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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호텔 수영장은 수정처럼 물이 깨끗하고 사람이 많지 않아서 주말이면 예준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그 시간은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였다. 8시까지 개장하는데 손님이 원하면 시간을 더 연장해 주기도 했다. 요금이 좀 비싼 게 흠이었다. 요금이 비싸도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예준은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손님이 그녀 혼자일 때도 있었다. 그 시간에는 대부분 수영을 끝내고 저녁 식사를 하는 시간이어서 그럴 게다. 오늘도 예준 혼자 남아서 8시 5분 전까지 수영을 즐겼다.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에 반해서 인어처럼 지느러미를 흔드는 흉내도 내고 갖가지 포즈로 몸을 비틀면서 글레머스타 같은 육체미를 과시했다. 예준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인데도 몸매는 십대나 이십대같이 터질 듯 탱탱했다. 예준이 수영하는 모습은 예술적이고 관능적이었다. 정말 보아 주는 남자가 없어서 유감이었다. 수영을 끝내고 물에서 나와 탈의실로 걸어가려고 할 때 한 남성이 입구 쪽에서 걸어왔다. 관리인인 줄 알고 인사를 하려다 표정이 공포로 바뀌었다. 갑자기 옷을 확 벗는 남자. 해변에서 봤던 그 꺽다리 남자였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꺽다리는 안경잽이였다. 유난히 긴 코가 잡아먹을 듯 예준을 노려보았고 타월로 중요 부분만 가리고 있었으나 알몸이었다. 남자는 예준을 씹어먹을 듯한 자세로 탐욕스런 눈알을 굴리며 다가왔다. 예준은 반대편 입구로 뛰었다. 그쪽은 남자 탈의실 쪽이었다. 꺽다리는 여자 탈의실로 들어왔던 것이다.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계단을 달려내려가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수영장은 8층에 있었다. 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끄러움도 잊은 채 일층 호텔 로비로 달려갔다.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슨 사고가 난 줄 알고 예준의 입만 바라보았다.
“살인범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살인범이요?”
남자 직원이 놀라서 물었다.
“예, 살인범이예요. 일 주일 전 해변에서 여자를 죽인 놈이예요.”
“그런 뉴스를 못 들었는데요.”
“경찰이 비공개 수사를 하기 때문이예요. 어서 경찰을 불러 주세요. 빨리요.”
남자 직원은 반신반의하며 경찰에 연락했다. 경찰관들이 달려왔다. 세 명이었다. 그때까지 예준은 수영복 차림이었다. 추위에 덜덜 떨면서 자신이 그 살인 사건의 신고자라고 밝혔다. 여직원이 예준의 옷을 가지고 와서 입혀 주었다. 경찰들이 호텔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살인범을 찾지 못했다. 허탕치고 로비로 돌아온 경찰관에게 한 여자 손님이 방금 밖으로 나갔다고 여직원이 말했다.
“그놈이 틀림없소. 여자로 변장한 거야”
“아차, 출입을 통제할 걸 잊었구나.”
“어머나, 이를 어쩌면 좋아?”
여직원은 발을 동동 구르고 예준은 울상을 하고 멍히 서 있었으며 경찰관들은 살인범을 잡겠다고 세 명이 우르르 호텔 밖으로 달려나갔다. 경찰관들은 꺽다리를 눈앞에 두고 놓쳤다. 꺽다리는 호텔에 들어올 때부터 여자로 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가 기통차게 좋은 살인범이었다.
예준은 집에 돌아와서도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을 단단히 이중으로 잠그고 그놈이 침입하면 방어하려고 호신용 무기도 준비했다. 호신용 무기는 이민술 형사가 마음써서 빌려준 모형 권총이었다. 장난감이었지만 발사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무기였다.
7
이민술 형사는 거만하고 무능한 형사지만 그 동안의 무능 형사란 탈을 벗고 말년에 승진하려는 욕심에선지 수사에 적극적이었다. 이민술 형사가 직접 그 사건을 담당했다. 책상 위에 산적한 큰 사건들을 제쳐 두고 해변 살인 사건에 매달렸다. 예준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믿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호해 주었다. 잠복 경찰과 의경들을 아파트 주변에 배치하고 후속 피해가 없게 머리를 썼다. 후속 피해는 예준이 살인범에게 또 한 번 살해당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인지 살인범한테선 전화도 오지 않고 미행하는 기미도 없었다. 예준이 지하상가에 출퇴근할 때 두 의경이 경찰차로 보디가드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예준은 일 주일 동안 온잠을 자지 못했을 게다. 일 주일 사이에 얻은 소득은 해변 사건 현장에서 주운 여자의 금팔찌였다. 그러나 그 금팔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직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금팔찌의 주인을 알아내면 수사에 큰 진전이 있을 텐데 형사는 인터넷 분실물 신고센터에 금팔찌의 사진을 올려 놓고 금팔찌 주인이 나타나기만 기다린다.
