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수필)
마르첼리노!
이제야 불러보는 네 이름이다. 소식 못 보낸 지 벌써 세 번째 봄이구나. 나는 무에 그리도 무심했을까. 봄꽃들이 앞다투어 찬란하고, 신록이 온 누리에 푸르른데, 뭐가 마음눈을 가렸는지…. 마음 깊은 너는 ‘코로나19’ 탓이라 할 거야. 그러면 좋으련만, 그게 다가 아닌 것만 같구나.
사월 중순이다. 보릿고개 시절, 이곳에서는 이밥을 연상시키는 하얀 꽃을 보며 배고픔을 달랬다지. 그 이팝꽃이 지금 만발했다. 코로나19 역병이 퍼지는 첫해 오월 중순 한 아침, 하얀 신부(新婦)처럼 내게 달려온 이팝꽃이었다. 한데 왜, 삼 년 후엔 거의 한 달을 앞당겨 왔을까. 피는 기간을 따져봐도 이르다. 하얀 조팝꽃도 앞당겨 웃고, 붉은 장미꽃도 앞당겨 피어나니, 하순에는 많은 담장에 장미 웃음 가득할 테지. 식물들은 사람보다 기후변화에 더 민감하게 살아내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마르첼리노.
지난번 편지는 이팝꽃 신부에 반해, '하얀 오월'이란 제목으로 네게 보냈었지. 한데 올핸 그 신부가 앞당겨 왔으니, 제목도 당겨 '하얀 사월'이라 해야만 되겠구나. 그만큼 우리 어머니 지구 행성의 기후와 환경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는 증거의 하나가 아니겠나. 우리 어릴 적만 하더라도 아니, 군에서 제대하고 취업할 때만 해도 너도 알다시피 지구촌의 기후와 환경이 이렇지는 않았었지 않나.
게다가 하나 더 하고 싶은 말은, 갈수록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그저 어지러울 뿐이다. 나이 들면서 느려지는 생체시계 현상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세상과 자연이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이라 느낀다. 산업화 이후, 인간의 육체적 활동을 기계가 대체해 가면서 사람들 몸은 편해져 온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인간이 더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나. 백 년도 못 산 너와 나의 경험만으로도, 이를 깨닫고도 남듯이 말이야.
마르첼리노.
그간 너의 봄들 아니, 삶은 어떠했나.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할 테지만, 너는 더 짙게 살아냈으리라 믿는다. 나보다 더 높고, 깊은 마음 누리에서 사는 너니까 말이다. 고대 그리스는 인간의 역사를 황금, 은, 동, 영웅, 철의 다섯 시대로 구분하였다지. 그에 따르면, 우리 사는 현대가 철의 시대로 제일 못사는 때란다. 인간의 역사는 발전해 온 게 아니라, 퇴보해 왔다는 거지. 사람 마음가짐의 변화를 두고 그리 말한다면, 나도 동감한다.
서구 물질문명이 지구촌을 휩쓸면서, 지구 어머니가 병든다는 사실을 왜 인류는 적기에 알아내지 못했을까. 영국기상청의 ‘단일 연도별 지구 기온 변화’ 그래프를 웹에서 찾아보았다. 20세기 후반부터 기온이 급격히 오르고 있었다. 산업화 이후 초기 즉, 20세기 초반에 지구온난화 사실을 인류가 깨닫고, 그 대책을 세워 실천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기후와 생태계 급변의 위중한 사태’는 맞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니 말이다.
마르첼리노.
인간의 역사는 크고 위급한 일에, ‘사후약방문’ 격으로 살아왔다고 본다. 1, 2차 세계대전과 우리나라 6.25 전쟁만 봐도 그랬으니 말이야. 하지만, 생명의 어머니인 지구 차원은 다른 게 틀림없다 싶다. 무슨 원인으로 수용한계를 넘는 대변화가 생기면, 지구 어머니는 스스로 모든 것을 적기適期에 리셋reset 하니까 말이다. 그 현장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인간도 그 리셋 대상에서 예외가 아닐 테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태평양에 떠 있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크기가 한반도 면적의 일곱 배에 달한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이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빨대가, 산 거북이의 콧구멍에 박힌 유명한 환경오염 실태 고발 사진도 보았어. ‘애완동물’이 언제부턴가 ‘반려동물’로 둔갑하면서도, 왜 사람의 기아 문제와 환경오염, 기후변화 문제는 점점 나빠져만 갈까. 한때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던 아나바다 운동이 벼룩시장 등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주민들의 피부에 와 닿기는 부족해 보인다.
