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순교의 땅 나가사키, 일본 기독교의 상징이 되다.
김경옥(한림대 일본학연구소 HK 연구교수)
일본의 종교와 기독교
일본인의 종교관을 나타내는 말 중에 '태어날 때는 신사, 결혼할 때는 교회, 죽어서는 절에 묻힌다'라는 말이 있다. 신도神道와 기독교, 불교가 일본인의 생활과 일체화되어 깊숙이 뿌리 내려 녹아들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일본에서 신도는 일본 전체 인구의 100%, 불교는 거의 70% 이상이 믿고 있다. 이에 반해 기독교 천주교 포함는 1% 내외라고 한다. 생활과 일체화되어 결혼식을 기독교식으로 거행한다고 하는데 왜 기독교 신자만 이렇게 적은 것일까? 그 이유를 일본의 기독교 전파와 관련해서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살펴보자.
쇄국의 땅 일본에 전해진 기독교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15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회 소속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는 동아시아에서 선교하던 중에 말라카에서 한 일본인과 만난 것을 계기로 일본의 가고시마로 건너갔다. 당시 유럽에서 일본 무역은 기독교 선교활동과 하나가 되어있었고, 일본의 다이묘들은 유럽과 교역을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해 유럽에서 온 선교사에게 적극적이었다.
자비에르는 가고시마에서 선교 활동이 생각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서 1550년 당시 국제 무역항이던 나가사키의 히라도로 옮겨 선교를 시작했다. 다이묘 마쓰우라 다카노부는 히라도에서의 선교를 인정했고, 이로써 나가사키에 기독교의 씨를 심었다. 자비에르가 히라도에 머문 한 달 동안 약 100명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히라도에는 지금도 자비에르를 기념하는 자비에르 기념 교회가 있다. 자비에르는 다이묘들의 협조로 교토와 야마구치에도 기독교를 전하고 1551년 일본을 떠날 때까지 약 1,000여 명의 일본인에게 기독교를 전했다.
이후 많은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양성하며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중 루이스 프로이스는 교토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했고, 1569년 오다 노부나가는 프로이스에게 교토 거주와 신학교 건립을 허락했다. 노부나가가 기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크리스천 신앙에 대한 관심이나 교리 이해보다도 불교 세력을 타도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함께 포르투갈과의 교역에서 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순교의 땅 나가사키
포르투갈의 항해자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항해의 목적을 '기독교와 향신료'라고 말했다. 향신료의 공급과 기독교 전파가 당시 유럽이 일본과 교역하는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선교를 희망하는 신부는 포르투갈 상선에 일본으로 향할 것을 요구했고, 일본의 다이묘는 신부를 보호하고 선교를 허가하는 대가로 포르투갈과 교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총과 화약을 구입해서 군비를 강화했다. 포르투갈 상인은 일본과의 무역에서 칼, 은, 해산물 등을 수입했고 일본은 서구의 소총, 화약, 가죽 등을 수입했다. 오다 노부나가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교역에서 이익을 우선시해서 크리스천의 선교 활동에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1587년 규슈를 평정하던 중에 크리스천 다이묘였던 오무라 스미타다가 이미 1580년에 나가사키를 포르투갈의 예수회에 기진(寄進)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인이 일본인을 노예로 매매한다는 사실도 전해 듣는다. 히데요시는 우선 다이묘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을 허가제로 바꾸고, 바로 선교사 추방령을 발포하여 해외로 선교사를 추방하고 나가사키를 일본령으로 회수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교역과 일체화된 유럽인의 선교 활동으로 기독교를 철저하게 금할 수는 없었다.
1596년 히데요시는 스페인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선교사를 이용한다는 정보를 듣는다. 이듬해 1597년 2월 5일 스페인계 프란시스코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와 신자 26명을 체포하고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처형했다. 히데요시는 보는 이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고자 일부러 기독교인이 많이 사는 니시자카 언덕을 처형지로 정했지만, 처형당하는 순교자의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은 오히려 크게 자극을 받았다. 그 후 유럽과의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나가사키는 순교의 상징으로 일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독교 박해와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크리스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시작되는 에도 막부는 1612년 전국에 금교령을 발표하고 ‘기리시탄 사종문(邪宗門)’이라는 이름하에 기독교를 사교시해서 철저하게 엄금했다. 선교사를 국외로 추방했고 나가사키의 성당은 1619년까지 모두 파괴되었다. 1637년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받던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에도 막부는 이를 기독교 신자에 의한 봉기로 규정하고 진압했다.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을 취했고 유럽과의 교역은 나가사키의 데지마를 통해서만 할 수 있게 했다. 오직 네덜란드만 교역국으로 인정하고 기독교 신자는 철저히 박해했다. 1657 년 오무라에서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가쿠레 기리시탄(잠복 크리스천)의 존재가 발견되었다. 그 후 막부는 한층 더 심한 박해와 감시를 계속 이어갔다. 이로써 겉으로는 불교도인 척하지만 실제로 숨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가쿠레 기리시탄이 생겨났다. 가쿠레 기리시탄이 남모르게 숨어서 신앙생활을 계속 이어오던 중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이 에도만에 나타났다. 막부는 미국,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 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 2월 나가사키 부교는 가쿠레 기리시탄을 찾아 내기 위한 수단으로 1629년부터 약 230년간 실시한 '후미에 (예수나 마리아의 상이 그려진 그림을 밟도록 하는 것’를 중지할 것을 선언했다.
