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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 14장의 장편소설이며
1~8장까지는 아래에 연재되어 있습니다.
1/사랑, 장마로 오다
2/치명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3/첫 키스의 향기
4/철길이 닿는 바다
5/검은 그림자
6/굴레의 사슬
7/연못둥지과수원
8/안개 속의 덫
9/뒤틀리는 운명들
10/색깔이 다른 피
11/성(城)을 떠난 사막
12/장남들의 곡예비행
13/보이지 않는 길
14/연리지(連理枝)를 꿈꾸다
<9장 아홉번째 이야기>
뒤틀리는 운명들
병영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마침내 상병계급장을 달았다. 정오부터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통증은 저녁이 가까워오면서 명치까지 치밀고 올라왔다. 우적우적 구겨 넣은 염적무가 화근인 듯싶어 소화라도 시킬 요량으로 홀로 영내를 뛰었다. 그러나 몇 바퀴를 뛰어도 통증은 여전히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허리까지 치민 통증은 밤새도록 모로 눕고 뒤로 눕기를 반복하게 만들었다.
날이 밝아오면서 그래도 참을 만한 시간이 얼마간 흘렀다. 아침점호가 밝았다. 웬만해서는 점호를 빼먹을 만큼 게으른 적이 없는 나는 그래도 상병이랍시고 불참하는 꾀를 부렸다. 다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계급 탓일까, 공연히 점호를 불참한 것이 꾀병 같기도 하여 내친김에 의무대로 지척지척 걸어가 아예 누워버렸다. 하지만 출근한 군의관이 무릎을 몇 번 점검하고 나서 예기치 않은 비상이 걸렸다. 급성맹장염으로 진단내린 군의관은 밤새 증식된 염증은 곧 터져 복막 전체로 흩어질 것이라며 곧바로 대대장에게 보고했다. 대대장은 급히 군단병원으로 후송시키기 위한 배려로 자신이 직접 타고 다니는 1호차를 내주었다. 더구나 의무병 두 명을 동행시키기까지 해 사태의 심각성은 더욱 증폭되었다.
군단병원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수술 팀이 달려들었다. 난생처음 수술대에 눕혀졌다. 알몸이 되어 아랫도리 언저리의 터럭이 팀스피리트의 부상병처럼 깎여나갔다. 마취가 시작되었다. 하체의 감각은 빠르게 무뎌져갔다. 중위계급장을 단 썩 예쁜 여자군의관이 살갗을 찌르며 감각의 정도를 물었다. 무언가 뾰족한 것이 피부를 찌른 듯했지만 통증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시시때때 곤두서던 심벌은 여자 앞에 버젓이 노출되었지만 성깔조차 부리지도 못했다.
비로소 흰 천막이 턱밑까지 드리워졌다. 살을 째는 서걱거리는 소리가 너무도 명료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얼마 후 예쁜 군의관이 염증으로 탱탱하게 살찐 헌혈마크처럼 늘어진 맹장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 때문에 아팠던 거니까 이젠 괜찮을 거야. 조금만 늦었으면 터져서 복막염으로 번질 뻔했어. 지금까지 견뎌낸 것을 보면 참을성이 대단하군. 그런데 뭘 못 먹어서 이렇게 말랐나!”
여자군의관이 심술궂게 심벌을 툭툭 치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아직 포경으로 쌓인 녀석은 놀림감으로 이리저리 맥없이 흔들리는 듯싶었으나 감각은 없었다. 수술에 동참했던 의무병의 킥킥대는 표정이 옅어져갔다. 마침내 나는 깊은 수면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마취가 풀려가는 모양이었다. 아랫배 깊숙한 곳으로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눈을 떴다. 낯선 병원에 발가벗겨진 채 홀로 누워 있는 꼬락서니라니, 가벼운 소화불량으로 여기고 거의 하루를 지탱했던 서러움이 불쑥 복받쳤다. 어머니의 손길이 아쉽고 정라의 얼굴이 그리움으로 떠올랐다. 더구나 자세가 영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소변까지 마려웠다.
짝눈으로 의무병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의무병은 등을 돌리고 있어 내 상태를 알릴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홀로 일어나려 시도했으나 통증을 못 이기고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수술 부위가 울려 식은땀이 솟았다. 도움을 요청할 요량으로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의무병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일등병 계급장을 확인한 나는 길게 말끝을 흐렸다.
“소변이…….”
“지금 움직이면 안 됩니다. 다른 맹장환자보다 급해서 속살은 그냥 실밥이 있는 상태로 꿰맸습니다. 실밥은 나중에 배 속에서 집 짓고 살아요!”
의무병이 소변통을 가져와 귀두에 끼우며 수술 경위를 설명해주었다. 실밥이 무슨 개미새끼도 아니고 몸속에서 집을 짓고 살다니, 이해 못할 황당한 설명에 소변이 뚝 끊어진 듯싶었다. 한참을 지나도 소식이 없자 의무병은 소변통을 아예 옆구리에 걸쳐놓았다. 또 잠이 쏟아져 내렸다.
저녁 무렵 병실로 옮기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며 환자복을 입은 사병들이 들것을 들고 나타났다. 내과병실은 각지에 흩어진 군단 소속의 환자들로 북적거렸다. 완쾌가 되었는데도 힘든 병영생활을 피하기 위해 귀대를 늦추는 일부 사병들이 있는가 하면, 멀쩡해 보이는데도 허리를 못 펴는 속병환자도 섞여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경환자에 속했다. 이튿날 항문으로 가스가 방출되고부터는 제법 걸어 다닐 만하게 호전되었다.
그로부터 사흘, 나흘, 닷새……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수술부위의 실밥도 뽑았고 목욕도 자유롭게 할 무렵이었다. 이제나저제나 귀대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목요일 오후, 집에서 석우가 면회를 왔다. 최소한 수술 소식은 알려야겠기에 보낸 편지 덕분이었다. 석우의 첫 물음은 간단했다.
“이제 참을 만하냐?”
“괜찮어. 최소한 한 달은 있어야 퇴원이 된다기에 지루해두 참구 있는 중이여!”
“그래두 그만하길 다행이다. 어디 수술자국 줌 보자.”
가운을 허리까지 올리며 배를 불쑥 내밀었다.
“잘 아물었네. 상처두 길지 않구.”
“배 속에 실밥이 그대루 있어. 꼭 지네발처럼 잡히는 걸. 아부지 어무니는 줌 어떠셔?”
“늘 그렇구 그려. 수술했다니까 니 걱정 줌 하는 정도지 뭐.”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그간의 궁금 사항을 모두 체크했다. 할머니는 청주의 작은아버지 집에 아직 있는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 여동생 양희는 취직은 했는지, 시내 고모는 어떻고 고향의 동창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석우는 할머니는 여전히 청주에 있고, 양희는 취직을 했으며, 동창들 소식은 잘 모르겠노라며 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참, 나 내년 봄쯤 결혼할 계획이다! 그땐 너두 제대하지?”