자기가 금팔찌 주인이라고 전화가 몇 번 걸려왔지만 모두 장난 전화였다. 형사는 그 금팔찌가 피해 여성이 폭행당할 때 떨어뜨린 거라고 믿고 있다. 허나 피살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아가씨의 가족이나 친한 친구가 아니고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설사 금팔찌의 주인을 찾는다고 해도 금팔찌에 지문 같은 게 명료히 남아 있지 않아서 정말 피살자의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개 수사를 않는 이유는 범인의 후속 살인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놈은 또 다른 살인을 한 연쇄 살인범일 수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예준을 살해할 수도 있다. 예준이 유일한 목격자니까. 예준이란 미끼를 놔두고 범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서 붙잡는 방법이 가장 현명한데 범인은 영리해서 그 수법에 걸려들지 않았다. 예준에게 전화도 오지 않고 미행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늘 저녁 또 나타난 것이다.
“내가 갔더라면 그놈을 붙잡는 건데 애들한테 맡겨서 놓친 거요. 그놈이 나타나면 무조건 그 권총으로 쏴요. 항상 그걸 몸에 지참하쇼.”
“예, 알았어요 형사님. 이젠 무서워서 수영장에도 못 가겠어요. 다른 데 또 나타나면 어쩌죠?”
“수영장 말고 다니는 데가 또 있소?”
“사우나탕에 한 번씩 가요.”
“염려 말고 가시오. 우리 의경들이 아가씨를 잘 보호할 거요. 그놈이 다시는 수영장에 못 올 테니까 수영장에도 마음놓고 다녀요. 식사 잘하고 몸매 관리 잘 하시오. 그래야 이 다음에 좋은 신랑감을 만나지. 하하하”
그 급박한 상황에도 형사는 넉살좋게 농담을 했다. 예준에겐 생과 사의 기로였다. 의경들이 지켜 준다지만 꺽다리는 그를 비웃듯 사우나탕에도 찾아왔다. 새벽에 물건을 받아 놓고 예전처럼 단골 사우나탕에 들러 목욕을 끝내고 나올 때였다. 주차장에 꺽다리가 귀부인처럼 차리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루지를 칠하고 화장을 했지만 그 얼굴은 그 얼굴이었다. 긴 코가 얼굴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보기 싫지 않게 잘 생겨서 웃으면 귀여운 데가 잇었다. 미모 뒤에 숨은 살인적인 미소란 뜻이다. 그의 차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고 예준의 차문 앞에 자기 차처럼 버티고 서서 예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의경들은 추위를 피하려고 그들의 차 안에 있었다. 새벽 추위가 대단했다. 살인범이 바로 지척에 있는데도 여자인 줄 알고 핸드폰으로 하는 게임에 열중에 있었다. “사람 살려요!”하는 예준의 비명에 의경들이 차에서 뛰어나왔을 때는 살인범이 바람같이 사라진 후였다. 마치 경찰을 비웃듯, 예준을 놀리듯 공포만 한 아름 선사하고 사라진 것이었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만 둥하고 가게에 출근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에 찍힌 전화번호를 보니 낯선 숫자였다. 전화 받기가 두려웠다. 떨리는 마음으로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다. 꺽다리 남자였다. 예준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단 듯이 농담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아저씨, 보고 싶었어용. 그렇게 용기가 없으면서 어떻게 저를 죽이겠다고 그러세용. 사우타탕 주차장에서 이 새벽에 기다리신 걸 보니 나를 좋아하신가 봐.”
“어떻게 그리 잘 알지? 내가 널 미치게 좋아한다는 걸 점쟁이같이 알아맞추네.”
