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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칭기즈칸의 등장과 몽고제국의 성립
임광자 추천 0 조회 131 08.05.09 08: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칭기즈칸의 등장과 몽골 제국의 성립 이 길 상

칭기즈칸의 등장과 몽골 제국의 성립                    이길 상

가. 칭기즈칸과 몽고제국

(1) 몽골 (Mongolia : 蒙古)

13세기 초, 중국은 淮水를 경계로 남송과 금(金)나라가대립하고 있었고, 고려에서는 최씨무신정권이 수립되어 교정도감을 설치, 반대파를철저히 숙청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겸창막부)가 성립되어일본 최초의 부케정권(武家政權)이 수립되었고, 비잔틴 제국에서는 십자군원정으로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어 라틴제국이 성립되었고,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영국의 리처드 3세, 그리고 존 왕이 영지문제로, 독일은 하인리히 4세가 로마교황과수위권 문제로 다툼이 한창일 때, 바람과 모래먼지, 혹한(酷寒)과 사막(沙漠)으로대표되는 몽골 고원에서는 세계를 경악과 공포로 몰고 갈 거대한 태풍이 서서히 잉태하고있었습니다.

몽골 족(Mongol : 蒙古族/몽고족)은 몽골고원 및 그주변에 사는 알타이어계(語系)의 몽골어군(語群) 민족으로 현재, 총인구 250∼300만,전형적인 몽골로이드로서, 비교적 키가 작고 단두(短頭)이면서 얼굴 폭이 넓은것이 신체적 특징입니다. 원래 고원 북동부의 초원과 삼림이 상접한 지대에 살면서반목반렵(半牧半獵)생활을 하였으나, 9세기 중엽이래 점차 남하하여 전형적인 기마유목민(騎馬遊牧民)이되어 부족국가를 세우기 시작하였고,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몽골제국을 건설하면서 그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지형은 평균 해발고도 약 1,400 m 이상의고원지대로서,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서부 알타이산맥 중의 묀흐하이르한산(4,366 m)이 가장 높고, 동부 도르노드 지구(552 m)가 가장 낮은 곳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 접경하고, 남쪽으로는 인산(陰山:음산)산맥을 사이에두고 중국 본토와 접경한 넓이 약 250만 ㎢, 중앙부에서 동부에 걸쳐 목축에 알맞은대초원이 전개되고, 서쪽으로 갈수록 높고 험준하지만 이 지역도 천혜(天惠)의 고원성초원지대를 이루어 목축이 가능하고, 북서에서 남동부에 걸쳐 몽골알타이, 고비알타이의두 산맥이 이어지고, 중앙부에 한가이·헨티이 산맥이 완만한 높이로 이루어지며,북부에는 탄울 및 사얀산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수계(水系)는 북부지역을 관류하는 셀렝가강(江), 동부지역을흐르는 오논강, 현재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주변을 흐르는 툴강, 중앙지대를 북류하는오르혼강, 서부지역의 자브한강·테스강·호브드강·이데르강 등이 주요 하천이며,하천의 유속(流速)은 비교적 빠르고 물은 맑고 차며,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여름은 덥고 겨울은 혹한이 계속되는데, 여름의 더위는 습도가 적어 견딜 만하고,겨울의 추위는 -40 ℃로 내려가는 일이 흔하며, 봄이 짧고( 5·6월), 여름이 금방가지만, 이즈음 몽골 초원의 아름다움은 여행자를 즐겁게도 하고, 기압의 변화가심하고 때때로 돌풍이 일어 추위를 가져오기도 하다가, 9·10월은 이상하게도 몽골에서가장 기후가 안정된 시기가 된다고 합니다.

(2) 칭기즈 칸(Chingiz Khan : 成吉思汗/성길사한/1155?~1227.8.18)

현재도 그렇지만 이 시기 즉 13세기 이전 까지 몽고부족이란보잘 것 없는 민족으로서 고비사막 동북부지역 일부, 만주 지방에 소속된 흑룡(黑龍)강발원 지대에 살고 있던 일개의 약소 민족에 불과 하였습니다. 몽고계에 속한 거란족이10세기 초, 요하 상류에서 흥기하여 요(遼)를 세워 약 200년간 이 지역을 통합하기도하였으나, 투르크(돌궐)계 제부족이 건재하고 있었고, 철저한 몽고화가 이룩되지도못했기 때문에 거란이 망하고 나서는 그 이전과 다른 것이 별로 없이 여전히 투르크계의제부족에 의해서 점거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척박한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남기위한 수단으로 남녀 모두 기마(騎馬)술에 능하였고, 메마른 사막과 한서(寒暑)가심한 고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용맹하고 충실 소박하여, 인내심과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매우 강했다고 합니다.

이 때를 전후하여 몽고 초원의 주인공이 될 목고족은투라이강과 헤이륭 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오논(Onon)강의 분수령상에 있는 부르칸산을근거로, 주로 유목생활을 하는 한편, 수렵도 하면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가족제도아래 혈연적 유대가 강한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몽고족은 당대 이래송나라와 거란에 예속되어 오다가 칭기즈칸의 아버지 에스게이 때부터 점차 여러부족을 통합하여 강대해졌으나 불행하게도 에스게이가 타타르(Tatar : 달단/??)에의해서 살해되자 일시 통합되었던 부족은 다시 분열되었습니다. 이 때 칭기즈칸의나이는 9세였다고 하며, 각 부족들의 시기로 온갖 어려움을 체험하고 여러 번 죽을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습니다.

칭기즈칸이 태어난 것 자체가 약탈의 상징성을 내포하고있는데, 어느 날 그의 부친 에스게이가 이웃의 메리키트부족을 방문했을 때, 그 추장은술대접을 하고, 처가 시중을 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술김에"네 마누라가 참 예쁘구나..." 하고 농담(弄談)을 하였으나,... 그것이강자에게는 농담일지 몰라도 약자에게는 잘못했다가는 일족의 목숨이 달린 문제기때문에, 추장은 서둘러 이혼하고 그녀를 에스게이에게 보냈고, 이렇게 해서 맞이한그녀로부터 에스게이는 4형제를 두었는데 그 맏아들이 후일의 칭기즈칸이 였습니다.