석우의 결혼소식은 금시초문이었다. 내년이면 겨우 스물여덟 살이 되는 나이를 감안할 때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대사건이었다. 적잖이 놀라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누구하구 하는데? 신부가 누구여? 혹시…….”
“그려 맞어! 신진영이다!”
석우는 짧게 이름만을 밝혔다. 신진영, 진수 여동생 진영! 그 이름이 갑자기 먼 우주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메아리쳤다. 고향 봉계를 버리고 연못둥지과수원으로 떠나게 만든 장본인이 신진영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석우를 옭아매려는 계략으로 염문을 퍼뜨린 당사자가 신진영이었다. 진영의 나이 고작 스물셋이다.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형은 그 애를 사랑하기는 하는 거여?”
“그 애라니. 말조심해야겠다. 이제 곧 니 형수가 될 사람이다!”
진영이 형수가 된다는 말에 더 이상 그를 윽박지를 의지마저 달아나 버렸다. 더구나 진영의 단순성이나 석우의 대충대충인 일상을 염두에 둔다면 참견할 의미는 더욱 필요 없는 일이었다. 대상이 비록 나의 형이며 친구의 여동생이라 할지라도 그들 나름의 선택이고 운명이다. 그들 앞에 무너지는 자가 왜 하필 내가 되어야 하느냐가 서글플 뿐이었다.
“진영이하구 결혼한다니까 아부지 어무니는 뭐라구 하셔?”
“애까지 가졌는데 뭘 어쩌시겠니. 허락하구 넘어가야지.”
“벌써 애까지 가졌다구? 철저히 몰아붙였군. 그럼, 진수네는?”
“불미스러운 일이 터져서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진영이가 불쌍해 보인 것두 결혼을 앞당기는 데는 한몫했지!”
“무슨 일?”
“참, 니는 아직 모르구 있겠구나. 진수가 군에서 큰 사고를 쳤어!”
“사고? 무슨 사고?”
팀스피리트 훈련장에서 맞닥뜨렸던 진수의 얼굴이 벼락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정호와의 갈등, 그리고 진수의 분노 어린 고뇌, 기어이 사단이 난 모양이었다.
“진수가 자해를 해서 완전히 불구가 됐어. 삼청교육대가 생겨서 교관을 하라구 명령했는데 더는 못 한다구 버텼나 보더구나. 처음에는 그럭저럭 명령에 따르더니 나중에는 상관에게 대들었구, 결국 지가 지 목에 총을 쐈단다.”
“총을 쏴? 얼마나 다쳤는데 불구까지 된 겨?”
“한쪽 턱이 완전히 날아갔어.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자해 혐의루 감옥 갔다 제대했다.”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턱이 날아가?”
“총구를 턱밑에 놓구 발가락으루 당겼다나벼. 길이가 안 맞아 턱이 위루 치켜지다 보니 그나마 겨우 살아난 게지!”
“염병할…….”
할 말이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아 흩어졌다. 공포가 달려와 심장에 칼을 꽂는 쓰라림으로 몰아쳤다. 그 충격으로 찍힌 머릿속은 하얗게 고요했다. 엄청난 사건에 경악한 나에 비해 비교적 간단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석우가 되레 낯설 따름이었다. 석우는 한바탕 회오리를 겪고 난 뒤의 일인지 이미 진수를 포기하고 있었다.
사건을 유추해보면, 교관이었던 진수가 상급자인 정호의 명령을 어겼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진수는 끈질기게 버텼고 정호는 끈질기게 명령했을 수직관계, 정호가 방화사건의 주범일지도 모른다는 진수의 공포, 군이라는 특수상황, 피할 길 없는 벼랑에서 자신의 목에 총을 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황당한 사건의 저변에 숨겨진 갈등의 비밀을 석우는 아마도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정라가 면회를 왔던 날 비상이 걸렸던 이유가 삼청교육대 폭동, 잊고 있었던 낯선 명칭에 의문이 솟구쳤다.
“형, 삼청교육대가 도대체 뭐여?”
“그것 때문에 쉬쉬들 혀. 조금만 건들거리구 다녀두 막무가내루 잡아 가. 소위 사회개혁을 이룬다는 명분으루 끌구 간다는데 그곳이 군대인 줄은 나두 몰랐었다. 진수 때문에 알았지. 인간적으루 가혹행위가 지독했다더군. 처음에는 그나마 명령에 따랐는데 진수두 도저히 못 견디겠던 모양이더라. 오죽 괴로웠으면 죽으려구 그 짓까지 했겠냐!”
그래도 그렇지, 못난 놈! 어떻게 자신을 그 지경으로 학대했다는 말인가. 가혹행위가 얼마나 험악했으면 교육생들이 폭동까지 감행했을까를 생각하니 샌드위치처럼 가운데에 낀 진수의 괴로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법도 했다.
“생활이나, 말 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겨?”
“혀두 일부 날아가서 말이 새나간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여. 진수는 집에만 처박혀 있구 두문불출이다. 폐인이 다 됐어.”
“진수가 무슨 얘기는 안 혀?”
녹아드는 깊은 의문, 진수의 자해가 누구의 표적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소리칠 수 없는 현실, 정호를 염두에 둔 물음이었다.
“없어. 눈알은 아직 살기가 있는데,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구 있어!”
“바보 같은 자식!”
먼 하늘을 바라보며 씹어뱉었다.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가까이에 있었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 부을 부릅뜬 기세였다. 석우는 가뜩이나 짧은 나의 머리를 헝클듯 휘저으며 투덜대었다.
“니는 남은 복무나 잘 해라. 신경 쓰지 말구.”
끈끈하고 축축한 습기가 금세 살갗으로 내려앉았다. 먹구름이 낮게 깔리며 몰려오기 시작했다.
서둘러 퇴원을 자청했다. 군대라는 특수상황을 감안할 때, 대다수 병사는 기간을 질질 끌며 하루라도 더 지체하기를 원하는 것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작전중사가 면회를 와서 일이 많다며 귀대할 것을 은근히 종용하는 것 같아 퇴원을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딴은 하루라도 빨리 진수를 만나 근황을 살펴보고 싶은 조바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퇴원 요청에 군위관은 별 특이한 놈 다 봤다고, 군대가 재미있는가 보다고, 비아냥거리며 퇴원을 허락했다.
대대장은 나의 귀대를 더없이 반겼다. 그는 그간의 밀렸던 자료를 완성케 하고 위로휴가로 보상해주었다. 맹장수술을 했으니 영양보충 좀 하고 오라는 명분이었다. 어머니의 삼계탕으로 속을 채운 휴가 다음 날, 나는 곧바로 진수를 방문했다.