“왜 날 미행해요? 죽이지도 못하면서 왜 날 괴롭히죠? 한 여자를 죽였으면 됐지, 또 살인을 하려고? 내 목숨 하나 죽는 건 아깝지 않지만 당신의 인생이 불쌍해서 그래요. 어서 자수하세요 네?”
“내게 충고까지 하는구나. 그렇게 인생론을 따지니까 앙징맞고 귀엽군. 이유를 말해 줄까? 네가 송정아하고 매우 닮아서 그런다. 매우, 아주 많이. 특히 그 볼우물이 사랑스러워. 내게도 사랑의 권리는 있다. 살인범은 사랑 못하나? 널 갖고 싶어서 미치겠다 히히히히!”
“미친놈, 성도착증 환자! 네 애인이 왜 널 싫어했는지 알겠다.”
“이년아, 말 조심해.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 게 아니고 그 여자가 날 점찍었던 거야. 그 맛을 너 같은 장사꾼이 알기나 하겠냐? 이 장사꾼, 멋테기 없는 시골 촌년아.”
그렇게 상말을 나불거리면서도 어조는 부드러웠다. 농담하듯 장난하듯 전화에 멋을 부린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어떻게 예준의 본적을 알아냈는지 그녀가 시골 태생이란 걸 알고 있다. 그 동안 그녀의 뒷조사를 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첫남자에 채인 쓰린 과거까지도 알까? 여자의 아픈 과거만큼은 몰라 줬으면 했다. 첫남자가 마지막 남자였고 죽을 때도 그 남자 하나만 기억에 담고 관에 들어가려고 했다.
예준이 독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진정 꺽다리 남자가 두려웠다면 장사도 집어치우고 고향에 칩거했으리라. 예준은 꺽다리의 잔인성에 이상하게 쾌감을 느꼈다. 이런 죽음 같은 고통도 첫사랑을 잊기 위한 과정이라면 달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8
날씨가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산너머, 강 건너에서 봄의 전령사가 소리쳐 밀려오고 있다. 밀려와선 지하상가 수입상점 진열대에 와서 부서진다. 꽃바람이었다. 수입상점 맞은편에 있는 꽃가게에선 입학 꽃다발을 준비하는 손님들로 북적대고 꽃집 주인은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일 년 삽백육십오일 날마다 이렇게만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어요 하고.
그 꽃가게 덕분에 수입상점 앞은 꽃향기로 넘치고 이쪽 손님들도 좋아라 한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듯이 꽃향기를 저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예준에게는 아름다움도 향기도 의미가 없었다. 꽃도 보기 싫고 세상만사가 다 귀찮기만 하다.
아침에 임순자 사장이 회계 보고를 받기 위해 보름 만에 가게에 들러 예준의 야윈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해골처럼 말랐냐며 장사에만 신경 쓰지 말고 보약을 좀 먹으라고 했다.
“지금도 그 남자 생각하니? 잊어 버려. 처자식이 줄줄이 딸린 타인 같은 사람이야. 아니 이미 타인이지. 생각하면 뭘해? 마음만 아프지. 자꾸 그 남자 생각하니까 살만 빠지지 뭐야? 그러니까 내가 뭐래? 딴 생각하지 말고 쿠렁쿠렁한 개똥 같은 사내놈 하나 만나서 살림을 차리라고 했지. 여자는 결혼해서 애 낳고 살림하는 게 최고야. 난 이래봬도 가정 없으면 못 산다. 보름 동안 외국 여행하면서 줄곧 쥐새끼 같은 우리 영감 생각만 했다니까. 늙으면 돈도 재산도 다 소용없는 거야. 밉고 보기 싫어도 부부 사랑에 비할 것이 없더라고. 쥐새끼 같은 내 영감이 춥지 마라고 이 여우털 목도리 사 줬다. 겨울도 다 갔는데 괜한 낭비지. 남자들이 돈 쓰는 법을 알아야지 원……”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고 떠난 뒤, 아침에 도착한 새물건들을 정리했다. 포장을 뜯고 진열대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가게가 좁아서 새물건이 도착하면 지하도 통로까지 짐들을 늘어놓고 보행에 지장을 주었다. 사장은 가게만 크면 뭘하냐며 큰 가게로 옮길 의향이 없어 보였다. 모든 가게가 다 불황이었다. 수입품 가게도 단골손님들 덕분에 그런 대로 현상 유지를 한다.
