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등장과 몽골 제국의 성립 이길 상 가. 칭기즈칸과 몽고제국 (1) 몽골 (Mongolia : 蒙古)
몽골 족(Mongol : 蒙古族/몽고족)은 몽골고원 및 그주변에 사는 알타이어계(語系)의 몽골어군(語群) 민족으로 현재, 총인구 250∼300만,전형적인 몽골로이드로서, 비교적 키가 작고 단두(短頭)이면서 얼굴 폭이 넓은것이 신체적 특징입니다. 원래 고원 북동부의 초원과 삼림이 상접한 지대에 살면서반목반렵(半牧半獵)생활을 하였으나, 9세기 중엽이래 점차 남하하여 전형적인 기마유목민(騎馬遊牧民)이되어 부족국가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몽골제국을 건설하면서 그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지형은 평균 해발고도 약 1,400 m 이상의고원지대로서,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서부 알타이산맥 중의 묀흐하이르한산(4,366 m)이 가장 높고, 동부 도르노드 지구(552 m)가 가장 낮은 곳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인산(陰山:음산)산맥을 사이에두고 중국 본토와 접경한 넓이 약 250만 ㎢, 중앙부에서 동부에 걸쳐 목축에 알맞은대초원이 전개되고, 서쪽으로 갈수록 높고 험준하지만 이 지역도 천혜(天惠)의 고원성초원지대를 이루어 목축이 가능하고, 북서에서 남동부에 걸쳐 몽골알타이, 고비알타이의두 산맥이 이어지고, 중앙부에 한가이·헨티이 산맥이 완만한 높이로 이루어지며,북부에는 탄울 및 사얀산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2) 칭기즈 칸(Chingiz Khan : 成吉思汗/성길사한/1155?~1227.8.18) 현재도 그렇지만 이 시기 즉 13세기 이전 까지 몽고부족이란보잘 것 없는 민족으로서 고비사막 동북부지역 일부, 만주 지방에 소속된 흑룡(黑龍)강발원 지대에 살고 있던 일개의 약소 민족에 불과 하였습니다. 몽고계에 속한 거란족이10세기 초, 요하 상류에서 흥기하여 요(遼)를 세워 약 200년간 이 지역을 통합하기도하였으나, 투르크(돌궐)계 제부족이 건재하고 있었고, 철저한 몽고화가 이룩되지도못했기 때문에 거란이 망하고 나서는 그 이전과 다른 것이 별로 없이 여전히 투르크계의제부족에 의해서 점거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남기위한 수단으로 남녀 모두 기마(騎馬)술에 능하였고, 메마른 사막과 한서(寒暑)가심한 고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용맹하고 충실 소박하여, 인내심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매우 강했다고 합니다. 이 때를 전후하여 몽고 초원의 주인공이 될 목고족은투라이강과 헤이륭 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오논(Onon)강의 분수령상에 있는 부르칸산을근거로, 주로 유목생활을 하는 한편, 수렵도 하면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가족제도아래 혈연적 유대가 강한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몽고족은 당대 이래송나라와 거란에 예속되어 오다가 칭기즈칸의 아버지 에스게이 때부터 점차 여러부족을 통합하여 강대해졌으나 불행하게도 에스게이가 타타르(Tatar : 달단/??)에의해서 살해되자 일시 통합되었던 부족은 다시 분열되었습니다. 이 때 칭기즈칸의나이는 9세였다고 하며, 각 부족들의 시기로 온갖 어려움을 체험하고 여러 번 죽을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것 자체가 약탈의 상징성을 내포하고있는데, 어느 날 그의 부친 에스게이가 이웃의 메리키트부족을 방문했을 때, 그 추장은술대접을 하고, 처가 시중을 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술김에"네 마누라가 참 예쁘구나..." 하고 농담(弄談)을 하였으나,... 그것이강자에게는 농담일지 몰라도 약자에게는 잘못했다가는 일족의 목숨이 달린 문제기때문에, 추장은 서둘러 이혼하고 그녀를 에스게이에게 보냈고, 이렇게 해서 맞이한그녀로부터 에스게이는 4형제를 두었는데 그 맏아들이 후일의 칭기즈칸이 였습니다.
그가 17세가 되어 성년식을 마치고 결혼하였으나,얼마 후 메리키트부족의 습격을 받아 아내를 빼앗기고 자신도 겨우 살아남았다가,그의 부친의 친구였던 케레이트부족의 왕칸과 동맹하여 메르키트부족을 무찌르고아내를 되찾았기도 했는데, 이는 20년 전 메르키트족이 그의 부친에게 당한 복수를한 셈이 됩니다. 한편 테무친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와 오랜 친구였고 수많은 어려움을같이 한 동족의 유력자 쟈무하가 테무친에게 도전, 테무친이 이들과 싸웠으나 전세가불리하여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때 그의 부하들은 70개의 가마솥에 넣어 무참하게삶아 죽였다고 합니다. 