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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
金甲淳, 창씨명 金井甲淳, 1872~1961
1910년 아산군수로 있으면서 국고 횡령. 1921~24년 중추원 참의
1920년 충청남도 도평의원. 1941년 흥아보국단 충남 도위원, 임전보국단 이사
"망국을 기회로 국고를 착복하고"
김갑순은 한말|일제초기 관료 출신으로서 관권을 이용하여 수탈적으로 치부하기 시작하여,
일제하에서는 철저하게 부일배 노릇을 하면서 거부가 된다. '돈만 있으면 개도 멍첨지이다.'라는
속담처럼 돈만 있으면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한 것이었다.
김갑순은 본래 공주감영의 심부름꾼이었다. 1872년에 출생하여 시장터에서 국밥장사를 하던
편모 슬하에서 외아들로 자라나 10대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20세가 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투전판에나 쫓아 다니다가 공주감영의 사령 군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노름꾼을 잡으러 어떤 곳에 갔다가 묘령의 미인을 만났다.
이것이 그의 출세에 행운을 가져왔다. 김갑순은 그 여자와 의남매를 맺고, 그 여자를 충청감사의
소첩으로 중매하였다. 그로부터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렸고, 의남매를 맺은 여자의 도움으로
총순(總巡)으로부터 충남 각지의 군수를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자필로 쓴 관문(官文) 이력서에 의하면 1900년 충북 주사 판임 8등, 1901년 중추원 의관,
1902년 내장원 봉세관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치부하기 시작한 시기는 1902년 내장원 봉세관이 되면서부터였다.
특히 1903년 그가 충남의 노성(魯城)군수로 있으면서 봉세관을 겸임하고 있을 때, 연산군(連山郡)에
있는 선희궁(宣禧宮:조선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거처) 소유의 궁장터 수천 마지기의
사음(舍音:마름)을 그의 매부인 하치관(河致寬)에게 맡겼는데, 그 하치관이 이 궁장터의 소작료를
한 마지기당 벼 한 섬씩 초과징수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또 그 곳의 친위영 군대의 양식을
마련하기 위한 군영 농지의 사음도 역시 자기 매부에게 맡겨, 법정 세액 외에 터무니없는 소작료를
받아내 백성의 원성을 샀다.
1910년 경술늑약 당시 김갑순은 아산(牙山)군수로 있었는데, 당시 군수에게는 상납금(上納金)
징수 권한을 비롯하여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으므로, 이 세금들을
착복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1910년 한일합병의 조서(詔書) 중에도 군수가 한꺼번에
치부할 수 있는 법적근거가 되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즉, 3년 이상 묵은 모든 국세는 탕감해준다는
조항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3년 이상이나 국세, 지방세를 백성으로부터 받지 않을 군수가 어디
있었겠는가. 이미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받아들이고도 그것을 즉시 한양에 보내지 않고 장사나
고리대에 그 돈을 사용하면서 국고를 유용해온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그러던차에 공전범포탕감령
(公錢犯逋蕩減令)이 공포되자 군수들은 막대한 국고금을 사유화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부동산 투기의 선구자"
김갑순도 이렇게 하여 거부가 되어 고향 공주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지주가로서 토지경영에 주력한
이외에도 땅투기에도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는 대전의 발전 가능성을 미리 내다보고
대전 부근의 땅을 사들이기로 작심하고는 돈을 끌어들일 수 있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먼저 공주에서 제일 가는 명문거족의 집을 산 후 머슴들에게 술값을 주어 장바닥에 나가
술을 마시면서 김갑순의 위세와 돈을 자랑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바닥에서
'김갑순이 공주에서 가장 좋은 집을 샀으며, 충청도 제일의 부자'라고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대전의 많은 땅을 사들이기 위해서는 다음해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그 동안 대전의
발전가능성에 대한 소문이 새어 나가는 것을 염려하여 이자돈을 얻어서라도 땅을 미리 사려고
이와 같은 일을 꾸민 것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김갑순 같은 부자에게는 안심하고 돈을 맡겨도 된다는 생각에서 이자는 싸더라도
돈을 늘려 달라고 맡겨오는 사람들이 차차 늘어났다. 이제 김갑순은 남의 돈을 이용하여 헐값으로
대전 부근의 땅을 사들이고 그 밖에 충청도 일대의 많은 땅들도 남몰래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1904년 경부선이 개통될 당시 대전은 허허벌판이었지만, 1914년 호남선이 이곳을 기점으로
다시 이어지자 교통의 중심지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고, 인구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김갑순은 일제 관료들과 결탁하여 충청도청을 대전으로 이전시키도록 했다.