태조 칭기즈칸원래 몽고는 칭기즈칸이 태어난 한 부족 명에 불과하였으나,그에 의해서 고비사막 남북에 걸치는 광대한 영역을 석권하게 되고, 이곳을 중심으로아시아와 유럽 일대를 지배했기 때문에 이 지역과 주민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확대되어그렇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명은 테무친(鐵木眞)이 였고, 바이칼호 근처에서태어나, 아버지가 살해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성장하면서 고난과 역경을 굳은 의지와 용맹, 영특한 재략(才略)으로 극복하고 다시부족을 통합하고 재건하였습니다.

그가 17세가 되어 성년식을 마치고 결혼하였으나,얼마 후 메리키트부족의 습격을 받아 아내를 빼앗기고 자신도 겨우 살아남았다가,그의 부친의 친구였던 케레이트부족의 왕칸과 동맹하여 메르키트부족을 무찌르고아내를 되찾았기도 했는데, 이는 20년 전 메르키트족이 그의 부친에게 당한 복수를한 셈이 됩니다. 한편 테무친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와 오랜 친구였고 수많은 어려움을같이 한 동족의 유력자 쟈무하가 테무친에게 도전, 테무친이 이들과 싸웠으나 전세가불리하여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때 그의 부하들은 70개의 가마솥에 넣어 무참하게삶아 죽였다고 합니다.

이런 역경에서 왕칸의 도움을 받아 다시 쟈무하를쳐부수어 숙적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였으나(1201), 쟈무하가 나이만의 다얀칸에게망명하여 그를 부추겨 테무친을 괴롭혔으며, 다시 왕칸과 숙명의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왕칸이란 명칭은 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에서 받은 칭호로서, 중국어의 왕(王)이라는뜻과 투르크, 몽고어의 칸(Khan)이라는 보통명사가 합해서 하나의 명예와 권위를상징하는 칭호가 되었습니다. 이 무렵의 몽고지방은 정세가 매우 불안하여, 동족형제간에도 적대관계에 서는 수가 많았고, 신분과 위계(位階) 질서도 극히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왕칸도 한 때 동족에게 배반당하여 그 지위를 상실하고, 다른 부족틈에서 망명생활을 한 적이 있었는데, 테무친의 주선으로 다시 족장(族長)의 지위를되찾기도 하였습니다.

테무친이 쟈무하를 격파하고 그 세력이 커지자, 이에왕칸은 불안과 동요의 빛을 띄고 테무친을 경계하게 되었는데, 테무친이 왕칸을 친아버지처럼섬겼으나, 피차가 통일국가의 야심을 품고 영토적 확대를 기도(企圖)하고 있었기때문에 언젠가는 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당시 사막의 사정이라는 게 동맹(同盟)아니면 적대(敵對)의 두 가지 선택밖에 없었기 때문에 잔적(殘敵)이 사라지면 두사람의 대결은 숙명적이 였습니다. 왕칸이 세력이 몽고 고원 일대에 떨치고 많은부족이 그에게 복종하자, 이들과 반목한 테무친은 시베리아까지 도망가기도 했습니다.그러다가 왕칸 진영 내부에서 세력 다툼이 일어나서 세력이 약해지자 테무친은 재빨리이를 기습 공격하였고, 이에 견디지 못한 왕칸은 몽고지방 서반부를 차지하고 있던나이만부족의 다얀칸에게 도망갔으나, 나이만의 한 군사에게 암살 당하고 말았습니다(1203)

나이만은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테무친의 세력을억제하기 위해 그의 영역에 침입해 오자, 테무친은 이를 물리치고, 다얀칸과 그를충돌질 했던 쟈무하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고비사막 주변의 대초원을 통일하고 전몽고민족의 군장이 되었는데(1204), 이때부터 몽고부족의 이름은 몽고 고원 전체의이름으로 통용되게 되었습니다. 테무친은 오논강 상류 지역에 개선하여, 몽골인을비롯하여 북방 유목민 사이에 옛날부터 관행(慣行)되어 온 합의제도(合議制度)인쿠릴타이(Khuriltai)에서 전 몽고의 주권자로서 추대되고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받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45세 였으며, 이로서 몽고제국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1206)

쿠릴타이(Khuriltai)란 옛 몽골어로 집회(集會)를뜻한다고 하며, 유목민은 이동성 목축에 의존해 왔으므로 씨족(氏族), 즉 혈연자(血緣者)의집단 내지 이에 준하는 집단을 사회구성의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약간의 혈연관계가있는 씨족에 의하여 부족이 구성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이들 씨족이나 부족에는 각각내부에서 선출되는 장로가 있어서 그들의 합의에 의해서 최고의 지도자로서 선우(單于)또는 칸(干,可汗)이 추대되었고 중요한 국사를 결정하였습니다. 칭기즈란 고대 터키어인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고도 하고, 강성(强性)을 뜻하는 몽고어라고도 하며, 1206년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칭기즈, 칭기즈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하나,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gis Tengri)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옳다고 합니다.

(3) 몽고의 군사력과 정복 사업

1206년 테무친이 오논 강변 평원에서, 몽골제국의 대칸에오르면서 몽고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 있던 혈연적인 씨족적 공동체를 해체, 군사조직에바탕을 둔 천호(千戶)라고 하는 유목민집단을 95개로 편성하였습니다. 천호란 보통천명의 군사를 소집할 수 있는 유목민 집단의 크기를 말하는데, 천호는 10개의 백호(百戶)로나누고, 다시 백호는 10개의 십호로 나누어 편성된 십진법에 따른 군사 및 행정조직이였습니다. 95개의 천호에는 88명의 천호장을 임명하여 한 천호장이 한 개 혹은 그이상의 천호를 지휘케하고, 이들을 좌익(左翼)·중군(中軍)·우익의 만호장 지휘하에두었고, 또 케시크테이라고 하는 친위대를 설립하고 천호장·백호장의 자제로 편성하여특권을 부여, 몽골 유목군단의 최정예 부대를 구성하였습니다.

