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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자전거공업주식회사
한국 자전거산업의 개척자, 개인에게는 추억의 그 이름 (자전거 생활 2003년 3월호)
한국 자전거를 대표하는 삼천리자전거는 학산(鶴山) 김철호(1905~1973) 라는 걸출한 기업가에 의해 태동되었다. 학산은 일본에서 기계부품 생산으로 큰 돈을 벌어 해방직전 귀국해 경성정공(주)을 설립, 국내 자전거산업의 뿌리를 내렸다.
1952년 최초의 국산자전거 3000리호를 선보이면서 기아산업(주)으로 회사명을 바꾼 이후 차례로 오토바이와 3륜차, 트럭과 승용차까지 생산해 지금의 기아자동차를 일궈냈다. 자전거 부문은 1979년 기아에서 분리되었지만 지금까지 국내시장을 리드하는 한국 대표 자전거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보통의 한국사람들에게 삼천리자전거는 추억이다. 아버지가 처음 사온 자전거, 비틀거리며 처음 배웠던 자전거, 장터의 일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짐을 실어나르던 그 경이의 자전거…. 6.25가 한창이던 1952년 최초의 삼천리자전거가 나왔으니 50년 이상 삼천리의 이미지는 국민들 머리 속에 각인되어온 셈이다. 이름은 남북한을 통틀어 한반도의 길이인 3천리(약 1천200km)에서 따왔지만 지금은 그 반쪽 땅만 달리고 있으니, 삼천리라는 이름에는 통일의 염원도 알게 모르게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한국인에게 삼천리자전거가 추억의 이름이라면, 산업적인 면에서 삼천리자전거는 한국 기계공업의 초석을 다진 개척자 역할을 해왔다.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만들어낸 자전거는 지금으로 보면 항공기를 생산한 것과 비교할 정도로 첨단공업이었고, 자부심을 가질 만큼 국가적인 대사건이었다.
내년 삼천리는 환갑인 60주년을 맞는다(2003년 현재). 설립자인 학산(鶴山) 김철호(1905~1973) 회장이 1944년 일본에서 귀국해 경성정공(주)을 창업한 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 경성정공은 현재의 기아자동차 전신이기도 한데, 세계적인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한 기아자동차도 최초에는 자전거산업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삼천리자전거 또는 기아자동차의 첫장은 193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다.
창업자 김철호 회장, 일본에서 기계업으로 성공
창업자 김철호 회장은 1905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학산은 마을 뒷산인 유학산에서 따온 것으로 애틋한 고향사랑을 엿볼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직후 일제의 가혹한 수탈정책으로 김 회장은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농촌에서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17세 때인 1922년 6월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당시 오사카는 명치유신(1868년) 이후 개발이 가속화되어 1920년대 들면서 한신(阪神)공업지대는 기계산업이 크게 번창해 있었다.
이런 공업도시 분위기에 압도당한 김 회장은 기계기술자가 되기로 마음 먹고 처음에는 막노동을 전전하다 3개월만에 철공소 견습공이 되어 기술자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김 회장이 들어간 회사는 볼트와 너트를 깎는 三和製作所였는데, 그는 공업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그런 노력의 결과 학교를 졸업한 1926년에는 조선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지배인으로 발탁된다. 그는 회사의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볼트와 너트 외에 새 사업으로 자전거판매를 시작했다.
당시 김 회장은 일본에서 각광받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자동차 포드 T형을 보고 자동차공업의 무한한 가능성을 예감했지만 당장은 자동차공업의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는 자전거에 관심을 돌린 것이다. 그러나 20년대 말이 되면서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은 태평양 반대쪽 일본경제까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삼화제작소도 결국 문을 닫으면서 직원들에게는 밀린 월급 대신 기계를 나눠 주었는데, 김 회장도 선반 한대를 받았다. 김 회장은 창고를 빌려 이 선반 한 대로 볼트와 너트를 깎으면서 삼화제작소 간판을 다시 내걸고 창업하게 된다(1930년 3월).
이후 삼화제작소는 신용과 철저한 품질관리로 성장을 거듭하는데, 1931년 만주사변에 이은 1937년 중일전쟁 등으로 군수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주문이 폭주해 제2, 제3 공장을 건설하고 종업원도 300명을 넘어섰다. 1941년 10월에는 三和精工(株)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자전거산업에 뛰어들 준비를 한다. 하지만 2차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김 회장은 1944년 8월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해 서울에 경성정공(주)을 설립했다. 이듬해 1월 영등포공장을 준공하고 자전거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1년 뒤에는 세 곳에 분공장을 더 세웠다.