이런 역경에서 왕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쟈무하를쳐부수어 숙적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으나(1201), 쟈무하가 나이만의 다얀칸에게망명하여 그를 부추겨 테무친을 괴롭혔으며, 다시 왕칸과 숙명의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왕칸이란 명칭은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에서 받은 칭호로서, 중국어의 왕(王)이라는뜻과 투르크, 몽고어의 칸(Khan)이라는 보통명사가 합해서 하나의 명예와 권위를상징하는 칭호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의 몽고지방은 정세가 매우 불안하여, 동족형제간에도 적대관계에 서는 수가 많았고, 신분과 위계(位階) 질서도 극히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왕칸도 한 때 동족에게 배반당하여 그 지위를 상실하고, 다른 부족틈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테무친의 주선으로 다시 족장(族長)의 지위를되찾기도 하였습니다. 테무친이 쟈무하를 격파하고 그 세력이 커지자, 이에왕칸은 불안과 동요의 빛을 띄고 테무친을 경계하게 되었는데, 테무친이 왕칸을 친아버지처럼섬겼으나, 피차가 통일국가의 야심을 품고 영토적 확대를 기도(企圖)하고 있었기때문에 언젠가는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당시 사막의 사정이라는 게 동맹(同盟)아니면 적대(敵對)의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기 때문에 잔적(殘敵)이 사라지면 두사람의 대결은 숙명적이 였습니다. 왕칸이 세력이 몽고 고원 일대에 떨치고 많은부족이 그에게 복종하자, 이들과 반목한 테무친은 시베리아까지 도망가기도 했습니다.그러다가 왕칸 진영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 일어나서 세력이 약해지자 테무친은 재빨리이를 기습 공격하였고, 이에 견디지 못한 왕칸은 몽고지방 서반부를 차지하고 있던나이만부족의 다얀칸에게 도망갔으나, 나이만의 한 군사에게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1203) 나이만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테무친의 세력을억제하기 위해 그의 영역에 침입해 오자, 테무친은 이를 물리치고, 다얀칸과 그를충돌질 했던 쟈무하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고비사막 주변의 대초원을 통일하고 전몽고민족의 군장이 되었는데(1204), 이때부터 몽고부족의 이름은 몽고 고원 전체의이름으로 통용되게 되었습니다. 테무친은 오논강 상류 지역에 개선하여, 몽골인을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사이에 옛날부터 관행(慣行)되어 온 합의제도(合議制度)인쿠릴타이(Khuriltai)에서 전 몽고의 주권자로서 추대되고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받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45세 였으며, 이로서 몽고제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1206) 쿠릴타이(Khuriltai)란 옛 몽골어로 집회(集會)를뜻한다고 하며, 유목민은 이동성 목축에 의존해 왔으므로 씨족(氏族), 즉 혈연자(血緣者)의집단 내지 이에 준하는 집단을 사회구성의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약간의 혈연관계가있는 씨족에 의하여 부족이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이들 씨족이나 부족에는 각각내부에서 선출되는 장로가 있어서 그들의 합의에 의해서 최고의 지도자로서 선우(單于)또는 칸(干,可汗)이 추대되었고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였습니다. 칭기즈란 고대 터키어인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고도 하고, 강성(强性)을 뜻하는 몽고어라고도 하며, 1206년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칭기즈, 칭기즈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하나,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옳다고 합니다. (3) 몽고의 군사력과 정복 사업
유목민 사회에서는 대략 2~3호가 모여 하나의 마을을이루기 때문에, 이러한 피라미드구조의 바닥에 있는 십호제에는 서너 개의 마을이모이고, 십호장의 지도에 따랐는데 평시에는 행정조직으로 전시에는 군사조직으로활용하여 그 효용성을 높이고, 정복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즉위한 이듬해서하(西夏)를 점령하고, 금(金)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中都 :현 베이징)에입성하였으며(1215), 한편 앞서 멸망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카라키타이(서요)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고, 그곳의 공주와 결혼하고도 배은망덕(背恩忘德)하여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이를 병합하여(1218)그 영역이 알타이 산맥을 넘어 이슬람세계와 접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시루강 이서의 광대한 영토는 투르크·이슬람계의 호라즘이 흥기하여 이란 이동을 제압하고 있었는데, 몽고와 호라즘간에 통상관계가수립되어 칭기즈칸은 통상 사절과 대상(隊商)을 호라즘 국왕 무하마드에게 보냈으나,호라즘 국왕이 사절단을 살해하자, 이것을 계기로 속국(屬國)의 군대를 합쳐 60만병력을 동원, 전후 7년간에 걸친 중앙아시아 원정에 나섰는데, 이는 실로 전 몽고병력을 총집결했으며, 막상 본거지는 공백으로 두고 금국 정벌도 일시 중단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20만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제 1대는 차남 차카타이와3남 오고타이에게 맡겨 오트라르를 공격시키고, 제 2대는 장남 주치에게 맡겨 우익(右翼)을,제 3대는 세 명의 장군에게 맡겨 좌익(左翼)을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막내아들 툴루이와함께 제 4대를 이끌고 중앙으로 진격하였습니다(1219). 