유목민 사회에서는 대략 2~3호가 모여 하나의 마을을이루기 때문에, 이러한 피라미드구조의 바닥에 있는 십호제에는 서너 개의 마을이모이고, 십호장의 지도에 따랐는데 평시에는 행정조직으로 전시에는 군사조직으로활용하여 그 효용성을 높이고, 정복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즉위한 이듬해서하(西夏)를 점령하고, 금(金)나라에 침입하여 그 수도인 중도(中都 :현 베이징)에입성하였으며(1215), 한편 앞서 멸망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카라키타이(서요)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고, 그곳의 공주와 결혼하고도 배은망덕(背恩忘德)하여그 나라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부장 제베를 파견하여 토벌한 후에 이를 병합하여(1218)그 영역이 알타이 산맥을 넘어 이슬람세계와 접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시루강 이서의 광대한 영토는 투르크·이슬람계의 호라즘이 흥기하여 이란 이동을 제압하고 있었는데, 몽고와 호라즘간에 통상관계가수립되어 칭기즈칸은 통상 사절과 대상(隊商)을 호라즘 국왕 무하마드에게 보냈으나,호라즘 국왕이 사절단을 살해하자, 이것을 계기로 속국(屬國)의 군대를 합쳐 60만병력을 동원, 전후 7년간에 걸친 중앙아시아 원정에 나섰는데, 이는 실로 전 몽고병력을 총집결했으며, 막상 본거지는 공백으로 두고 금국 정벌도 일시 중단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20만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어 제 1대는 차남 차카타이와3남 오고타이에게 맡겨 오트라르를 공격시키고, 제 2대는 장남 주치에게 맡겨 우익(右翼)을,제 3대는 세 명의 장군에게 맡겨 좌익(左翼)을 담당하게 하고, 자신은 막내아들 툴루이와함께 제 4대를 이끌고 중앙으로 진격하였습니다(1219). 제 1대는 오트라르를 5개월간의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키고, 앞서 몽고의 대상을 살해한 보복조치로서 그 태수를잡아 칭기즈칸 면전에서 부글부글 끓는 은액을 눈과 귓구멍에 부어 넣어 죽이고,부하라 등의 도시를 공략하여, 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이끌고 사마르칸드에서 칭기즈칸의군대와 합류하였습니다. 이들이 사마르칸드를 포위 공격하자 투르크와 이란 계의정예군 5만은 이를 지키지 못했고, 성이 함락되자 이들은 수십만의 무고한 주민과함께 전원 살해되었고, 수공업자를 비롯한 특수 기술자 3만 여명만이 간신히 생명을부지했고, 호라즘의 국왕 무하마드는 바그다드를 향해 탈출하였으나, 제베와 수부타이가인솔한 별군(別軍)의 추격을 피하지 못하여 결국은 카스피해상의 작은 섬으로 들어갔다가심신의 피로와 굶주림이 겹쳐 병사하였습니다. 이로서 서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던대국 호라즘은 멸망하였습니다(1220)

제베와 수부타이는 다시 카프카스산맥을 넘어 남러시아로출동, 투르크계의 킵차크인들의 유목민과 키에프 대공을 비롯한 러시아 제공(諸公)의연합군을 하르하 강변에서 격파하였으며(1223), 크림을 정복한 후 본 군에 합류하였습니다.본 군은 그에 앞서 발흐를 점령하고 무하마드의 아들 잘랄웃딘과 인더스 강변에서싸워 크게 격파하였습니다(1221). 그러나 뜨거운 열기에 견딜 수 없어 철군하기로결정하고, 차가타이·오고타이군과 합세하여 귀국하였습니다(1225). 이때 이슬람교도의공예가와 장인(匠人)의 기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고, 정복한땅은 아들, 동생들에게 각각 분할해주어 나중에 한국(汗國)을 이룩하게 하였는데,장남 주치의 적자(嫡子) 바투에게는 가장 먼 아랄해의 북방 키르키즈초원지대와 남러시아일대를, 차남 차카타이에게는 알타이 산맥에서 아무강에 이르는 카라키타이와 옛코라즘의 영토를, 삼남 오고타이에게는 바이칼호에서 텐산지방에 이르는 나이만의옛 영토를 각각 분봉해 주었고, 막내 툴루이게는 몽고의 말자 상속 유풍에 따라 몽고본토를 상속해 줄 요량으로 일단 분봉에서 제외 시켰습니다. 그 외에 몽고의 남동지방으로부터 만주에 이르는 지역은 아우들에게 분배해 주었고, 화북지방과 아무강서남지역은 부장들을 지방관 임명하여 각기 그 영지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이어 1226년 가을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한 서하를응징하려고 서하의 수도 닝샤(영하/寧夏)를 포위하였으나 간쑤성 칭수이현(청수현/淸水縣)시장(西江) 강변에서 6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으며,특히 위구르 문화를 사랑하여 나이만 정벌 당시 포로로 데리고 온 위구르인 타타동가에게여러 아들들로 하여금 위구르 문자를 배우게 하였고, 그것을 국자(國字)로 채용하기도하였는데, 이 위구르 문자로부터 몽골문자와 만주문자가 만들어졌으며, 또 요(遼)나라유신(遺臣)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진해(鎭海)를 중용하고 그 교양과 정치적능력을 이용하여 정복지 통치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몽고군이 정복지에 주민들을 다음 정복지까지 잡역에종사시키거나 싸움에서 방패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면 독전대가 사정없이 살해하였으며,성벽도시를 공격할 때는 큰돌을 쏟아 넣는 투석기와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한 수레등을 제작하여 사용하였고, 금국과의 싸움에서 포로로 데리고 온 화약제조 기술자들에게그 제조법과 사용법을 배워 이 서역 원정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고, 툴루이가 니샤푸르를공략했을 때는 그의 매부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했기 때문에 그 보복으로 점령후에는 나흘동안 수십만을 학살하고 그 머리를 잘라 이것으로 피라미드를 3개나 만들었고,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전투에서는 주민을 한 사람 빠짐 없이 모두 살해하여도시는 완전히 파괴당하여 그로부터 수십년 동안은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몽고가 정복한 지역은 이른바 초원지대로서 목축을유일한 생업 수단으로 삼아온 그들에게 초원은 안주할 수 있는 안식처인 동시에 축복받은 약속의 땅으로 알았기 때문에, 중국을 비롯한 농경사회나 상업지역은 이때 까지만해도 버려진 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분봉된 소령지에서 영토를 확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골육간에영토분쟁의 발단이 되었고, 초원의 유목생활에서 정주(定住)민의 생활 방식으로 변화하는중대한 계기가 되어 몽고인 상호간에 현실적 이해 관계에 금이 가고 제국의 구심력(求心力)이약화되어 가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나. 몽고 제국의 발전