이 당시는 중고 부품을 재생하거나 철판을 두드려 만드는 가내수공업 수준이었지만 1946년 5월 일본에 있던 삼화정공팀이 기계설비를 가지고 귀국해 기술수준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한국전쟁 때는 생산설비를 뜯어들고 피난길에 올라 전쟁의 와중에도 부산공장을 세워 1952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전거인 3000리호를 생산할 수 있었다. 최초의 국산자전거 생산과 함께 회사이름도 起亞産業(株)으로 바꿔 마침내 기아시대를 열게 된다.
79년 기아에서 분리, 87년 연산 100만대 돌파
기아산업은 1957년 시흥공장을 완공하면서 자전거용 파이프의 국산화를 이루었고, 본격적인 대량생산체제도 갖추게 된다. 자신감을 얻은 김 회장은 최종목표로 두고 있던 자동차 생산을 위해 1959년 일본의 혼다 및 마쓰다와 오토바이와 3륜 자동차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맺었다. 그 결과 61년 첫 오토바이인 기아혼다 C-100이 나왔고, 이듬해에는 3륜차인 K-360도 시판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기아산업의 주력은 자전거였다.
시흥공장에서 파이프의 국산화에 성공함으로써 자전거 생산량은 월 3천대로 늘어났고 65년에는 미국으로 첫 수출을 했다. 이 당시 기아산업은 프레임과 포크, 림, 스포크 등을 자체 생산했으며 나머지 부품은 국내의 협력업체나 해외에서 수입해 사용했다.
국내 경제가 성장하고 자전거 품질도 좋아져 기아산업의 자전거 생산량은 계속 늘어났다.
1953년 3천대에서 65년에는 2만5천대로 늘었고 69년에는 7만5천대에 이르렀으며, 대미수출액은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이렇게 자전거부문이 비대해지자 69년 3월에는 자전거판매를 전담할 별도회사인 자전거판매(주)를 설립했다.
73년 3월에는 시흥공장의 증설로 연간 40만대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되는 등 자전거사업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자동차와 오토바이사업도 확장일로를 걷게 되면서 자전거사업의 분리를 검토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79년 4월 1일 자전거부문은 三千里自工(株)으로 독립되어 기아산업에서 완전 분리되었다.
82년에는 삼천리자전거공업(주)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듬해 공장을 경남 양산으로 이전했다.
양산공장은 연간 80만대 생산능력을 갖추었는데, 87년에는 국내최초로 연간생산 100만대를 돌파했다.
90년에는 협력업체를 모은 대구 검단공장을 준공했고, 이듬해에는 새로운 C. I(기업 로고)를 발표하면서 레스포(Lespo)라는 새 브랜드도 선보였다.
92년 5월에는 지금도 국내최고의 권위와 규모를 자랑하는 학산배 대회가 창설되었고, 96년에는 고급모델 브랜드인 첼로(Cello)와 아팔란치아(Appalanchia), 블랙캣(Black cat)을 발표했다.
97년에는 건설업 면허를 획득해서 자전거 주차시스템을 개발한다.
99년에는 판매와 생산부문으로 나뉘어 있던 삼천리자전거(주)와 삼천리자전거공업(주)이 합병, 삼천리자전거공업주식회사로 통합되었다.