진수는 어두운 골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누가 오고 가는지조차 관심 밖인 그의 눈동자는 오래전에 삶을 포기한 자의 초점이었다. 그의 처참한 모습은 속절없이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조준점이 없는 단순한 시선, 어떤 물체의 움직임에도 반응이 없는 무정형의 눈동자, 일그러지고 떨어져 나가 너덜대는 턱관절의 언저리, 달아난 윗입술을 위장하기 위해 기른 다듬어지지 않은 검은 수염, 정라에게서 전동면도기를 선물 받으며 지껄였던 수염 운운이 불현듯 연상되었다.
“야, 신진수! 나 알아보겠니?”
조심스럽고 나지막하게 물었다. 진수의 대답은 없었다. 동석한 진수의 어머니는 벌써부터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복받치는 울음을 참아내려는 어머니의 훌쩍임은 심장을 할퀴고도 넘쳐흘렀다.
“어무니, 사람두 알아보지 못하는 건가유?”
“가끔, 멀쩡하다가두 어떨 땐 지금처럼 넋을 놓구 그려.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네.”
“어찌 이리두 험한 짓을 했답니까?”
“그걸 우리 같은 무지랭이가 어찌 알겠나. 지가 그랬다구 허니까 그런 줄 알아야지!”
“말은 좀 혀유?”
“혀가 고장 나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네.”
어머니에게 더는 여쭈어볼 의미가 없었다. 아니, 용기도 없었다. 진수 가족이 처한 명백한 현실 앞에 상처를 덧내고 피로 얼룩지게 하는 것은 가혹한 폭력이었다. 모든 정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구태여 비굴하게 하는 작태는 또 다른 살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는 급기야 긴 한숨을 방바닥에 토해내고는 힘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얼마간 멀거니 진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사는 것을 포기한 체념의 시선을 천정에 고정시킨 채 말이 없었다. 고요는 적막하고 괴괴하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낮고 흐렸다. 그 속에 무언가가 흘렀다. 정호와 진수가 흘렀다. 석우와 진영이 흐르고, 정라와 내가 흐르고 있었다. 흐름의 무게와 방향은 보이지 않았다. 서로가 얼마나 더 모질어져야 끊을 수 있는 고리일까,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거리였다.
마침내 그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등을 돌린 순간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섬뜩함이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마치 전설의 공동묘지에서나 있음 직한 ‘내 다리 내 놔’식의 팔에 걸려 저절로 주저앉고 말았다. 더구나 몸이 한 바퀴나 뒤틀려 돌아가며 진수의 얼굴과 충돌할 뻔했다. 그의 찢겨져 나간 턱주가리 표피와 선명한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찌르고 침투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진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전치 못한 반쪽의 혓바닥 진동만으로는 억양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가 윗목에 비치해둔 종이와 볼펜을 끌어당겨 움켜쥐었다. 아마도 필요한 의사전달을 위해 미리부터 준비한 소통수단이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종이 위에 글자를 옮겨 썼다.
- 와줘서 고마워.
“괜찮은 거니?”
- 빨리 죽고 싶어.
“염병하구 있네. 미쳐두 단단히 미쳤구나. 이게 뭐여, 씨발!”
나는 억지로 강한 척 욕지거리부터 퍼부었다. 진수에게 노여움을 끌어내어 살고자 하는 오기라도 발동시켜주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울먹거렸으며, 책망은 동정으로 표출되었다.
- 너도 조심 해.
“뭘?”
- 정호!
진수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가 모르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조상들의 얽히고설킨 사슬들, 진수의 입에서 나오기 전에 알고 있냐고 내가 먼저 확인할 수 없었던 사건들, 그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너두, 알구 있었니?”
- 어, 집에 불 지른 것도 정호 같아. 끝까지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치겠군!”
- 정라 사귀는 것, 다시 생각해봐.
“그건 또 어떻게 아니?”
- 음영석, 친구들도 다 아는 얘기야.
“영석이 자식, 해수욕장에서 달빛에 취해 말한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어!”
- 정호는 완전히 또라이야!
“무슨 소리여?”
- 삼청교육대로 잡혀온 사람들한테 못할 짓을 시켰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어. 정호가 제일 지독했어. 죽이고 싶었어.
“그래두 참았어야 옳은 거 아니었어. 그래서, 결과가 고작 이거여?”
- 나중에는 내가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그랬어.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하는데……. 돌겠어.
“엿 같은 소리 집어 치우구 정신 차려. 가족은 어떻게 하구 니 생각만 하니?”
몸서리를 치며 야멸치게 맞대응 쳤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나의 심약한 위장술일지도 몰랐다. 진수가 느끼는 공포를 내가 느끼지 않을 리 없었다. 섬뜩섬뜩, 성큼성큼 다가오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의 그림자!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정라에게 근접하는 것을 강하게 통제했던 살기 어린 눈동자! 진수가 써내려가는 볼펜을 통하여 정호가 목을 조여오는 착각으로 엄습했다. 그가 다시 쪽지를 내밀었다.
- 진영이 시집가면 잘해줘. 불쌍하게 된 애야!
“그건 석우 몫이여. 나한테는 형수인데 내가 뭘 어쩌겠어!”
- 너만 믿는다.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꺼풀을 깜박여 긍정을 표현했다. 그가 쓰고 내가 말하는 방법으로 진행된 소통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등을 돌려 방을 나왔다. 진수는 다시 격리되었다. 마음의 무게가 군화 밑창으로 무겁게 쏠렸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날아와 고막에 부딪쳤다. 녀석이 내깔리는 파열음은 누군가의 접근을 저지하려는 강력한 경고음으로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마을을 돌아 나오는 동네 어귀에서 신진영과 맞닥뜨렸다. 진영은 석우를 만나고 오는 길이라며 간단한 인사만 건넬 뿐 평소처럼 밝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진수 때문이리라 여겨졌다. 곧 형수가 될 사람이라는 생각과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은 부담감에 사로잡힌 것은 오히려 나였다. 어느새 형수라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 니?”
말꼬리를 흘렸다. 존댓말을 해야 하는지 헷갈려서 나도 모르게 말꼬리를 흘려버린 것이다.
“그냥, 괜히 기운이 없어…… 유!”
진영도 어색하게 말끝을 길게 끌었다. 그녀의 어투에서 서로가 낯설고 멀기만 한 것이 나만이 느껴지는 감정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의 아랫배로 슬그머니 시선이 옮겨졌다. 아직 표시 나는 몸태는 아니어서 임신 사실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두 기운을 내야지유.”
결국 존댓말로 답하고 말았다. 내 스스로 진영을 형수로서의 반열에 올려놓은 셈이었다.
“수술한 데는 괜찮어유?”
“예…… 에!”
“제대할 때까지 몸조심하세유.”