장갑 낀 손으로 박스에 붙은 포장 테입을 뜯다가 잘못하여 칼날이 장갑 안으로 파고들었다. 피가 나오고 아팠지만 늘상 있는 일이라 얼른 지혈제를 바르고 밴드로 봉했다. 탁자 위에 흰 봉투가 하나 놓여 있어서 열어 보니 십만원짜리 수표가 다섯 장 들어 있었다. 사장이 보약 사 먹으라고 놓고 간 것이었다.
사장을 잘 만나서 월급도 많이 받고 자유롭고 활달하게 가게 주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원초적인 우울증은 생활의 기쁨마저 삭둑삭둑 전정가위로 잘라 버렸다. 꽃가게 주인이 예쁘게 키운 꽃들을 장식품 만들기 위해 잘라 버리듯이. 그리고 지금은 지상에 가득한 아름다움들이 모두 보기 싫은 장식물이 되어 그녀의 호흡을 막으려고 했다.
해변에서 살인 현장을 보고 난 후부터 바뀐 그녀의 인생관이었다. 남자들이 모두 꺽다리 얼굴 같은 가면으로 보이고 히히낙낙거리는 여자들이 세균이나 미생물 같은 힘없는 윈시동물로 보였다. 그녀들은 무지막지한 남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간단히 죽일 수 있는 미생물 같은 존재였다. 그녀 자신도 지금 그런 위기감 속에서 깔딱깔딱 숨을 쉬고 있다.
(파리 같은 목숨, 보약은 무슨 보약? 이 돈으로 쥐새끼 같은 바깥 사장님 양복이나 한 벌 맞춰 드려야지.)
가끔 가게에 놀러오는 사장님 남편의 양복이 낡아서 양복 한 벌 선사하려던 참이었다. 예준은 수표 봉투를 핸드백에 담아 넣고 나서 포장 푸는 일을 계속했다. 테잎끈으로 단단히 묶고 또 접착테입으로 붙인 박스 포장을 뜬는 일이었다. 일하면서 껌을 오물거렸다. 열 한 개째 껌이었다. 하루에 삼십 개씩 씹으니까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호주머니에 든 껌의 숫자를 보고 시간을 측정한다.
9
지하상가는 온풍 시설이 잘 돼 있고 식당에서 풍기는 음식냄새와 사람들의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핑크색 모피코트의 앞단추를 활짝 열고 얼룩말무늬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한 아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는 동행 남자가 붙어 있는데 애인 같았다. 그 여자가 걸어오니까 지하상가 통로가 환해 보였다.
예준은 박스 포장을 뜯다 말고 그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름 전에 해변에서 있었던 살인 광경이 떠올랐다. 그 아가씨와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짧은 파마머리에 굽이 낮은 파란 하이힐, 양쪽 뺨의 귀여운 보조개 두 개. 그 아가씨를 본 순간 가슴이 뛰고 소변이 마려웠다. 하체에서 쫄졸쫄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들렀다.
해변의 아가씨와 그렇게 닮을 수가 없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그 아가씨가 분명했다. 죽은 줄 알았던 그 아가씨가 살아 있었단 말인가? 꿈이 아니길 바랬다. 그 여자는 죽어서는 안 될 히로인이었다. 그 히로인이 죽었기에 세상이 암흑처럼 어두워지고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었던 것이다. 예준도 그 여자와 함께 피살되었다. 살아 있는 건 껍데기. 그런데 그 여자가 살아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예준은 동작을 멈추고 한 동안 석상처럼 서 있다가 아가씨의 뒤를 따라갔다. 지하도의 중간에 계단이 있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전철역 지하상가였다. 얼룩말무늬 아가씨는 남자와 함께 지하절을 타기 위해 그쪽으로 가고 있었다. 아가씨와 남자가 계단을 내려갈 때 예준이 종종종 달려왔다.
“아가씨!”
얼룩말무늬 아가씨가 돌아보았다.
“혹시 송정아 씨 아니신가요?”
“맞는데요. 제가 송정아입니다.”