국내생산 포기, 자전거산업의 대전환기에 적응 성공
90년대 들면서 국내 자전거산업은 큰 갈림길에 서게 된다. 경제성장에 따른 인건비 상승으로 국산 자전거가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급격하게 잃어간 것이다. 그 자리를 대만과 중국업체들이 차지했고, 90년대 후반 들어서는 프레임과 부품 모두 국내생산으로는 수지를 맞출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삼천리에도 결단의 시간이 왔고 결국 2001년 양산공장을 폐쇄하고 충북 옥천에 조립공장만 남게 된다. 대신 중국과 대만 업체에서 OEM 납품을 받거나 중국 공장에 일부 지분투자하는 식으로 생산의 아웃소싱(out sourcing) 체제로 돌아선다. 국내 본사는 신제품 개발과 디자인, 판매, 마케팅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WTO 체제 하의 현대는 국경의 문턱이 점점 낮아져 가고 브랜드만이 살아남는 시대다. 따라서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생산기지를 보다 유리한 해외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하나의 추세이기도 하다. 이는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유명 메이커도 마찬가지로, 자국에서 직접 프레임을 생산하거나 조립하는 경우는 일부 고급 모델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사는 브랜드를 앞세우고 신제품 개발과 판매 기능만 유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인건비가 비싼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대량생산하고 있는 자동차와 달리 자전거는 공장 자동화가 어려운 노동집약적 성격이 강한 것이 생산기지 이전의 이유다. 인건비가 생산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결국 임금이 싼 중국과 베트남, 인도, 동유럽 등지로 생산기지가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삼천리의 경우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수출시장이 사실상 막히게 되어 국내시장에 주력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현재 삼천리자전거는 김철호 회장의 손자인 김석환 대표이사를 필두로 관리본부, 첼로사업본부, 생산본부, 중앙연구소, 영업본부 등 5개 본부에 총 15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생산모델은 첼로와 아팔란치아, 블랙캣, 레스포, 넥스트 등 다섯 브랜드로 어린이용부터 여성용, 접이식, 2인승 탠덤, 전문 MTB와 사이클까지 70여 종이 있다.
지난해 삼천리자전거는 약 70만대를 생산했고 매출은 670억 원에 이르렀다. 이는 국내 자전거시장 전체에서 약 50%에 이르는 시장점유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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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자전거의 산 역사 안태환 고문
“80년대 초까지는 우리가 대만을 앞섰어요.”
1972년 기아산업(주)에 입사해서 30년 이상 삼천리자전거와 함께 해온 안태환(62) 고문은 삼천리자전거의 산 역사인 것은 물론 국내 자전거업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경력이 오랜 현역으로 꼽힌다. 도금과 도장 등 표면처리 기술자인 그는 금성사 연구실에 근무하다가 기아산업에 특채되어 30년 넘게 오직 자전거 한 길을 걷고 있다. 2000년 퇴사했다가 이듬해 고문으로 다시 복귀했으니 삼천리와의 인연은 그의 인생 자체다. “삼천리자전거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6.25 때 고향으로 피난 갔다가 관공서에 붙은 화보에서 최초의 국산자전거가 개발되었다는 걸 보았죠. 전쟁의 와중에서 자전거를 개발한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어요.”
안 고문은 입사 후 직접 겪은 김철호 회장의 일화도 소개해 주었다. 건강이 악화된 김 회장은 산소호흡기를 단 채 휠체어를 타고 출근했고, 밤 늦게 작업장에 들렀다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빵을 한 트럭씩 사주기도 했다고 한다. 안 고문은 “그때는 지금 같은 노사관계가 아니라 정말 인간적으로 챙겨주고 따르는 분위기였다”면서 “김 회장이 진심으로 직원들을 챙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자전거만은 살리기 위해 독립시켰다
삼천리자전거가 기아에서 분리될 때의 뒷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자전거 부문의 덩치가 커진 탓도 있지만 당시 기아산업이 경영난에 봉착해 매각될지 모르는 위기에 처하자 김 회장이 처음 일으킨 자전거만은 계속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리해 김상문 사장(김 회장의 아들)이 별도로 자전거를 맡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기아에서 독립했지만 이후 상당 기간 삼천리는 기아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70~80년대 자전거의 전성기 때 이야기가 나오자 안 고문의 목소리에는 힘과 추억어린 감회가 배어난다.
“그때 삼천리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65%에 달해 독과점품목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가격통제를 받았어요. 그래서 매출은 많았지만 실제 이익은 높지 않았죠. 수출에서는 큰 재미를 봤어요. 미국의 대형 유통업체인 ‘Toys R US’에 대량납품을 했는데, 88년에는 연간 60만 대나 수출했고 일본에도 나갔어요.”
70년대 거리를 누빈 자전거인 슈퍼스타, 로드스타, BMX와 국내 실정에 맞게 변형된 BMX, 여성용 하이라이저(높은 라이저바를 달았음)의 높은 인기도 추억담으로 이어졌다.