(1) 오고타이 칸(Ogadai/ 와활태/ 태종/ 1229~1241)

칭기즈칸이 사망하자 몽고 고래의 유풍에 따라 막내인투루이가 감국(監國)이 되어 몽고제국을 섭정해 왔는데, 케롤렌 강가에서 그의 유언에따른다고 하여 제 3자 오고타이가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는데(1229), 40세의나이가 된 그는 성격이 관대·온후하고, 왕자로서의 인품을 갖추고 있어서, 한인(漢人)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위구르인 재상 전진해(田鎭海) 등을 등용하여 중앙정부의정치기구를 정비하는 동시에, 속령(屬領)에 대해서는 통치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를파견하여 통치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오르콘강변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건설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제국 내의 교통망을 완비하였으며, 칸이 된 기념(?)으로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을 계승, 이란·남러시아, 금(金)나라, 남송, 고려, 유럽 및인도 방면의 정복계획을 수립하고 그 실천에 착수하였습니다. 1234년에는 여진족의금나라를 정복, 그 수도를 함락시켰으며, 채주성(蔡州城:河南省汝南縣)을 격파하여,1234년 봄에는 몽고족의 오랜 꿈이었던 회수 이북의 광대한 중국 영토를 확보하므로써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1236년부터 큰형 주치의 아들 바투(拔都)를 총사령관으로수브타이를 부사령관으로 임명, 대규모의 서방원정군을 파견, 러시아로부터 유럽대륙 깊숙이 들어가, 헝가리·폴란드의 각지를 공략함으로써, 로마교황 및 유럽 봉건제후(封建諸侯)들을궁지에 몰아넣었는데, 동러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블라디미르 대공 유리 2세의군대를 격파하고 삽시간에 리아잔을 함락시키고, 지방 소도시에 불과했던 모스크바를점령 초토화한 후, 다시 키에프를 공격하여 이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1240) 바투는차카타이의 아들 바이달에게 별군(別軍)을 주어 헝가리를 침공하기 위해 폴란드를침입하게 하였고, 폴란드를 함락한 후에는 당시 독일의 영토였던 실레지엔을 공격,실레지엔의 왕 하인리히 2세는 몸소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폴란드 및 독일 제후의연합군과 함께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니그니츠교외에서 몽고 군에게 참패하여 비장한최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1241). 이 "발시타르의 싸움"에서 몽고 군은수많은 전사자의 귀를 잘라 9개의 큰 포대를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한편 헝가리에 진격한 바투의 군대는 폴란드로부터개선한 바이달의 별군과 합세, 수도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고, 오스트리아로 진격하였습니다.그러나 본국에서 오고타이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오고, 그렇게 되면 쿠릴타이를열어 다음 칸을 추대해야 되기 때문에, 바투의 군대는 여기서 서정(西征)을 멈추고귀환 길에 오르게 되어, 유럽은 몽고의 말발굽에서 일단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유럽, 특히 독일은 황제와 교황간의 수위권 다툼으로 틈이 벌어져 있었고, 중 무장한기사로서 몽고의 경기병(輕騎兵)을 당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고 합니다. 만약 몽고군이계속 서진 하여 프랑스까지 갔다면, 노르만족 이상의 약탈과 살육의 큰 잔치(?)가다시 벌어질 수도 있었으나, 천만 다행으로 대칸의 죽음이 이런 환란(患亂)을 막아주었고, 몽고군의 잔인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인 들은 아시아를 공포의 대상으로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귀환 길에 오른 바투는 남 러시아의 평원에 도착했을때, 투루이의 장남 망구에게 모종의 밀계(密計)를 주어 먼저 본국으로 보내고, 정권변동에 따른 사태의 추이를 예의(銳意) 주시하던 중, 본국에서 이미 칸이 추대되었다는소식을 듣고 볼가강 하류에서 가까운 사라이에 자리를 잡아 러시아 제후들을 다스리며이 지역을 통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영토는 원래 투르크계의 유목민 킵차크족들이것이 였기 때문에 이곳을 킵차크한국(칸국)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칸은 황금색천막에 살고 있어서 금장국(金帳國)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 후 몽고의 러시아 지배는약 200 여 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2) 몽고의 고려 침입

고려가 몽고와 악연(惡緣)을 맺게 된 최초의 동기는 칭기즈칸이부족을 통합하고, 금 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을 토벌 한데서부터 시작합니다.여진족이 세운 금 나라가 내부 분열로 국력이 쇠약해 지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있던거란족이 다투어 독립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고, 칭기즈칸은 그의 조부 때부터 원수가진 이 거란족을 토벌하고,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게 살륙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거란족의 한 무리가 이 무서운 몽고족을 피해서 동쪽으로 도망하다가 결국은 한반도의북부에까지 들어 왔고, 1216년 거란유민이 영삭진(寧朔鎭)˙정계진(定戒鎭)에 침입하여재물을 약탈하고, 황주를 침공하였으며, 1217년 5군(軍)이 태조탄(太祖灘)에서 거란병에게 대패했으나, 1218년 거란 병이 재침 하자 조충 등이 거란 병을 강동성(江東城)으로패주시켰습니다.