진수를 염두에 둔 진영의 걱정이었다. 이제는 한 가족의 일원이니 어쩌면 당연한 염려로 들렸다. 진영과의 대화도 거기까지였다. 진영은 지척지척 신발을 바닥에 끌며 집으로 향했다. 그런 진영의 쓸쓸한 뒷모습에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나마 밀려오는 산들바람이 민낯에 나부껴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불쑥불쑥, 나부끼는 바람처럼 정라를 향한 그리움이 스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석우와 진영과 진수를 생각한다면 정녕 정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야 할 현실인가, 그녀의 가슴에 쏘아버린 큐피드의 화살을 스스로 뽑아내야 한다는 말인가, 이 혼란을 멈출 길은 무엇인가, 정답 없는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답을 주지 않았다.
밀려오는 그리움에 결국 정라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다행히 전화는 그녀가 직접 받았다. 직장은 건강하게 잘 다니느냐고 물었다. 맹장수술한 곳은 어떠냐는 물음표가 건너왔다. 서로의 상투적인 안부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 그녀의 느닷없는 훌쩍임이 수화기를 타고 달려왔다. 혹시 정호의 신변에 문제가? 갑자기 밀려오는 불길한 마음이 순식간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왜 그려, 무슨 일 있어?”
“아니여, 별 일 아니여!”
예기치 않은 다그침에 놀랐는지 그녀가 들킨 마음을 애써 숨기려 했다. 나는 더욱 채근했다.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지금 곧장 서울로 올라가겠노라고 볶아댔다. 내 적극성에 결국 그녀가 마음을 무너뜨렸다.
“아부지가, 아부지가 유치장에, 사기혐의에 휘말려서…….”
정라는 더욱 훌쩍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유치장이라는 단어는 환청과도 같이 멀리서 왔다. 갑자기 오금이 저려 몸을 떨었다. 나는 겨우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떻게 된 거여? 심각한 거여?”
“아직은 몰러. 아는 사람한테 약간의 용돈을 받구 이름을 빌려주었든가 벼. 당사자는 연락이 끊어지구 피해자들이 고소를 해서…….”
사건은 금방 파악되었다. 정호와 연관된 사건이 아닌 것에 안도하며 정라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지할 정도로 순진한 심성의 아버지이다. 갑갑할 정도로 완만하고 축축한 아버지이다. 그런 성정으로 인하여 늘 당하고만 살아왔던 노년에 또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던 모양이었다. 제발 별일 없기를 바라면서 그녀를 위로하는 것이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두 너무 걱정하지 마러. 아직 사건이 종결된 것두 아니잖어!”
“작정하구 사기 친 거라 피할 길이 없는가벼.”
“정호 형은 뭐라셔?”
“오빠는 군대에 있으니까 별 힘이 못 돼. 법대 나온 대학 친구한테 부탁해서 알아보구는 있는데 도움이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
정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테두리 밖을 맴도는 위치였는가 싶었다. 할아버지가 물에 빠져 허우적댈 때도 정호는 없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순간에도 정호는 없었다. 또한 아버지가 유치장에 들어갔는데도 공교롭게 원거리에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역시 무엇이든 참견해야 할 것 같았다.
“어떻게 잘 되겠지 뭐. 나 오늘 올라갈까?”
“그러지 마. 아버지 때문에 가뜩이나 복잡혀, 넌 줌 쉬었다가 부대에 들어가야 하잖어!”
정라의 태도는 단호하고 분명했다. 별 도움도 못 되는 나의 등장도 귀찮기는 매한가지일 터였다. 단지 그녀의 아픔을 함께하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란 것을 알게 할 길은 없었다.
“알았어. 소식은 편지루 혀.”
“으음, 알았어!”
정라와의 연결선은 그렇게 토막으로 끊어졌다. 불미스러운 일들이 점점 굳어져 응고된 채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마을의 개는 여전히 맹렬하게 누군가에게 짖어댔다. 덩달아 까마귀까지 불길하게 울며 높은 하늘을 맴돌았다.
몇 달 남지 않은 복무기간에도 부대 밖 상황은 빠르게 변해갔다. 정라 아버지는 결국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정호는 중사로 진급했다. 석우는 협회의 지역연합회장이 되었다. 진영은 출산이 임박했고, 진수는 조심스럽게 외출을 시도한다는 소식 등, 각자에겐 각자의 일만이 중요하게 흘러갔다. 영내에 박힌 나는 제대를 손꼽아 기다리며 비가 오면 그것이 비였고, 바람이 불면 그것이 바람이었고, 무지개가 뜨면 그것이 무지개였을 따름이었다. 참,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의무대중사를 꾀어 야매로 포경수술을 했다. 맹장수술을 했던 여자군의관의 행동이 자꾸만 거슬려 살붙이를 떼어 군대에 버렸다. 군대에 버린 신체는 맹장에 포경까지 추가된 셈이었다.
제대 이틀 전, 나의 송별식은 여느 사병의 제대와는 사뭇 차별화되었다. 차트로 부대 곳곳에 족적을 남긴 대가로 1차 송별회는 내무반에서 치러졌다. 1차에서 이미 거해진 뒤였지만 2차로 작전과 후임들에 이끌려 상황실로 불려갔다. 작전과장조차 굳이 상황장교를 자청했을 정도로 나의 송별회를 배려해주었다. 비록 사병이지만 그만큼 부대에 기여한 비중이 컸다는 방증이었다.
작전과 후임들은 관습대로 제대 세 달 전부터 술을 준비했다. 계곡에서 꺾어온 잣송이로 담근 달착지근한 밀주가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군대란, 특히 제대란 보내는 자의 아쉬움보다 떠나는 자의 후련함이 더 큰 집단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나의 마음은 예외였나 보다. 끊임없이 술잔이 돌아 거의 바닥날 즈음, 몸을 가누기도 힘겨울 지경으로 술에 노예가 되었을 때, 나는 이유 없이 펑펑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관절 어떤 연유에서 복받치는 눈물인지 가늠되지 않는 깊은 슬픔이었다. 나는 울면서 뇌까렸다.
“과장님, 전양우는 이제 갑니다! 중사님, 양우는 이제 갑니다!”
대다수의 사병들은 웃으며 떠나게 마련이었다. 그들과는 달리 특이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나를 모두는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추태를 보다 못한 과장이 겸연쩍은 얼굴로 위로했다.
“전 병장이 뭔가 서운하긴 엄청 서운한가 보군! 차라리 말뚝이나 박을 걸 그랬나 봐!”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오입 한번 시켜서 보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야, 전 병장! 궁상떨지 말고 노래나 한 곡조 시원하게 뽑아라! 이따가 내가 좋은 데 데려다 줄게!”
중사가 맞받아쳤다. 눈물은 더욱 사납게 고여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일어나서 웃으면서 울면서 전선야곡을 마구 불러 젖혔다. 맹렬하게 울부짖는 작태가 볼썽사나웠는지 과장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겨우겨우 노래를 마무리한 나는 자리에 앉으려다가 결국 의자와 함께 나뒹굴고 말았다. 그리고 암흑이었다. 암흑 속에서 진수의 모습이 보였다. 제대 전 말년휴가를 갔을 때도 다시 찾아가지 못한 진수, 그의 환영이 암흑 속에서도 나를 덮쳐왔다.