80년대까지 삼천리자전거가 미국과 일본에서 히트할 수 있었던 것은 저가품 위주의 중국이나 대만제품과 선진국에서 만든 고급제품 사이 틈새시장을 잘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국내의 임금이 급격하게 올라가고 중국과 대만의 기술력이 높아지면서 삼천리자전거의 국제 경쟁력은 점점 떨어지고 만다. 결국 ‘Toys R US’ 납품도 중국 업체로 돌아갔다.
“삼천리는 완성차를 조립, 생산하는 업체지만 기본적으로 자전거산업이 유지되려면 부품업체들의 경쟁력이 있어야 합니다. 중국 제품의 수입을 막기 위해 반덤핑제소를 하고 우리 부품업체들을 살리려고 대구에 협동화단지까지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하면서 사실상 국내의 자전거 공업은 막을 내렸어요. 8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자전거산업이 대만을 앞섰지만 대만은 부품값이 더 싸고 종류도 다양해서 결국은 세계 자전거시장을 석권하기에 이르렀어요.”
안 고문은 우리나라 자전거산업이 대만에 추월당한 원인의 한 가지로 정부의 정책을 들었다. 우리 정부는 조선, 자동차, 중화학 등 중공업 육성에 힘을 쏟았고, 대만은 자전거 같은 경공업에 집중하고 정부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업계의 자발적인 노력부족 탓도 크다.
협력업체들의 중국과 북한 진출 추진
당시 삼천리의 국내 협력업체는 60개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2000년에는 15개로 급감했다. 안 고문은 직접 나서 이들 업체들의 중국진출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해외진출에 부담을 느껴 결실을 맺지 못했다. 또 하나의 대안은 북한이었다. 97년 북한의 자유무역지대로 지정된 나진선봉지구에 협력업체와 함께 진출할 생각으로 안 고문은 북한을 방문해 의향서까지 교환하며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그러나 97년 말 예기치 못하게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로 이마저 무산되고 만다.
결국 부품업체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고 그나마 발 빠르게 움직인 업체는 자동차 부품업체로 전환해서 활로를 찾았다. 현재 국내에 남은 삼천리 부품업체라고는 어린이용 자전거에 다는 플라스틱 바구니와 보조바퀴, 전자혼 등을 만드는 곳 정도다. 미국을 시작으로 자전거의 새 장르를 연 MTB는 국내 도입 초창기에는 큰 실패를 맛보았다고 한다. 90년대초 삼천리는 첫 MTB를 선보였지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소비자들은 자전거는 도로에서 타는 것이고 가벼워야 하는데 굵은 프레임에 커다란 타이어를 끼웠으니 손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소비자들의 반응을 수렴해 본고장인 미국형과 달리 한국 실정에 맞춘 ‘태풍시리즈’를 다시 선보이면서 이번에는 대성공을 거둔다. 안 고문은 “정말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신나는 표정이다.
안 고문은 국내의 자전거공업 기반은 잃었지만 시장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30년간의 경험에서 볼 때 세계적으로도 자전거시장은 등락이 별로 없어요. 경기에 따라 해마다 10~15% 정도 오락가락하죠. 하지만 롤러스케이트나 킥보드 같이 다른 탈것들은 반짝 인기를 끌었다가 빠르게 사라졌어요. 인라인은 조금 경우가 다른 것 같지만 유행의 거품이 없지는 않아요.”
그는 국내 시장규모가 연간 100~150만대 정도로 유지될 것으로 본다. 올해는 경기부진으로 작년보다 조금 떨어졌지만 위기 수준은 아니라는 진단이다. 현재 삼천리가 시험적으로 내놓은 인라인스케이트도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가 신제품 개발에 들어간 상태다.
작년 중국 출장만 21번 다녀왔다는 그는 영원한 ‘삼천리맨’으로서 “보다 품질 좋고 값싼 자전거를 개발하는 것이 언제나 나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환갑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평소에는 충북 옥천공장에서 상주하고 일주일에 두 번 귀경하는 강행군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것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다 누벼야 한다는 노장 ‘삼천리맨’의 정신력에서 기인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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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삼천리는 세계속의 브랜드가 되기 위해 연구개발과 품질개선에 적극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삼천리의 이름에 담긴 염원에 따라 언젠가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삼천리자전거’가 누비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3천리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을 누비는 ‘삼만리자전거’가 되어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천리자전거공업주식회사/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6가 121-61
[출처] 삼천리자전거공업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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