제 1대는 오트라르를 5개월간의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키고, 앞서 몽고의 대상을 살해한 보복조치로서 그 태수를잡아 칭기즈칸 면전에서 부글부글 끓는 은액을 눈과 귓구멍에 부어 넣어 죽이고,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여,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이끌고 사마르칸드에서 칭기즈칸의군대와 합류하였습니다. 이들이 사마르칸드를 포위 공격하자 투르크와 이란 계의정예군 5만은 이를 지키지 못했고, 성이 함락되자 이들은 수십만의 무고한 주민과함께 전원 살해되었고, 수공업자를 비롯한 특수 기술자 3만 여명만이 간신히 생명을부지했고, 호라즘의 국왕 무하마드는 바그다드를 향해 탈출하였으나, 제베와 수부타이가인솔한 별군(別軍)의 추격을 피하지 못하여 결국은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들어갔다가심신의 피로와 굶주림이 겹쳐 병사하였습니다. 이로서 서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던대국 호라즘은 멸망하였습니다(1220) 제베와 수부타이는 다시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출동, 투르크계의 킵차크인들의 유목민과 키에프 대공을 비롯한 러시아 제공(諸公)의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 군에 합류하였습니다.본 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싸워 크게 격파하였습니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습니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공예가와 장인(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고, 정복한땅은 아들, 동생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는데,장남 주치의 적자(嫡子) 바투에게는 가장 먼 아랄해의 북방 키르키즈초원지대와 남러시아일대를, 차남 차카타이에게는 알타이 산맥에서 아무강에 이르는 카라키타이와 옛코라즘의 영토를, 삼남 오고타이에게는 바이칼호에서 텐산지방에 이르는 나이만의옛 영토를 각각 분봉해 주었고, 막내 툴루이게는 몽고의 말자 상속 유풍에 따라 몽고본토를 상속해 줄 요량으로 일단 분봉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그 외에 몽고의 남동지방으로부터 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아우들에게 분배해 주었고, 화북지방과 아무강서남지역은 부장들을 지방관 임명하여 각기 그 영지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영하/寧夏)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청수현/淸水縣)시장(西江) 강변에서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으며,특히 위구르 문화를 사랑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國字)로 채용하기도하였는데, 이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으며, 또 요(遼)나라유신(遺臣)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진해(鎭海)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몽고군이 정복지에 주민들을 다음 정복지까지 잡역에종사시키거나 싸움에서 방패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면 독전대가 사정없이 살해하였으며,성벽도시를 공격할 때는 큰돌을 쏟아 넣는 투석기와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한 수레등을 제작하여 사용하였고, 금국과의 싸움에서 포로로 데리고 온 화약제조 기술자들에게그 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워 이 서역 원정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고, 툴루이가 니샤푸르를공략했을 때는 그의 매부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했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점령후에는 나흘동안 수십만을 학살하고 그 머리를 잘라 이것으로 피라미드를 3개나 