눈을 떠 보니 영내가 아닌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골방이었다. 하물며 발가벗겨져 버려진 알몸뚱이 그대로였다. 몸뚱이 위로는 창틈을 비집고 침입한 햇살이 맹렬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기억은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헹가래처럼 들려 어디론가 이동시켜진 조각난 기억이 고작이었다.
“야, 전 병장! 넌 하지도 못할 놈이 옷은 왜 벗고 지랄 떨었냐?”
옆방 문이 벌컥 열리며 굴러들어온 소리였다. 인기척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중사의 느닷없는 침범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알몸을 감추려는 여인네처럼 이불로 몸을 가리며 움츠렸다.
“야 인마! 너 고자냐?”
중사의 빈정대는 이죽거림에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 그나마 띄엄띄엄 투영되기 시작했다. 내 몸뚱이가 헹가래 위로 들려져 군용트럭에 실려 영외로 밀려왔던 기억, 어딘가의 선술집에 강제로 떠밀림과 동시에 등장했던 낯선 여자의 기억, 그랬다. 오입 운운하며 히죽거리던 중사의 짓이었다.
그럼 동정은 낯선 여자가 가져간 것인가? 발가벗겨져 버려진 것을 보면 동정을 빼앗긴 것은 영락없는 현실일 터였다. 그런데, 중사의 ‘하지도 못할 놈’등의 빈정대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부끄럽게 확인했다.
“중사님,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어떻게 돼. 그렇구 그렇게 됐지!”
중사는 키득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웃음이 거짓웃음이란 것을 삼 년 동안 같이 근무한 나는 충분히 간파하고 있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어제 전 아무 짓두 안 했다구요!”
제발 그랬기를 바라면서,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지해 못이라도 박아야 하듯이, 사투리의‘유’를‘요’로 발음하며 힘주어 정의를 내렸다.
“자식, 그래도 기억은 조금 나는가 보네. 야, 전 병장! 너 지랄같이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면서? 그래서 오입하면 안 된다고 발버둥 쳤다던데. 어떻게 된 놈이 거꾸로 됐냐. 여자가 빼고 남자가 덤벼야 하는데, 남자가 빼고 여자가 덤비게 뒤집혔으니 말이야!”
기억이 조각조각 되새김되기 시작했다. 그랬다. 직속상관이었던 중사는 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 요량으로 색시 집까지 끌고 나왔다. 색시 집 골방에 떠밀리자마자 여자가 투입되었다. 여자는 비교적 크고 말랐으며 나름 예쁘기까지 했다. 여자는 중사의 지시를 받았는지 직업적으로 후다닥 웃옷을 벗으며 가슴을 드러내기부터 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의 맨가슴을 처음으로 마주했음에도 동물적인 욕정이 솟지 않았다. 늘 숨겨져 볼 수 없는 정라의 가슴보다 맨살의 드러낸 가슴이 흑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연유는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모든 감각이 마비될 만큼 술에 떡이 되었어도 자꾸만 정라를 상기시켜 떠올렸었다. 당장의 욕정보다 정라의 가치를 뇌리에 주입하며 타협과 배반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싸움을 했다. 여자에게 고향은 어디냐, 어떻게 이런 곳까지 왔느냐, 여자가 싫어할지도 모르는 물음들을 주저리주저리 지껄이며 수컷으로서의 욕망을 회피하려 애썼다. 여자는 몹시 화가 난 듯 했었지만 차츰 부드러워지는 모습을 보였다. 고향은 부산이며, 애인에게 버림받아 흘러왔다,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그런 여자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지주의 후손이며, 피해자의 딸이다, 그러나 미치도록 사랑하는 여자다…… 라는 고백을 쏟아냈다. 이어서 여자는 나이가 나보다 네 살이나 많아 남동생 같으니 예쁜 사랑 엮어서 행복하게 살라면서 어느 순간 누이처럼 말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그냥 서로 옆에서 자기만 해요! 그 대신 키스만 해줄게요!”
이어서 여자의 입술이 내 입술로 다가와 곧바로 맞닿았다. 이번에는 기습을 한 것이 아니라 기습을 당했다. 늘 호시탐탐 기습의 기회를 엿보던 정라의 아련한 입술이 아닌 돈이면 언제나 가능한 입술의 역습이었다. 놀란 나는 마침내 왈칵 뒤집혔다.
“병장님, 처음이군요!”
여자가 재미있다는 듯 배 위로 올라타며 맹렬하게 입술을 비볐다. 나는 꼼짝을 못하고 받아야만 했다. 여자의 냄새는 멀리서 왔으나 젖은 입술은 능숙하고 깊었다. 하물며 여자의 겨드랑이, 언젠가 연못둥지과수원 원두막에서 목격했던 혜진이라는 여자의 것과 흡사한 겨드랑이, 붓끝처럼 돋은 겨드랑이에서 느껴지는 시각적인 정염은 입술을 밀쳐낼 수 없도록 자극했다.
키스만 한다던 여자가 욕정이 도졌는지 나의 군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토록 견고하고 두텁게 32개월 20일 동안 나를 가두었던 껍데기는 너무도 쉽게 떨어져 나갔다. 여자는 마치 궁지에 몰린 쥐를 유린하는 고양이처럼 능숙하게 몰아붙였다. 나는 방향을 잡을 수 없이 완전히 고립되어버렸다. 어느새 아랫도리는 출정을 앞둔 병사들의 외침소리처럼 울어댔다. 온몸의 핏덩이는 사타구니로만 몰입되어 굳어졌다.
여자의 물컹한 맨가슴이 얼굴을 통째로 점령해왔다. 밀려가고 밀려오는 파도소리처럼 넘실거리는 가슴의 감촉, 그토록 아련한 정라의 감촉,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뒤에서 느꼈던 정라의 가슴이 이것이었나? 아니었다. 그건 결코 아니었다. 정라의 가슴은 꼭꼭 숨겨놓은 귀한 감촉이었다. 온몸을 전율로 휘감고 나를 노예로 옭아맨 졸도할 듯 황홀했던 정라의 가슴, 정라의 가슴은 물결처럼 아련한 가슴이었고 여자의 가슴은 돈에 얽매인 쓰라린 가슴이었다. 정라의 아련한 가슴 때문이었을까, 뇌세포의 명령을 받은 병사가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토록 울어대던 무기가 어느 순간 울음을 포기하고 스러져버렸다. 병사의 무기는 적군의 심장으로 돌진하기에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장식품에 불과했다.
“어머, 얘가 왜 이래!”