이듬해 고려는 조충과 김취려를 보내어 이들을 토벌하고있었는데, 한편 당시 두만강 유역에는 금의 장군 포선만노가 독립정권을 세워 동진이라부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몽고는 고려, 동진과 연합하여 강동성에 웅거하고 있던거란족을 섬멸하고 고려와 외교관계를 수립, 조공을 요구하였습니다(1219) 고려는응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1222년 선주(宣州)˙화주(和州)˙철관(鐵關)에 성을 쌓아몽고에 대비하였습니다.

그 후 몽고 사신 저고여(차고여/札古與)피살사건(著古與被殺事件)이라는게발생하였는데, 저고여는 1221년과 1224년 두 차례에 걸쳐 몽고의 사신으로 고려에파견되었고, 한편, 동진의 포선만노는 칭기즈칸의 서역원정 중, 소식이 막연함을호기로 삼아 몽고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고려에 무역을 하자고 요청해 왔습니다. 이에난처한 입장에 선 고려는 일단 몽고와 동진 두 나라와 통교를 계속하며 정세를 관망하였는데,1224년 11월 공물을 요구하러 온 저고여가 1225년 정월 함신진(咸新鎭/함신진 : 의주)을거쳐 본국으로 돌아가던 중 압록강가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무렵 금(金)나라와동진은 고려와 몽고를 이간할 목적으로 고려를 침범할 때 몽고복장을 하여 몽고의소행으로 가장하고, 몽고 사신이 고려에 들어올 때는 고려의 복장을 하여 습격하기도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는 이 사건이 금 나라 도둑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몽고는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 사건을 고려 침입의 구실로 삼게 되었습니다.이로써 동진과의 관계도 악화되어 1228년 동진(東眞)은 정주(定州)와 장주(長州)에침입하였으나 이를 물리쳤습니다.

오고타이가 칸이 되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장살리타(Salietai/撒禮塔/살례탑/?~1232)가 이를 고려인에게 살해된 것으로 의심하고,함신진(咸新鎭)을 넘어 공격해 왔으나 구주(龜州)에서 박서(朴犀)에게 패하였다가,다시 군대를 정비하여 개경 성의문(省義門) 밖까지 침공해 왔으므로 고려에서는 살리타가있는 안북부(安北府:安州郡)까지 사신을 보내어 강화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이듬해에 살리타는 다루가치(darughachi:達魯花赤) 72명을 남겨 두고 일단 돌아갔습니다.이 때 고려는 무신 정변(1170) 이래 국정이 매우 혼란하였는데, 최충헌이 등장하여사방에서 일고 있던 반란을 과감히 진압하고, 최씨무신정권을 수립하였으며, 그의아들 최우가 교정도감이 되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최우는 몽고가 다루가치를 파견하자, 정권에 불안을느꼈고, 몽고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다하였으며, 반 최씨 세력을 견제할 목적도 있고해서 도읍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고, 다루가치를 철수시키는 등 반몽 태세를 갖추자다시 살리타가 고려에 침입하였습니다(1232) 이 후 몽고의 침입을 연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231년 제1차 몽골군 침입. 살리타[撒禮塔]를 원수로삼아 평주(平州)를 치고 개경에 육박.
1232년 강화도(江華島) 천도.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축출. 몽골군 살리타 2차 침입.김윤후(金允侯)가 지휘하는 부곡민이 처인성(處仁城)에서 항전. 살리타를 사살.
1235년 몽골군 당올대 3차 침입, 용강(龍岡), 삼등(三登), 용진진(龍津鎭), 동주성(洞州城)등을 함락, 동경(東京/경주)까지 침입. 야별초군(夜別抄軍)이 지평(砥平)에서 몽골군격파.
1236년 개천(价川), 죽주(竹州)에서 몽골군을 크게 격파. 강도(江都)에서 대장경의재조(再雕) 시작(고려대장경/ 8만대장경).
1238년 동경의 황룡사9층목탑, 황룡사장륙상(皇龍寺丈六像)이 불탐. 조현습(趙玄習)등이 몽골에 투항, 홍복원의 지휘를 받음.
1239년 몽골군 철수. 몽골 사신이 와서 왕의 친조(親朝)를 조유(詔諭).
1241년 족자(族子) 영녕공(永寧公)을 왕자(王子)라 칭하고 몽골에 보내어 볼모[禿魯花]로삼음.
1247년 아모간(阿母侃)이 지휘, 제4차 몽골군 침입.1249년 몽골, 고려왕의 출륙친조(出陸親朝)를강요. 별초군, 동계(東界)에 침입한 동진군을 격파. 최우 죽고, 최항(崔沆)이 정권장악.
1253년 야굴(也窟)의 몽골군이 제5차 침입. 고종 출륙하여 승천(昇天) 신궐(新闕)에서야굴의 사자와 회견.
1254년 차라대(車羅大) 제6차 몽골군 침입.
1255년 차라대 제7차 몽골군 침입
1256년 수군을 남하시켜 몽골군을 막게 함. 몽골의 차라대(車羅大), 고려왕자의 몽골방문 요청. 차라대 철군.
1257년 최항 죽고, 최의(崔誼) 집권. 차라대의 제8차 몽골군 침입.
1258년 최씨무신정권 붕괴. 충주의 별초군이 박달령서 몽골군 격퇴.
1259년 성주 기알성의 야별초군과 주민 몽골군 대파. 한계성(寒溪城)에서 몽골군격멸. 고종 죽고(1192~), 태자 전 몽골로 감.
1261년 몽골, 요양(遼陽)의 고성(故城) 수리,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摠管府)를둠. 동서학당(東西學堂)교역장 설치.
1269년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웠으나 반년 만에 원종이복위.
1270년 강화에서 환도. 삼별초군(三別抄軍)의 항몽전(抗蒙戰). 삼별초군의 해산명령에배중손(裵仲孫) 등이 항쟁 시작.
1271년 삼별초군, 합포(合浦)˙동래(東萊)를 공격, 금주(金州)를 점령. 세자 심(諶)을몽골에 보냄.
1272년 세자 심이 변발(辨髮)과 호복(胡服)으로 돌아옴.
1273년 김방경(金方慶)이 원군(元軍)과 함께 탐라의 삼별초군을 공략.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達魯花赤摠管府)를둠.
1274 세자 심(39세) 쿠빌라이 딸(홀도로게리미실 공주,16세)와 결혼,이후 5명의 왕(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공민왕)이 원제실의 부마가 됨.몽고 풍습(호복,변발,융복)유행함. 설렁탕, 소주, 포도주, 상화 들어옴. 결혼도감제정으로 조혼 풍습 시작됨
1274년 원(元)이 전함 300척을 만들게 함. 제1차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 일본정벌실패.