1858년 막부는 화친조약을 맺은 4개국에 프랑스를 더해 5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나가사키에 선교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가톨릭의 파리선교회가 1863년 나가사키에 외국인을 위한 성당인 '오우라 성당'을 건설했다. 나가사키 사람들은 낯선 건물을 바라보며 그곳을 '프랑스 절'이라고 불렀다. 선교사들은 건물의 정면에 '천주당'이라고 한자로 적고 가쿠레 기리시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오우라 천주당 앞으로 수십 명의 가쿠레 기리시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오우라 성당의 신부 앞에서 자신들이 신자임을 밝혔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다시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여전히 금교령하에 있었고 에도 막부에 이어 메이지 정부도 기독교를 사교(邪敎)시하며 일본의 국체를 모독하고 풍속을 문란하게 해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기독교 신자를 박해했다.
메이지 정부의 기본 철학은 한마디로 화혼양재라 할 수 있다. 정신은 일본 전통의 천황제 안에서 일본의 도덕을 행하고, 기술은 서양에서 구해서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이중의 모순된 철학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서양의 정치제도나 물질번영에 관심이 있었고, 서양의 정신적 근원을 이루는 기독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의 크리스천에 대한 박해와 탄압 정책이 유럽 각국에 알려져 외국에서 비난을 받자 메이지 정부는 기독교의 선교 활동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873년 메이지 정부는 금교령을 해제하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의 '신교의 자유'에 따라 드디어 일본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가쿠레 기리시탄은 우선 자신들의 마을과 촌락에 성당을 세웠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헌금과 헌신을 통해 성당과 교회 건설에자원해서 참여했다. 그들에게 성당과 교회의 건립은 오랜 박해와 탄압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켜온 가쿠레 기리시탄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1966년 기독교인 작가 엔도 슈사쿠는 후미에를 소재로한 소설 《침묵》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2016년 미국에서 영화 <사일런스〉로도 제작되었다.
일본의 젊은이와 교회식 결혼식
메이지 정부는 신도를 '국가의 제사'로 규정하고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이후 천황은 정치와 군사의 총괄자로서 신도를 기반으로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신도는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최상위에 위치했다.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하에서 '신교의 자유는 천황제절대주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교육칙어'와의 관계 속에서 천황제추종을 전제로 한 자유였다. 더욱이 일본에 사회적·도덕적 혼란을 야기한다는 '사교'라는 인식은 신도와 불교가 토속신앙처럼 깊이 뿌리내린 일본에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약 1%밖에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교회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만 그것은 신앙에 근거한 규범적 예식이 아니다. 단지 호텔 안에 만들어진 채플 형식의 예식장에서 주례를 맡아줄 외국인 가짜 목사와 성가대를 고용해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뿐이다. 일본에서 기독교는 생활과 하나가 된 신도와 불교처럼 종교나 신앙의 의미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결혼식은 신도식으로 자택에서 행했으나, 1945년 패전 후 점령기 (1945~1952년) 일본의 경건한 교회에서 성가대의 성가에 맞춰 진행한 서양식 결혼식은 낯설면서도 이국적인 것으로 일본인이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기독교 교리나 신앙 고백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교회식의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다. 당시 인기 있는 연예인이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교회에서 올린 결혼식은 일본 여성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대가 되면 자택결혼식은 줄어들고, 1980년대에는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로열 웨딩을 계기로 호텔 안에 늘어나는 채플과 함께 교회식 결혼식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아시아의 성지순례지 나가사키
한국의 기독교는 서민적이고 대중적이며 누구나 다가가기 쉬운 종교로서 역동적인 선교로 전파되었지만, 이와 달리 일본의 기독교는 오랜 기간 사교시되어 오다가 막부 말기 하급무사들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근대적 지식을 찾는 과정에서 만난 종교였다. 그만큼 일반인들은 기독교의 신앙과 교리보다는 결혼식과 같은 기독교 문화에 익숙하다.
1862년 9월 사쓰마번의 국부인 시마즈 히사미쓰 행렬이 나마무기라는 마을을 지나던 중, 말을 탄 영국인 4명이 무례하게 난입했다는 이유로 히사미쓰의 호위 무사에게 살해당한 나마무기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1863년 영국은 사쓰마번과 직접 협상하기 위해 군함 7척을 이끌고 가고시마만에 입항했다. 사쓰마번과 영국 사이에 사쓰에이 전쟁이 일어났지만 사쓰마번은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이것은 기독교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사쓰마번은 현 가고시마로 자비에르가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곳이었다. 당시 사쓰마번은 사쓰에이 전쟁을 통해 영국과 같은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1865년에는 사쓰마의 젊은이를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 근대적 지식과 문물을 배워 오도록 했다. 일본 내에서 기독교 인구는 1%라는 미미한 수이지만 기독교 역사는 일본 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다.
현재 일본 국토의 1%의 면적을 차지하는 나가사키에는 일본 전국의 가톨릭 성당과 교회의 10% 이상이 몰려 있고 그 수는 130여 개에 이른다. 오랜 기간 몇 대에 걸친 박해와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지켜온 신앙의 결실이다. 나가사키 곳곳에는 약 450년 이상을 이어온 신앙이 오늘도 계속 살아 전해지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와 성당은 이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어 관광객의 발길을 맞이한다. 나가사키는 오늘도 아시아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관광객 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 가톨릭과 기독교는 나가사키를 성지순례 코스로 정하고 매년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