여자는 싸움을 포기해버린 병사의 무기를 확인하고는 만지작거리며 뇌까렸다. 여자가 병사의 무기를 탐하려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병사의 무기는 발끈 성을 내며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자신을 희롱하는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병사는 공격 지점을 쉽게 찾지 못했다. 적군은 엄폐물에 가려진 은신처를 맘껏 개방했어도 어설픈 학도병같이 공격지점만 맴돌 뿐 포인트까지는 끝내 근접하지 못했다. 몇 번의 공격실패에 병사는 또 다시 맥이 빠졌고 무기는 흐느적거리며 힘을 잃어갔다.
“술을 먹어도 지독하게 먹었나 봐. 이런 일은 처음 보네. 애인 생각 때문에 안 되겠어!”
측은지심이었을까, 여자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 어머니처럼 병사를 품었다. 학도병의 몸은 비로소 평온해진 갈등의 끝자락에서 기진맥진 허물어졌다. 필름이 끊어져 바야흐로 자유를 얻은 것이었다. 병사는 여자의 맨살에 젖어 잠들었다. 잠든 병사의 꿈속에 여자의 가슴은 없었고 어린 소녀, 정라의 가슴만이 흘렀다.
우라질! 간밤의 기억이 거기에서 멈춰져 흩어졌다. 꼭꼭 감추었다가 정라에게만 보여주고 싶었던 보물을 낯선 곳에서 잃어버렸다. 아니, 도둑맞았다.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몇 사병들이 쉽게 버리고, 더러는 그것이 수컷의 훈장처럼 회자되는 것과 나의 관념은 정반대였다. 적어도 나는 통념에 편승하지 않으려 퍼덕거려왔다. 여자보다 더한 정조의 관념이 병적일 정도였다. 그것은 누가 강요했던 것도 아닌 오로지 나의 주문에서 비롯되었다. 장마 이후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의 홀씨가 발아되었을 때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 성장시킨 소중한 자존심이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 내세우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정라에게 떳떳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었다.
이제 정라의 얼굴을 어찌 대할지 막막해졌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볼 뻔뻔함이 남아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좀 더 세월이 흐르면 오늘의 기억조차 희미해질까, 좀 더 모질게 나를 학대하면 씻어질 수치심일까, 나는 고작 군복을 위장용으로 삼아 주섬주섬 알몸을 감추었다.
나의 제대는 어디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세상은 물론 가까이에서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가족에게조차도 그저 살아야 하는 일상의 연속일 뿐이었다. 하물며 함구하고 있는 제대 마지막 날의 탈선을 알 리도 없었으며, 적의 은신처까지 침투하지도 못한 사건을 심각하게 곱씹는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 거짓말처럼 옅어져갔다. 동물적 탈선의 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밀주된 잣 술 때문이었다는 나름의 변명이 점차 설득력 있게 나를 정당화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정라에 대한 나 혼자만의 부끄러움을 흐르는 세월에 흘려보낼 수 있었고,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용기가 새순처럼 작고 여린 싹을 다시 밀어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구치소에 있었으며, 한번 추락하여 수렁에 빠진 정라네의 모질고 끈적끈적한 살림살이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한 채 질퍽이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용기를 막았고, 그녀를 만난다는 것이 너그러울 수는 없도록 작용했다. 그 수평적 흐름은 무심하게 흘러 가을까지 속절없이 이어졌다.
하늘이 높아 시리고 청명해진 가을, 석우의 결혼식은 시내 향군회관에서 치러졌다. 사교적이지 못한 나에 비해 비교적 건들거렸던 형의 하객은 예상외로 북적였다. 연합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남용하였으며, 굳이 참석할 이유가 없는 먼 이웃의 얼굴까지 가끔 눈에 띄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석우는 연락 가능한 사람들은 모두 하객의 범위에 포함시켜 불러 모았던 듯 보였다. 월악산에 버섯을 따러 간 이후 주봉기와 음영석을 만난 계기를 제공한 것이 석우의 짓이었고, 할머니를 작은집에서 큰집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한 것도 석우의 짓이었다.
여하튼 시끌벅적한 만남들이 뒤섞인 예식장은 첫출발의 싱그러움으로 와글거렸고, 곳곳에서 꼬리를 문 가벼운 입방아들이 낮게 흘러 다녔다. 입방아의 주요 요리감은 혼전 출산한 석우의 아들이었다. 결혼식보다 먼저 태어난 사내 녀석은 이문동 이모 품에 손자처럼 안겨 세상모르게 새근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남의 이야기라면 서슴없이 흠잡는 어른들의 본능적 시기심과는 달리 아이의 숨결만은 맑고 순했다.
“석우 어무니, 손주 안아보는 기분이 어떠여?”
“그 녀석, 되게 급했나벼!”
누군가는 노골적인 빈정거림도 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날이 날이니만큼 연신 웃음으로 화답하면서도 예식장까지 손자를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결국 하객의 발걸음이 뜸해지는 기회를 틈타 신랑 부모석으로 피신하듯 몸을 옮긴 어머니는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우정 앞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예식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확성기로 증폭되어 고르게 깔렸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예식은 양측 어머니의 축복 어린 촛불이 켜지면서 부부로서의 첫걸음을 밟아나갔다. 주인공들이 등장했고 성혼선언문 낭독 등 여타 결혼식과 다르지 않은 예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조금은 상기되어 있는 신랑에 비해 어린 신부는 전혀 당황하거나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진영의 태도는 이미 첫 아이를 출산한 어미로서의 자신감으로 내겐 비추어졌다.
석우가 소속된 협회 총연합회장의 주례사는 길었다. 별반 자랑거리가 없는 신랑 전석우와 신부 신진영의 소개로 시작된 주입식 주례사는 난파선처럼 표류하며 떠다녔다. 듣는 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혼자만의 명분을 늘어놓던 주례는 식은땀을 흘리며 횡설수설까지 해 하객들의 빈축을 샀다. 하객들은 옆 사람과 속닥거리며 주례사를 경청하는 이가 거의 없었고, 석우와 진영마저도 지루함을 이겨내려는 몸짓이 간간히 노출되었다.
뒤편에 서서 예식을 지켜보던 나는 잠깐 악수만 하고 인사를 나누었던 주봉기와 음영석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혹시나 진수를 본 적이 없느냐는 궁금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녀석들은 이미 식당 술자리로 튀어버렸는지 한참을 둘러봐도 눈에 밟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곧 하객들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숨어 있는 진수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구석에 숨어 진영을 바라보기만 하는 진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눈 밑까지 가려 눈동자만 살아 있는 범죄인 모습의 진수, 하객들의 틈을 비집고 그에게로 접근했다. 진수는 살금살금 좁혀지는 나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옆구리를 찔러 신호를 보냈다. 자신을 알아 본 나와 맞닥뜨린 진수가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의도적으로 등을 돌렸고 나로부터 벗어나고자 식장을 빠져나갔다. 뒤따라 재빨리 팔을 잡았다. 그대로는 차마 보낼 수 없는 신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그냥 가면 어떻게 혀! 식사는 하구 가야 할 것 아니여?”