1278년 충렬왕, 원의 관리와 원군의 철수 및 고려인송환을 요구.
1280년 일본 정벌을 위해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둠.
1281년 제2차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실패.
1291년 원의 군대와 함께 합단군을 연기(燕岐)에서 격파. 상서성(尙書省) 폐지, 다시중서성(中書省)을 둠.
1292년 개경으로 환도.
1294년 원나라 세조(世祖) 죽고, 동방정벌 중지. 탐라에서 원나라 철수.
1295년 탐라를 제주(濟州)로 고침.
1298년 충렬왕 태상왕(太上王)이 되고, 충선왕(忠宣王) 즉위.  
1308년 원이 충선왕을 심양왕(瀋陽王)에 봉함. 충렬왕 죽고(1236~), 충선왕 다시복위. 서운관(書雲觀) 창설.
1310년 원에서 충선왕을 심왕(瀋王)에 봉함.
1313년 충선왕, 충숙왕에게 전위(傳位), 조카 연안군(延安君) 호를 심양왕(충선왕)의세자로 함.
1316년 상왕(上王), 심왕의 위(位)를 세자 호에게 전하고 태위왕(太尉王)이라 칭함.
1320년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 관리임명을 담당. 원, 상왕 충선왕을 토번(吐蕃)으로귀양 보냄.
1325년 상왕 충선왕 원에서 죽음(1275~).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예문관과 춘추관으로분리.
1332년 상왕 충숙왕 복위하고, 충혜왕은 원나라로 감.
1340년 충혜왕 복위. 원나라의 문제, 고려인 기씨(奇氏)를 제3황후에 봉함.
1343년 원, 충혜왕을 게양(揭陽)에 귀양.
1344년 충혜왕 악양(岳陽)에서 죽고(1315~) ,충목왕(忠穆王) 원나라에서 즉위(~1348).숭문관(崇文館) 설치.
1352년 충정왕 강화에서 죽음(1337~). 변발(辨髮)을 금지. 안흥˙서산˙강화 등지에침입한 왜구를 격퇴.
1356년 원나라 연호 사용을 중지. 쌍성총관부 회복.
1359년 홍건적(紅巾賊)의 제1차 침입. 4만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서경 함락.
1360년 각군 홍건적 무찌르고 서경수복. 강화에 왜구 침입.
1361년 홍건적 10만으로 제2차 침입. 개경 함락, 공민왕 복주(福州)로 파천. 이성계(李成桂),홍건적을 대파.
1363년 문익점(文益漸), 원나라에서 목화씨 가지고 옴.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 신돈(辛旽)을 판사(判事)로 함.
1369년 이성계를 보내 동녕부 공격, 원(元)나라와 절교.
1370년 명나라의 연호 사용.
1374년 공민왕 피살되고(1330~), 우왕(禑王) 즉위(~1389).
1377년 최무선(崔茂宣), 화통도감 설치.
1378년 최영, 이성계, 왜구를 승천부(昇天府)에서 대파.
1387년 왜구를 막기 위해 기선군(騎船軍)을 편성.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이성계, 우왕을 폐하고 창왕(昌王)을세움.
1389년 박위, 대마도(對馬島) 정벌. 왜선 300여 척 격파. 창왕 폐위되고 공양왕(恭讓王)즉위.
1391년 이성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군사통수권을 장악.
1392년 정몽주 피살. 이성계 즉위. 문무백관의 제도 제정.
1393년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결정. 식년문과(式年文科) 실시(33인 급제).

(3) 몽고의 일본 원정

(가) 세조 쿠빌라이
태종오고타이가 죽고 그의 맏 아들 귀위크 칸(貴由/귀유/1246~48)이 즉위했으나, 성격이억세고 완고하였고, 1235년 바투를 따라 유럽원정에 나섰으나, 바투와 사이가 나빠져본국에 소환 도중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의 노력으로 칸을 계승할 수 있었지만,바투는 이를 끝내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서쪽에서 킵차크 한국(汗國)을 건국한 바투와사이가 좋지 못하여 앞날을 우려할 만한 사태가 되었으므로, 후에 바투와 대결하려고대군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고도 하며, 암살되었다고도합니다.

다음으로 몽고의 칸을 계승한 것은 투루이가계의 몽케칸(Mongke Khan/蒙哥汗/몽가한: 1251∼59)으로서,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투루의 맏아들이고,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그의 동생들이 였습니다. 유럽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세웠고, 1248년 정종(定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카라코룸에서 번영을 누렸으며,쿠빌라이로 하여금 중국·티베트·다리(大理:중국 雲南省 서부)·안남(安南)을, 훌라구로하여금 서 아시아 이슬람교의 바그다드 아바스왕조를 정복하게 하였으며(1258), 스스로도남송정벌을 결의, 쓰촨(四川)까지 진군하였으나 병사하였습니다.