마르첼리노!
인간은 그냥, ‘케세라세라’로 살아가야만 할까. 지구촌이 어떤 상황에 있든 오늘 장가가고 내일 시집가며,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삶. 그걸 행복이라고 믿고 매시간 자기 최면을 걸어 시간을 축내고, 생태적 방종을 일삼으며 살아가야만 하는지…. ‘그럴 순 없다고?’ ‘맞아. 그래서는 안 돼!’ 인간은 지구 어머니의 살과 피로 태어나, 그 품 안에서 살다가 그 품으로 돌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란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만 해. 휴지 한 장, 세제 한 방울, 기름 한 컵, 물 한 모금이라도 적게 쓰는 삶으로 당장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지.
세 살, 다섯 살 손자 둘이 맑고 귀엽게 잘 자란다. 할아비 속마음은 우리 귀염둥이들에게 늘 미안하단다. 살면서 지구온난화에 일조한 기성세대로서, ‘지속 가능한 지구촌을 저 아이들에게 과연 물려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네가 알다시피 나는 환경, 기후변화 같은 어젠다들을 과학적 시각으로도 조금은 헤아릴 수 있는 환경산업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해 왔다. 그러면서도, 남들과 비슷하게 소비하고, 배출하며 살아온 아둔한 지난 세월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첼리노.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인류가 쏘아버린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의 화살은 이미 파멸이란 과녁과 너무 가까이 가버려, 손 쓸 수 없는 상태라고…. 비전문가인 우리는 그럴지, 안 그럴지 모른다는 게 정직한 고백이겠지. 하지만, ‘하얀 사월’을 살아내며 느끼는 내 마음은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과 가족, 이웃이 함께 공멸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 앞에서도, 거대한 기후변화의 와류에 함께 휩쓸려 가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눈뜬장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원죄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결함을 안고 태어나기에, 지구 어머니가 병드는 모습을 못 보는 걸까, 안 보는 걸까. 보고도 모른척하는 걸까. 아니면, 무관심할까. 그도 아니면, 함께 공멸하자는 심보일까. 하여, 볼 줄 아는 현대인은 진퇴양난의 또 다른 존재론적 슬픔과 고통에 마주 서야만 하는구나. 침묵하는 다수의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우리 시대를 살아갈까. 1972년 스웨덴에서 처음 개최된 '유엔인간환경회의' 이후,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그동안 나아진 게 무얼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 본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6차 평가보고서는,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섭씨 1.5도 이내로 하기로 했다지. 부디 이 절대적 목표가 지구촌의 사생결단으로 이루어 내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마르첼리노!
슬프게도 우리 사회는, 자살자를 미화하고 영웅시까지 하는 풍조가 자리 잡은 듯하다. 정치적 이해득실이 뭐라서, 하나뿐인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사례가 빈번할까. 정상인이라면 어찌하여 자살을 좋게 볼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국민의 절반은 종교인일 텐데도. 선거철이면 뻔질나게 종교집회를 찾아다니며 자신도 신자나 도반이라며 읍소하는 자들이, 사람의 생명을 왜 그리도 하찮게 여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하는 건물들에 검은색 외벽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주위에 알게 모르게 죽음의 문화가 시나브로 스며드는 반증이 아니겠나.
지구촌 생태계오염과 기후 급변 현상은 결국, 인간의 마음에서 기인한다 싶다. 하늘과 자연, 이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의 마음 말이야. 이러한 느낌이 나만의 착각이면 좋겠다. 네게 써 보냈듯이, 삼 년 전 내 마음에 비친 ‘하얀 오월’은 침묵, 외면, 무시, 강행의 카르텔을 덮어쓰고도 희망을 노래했었다. 그 오월이 앞당겨 온 올 ‘하얀 사월…’. 비록 주위에 죽음의 문화가 스멀스멀하더라도 내 마음은, 이 하얀 사월에도 희망의 끈을 꽉 붙잡는다. 해맑은 우리 두 어린 손자들 얼굴이 떠올라서다. 그리고, 기도드린다.
“인자한 우리 지구 어머님! 부디 이 무고한 아이들도 지구촌에서 무탈한 생을 살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 2023. 5. 30. <수필미학> 2023 여름호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