진수가 멈칫하며 들숨을 골랐다. 그의 등판이 날숨과 함께 처량하게 굽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내 눈동자에 박았다. 여동생을 바라보며 생겨난 습기인 듯 동공 언저리에 연민의 물기가 배어 있었다. 진수의 물기 어린 눈동자 안에 진영이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볼 수가 없어 눈동자를 깔았다. 말없는 그가 단지 내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진영을 부탁한다는 무언의 의미가 온몸으로 전이되며 심장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진수의 시선을 억지로 피하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손아귀를 이탈해나갔다. 그리고 그는 하객들 틈으로 소리 없이 묻혀 멀어져갔다. 내게는 그를 붙잡을 용기는 물론 가족으로서의 배려조차도 챙길 틈이 없었다. 아니, 책임을 회피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었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신랑 신부의 퇴장식이 마무리되고 기념촬영이 진행될 순서였다. 갓 탄생한 부부의 언저리에 포진한 가족 중 양희가 나를 발견하고는 밖에서 서성대지 말고 오라는 손짓을 연신 보냈다. 애써 진수 생각을 털고 신랑 측 위치로 돌아갔다. 신부 측 자리에 진수가 없는 것을 문제 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부의 가족인 진수는 가족사진 속에 없었다.
폐백이 진행되었다. 어른들 순서에 이어 항렬순서가 되었을 때 맞절을 하고 있는 진영을 나는 유심히 관찰했다. 평생 한번 있을 곱게 차려입은 옷맵시였다. 검은 피부색을 포장한 화사한 새색시의 옥빛 얼굴이었다. 그러나 눈을 내리깔고 익숙하지 못한 상황에 지친 어린 신부의 몸짓, 진영의 얼굴에서 문득 알 수 없는 수심을 보았다. 그 수심의 깊이에는 예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 진수를 기억하는 수심으로 귀결되었다. 나는 애써 불운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이탈하였다.
식당으로 내려왔다. 주위를 휭 하니 훑어보고는 영석과 봉기의 자리에 합석했다. 영석이 먼저 말을 건넸다.
“어서 와라. 수고 많았다. 원래 이런 큰일에는 주변 사람들이 더 고생이 많은 법이여!”
“맞어,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지!”
이미 술기운이 적당히 올라 있는 영석과 봉기가 각각 한마디씩 인사치레를 했다. 영석이 먼저 잔을 내밀었다.
“자아, 한잔 받어라.”
녀석은 술잔이 출렁일 때까지 가득 따랐다. 건배가 이어졌다. 줄곧 나름 긴장했던 갈증 탓인지 목젖으로 넘김이 가벼웠다. 봉기가 물었다.
“그런데, 양우 니 진수는 못 봤냐?”
녀석들은 진수를 만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대답하지 않을 참이었다. 뒤돌아 식장을 벗어나는 초라한 등판이 아직도 아른대며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 큰일 났어!”
영석이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큰일이라니, 나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영석을 치받았다.
“큰일?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또 있는 거여? 무슨 말이여?”
“니 아직 모르구 있었니? 아무래두 진수 오래 못 살 것 같다.”
“그게 무슨 뜻이여?”
“갸가 설암인가 뭔가가 혀에 생겼단다. 혓바닥 언저리에 병균이 침투했다나 뭐라나.”
“염병할…….”
내 입에서 욕지거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놀라움과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갈가리 찢겨진 육신보다 그렇게 추락하도록 자신을 아끼지 못한 진수에 대한 연민도 아니었다. 어디가 종착역인지 알 수 없는 진수에 대한 분노의 울부짖음이었다. 뒤틀린 운명들을 향한 반항의 몸부림이었다.
“말해 뭐혀. 인생이 꼬여두 어떻게 그렇게 꼬이냐?”
봉기의 푸념 섞인 목소리는 이미 아득했다. 무대뽀삼형제의 세 바퀴로 지탱하던 무대뽀 우정도 두 바퀴만이 뒤뚱대며 굴러갈 판이었다. 녀석들의 표정은 그것이 더 안쓰러운 모양이었다. 녀석들이 번갈아 준 술잔을 거푸 들이킨 나는 우울한 진수 이야기를 그들과 주절주절 섞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식당으로 들어오는 신랑 신부를 발견하고는 핑계 차 자리를 떴다. 신랑 신부는 하객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올리고 신혼여행지인 경주로 떠났다. 떠나는 모습을 배웅한 나는 진수의 몫까지 보태어 신혼부부의 행복을 간절히 빌었다.
신혼부부가 여행을 떠난 이튿날 늦은 오후, 한낮부터 을씨년스럽게 떨어지던 가랑비가 이내 소나기로 변해버렸다. 과수원 둔덕을 흩날리던 흙먼지는 젖어들었고, 아카시아 나무 꼭대기의 까치집은 오늘따라 위태롭고 처량 맞아 보였다. 나는 빗물이 고였을지도 모르는 과수원의 고랑 곳곳을 점검하기 위해 장화를 신고 삽을 왼쪽 어깨에 걸쳤다.
전날 도착 사실만을 통보한 신혼부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소나기 때문에 신혼여행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답을 알 수 없는 생각을 추측하는 동안 빗물에 취약하던 고랑에 어느덧 발길이 멈춰 있었다. 빗물이 고인 둔덕을 터 물길을 풀고, 무더기로 엉킨 낙엽들을 걷어내었다. 길이 막혀 멈췄던 물방울들은 서로 먼저 달아나려 안달을 부리며 낮은 곳으로 내달렸다. 늘 하던 그 일이 갑자기 싫증난 것은 아마도 심신이 지친 탓일 터, 스산함까지 느낀 나는 과수원 둘레를 더 살펴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길을 대충 얼버무려 놓고 집으로 걸음을 되돌렸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소식이 과수원으로 날아들어 있었다. 봉계로부터 날아온 내용은 간단했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진수가 달천강 물에 빠져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신혼부부에게는 연락하지 말아달라는 진수 아버지의 전갈도 함께 당부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비보였다.
내 심장은 물 풍선 터지듯 일시에 터져버렸다. 어깨에 걸쳤던 삽을 그대로 팽개쳤다. 곧바로 헛간에 있는 자전거를 몰고 신진수 집으로 치달았다. 사선으로 날아오는 세찬 빗방울이 나를 때리는지 내가 빗방울을 때리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벌써 어둠에 에워싸인 그의 집은 적막하고 괴괴했다. 대문 밖에는 삼삼오오 모여 집안 분위기를 염탐하는 동네 사람들로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냉기는 낮게 표류하며 주위를 맴돌았고, 창틈을 비집고 나온 희미한 불빛은 처마에 매달려 흔들리는 듯 음산했다.