만들었고,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전투에서는 주민을 한 사람 빠짐 없이 모두 살해하여도시는 완전히 파괴당하여 그로부터 수십년 동안은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몽고가 정복한 지역은 이른바 초원지대로서 목축을유일한 생업 수단으로 삼아온 그들에게 초원은 안주할 수 있는 안식처인 동시에 축복받은 약속의 땅으로 알았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농경사회나 상업지역은 이때 까지만해도 버려진 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분봉된 소령지에서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골육간에영토분쟁의 발단이 되었고, 초원의 유목생활에서 정주(定住)민의 생활 방식으로 변화하는중대한 계기가 되어 몽고인 상호간에 현실적 이해 관계에 금이 가고 제국의 구심력(求心力)이약화되어 가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나. 몽고 제국의 발전 (1) 오고타이 칸(Ogadai/ 와활태/ 태종/ 1229~1241)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몽고 고래의 유풍에 따라 막내인투루이가 감국(監國)이 되어 몽고제국을 섭정해 왔는데, 케롤렌 강가에서 그의 유언에따른다고 하여 제 3자 오고타이가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는데(1229), 40세의나이가 된 그는 성격이 관대·온후하고, 왕자로서의 인품을 갖추고 있어서, 한인(漢人)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재상 전진해(田鎭海) 등을 등용하여 중앙정부의정치기구를 정비하는 동시에, 속령(屬領)에 대해서는 통치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를파견하여 통치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오르콘강변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건설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제국 내의 교통망을 완비하였으며, 칸이 된 기념(?)으로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을 계승, 이란·남러시아, 금(金)나라, 남송, 고려, 유럽 및인도 방면의 정복계획을 수립하고 그 실천에 착수하였습니다. 1234년에는 여진족의금나라를 정복, 그 수도를 함락시켰으며, 채주성(蔡州城:河南省汝南縣)을 격파하여,1234년 봄에는 몽고족의 오랜 꿈이었던 회수 이북의 광대한 중국 영토를 확보하므로써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1236년부터 큰형 주치의 아들 바투(拔都)를 총사령관으로수브타이를 부사령관으로 임명, 대규모의 서방원정군을 파견, 러시아로부터 유럽대륙 깊숙이 들어가, 헝가리·폴란드의 각지를 공략함으로써, 로마교황 및 유럽 봉건제후(封建諸侯)들을궁지에 몰아넣었는데, 동러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블라디미르 대공 유리 2세의군대를 격파하고 삽시간에 리아잔을 함락시키고, 지방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를점령 초토화한 후, 다시 키에프를 공격하여 이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1240) 바투는차카타이의 아들 바이달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헝가리를 침공하기 위해 폴란드를침입하게 하였고, 폴란드를 함락한 후에는 당시 독일의 영토였던 실레지엔을 공격,실레지엔의 왕 하인리히 2세는 몸소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 및 독일 제후의연합군과 함께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니그니츠교외에서 몽고 군에게 참패하여 비장한최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1241). 이 "발시타르의 싸움"에서 몽고 군은수많은 전사자의 귀를 잘라 9개의 큰 포대를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한편 헝가리에 진격한 바투의 군대는 폴란드로부터개선한 바이달의 별군과 합세, 수도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였습니다.그러나 본국에서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오고, 그렇게 되면 쿠릴타이를열어 다음 칸을 추대해야 되기 때문에, 바투의 군대는 여기서 서정(西征)을 멈추고귀환 길에 오르게 되어, 유럽은 몽고의 말발굽에서 일단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유럽, 특히 독일은 황제와 교황간의 수위권 다툼으로 틈이 벌어져 있었고, 중 무장한기사로서 몽고의 경기병(輕騎兵)을 당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고 합니다. 만약 몽고군이계속 서진 하여 프랑스까지 갔다면, 노르만족 이상의 약탈과 살육의 큰 잔치(?)