결국 1932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오자 매평 15전 내외에 불과했던 땅이 평당 수백원으로
폭등하여 거액의 폭리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대전 시가지의 약 40% 정도를 김갑순이 소유하고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많은 부를 축적하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땅을 빌려준 대가로
받는 수입 이외에도 수십 배의 지가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이 재산을 더욱 증식케 한 것이다.
그는 운수사업도 했고, 온양과 유성 등지 온천을 개발하여 호텔을 지었으며, 흥행업에도 손을 대어
경심관이라는 극장을 짓기도 했다. 또한 언론사업에도 투자하여 대주주로 군림했다.
그의 재산규모는 실로 엄청났다. 1930년 말까지만 해도 공주, 대전 등지에 산재해 있는 논이
1267정보, 밭이 254정보, 기타 1850정보(대지 등 포함)로 모두 3371정보에 이르렀다.
이를 평수로 환산하면 1정보가 3000평이니까 1011만 3000평이 되는 엄청난 땅을 소유한
거대지주였던 것이다. 이 중, 논에서의 소작료 수입만을 따져도, 당시 통상 100정보를 소유한 지주를
천석꾼이라고 일컬었으니 그는 만석꾼도 훨씬 넘는 충남 제일의 거부로 성장했던 것이다.
({충청남도 대지주 명부}, 1930년 말)
이처럼 그가 당대의 만석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관권을 이용하거나 땅투기를 통하여 부를 축적한
방법 이외에도 농민수탈을 통해 부를 증식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당시의 신문기사를 살펴보자.
충남 공주에 사는 부자 김갑순 씨는 대전역 부근에 있는 300여 두락의 토지에 대하여 작년에는
소작료를 매두락에 20원 내지 25원씩 현금으로 미리 받았는데, 그 소작인들은, 작년 가을에 곡식값이
폭락됨으로 인하여 가을에 수확한 것은 봄에 낸 소작료의 3할에 불과할 뿐 아니라 높은 변리로 빚을
얻어서 소작료를 낸 자는 원리의 이자도 부족하여 소작인 간에 원성이 높더니, 금년 봄에는 다시
공주군 반포면 공암리 이학제(51)란 사람이 마름이 되어가지고 와서 작년에 맛들인 선도지를
또 받기 위하여 매두락에 10원씩 받아감으로?자연 소작인이 변경되는 일이 많아 일반 작인간의
여론이 분분한 바.
({동아일보}, 1921. 5. 21)
이 기사는 지주와 마름이 농민을 수탈하는 방법을 극명하게 설명해 주는데, 농사를 짓기도 전에
봄에 소작료를 현금으로 미리 받아들여 그 돈을 여러가지 축재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김갑순은 소작인들을 철저히 수탈하여 만석꾼 거대 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작료 수입 이외에도 중요한 수입원은 대전에서의 대지료 수입이었다.
김갑순 씨 대전 소유지 대지료 5배 인상. 매평 5리(厘)가 2전 5리로 2백여 주민의 중대 문제.
대전읍 일대에는 공주 부호 김갑순 씨의 소유 토지가 상당히 있는바, 근일 200여 호에 달하는
다수한 가대(家垈)에 그 요금을 일시에 5배나 올리어서 징수한다고 한다.
이제 그 진상을 알아보면, 서정(西町), 대흥정(大興町), 춘일정(春日町) 등에는 김갑순의 토지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이 절대다수인 바, 작년 매월 매평 5리 표준이던 것으로 60평이면 매월 30전씩
받아가던 것을 이제부터는 매월 2원 50전씩 5배나 인상하여 받아간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2. 7)
이 때가 바로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가던 때였다. 그 바람에 땅값이 몇십 배로
뛰어 도깨비방망이 요술처럼 재산이 불어났다. 그는 대지료를 5배 올린 것 이외에도 자기 돈으로
자기 사람을 시켜 제 땅을 비싸게 사들이는 등, 땅값을 올리기 위해 고등술책을 부린 것이다.