몽케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세조 쿠빌라이(Khubilai/忽必烈/홀필열/1260∼94)가 칸을 계승하였는데, 형 몽케 칸이 쓰촨(四川)의 병영에서 병사하자,쿠빌라이는 국도(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는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의 야망에 선수를써서 이듬해 이례적으로 중국의 카이핑부(開平府)에서 쿠릴타이를 소집, 칸의 자리에올랐으며, 중국식으로 연호를 세워(建元) 중통(中統)이라 하였고, 이에 맞서막내가 카라코룸에서 칸에 오르자,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리크부카를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연경(燕京:北京)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1271년 나라 이름을 중국식으로 원(元)이라 하였습니다. 그의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루었는데(1279), 이 시기 쿠빌라이의 관심은일본 정복에 두고 있었으나 동서양을 종횡무진하던 몽고군도 이 일본 정복만은 끝내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 일본의 무가 정치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당시의 일본은 무가시대였는데 이른바 막번체제라고 하는 일본 특유의 봉건제도가성립된 것은 미나모토씨(源氏) 집안의 골육상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の賴朝)와미나모토노요시쯔네(源の義經)는 형제지간였으나, 단노우라(壇の浦)에서 헤이씨(平氏)를멸망시킨 동생 요시쯔네는 혁혁한 공을 세운 개선장군으로서 당당한 모습으로 수도쿄오토(京都)로 돌아와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카마쿠라(鎌倉)에있던 요리토모는 요시쯔네에게 냉담했는데, 일찍이 요리토모는 요시쯔네와 친형제지간이면서도부하처럼 대하였고, 요시쯔네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것을 시기하였기 때문입니다.또한 요시쯔네가 타이라노토키타다(平の時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에 대하여분개하고 있었습니다.

요시쯔네는 요리토모의 화를 풀기 위해 카마쿠라 부근까지가서 요리토모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나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지만, 요리토모는 이를거부하고 카마쿠라에 들어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으며,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를보내어 요시쯔네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요시쯔네는 쿄오토로 돌아와고시라카와법황(後白河法皇)에게 간청하여 요시쯔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아 내고,토벌에 필요한 무사들을 동원하였으나, 동원된 군사는 겨우 300기에 불과 하였습니다.고시라카와법황은 이런 사실을 알고 이번에는 요리토모에게 요시쯔네를 치라는 명령을내렸습니다.

요시쯔네는 나라의 요시노(吉野)등으로 몸을 숨기면서토호쿠(東北)지방의 히라이즈미(平泉→이와테현 소재)까지 도망하였으나, 더 이상피할 은신처를 찾지 못해, 자살로서 30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이에 그 형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카마쿠라를 근거지로하여 전국을 지배하기시작하여, 1192년 고시라카와법황이 죽자 세이이 다쇼군(征夷大將軍/정이대장군)에임명되어 카마쿠라 막부(幕府)를 열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싸움에서 활약한무사들에게 토지를 주어 주종관계를 맺어 부하로 삼았으며, 그 중에서 유력한 자를관리에 임명하여 각지로 파견하는 등 전국적인 군사권과 치안권을 장악하게 되어실질적인 일본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로써 카마쿠라 막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다) 호쿠죠오 시대
요리토모는 1198년 사가이강(相模江) 교량 낙성식에 참석했다가 돌아 오는 길에 말에서떨어진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 해 정월 53세로 죽고, 장군이 된 자는 장남 요리이에(賴家)였으며당시 겨우 18세,...그의 어머니인 호쿠죠오마사코(北條政子)는 아버지인 호쿠죠오도키마사(北條時政)와함께 아들로부터 모든 권한을 박탈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요리이에가 반발하자 마사코는 아들인 요리이에를 이즈(伊豆)의 슈젠사(修禪寺)라는절에 유폐시키고, 얼마 후 부하를 시켜 죽이고, 1203년 9월 요리이에의 동생 사네모토(實朝)를쇼오군(將軍)으로 추대,...당시 그의 나이 12세였고, 토키마사는 나이 어린 장군을제멋대로 조종하여 막부 제일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1219년 정월 3대 쇼오군 사네모토는 그의 조카인 구교(公曉=요리이에의아들)에게 살해당하고, 구교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여, 미나모토 가문은요리토모로부터 겨우 3대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을 빚으면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쿄오토(京都)의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은 미나모토 가문의 혈통이 끊겼다는 사실을 듣고, 1221년5월 막부의 실권자인 요시토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전국 무사들에게 내렸습니다.이에 마사코는 막부의 무사들을 불러모아이들을 설득하고, 즉시 쿄오토로 출진, 고토바상황의군사를 진압하고, 고토바상황을 오키(隱岐)로 유배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황 쪽에가담했던 귀족들과 무사들을 엄하게 벌하였는데, 이것을 죠오쿠의 난(承久の亂)이라고합니다.

(라) 몽고의 일본 침입
고려를 지배하게된 몽고는 일본 원정을 위해서 고려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요구를강요하였습니다. 몽고는 1266년 일본에 조공(朝貢)을 받기 위해 병부시랑 흑적을일본에 파견하였는데, 풍랑으로 뜻일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고, 1268년에는 고려의반부를 사신으로 보내어 원나라와 고려의 국서(國書)를 일본에 전달하였습니다. 국서의내용이 수교(修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상 예속(隸屬)을 강요한 것으로써, 일본의실력자 호쿠오죠는 단연 거부하였습니다. 그 후 원에서는 여섯 차례에 걸쳐 해마다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일본은 끝내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격노한 쿠빌라이는 정동군을 일으켰는데, 원정군의규모는 원군 주력이 2만, 고려군이 5천 3백, 기타 수부(水夫) 잡부(雜夫) 5천 여명이가세하여 3만 명이 넘었습니다. 원군 주력부대의 총사령관에는 몽고인 혼도(홀돈)가그리고 부 사령관에는 고려인 홍다구가 임용되었고, 고려군의 사령관에는 김방경이맡았습니다. 몽고는 고려에 군선(軍船), 무기, 군사 식량 등의 준비를 강요하였고,1274년 10월 3일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은 900여척의 군선에 나누어 타고 합포(合浦)를출발하여 일본으로 출진하였습니다. 몽고군은 5일에는 쓰시마(對馬)를, 14일에는이키(壹岐)섬을 점령하였고, 19일에는 하카타(博多)까지 침공하여 다음 날인 20일에는큐우슈우에 상륙하였습니다.