가다시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천만 다행으로 대칸의 죽음이 이런 환란(患亂)을 막아주었고, 몽고군의 잔인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인 들은 아시아를 공포의 대상으로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귀환 길에 오른 바투는 남 러시아의 평원에 도착했을때, 투루이의 장남 망구에게 모종의 밀계(密計)를 주어 먼저 본국으로 보내고, 정권변동에 따른 사태의 추이를 예의(銳意) 주시하던 중, 본국에서 이미 칸이 추대되었다는소식을 듣고 볼가강 하류에서 가까운 사라이에 자리를 잡아 러시아 제후들을 다스리며이 지역을 통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영토는 원래 투르크계의 유목민 킵차크족들이것이 였기 때문에 이곳을 킵차크한국(칸국)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칸은 황금색천막에 살고 있어서 금장국(金帳國)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 후 몽고의 러시아 지배는약 200 여 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2) 몽고의 고려 침입
이듬해 고려는 조충과 김취려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고있었는데, 한편 당시 두만강 유역에는 금의 장군 포선만노가 독립정권을 세워 동진이라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몽고는 고려, 동진과 연합하여 강동성에 웅거하고 있던거란족을 섬멸하고 고려와 외교관계를 수립, 조공을 요구하였습니다(1219) 고려는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1222년 선주(宣州)˙화주(和州)˙철관(鐵關)에 성을 쌓아몽고에 대비하였습니다. 그 후 몽고 사신 저고여(차고여/札古與)피살사건(著古與被殺事件)이라는게발생하였는데,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몽고의 사신으로 고려에파견되었고, 한편, 동진의 포선만노는 칭기즈칸의 서역원정 중, 소식이 막연함을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고려에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습니다. 이에난처한 입장에 선 고려는 일단 몽고와 동진 두 나라와 통교를 계속하며 정세를 관망하였는데,1224년 11월 공물을 요구하러 온 저고여가 1225년 정월 함신진(咸新鎭/함신진 : 의주)을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가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 금(金)나라와동진은 고려와 몽고를 이간할 목적으로 고려를 침범할 때 몽고복장을 하여 몽고의소행으로 가장하고, 몽고 사신이 고려에 들어올 때는 고려의 복장을 하여 습격하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는 이 사건이 금 나라 도둑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몽고는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 사건을 고려 침입의 구실로 삼게 되었습니다.이로써 동진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1228년 동진(東眞)은 정주(定州)와 장주(長州)에침입하였으나 이를 물리쳤습니다. 오고타이가 칸이 되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장살리타(Salietai/撒禮塔/살례탑/?~1232)가 이를 고려인에게 살해된 것으로 의심하고,함신진(咸新鎭)을 넘어 공격해 왔으나 구주(龜州)에서 박서(朴犀)에게 패하였다가,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개경 성의문(省義門) 밖까지 침공해 왔으므로 고려에서는 살리타가있는 안북부(安北府:安州郡)까지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이듬해에 살리타는 다루가치(darughachi:達魯花赤) 72명을 남겨 두고 일단 돌아갔습니다.이 때 고려는 무신 정변(1170) 이래 국정이 매우 혼란하였는데, 최충헌이 등장하여사방에서 일고 있던 반란을 과감히 진압하고, 최씨무신정권을 수립하였으며, 그의아들 최우가 교정도감이 되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최우는 몽고가 다루가치를 파견하자, 정권에 불안을느꼈고, 몽고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다하였으며, 반 최씨 세력을 견제할 목적도 있고해서 도읍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다루가치를 철수시키는 등 반몽 태세를 갖추자다시 살리타가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1232) 이 후 몽고의 침입을 연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231년 제1차 몽골군 침입. 살리타[撒禮塔]를 원수로삼아 평주(平州)를 치고 개경에 육박. 1278년 충렬왕, 원의 관리와 원군의 철수 및 고려인송환을 요구. (3) 몽고의 일본 원정 (가) 세조 쿠빌라이 다음으로 몽고의 칸을 계승한 것은 투루이가계의 몽케칸(Mongke Khan/蒙哥汗/몽가한: 1251∼59)으로서,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투루의 맏아들이고,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그의 동생들이 였습니다. 