나는 구경꾼들의 사이를 비집고 빨려들듯 방 안으로 돌진했다. 진수는 잠자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밖을 보지 않으려 머리까지 덮어쓴 숨바꼭질 모양새가 낯설 따름이었다. 미친 놈, 이건 사고가 아니라 분명 자살이었다. 사고로 위장한 자살이었다. 턱의 일부가 날아간 흉물스러운 얼굴, 말조차 자유롭지 못할 정도로 마모된 혀, 그 혀에 설암까지……. 그래, 그것이 편한 길이었다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이었다면, 편히 잠들기만을 애써 삼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도 모르는 눈물이 어느새 볼따구니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빗물인지 눈물인지 확인하고 싶지도 않았다. 팔소매로 물방울을 훔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열려진 문 밖에는 영석과 봉기가 막 도착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방 안을 힐끗힐끗 염탐하고는 안절부절했다. 녀석들에게 약한 모습을 들키기 싫은 나는 소매로 얼굴을 마구 문질러 빗물인지 눈물인지를 닦아내었다. 녀석들이 죄인처럼 슬금슬금 방으로 기어들어왔다. 영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왔니?”
“줌 전에…….”
묻고 답한 언어는 거기가 끝이었다. 녀석들은 좌우에 나란히 앉아 침묵했다. 진수의 주검 뒤에는 하천 둑에서 실력을 발휘하던 손때 묻은 기타가 제멋대로 팽개쳐져 죽어 있었다. 녀석들과 나의 시선이 멈춘 기타에서는 추억의 아련한 음률이 울어대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게 들리는 음률이 그들에게 들리는 음률이고, 그들이 듣는 음률이 진수의 음률일 터였다.
한참을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던 우리들 중 영석이 먼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건넛방으로 몸을 넘긴 그가 진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영석을 알아본 아버지가 눈두덩을 훔쳤다. 아마도 무대뽀삼형제인 영석의 얼굴에서 아들 진수가 투영된 모양이었다.
“아버님, 어찌된 거여유?”
“아침에, 물고기 잡으러 달천강으루 간다구 하더니만 저 지경이 되어 돌아왔네.”
영석의 물음에 답하는 아버지는 몹시도 힘겨워 보였다.
“혼자 갔어유? 누가 본 사람 없대유?”
“모르겠네. 강가에서 자갈 채취하던 사람들이 건져 올렸나벼.”
나는 건넛방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영석의 옆구리를 찔러 신호를 보냈다. 가뜩이나 힘든 아버지를 더는 힘들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권고였다. 의도를 알아챈 영석이 금방 물음을 멈추었다. 아버지는 진수를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를 두고 우리의 의견을 구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아버님 생각은 어떠신대유?”
“글쎄다. 장가두 안 간 녀석이니 삼일장을 치르기두 그렇네.”
아버지는 곧바로 화장을 하여 달천강에 뿌리거나, 어디 적당한 곳이 있으면 소리 소문 없이 매장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넋 나간 어머니는 그저 아버지의 처분에 따르려는 듯 아무런 의견도 내세우지 않았다. 단지 살아 있는 우리를 보고 서러움이 복받친 듯 흐느낌을 토해낼 뿐이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진수의 처리 방법에 대하여 감히 의견을 제시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아버지의 선택에 따라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야 할 따름이었다.
나의 어머니로부터 소식을 들었는지 아버지가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진수 아버지의 괴로움을 달래주기에는 더없는 지인이었다. 봉계를 떠나 연못둥지과수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진영의 사건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불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이제는 사돈지간으로 맺어진 혈연관계며, 조상까지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도리이기도 했다. 진수 아버지의 자초지종을 모두 전해들은 아버지는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그래두 어떻게 화장을 하겠나. 우리 과수원 귀퉁이래두 묻어주면 어떨까 싶네. 여동생이래두 가끔 무덤을 살펴줄 게 아닌가!”
내게는 의외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버지의 판단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여쭐 명분은 없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존경스러울 뿐 어떤 이유도 제기할 수 없는 일, 나의 침묵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 생각은, 우울한 진수의 죽음을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앞으로 진영의 인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고맙네, 이다지두 신경 써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먼!”
진수 부모는 아버지의 호의에 한없는 고마움을 표했다. 영석과 봉기 또한 더없이 반기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어서 논의된 매장 날짜는 이튿날로 매듭지었다. 진영이 돌아오기 전에 진수를 묻어 더는 추한 모습을 남기지 말자는, 살아 있는 자를 배려한 결론이었다. 서둘러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았다.
아버지는 늦은 저녁 돌아갔다. 나는 무대뽀 두 명과 함께 밤을 밝혔다. 마지막 가는 진수의 차가운 몸뚱이 앞에 뜨거운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동해의 망상해수욕장에서, 버섯을 따서 나누어 갖던 월악산 골짜기에서, 함께 뜨거웠던 진수는 싸늘하게 식은 채 말이 없었다. 예식장에서 본 진수의 습기 어린 눈동자가 끊임없이 아른거렸다. 너는 내 마음을 알겠지? 하면서 응시하던 마주볼 수 없었던 눈동자, 그의 눈동자는 점점 명료해졌고 나의 눈동자는 점점 자욱해졌다. 남겨진 우리는 진수와의 고리를 끊기 위해 술에 취하고 슬픔에 취해서 그 자리에 하나씩 널브러졌다.
비는 어슴푸레하게 먼동이 틀 무렵에야 그쳤다. 진수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의 눈에 덜 띄게 하려는 일념으로 일찍부터 채비를 서둘렀다. 미리 연락된 사내들에 의해 절차나 의식도 없이 입관된 진수는 미처 해가 뜨기도 전에 연못둥지과수원으로 출발했다. 상여도 아니었다. 영구차도 아니었다. 진수의 식은 몸뚱이는 트럭 짐칸에 널빤지처럼 실려 덜컹대며 흔들거리기까지 했다.
더구나 과수원에 도착해서도 원두막 언덕까지 조성된 꽃길의 정면을 통과하지도 못했다. 개울가에 차를 세우고 겨우 우리의 손에 의해 과수원 끝자락 귀퉁이로 옮겨졌다. 그리고 잠시의 짬도 없이 한 평 남짓 되는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관이 밀려 떨어졌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미 예정된 순서대로 신속하게 진행되는 매장에 그 누구도 이유를 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들켜버리기라도 한다면 안 될 사람들처럼 우리도 매장을 도왔을 뿐이었다.
진수의 몸뚱이는 그렇게 맥없이 흙으로 회귀했다. 흙으로 돌아간 자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비석은 물론 없었다. 더구나 봉분조차 어설퍼서 볼품없었다. 멀리 비 그친 산자락에는 보기 드문 쌍무지개가 떴다. 하늘은 멀었고 무지개는 가까웠다.
“우라질, 뜬금없이 웬 쌍무지개여!”
영석이 투덜대며 비로소 눈가를 훔쳤다. 나는 등을 돌려 무지개는 물론 영석의 얼굴조차 외면해버렸다. 빌어먹을, 또 눈동자에 안개가 서려 치밀었다. 눈물이 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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