 보내고, 강시(姜蓍), 강인보(姜仁甫)(1) 등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강회중(姜淮仲) 등은 본향(本鄕)에 안치(安置)(2)할 것이다. 이렇게 강시(姜蓍)의 5형제 중 막내아들 진원군(晉原君) 강회계(姜淮季)는 1392년(공양왕 4} 회빈문(會貧門) 밖에서 참(斬)당하였다. 맏아들 강회백(姜淮伯)먼 지방에 귀양 가고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 등은 본향(本鄕)에 안치(安置)되었다. 다음은 『고려사』의 「전 승추부 판사 강회백의 졸기」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기록된 통정공에 대한 행력이다. 1) 전 승추부 판사 통정공 강회백의 졸기 , 1357 ㅡ 1402 , 46 세에 영면 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 강회백(姜淮伯)이 죽었다. 회백은 진양(晉陽) 사람인데,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의 아들이다. 1376년(병진년)에 과거에 오르고, 1382년(임술년)에 나이 26세로서 대언(代言)이 되었는데, 이해에 봉익 대부(奉翊大夫) 밀직 제학(密直提學)에 승진하였다. 1385년(을축년) 겨울에 하정사(賀正使)로 경사(京師)에 갔고, 1388년(무진년)에 또 경사에 조회(朝會)하였다. 1389년(기사년)에 광정 대부(匡靖大夫)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제수하여 교주(交州)ㆍ강릉도(江陵道)를 관찰(觀察)하였고, 1391년(신미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옮기어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을 겸임하였다. 1392년(임신년) 여름에 진양(晉陽)으로 폄출(貶出)되었다가, 7년 1400년(경진)에 동북면 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로 제수되어 정헌계(正憲階)에 올랐고, 조금 뒤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46세였다. 회백은 총명(聰明)이 남보다 뛰어나고 강개(慷慨) 노성(老成)하여, 가는 곳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다섯의 아들이 있으니, 강종덕(姜宗德)ㆍ강우덕(姜友德)ㆍ강진덕(姜進德)ㆍ강석덕(姜碩德)ㆍ강순덕(姜順德)이었다.『조선왕조실록』 淮伯(회백) 1357(공민왕 6)~1402(태종 2)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 부사, 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호복제(胡服制)를 혁파하였다.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ㆍ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동생인 회계(淮季)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晉陽)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통정집』이 있다.
淮仲(회중) ?~1421 자는 중보(仲父), 호는 통계(通溪) 1373년(공민왕 22) 군자시승(軍資寺丞)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이듬해 최영장군을 따라 탐라도를 토평하였다. 1379년(우왕 5)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으며, 1382년(우왕 8) 진사문과에 급제하였다. 1390년(공양왕 2) 사헌부집의(司憲府執議), 1392년 군자윤(軍資尹)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색과 더불어 결당모란(結黨謀亂)하였다는 죄로 본향에 안치되었으며, 임금이 수차례 출사를 권했지만 불응하자 하는 수 없이 유사(宥赦)하였다. 1398년(태조 7) 10월에 좌우사간대부(左右司諫大夫), 1415년(태종 15) 신정을 하례하기 위해 중국에 다녀왔다. 1417년(태종 17)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가 되었다가 무고죄로 갇혔으며, 1418년(태종 18)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겸 개성부유후(開城府留後),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역임하였다. 이듬해에 한성부윤(漢城府尹: 지금의 서울부시장)ㆍ공조참판(工曹參判)ㆍ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역임하였다. 1421년(세종 3) 4월 4일 총제(摠制)로 재직 중에 사망하여 조정에서 미두(米豆) 20석을 내렸다.(3)
(1) 계보 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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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백 할아버지 묘역에 참배하면서, 술 한잔 올리고 싶어집니다.
통정공할아버지께서 잡으시고 무학대사께서 점고해 주신 명당이라 터가 맑습니다 . 금년에 저도 술한잔 올리면서 속 마음이 후련했습니다
할아버지 어리석은 후손 인사올림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