유럽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세웠고, 1248년 정종(定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카라코룸에서 번영을 누렸으며,쿠빌라이로 하여금 중국·티베트·다리(大理:중국 雲南省 서부)·안남(安南)을, 훌라구로하여금 서 아시아 이슬람교의 바그다드 아바스왕조를 정복하게 하였으며(1258), 스스로도남송정벌을 결의, 쓰촨(四川)까지 진군하였으나 병사하였습니다. 몽케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세조 쿠빌라이(Khubilai/忽必烈/홀필열/1260∼94)가 칸을 계승하였는데, 형 몽케 칸이 쓰촨(四川)의 병영에서 병사하자,쿠빌라이는 국도(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는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의 야망에 선수를써서 이듬해 이례적으로 중국의 카이핑부(開平府)에서 쿠릴타이를 소집, 칸의 자리에올랐으며, 중국식으로 연호를 세워(建元) 중통(中統)이라 하였고, 이에 맞서막내가 카라코룸에서 칸에 오르자,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리크부카를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연경(燕京:北京)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1271년 나라 이름을 중국식으로 원(元)이라 하였습니다. 그의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루었는데(1279), 이 시기 쿠빌라이의 관심은일본 정복에 두고 있었으나 동서양을 종횡무진하던 몽고군도 이 일본 정복만은 끝내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 일본의 무가 정치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요시쯔네는 요리토모의 화를 풀기 위해 카마쿠라 부근까지가서 요리토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나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지만, 요리토모는 이를거부하고 카마쿠라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를보내어 요시쯔네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요시쯔네는 쿄오토로 돌아와고시라카와법황(後白河法皇)에게 간청하여 요시쯔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아 내고,토벌에 필요한 무사들을 동원하였으나, 동원된 군사는 겨우 300기에 불과 하였습니다.고시라카와법황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번에는 요리토모에게 요시쯔네를 치라는 명령을내렸습니다. 요시쯔네는 나라의 요시노(吉野)등으로 몸을 숨기면서토호쿠(東北)지방의 히라이즈미(平泉→이와테현 소재)까지 도망하였으나, 더 이상피할 은신처를 찾지 못해, 자살로서 30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이에 그 형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카마쿠라를 근거지로하여 전국을 지배하기시작하여, 1192년 고시라카와법황이 죽자 세이이 다쇼군(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에임명되어 카마쿠라 막부(幕府)를 열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싸움에서 활약한무사들에게 토지를 주어 주종관계를 맺어 부하로 삼았으며, 그 중에서 유력한 자를관리에 임명하여 각지로 파견하는 등 전국적인 군사권과 치안권을 장악하게 되어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로써 카마쿠라 막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다) 호쿠죠오 시대 1219년 정월 3대 쇼오군 사네모토는 그의 조카인 구교(公曉=요리이에의아들)에게 살해당하고, 구교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여, 미나모토 가문은요리토모로부터 겨우 3대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을 빚으면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쿄오토(京都)의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은 미나모토 가문의 혈통이 끊겼다는 사실을 듣고, 1221년5월 막부의 실권자인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전국 무사들에게 내렸습니다.이에 마사코는 막부의 무사들을 불러모아이들을 설득하고, 즉시 쿄오토로 출진, 고토바상황의군사를 진압하고, 고토바상황을 오키(隱岐)로 유배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황 쪽에가담했던 귀족들과 무사들을 엄하게 벌하였는데, 이것을 죠오쿠의 난(承久の亂)이라고합니다. (라) 몽고의 일본 침입