일본군도 분전했으나 몽고군의 철포(鐵砲)와 화살에화약을 장치한 화전(火箭)의 사용과 집단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사상자가속출하여 내륙 다자이후(大宰府)로 후퇴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일본 지리에 어두운몽고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배로 철수하였는데, 그런데 그 날밤 갑자기 태풍이불어 닥쳐 하카타만에 정박 중이던 몽고의 군선이 거의 침몰되고 병사들이 많은 피해를입어 철군하였습니다. 이 때 몽고군 1만 3천 5백명 정도가 익사했다고 합니다.(文永の役)

다음 해인 1275년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종속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집권 토키무네는 사신의 목을 베고 단호히 거부하자,1276년 남송의 임안을 점령한 몽고는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2차 원정을 서두르게되었습니다. 이어 1279년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다시 사신을 일본에 보냈으나역시 참수(斬首)당하였고, 뿐만 아니라 몽고군의 재 침입에 대비하여 하카타만(博多灣)에방루를 쌓고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1281년 6월, 동로군(몽고/한인/고려) 5만과 강남군10만으로 편성된 원정군은 하카타만에 도착, 일본측이 해안 수비를 강화하고 완강히대항하였기 때문에 상륙에 실패하였습니다. 밤이 되자 일본군은 작은 배를 타고 와서,몽고군의 배에 접근하여 횃불을 던져 배를 불태웠고,... 몽고군도 이 작전에는 고전을면치 못하고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철수하여 대기하고 있었는데, 강남군은당초 이키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변경하여 히라도(平戶)로 향하였기때문에 양 군은 7월에야 합류할 수 있었으며, 총공격을 눈앞에 두고 키타큐우슈 일대에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몽고군은 다시 아무 소득 없이 철수하였습니다. (弘安の役)

몽고는 이 이후에도 일본 원정의 뜻을 버리지 않고1282년 제 3차 원정 계획을 세웠지만, 고려, 중국, 베트남 등에서 몽고에 대한 저항운동이활발히 전개되자, 일단 원정은 중단되었지만 쿠빌라이의 일본 정복에 대한 집념은잠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79세의 고령으로서 사망하기 전해인 1293년에도 원정을계획하고 고려에 막대한 수의 함선과 군량의 준비를 명하였다가, 1294년 쿠빌라이칸의사망과 함께 일본 정복 야욕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몽고의 일본원정 실패의원인은, 몽고군이 다른 나라의 군인과 섞인 혼성군으로 이루어 졌고, 고려의 민중과군대가 몽고에 저항하고 있었고, 시기적으로 태풍의 계절을 택해 패전을 자초하였다고할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 태풍을 신(神)이 가져다 준 바람(風)이라하여, 카미카제(神風)라 하였고, 또한 신이 수호해 주는 나라라고 자긍심을 부추겨일본의 신도(神道)가 이때부터 더욱 팽배해 졌으며, 태평양 전쟁(1941~45)에서 미국에게밀리자 나이 어린 청소년을 카미가제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사지로 내몰아 안간 힘을다했으나, 결국 일본의 군국주의는 막을 내리고 우리는 광복을 찾았으나, 이 카미가제특공대에 한국의 청소년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 카마쿠라막부의 붕괴
몽고군과의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막부는 몽고군의 침입을 간신히 방어할 수 있었지만,서국(西國)의 어가인(御家人)들은, 이 이후에도 키타큐우슈우(北九州)연안에서의방비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만 늘어났고, 어가인의 역할에대해. 막부는 은상의 토지를 줄 수 없는 형편에 있어서, 막부에 대한 어가인의 불만은차츰 강해졌습니다. 또한 어가인 집에서는 영지를 형제들에게 나누어 상속하였기때문에 상속 때마다 영지가 세분화되었으며, 상업의 발달로 지출이 늘어나면서 생활고가한층 가중되었고, 어가인들 사이에는 토지를 매입하거나 매도하는 자가 늘어나면서,막부를 지탱하던 어가인 제도가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막부의 집안을 어가라 하였고,황실의 집안을 공가라고 일본에서는 불렀습니다. 어가인 중에 슈고(守護)는 그 지방의 군사 및 반란 진압을 맡았고, 지토오(地頭)는 공납(年貢) 징수 및 토지 관리 등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다이묘(大名)는 지방 정권을 맡은 영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정의 혼란 속에서 카와찌(河內=지금의 大阪)의 쿠스노끼마사시게(楠木正成)를비롯한 각지의 무사들이 천황 편에 가담하여 잇달아서 봉기하자, 막부는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등을 대장으로 해서 대군을 보내어 정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부터 막부에 불만을갖고 있던 타카우지는 갑자기 천황 측에 가담해 막부 측을 공격하자, 그 때까지 사정을살피고 있던 무사들이 잇달아서 천황 측에 가담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닛타요시사다(新田義貞)가일족을 거느리고 카마쿠라를 공격하여 1333년 호쿠죠타카토키(北條高時)에게 자살을명하므로 해서 카마쿠라 막부는 멸망하였고, 아시카가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바쿠후를 열었으나(1336) 지방 정권에 불과 하였고, 슈고 들이 세력을 확장하여 슈고다이묘가 되었고, 다시 전국시대가 되면서 전국다이묘가 되어 혼란과 분열을 거듭하다가, 이 후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나타나 재통일 할 때 까지 이른바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 동서간의 교류- 초원 길. 비단 길, 바닷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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