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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구와타와 함께 선수 생활을 한 조성민은 구와타를 가장 존경하는 투수로 꼽았다.(사진 김수홍) |
7월 19일 방송국 스튜디오 안에 있는데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 중계 도중이었다.
구와타 마스미 선배가 한국에 왔으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깜짝 놀랐다. 한국에 돌아온 2002년 이후 구와타 선배를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구와타 선배를 처음 본 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1996년이다. 정식 입단 전이던 1995년 11월 미야자키에서 열린 가을 캠프에 참가하긴 했지만 그때는 구와타 선배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 전에 구와타 선배의 피칭을 TV로 보긴 했다. 1994년 히로시마아시아경기대회 때였다. 숙소에서 TV를 켜니 요미우리와 주니치 드래건스가 우승을 건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이때 투수가 구와타 선배였다. 정말 잘 던졌다. 같은 투수가 보기에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때 이후 구와타가 어떤 선수인지 알아봤다. 당시는 구와타 선배가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와 함께 ‘교진의 세 기둥’으로 칭송 받는 에이스였다.
구와타 선배는 1995년 팔꿈치를 다쳐 수술을 받았다. 1996년에는 가와사키 2군 구장에서 훈련을 했다.
구와타 선배는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다. 1년 내내 외야에서 짧게는 40분, 길면 한 시간 러닝을 했다. 구와타 선배가 달린 워닝트랙 쪽 잔디가 자라지 않아 ‘구와타 로드’가 생겼다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다.
신인이던 나도 2군에 있던 터라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 있었다. 대화도 많이 했고 식사도 자주 같이 했다.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구와타 선배와 시간을 보내면서 가장 존경하는 투수의 이름이 바뀌었다.
그 전엔
선동열 선배였지만 일본에 진출한 뒤론
구와타 마스미다. 대화를 나누거나 플레이를 볼 때면 정말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가령 노 스트라이크 스리 볼을 만든 뒤 타자를 잡는 볼 배합은 절로 무릎을 치게 했다. 공 하나라도 다음 공과 그 다음 공의 조화를 생각하면서 던졌다.
구와타 선배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일본에서 배운 영어도 수준급이다. 팔꿈치 수술한 뒤 와인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몇 년 만에 소믈리에 수준이 됐다.
원산지, 포도 품종, 양조장 등을 맞추는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도 어김없이 정답을 내놓았다. 어릴 때는 놀 만큼 놀았다고 한다. 노는 맛을 알아야 나중에 절제도 할 수 있다는 게 구와타 선배의 생각이었다.
구와타 선배는 운전을 할 때도 핸들을 꽉 쥐고 앞만 보고 달리지 않는다. 그러면 쉽게 지친다는 것이다. 핸들을 이리 저리 흔들어보고 전후좌우도 살펴야 사고 위험이 줄어든다고 했다. 야구와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구와타 선배는 정상에 서 봤고 부상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부침이 있다. 구와타 선배는 좋을 때든 나쁠 때든 한결같이 스스로를 관리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늘 성실하게 대했다.
동료들에게도 늘 친절했다. 그래서 동료의 사랑을 받았다. 1997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요미우리에 입단했을 때 화제가 됐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워낙 스타일이 달라 고교 때처럼 단짝은 아니었다. 구와타 선배는 와인만 마시지만
기요하라는 주종 불문이다.
구와타 선배의 삶의 방식이 부럽다. 품위와 멋이 있다.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여유가 있어도 품위를 갖추지 못한 이가 많다.
문화 차이는 있지만 나는 한국프로야구의 고액 연봉 선수들도 좀 더 멋있어져야 한다고 본다. 스타가 멋있게 보여야 팬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다. 구와타 선배는 멋있는 사람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만 훈련량 자체가 엄청났던 건 아니다. 필요하다 싶은 훈련이라면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었다.
1997년 시즌이 끝난 뒤 구와타 선배가 제안해 호주에서 함께 개인 훈련을 했다. 아침식사를 한 뒤 오전 10시에 운동을 시작해 워밍업과 러닝, 캐치볼을 하다 보면 오후 1시가 된다. 그 뒤 체육관에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구와타 선배는 일정을 거른 적이 없다. 1996년과 2000년 한국에 왔을 때도 아침에는 거르지 않고 조깅과 산책을 했다. 외국에 나가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1999년 팔꿈치 수술을 할 때 구와타 선배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해 팔꿈치를 다쳤을 때 진료한 의사가 사사키 가즈히로를 수술했던 이다.
이 의사는 처음에는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가 1999년 봄 부상이 재발했을 때는 수술을 하라고 했다. 7개월가량을 흘려보낸 셈이었다. 그때가 일본식 나이로 스물여섯 살이었다.
구와타 선배는 “네 나이면 빨리 수술을 해서 1년에서 1년 반 정도 재활해 복귀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일본에도 좋은 의사들이 있지만 이왕이면 미국에서 수술할 것을 권했다. 내 집도의가 구와타 선배를 수술한 프랭크 조브 박사다.
1997년 구와타 선배가 재기 등판했을 때가 생각난다. 마운드에 오른 뒤 투구판에 다쳤던 오른쪽 팔꿈치를 갖다 댔다.
역시 스타는 스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동작 하나에 팬들은 큰 감동을 느끼는 것 아닌가.
구와타 선배 뒤로 많은 투수들이 복귀전에서 그 동작을 흉내 냈다. 사실 나도 수술을 하고 복귀했을 때 구와타 선배처럼 해볼까 싶었지만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다.
입단 전 투구는 직접 보지 못했지만 아마 시속 140km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그리 빠른 구속은 아니었지만 컨트롤이 워낙 좋았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가 굉장히 영리한 투수였다.
투수로서 구와타 선배는 무엇보다도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선수’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피칭뿐만 아니라 수비와 타격, 주루 플레이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즐기면서 야구를 했다.
방송이 끝난 뒤 구와타 선배의 숙소를 찾아 저녁을 함께하며 회포를 풀었다. 역시 예전처럼 체육관에서 1시간 넘게 운동을 하고 난 뒤였다. 메이저리그와 일본야구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구와타 선배는 야구 기술은 일본이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힘에서는 역시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아시아인 홈런 타자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이 점은 나도 동감한다.
그리고 요미우리 구단, 한국프로야구, 은퇴한 뒤 진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다음날 고교 시절 마운드에 올랐던 잠실구장에 간다고 하길래 “그 시절에 비해 달라진 게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SPORTS2.0 제 114호(발행일 7월28일) 기사
첫댓글 길어서 읽기 귀찮음 p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