일본군도 분전했으나 몽고군의 철포(鐵砲)와 화살에화약을 장치한 화전(火箭)의 사용과 집단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사상자가속출하여 내륙 다자이후(大宰府)로 후퇴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일본 지리에 어두운몽고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배로 철수하였는데, 그런데 그 날밤 갑자기 태풍이불어 닥쳐 하카타만에 정박 중이던 몽고의 군선이 거의 침몰되고 병사들이 많은 피해를입어 철군하였습니다. 이 때 몽고군 1만 3천 5백명 정도가 익사했다고 합니다.(文永の役) 다음 해인 1275년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종속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집권 토키무네는 사신의 목을 베고 단호히 거부하자,1276년 남송의 임안을 점령한 몽고는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2차 원정을 서두르게되었습니다. 이어 1279년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다시 사신을 일본에 보냈으나역시 참수(斬首)당하였고, 뿐만 아니라 몽고군의 재 침입에 대비하여 하카타만(博多灣)에방루를 쌓고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1281년 6월, 동로군(몽고/한인/고려) 5만과 강남군10만으로 편성된 원정군은 하카타만에 도착, 일본측이 해안 수비를 강화하고 완강히대항하였기 때문에 상륙에 실패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일본군은 작은 배를 타고 와서,몽고군의 배에 접근하여 횃불을 던져 배를 불태웠고,... 몽고군도 이 작전에는 고전을면치 못하고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철수하여 대기하고 있었는데, 강남군은당초 이키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변경하여 히라도(平戶)로 향하였기때문에 양 군은 7월에야 합류할 수 있었으며, 총공격을 눈앞에 두고 키타큐우슈 일대에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몽고군은 다시 아무 소득 없이 철수하였습니다. (弘安の役) 몽고는 이 이후에도 일본 원정의 뜻을 버리지 않고1282년 제 3차 원정 계획을 세웠지만, 고려, 중국, 베트남 등에서 몽고에 대한 저항운동이활발히 전개되자, 일단 원정은 중단되었지만 쿠빌라이의 일본 정복에 대한 집념은잠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79세의 고령으로서 사망하기 전해인 1293년에도 원정을계획하고 고려에 막대한 수의 함선과 군량의 준비를 명하였다가, 1294년 쿠빌라이칸의사망과 함께 일본 정복 야욕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몽고의 일본원정 실패의원인은, 몽고군이 다른 나라의 군인과 섞인 혼성군으로 이루어 졌고, 고려의 민중과군대가 몽고에 저항하고 있었고, 시기적으로 태풍의 계절을 택해 패전을 자초하였다고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태풍을 신(神)이 가져다 준 바람(風)이라하여, 카미카제(神風)라 하였고, 또한 신이 수호해 주는 나라라고 자긍심을 부추겨일본의 신도(神道)가 이때부터 더욱 팽배해 졌으며, 태평양 전쟁(1941~45)에서 미국에게밀리자 나이 어린 청소년을 카미가제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사지로 내몰아 안간 힘을다했으나,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는 막을 내리고 우리는 광복을 찾았으나, 이 카미가제특공대에 한국의 청소년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 카마쿠라막부의 붕괴 국정의 혼란 속에서 카와찌(河內=지금의 大阪)의 쿠스노끼마사시게(楠木正成)를비롯한 각지의 무사들이 천황 편에 가담하여 잇달아서 봉기하자, 막부는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등을 대장으로 해서 대군을 보내어 정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부터 막부에 불만을갖고 있던 타카우지는 갑자기 천황 측에 가담해 막부 측을 공격하자, 그 때까지 사정을살피고 있던 무사들이 잇달아서 천황 측에 가담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닛타요시사다(新田義貞)가일족을 거느리고 카마쿠라를 공격하여 1333년 호쿠죠타카토키(北條高時)에게 자살을명하므로 해서 카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고, 아시카가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열었으나(1336) 지방 정권에 불과 하였고, 슈고 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슈고다이묘가 되었고, 다시 전국시대가 되면서 전국다이묘가 되어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다가, 이 후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나타나 재통일 할 때 까지 이른바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 동서간의 교류- 초원 길. 비단 길, 바닷길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