"역대 조선 총독 열전각을 지어 충성심 과시"
김갑순은 일제 침략 초기에는 중추원 참의, 충청남도 평의회 의원 등 식민지 지배기구에 참여하여
일제침략의 첨병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들로부터 각종 이권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받아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다. 가령 총독부 고관이 공주에 오면 으레 집으로 데려와 대접했고, 꼭 만나야 할 고관이
안 만나주면 순금(純金) 명함갑이나 순금 화병 한 쌍씩을 뇌물로 건네는 방법까지 서슴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김갑순은 일제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당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던
금강도교(金剛道敎)의 비밀을 염탐하여 왜경에 밀고하였다.
이에 교두 이하 각 간부들이 투옥되었으며, 왜경의 후원하에 금강도교 소유인 단군성전을 압수하여
제멋대로 역대 총독 열전각(列傳閣)이라는 해괴한 건물을 건축하여 역대 조선총독의 사진을 안치하고
강제로 이에 참배케 하였던 것이다. 그 때 피검된 교도 63명 중 7명은 악독한 고문에 못이겨 무참하게
옥사하기도 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부일협력은 극에 달하였다. 무수한 동포의 희생을 대가로
임전보국단의 이사로서 혹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서 혹은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충남대표로서, 그리고 그외 각 부일단체의 간부로서 내선일체와 황도실천에 초인적인 활약을 하여
혁혁한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참고문헌 : {충청남도 대지주 명부}, 1930년대 말. {동아일보}, 1921. 5. 21, 23.
자료출처 : 박천우(장안전문대 교수/한국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갑순의 축재비결은 탁월한 이재술과 ‘인맥관리’
김갑순의 성공비책은 탁월한 축재술과 ‘인맥관리’. 피붙이 가운데 유력자가 별로 없었던 그는 자식들의
‘정략결혼’을 통해 인맥을 구축하였다. 김갑순은 호적상 아들 일곱과 딸 넷을 두었다. 결혼 전에 사망한
4남·6남을 제외하고는 전부 지역유지나 세도가 집안의 자제들과 결혼시켰다.
대표적인 케이스는 장남(1899년생) 종석(鍾錫)과 장녀 정자(貞子. 1909년생)의 경우다.
종석의 첫 부인은 전 내장원경(內藏院卿, 종2품 칙임관) 김윤환(金閏煥)의 딸 김학필
(金學筆. 1932년 사망)이었고 두번째 부인은 도지사를 지낸 이규완(李圭完)의 딸 이절자(李節子)였다.
장녀 정자는 충남 아산 둔포 출신의 윤명선(尹明善)과 결혼하였다. 윤씨는 좌옹 윤치호(尹致昊)와는
5촌간으로 그의 부친은 치오(致旿)는 한말 학부(學部, 현 교육부)학무국장 출신으로 ‘한일병합’후
중추원 찬의를 역임하였다. 윤명선 본인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일제의 괴뢰정부 만주국의
국무성 사무관, 간도성 차장 등을 지냈다.
이밖에 7남 종소(鍾昭)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의 손자인 이병길(李丙吉. 후작 습작, 당시 경성부
옥인동 거주)의 딸과 결혼하였다. 다른 자식들 역시 모두 경성(京城, 현 서울) 거주 유명인사들의
자제들과 혼인시켰다.
김갑순이 여러 사돈 중에서 특별히 가까이 지낸 사람은 장남의 장인이었던 김윤환이었다.
김윤환은 공주지역에서 신망이 두터운데다 명망가로 평판이 나 있었다. 김갑순은 그의 신망을 사업에
활용할 욕심이었다.
김갑순이 거부로 성장한 배경에는 남다른 축재술과 함께 ‘인맥관리’가 큰 역할을 했다.
그의 회갑(1932년 5월)때 명사들이 보내온 축시(祝詩)를 모아 출간한 『동우수집(東尤壽集)』
(‘東尤’는 김갑순의 아호임)에는 당대의 거물인사들이 총망라돼 있다.
박영효(朴泳孝. 후작), 이해승(李海昇. 황족, 후작), 민영휘(閔泳徽. 황실 외척, 자작), 민병석
(閔丙奭. 중추원고문), 이창훈(李昌薰. 이근택 아들, 자작), 권중현(權重顯. 을사오적 중 1인, 자작),
윤치호(尹致昊. 전 학부협판), 이윤용(李允用. 중추원고문, 남작), 민건식(閔建植. 중추원 참의, 남작) 등.
자료출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