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7년 7월 18일 〈오만과 편견〉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이 세상을 떠났다. 〈오만과 편견〉은 대부호의 아들 피츠윌리엄 디아시와 평범한 서민의 딸 엘리자베스 베넷 사이에 벌어지는 연애담을 담고 있는 장편이다. “에이, 뻔한 이야기잖아!”라고 섣부른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그런 태도야말로 ‘오만과 편견’으로 범벅을 이루고 있는 부적절한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그렇고 그런 러브스토리가 아니냐는 단정에는 두 가지 잘못이 내재되어 있을 법하다. 〈오만과 편견〉을 읽지 않았거나, 읽어도 작품에 깃들어 있는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오독에 머물렀으리라는 추정이다. 소설은 두 남녀가 오만과 편견을 이겨내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진지하게 보여준다. 사실(!) 오만을 떨쳐내고 편견을 벗어던지는 일은 사람에게 너무나 어려운 결단이고 실천이다.
〈오만과 편견〉이 발표된 때가 지금부터 200년도 더 지난 1813년이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고 그런 이야기와 드라마들은 모두 〈오만과 편견〉에서 진지함을 쏙 빼버린 채 생산된 저급 아류들이다. 아류들의 수준이 낮다고 해서 200년에 나온 원작에 비난을 퍼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깨달으면 영혼의 덕을 쌓을 수 있고, 덕을 쌓으면 행복을 누리게 된다면서 지덕복합일설知德福合一說을 가르쳤다.
편견은 고정관념과 다르다. 고정관념은 대상을 꼭 나쁘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권율을 무관으로 생각하는 식이 고정관념이다. 권율은 문과로 벼슬길에 올랐다. 그가 임진왜란 때 조선군 도원수였으니 무관이리라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권율에게는 또 다른 고정관념이 적용될 수 있다. 영의정을 지낸 권철의 아들이었고, 본인도 뒷날 도원수까지 역임하는 것을 보면 어리거나 젊은 나이에 급제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하지만 권율은 46세나 되어서야 문과에 붙었다. 즉, 고정관념은 대상을 반드시 좋지않게 여기는 시선은 아니다.
편견은 한 집단을 근거 없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게다가 편견은 자신이 속한 집단 구성원 중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내집단 편향), 반대편 집단의 누군가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집단 전체를 매도하는(외집단 동질성) 경향을 띠기 때문에 사회에 더욱 해롭다.
중언부언,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을 것도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오만과 편견에 젖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신분 높낮이와 연령 고하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포진해 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동일 목표를 향해 함께 노력하면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편견을 없앨 수 있다는데, 오늘도 신문과 텔레비전을 보면 백년하청이 따로 없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
민주당 대구시당 초청 강연 제2회(오늘 7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