아가씨가 빙그레 웃으며 두 개의 보조개를 실룩거렸다. 해변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아름답고 목소리도 다정다감했다. 예준의 가슴에 탱탱히 당겨졌던 고무줄이 풀리며 해변에서 느꼈던 경악과 분노가 눈녹듯 사라지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예준은 그 경악과 분노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을 좀 내어 달라는 예준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아가씨는 지하도 계단에 예준과 나란히 걸터앉아 말상대가 되어 주었다. 생각하기도 괴로운 그날의 사건을 들먹일 때 아가씨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예준이 목격자라고 하자 아가씨는 자기를 불러 세운 이유를 이해했다. 그리고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녀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동행 남자는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그녀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는 사람도 없었다. 세상 한쪽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 미수 사건을 알 바 없단 듯이 핑핑 그녀들 옆으로 지나갔다. 수많은 발길들이.
아가씨는 예준이 그 사건을 경찰에 신고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금팔지는 정아의 것이었다. 그 남자가 스물 여섯 번째 생일 선물로 선사한 거라고. 곽신훈(꺽다리)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걸핏하면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폭행에 쾌감을 느끼는 남자. 폭행을 통해 여자가 그의 소유물임을 확인하는 남자. 그에게 신물이 나서 헤어지자고 한 말이 살인 미수의 원인이었다. 오늘 동행한 남자는 정아의 직장 동료였다.
정아는 해변에서 실신된 상태로 승용차에 실려 예준의 아파트까지 갔다. 실신에서 깨어 보니 아파트 주차장이었고 운전석 차문이 열려 있었다. 신훈은 차 안에 없었다. 예준을 미행하려고 아파트로 뒤따라갔던 시각이었다. 정아는 승용차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정아는 그날의 상처와 충격으로 직장에 나가지 못하고 어제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직장에 출근하여 동료 직원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에 가는 길이었다. 남자의 승용차로 가자는 걸 사람들 냄새를 맡고 싶어 전철을 택했다.
정아의 얼굴은 아직도 부어 있고 몸에는 상처 자국이 있었다. 꺽다리가 정아를 모래밭에 패대기칠 때 돌에 부딪쳐 찢어진 상처였다. 머리를 열 다섯 바늘이나 꿰맸다고 하며 보여 주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고 언니까지 죽이려고 하다니 그놈 나쁜 놈이예요.내가 사람을 잘못 봤죠. 허우대만 멀쩡할 뿐 지저분한 색광이고 여자를 위할 줄 몰라요. 정액을 쏟을 구멍으로 생각했어요. 그런 남자와 어떻게 결혼해서 살겠어요? 언니도 참 재수가 없네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내가 묻고 싶어요. 이제 그놈 신분을 알아냈으니 경찰에서 좋아하겠네요. 범인을 잡았다고. 살인이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예요. 축하해요. 이런 표현은 아픈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전 괜찮아요. 그 새끼가 언니를 괴롭힐까 봐 걱정이예요. 경찰에 알리면 되겠군요. 하지만 저는……이대로 끝내고 싶어요. 그와 다시 얼굴 마주치기 싫어요. 재판하면 또 그 보기 싫은 얼굴을 볼 것 같아서……”
“용서한단 말인가요?”
“용서는 안 해요. 절대로 용서 못해요. 법적으로 비화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지 않겠어요.”
“착한 마음씨! 복받을 거예요.”
10
예준은 정아에게 가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다. 정아는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꺼내 주었다. 회계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정식 직원이었다.
“우리 가게에 놀러와요. 정아 씨에게 필요한 것도 있을 거야. 원가만 받고 주지. 기분나면 거저 드릴 수도 있고.”
예준이 웃으며 말했다. 정아는 꼭 놀러오마고 약속했다. 두 여자의 예쁜 보조개가 함께 웃고 있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치료 잘 하세요.”
아가씨와 헤어져 가게로 돌아오면서 이민술 형사에게 전화했다. 피해자가 살아 있다는 말을 하고 꺽다리의 집과 직장 주소, 전화번호 등을 알려 주었다. 모두 정아가 자진해서 가르쳐 준 정보였다. 그걸 가르쳐 줬다고 꺽다리가 정아를 또 죽이려고 하면 어쩌겠냐고 걱정했더니 죽일 테면 죽이라지,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고 태연히 대꾸하던 정아였다. 정아도 실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사랑의 동업자였다. 그 상처는 죽음과 동일할지도 모른다. 모든 걸 아낌없이 바쳐 사랑했기에.
모형 권총을 돌려주려고 경찰서 형사과에 찾아가서 이민술 형사를 만났다. 권총은 의경을 시켜서 보내지 뭣하러 장사를 안 하고 왔냐며 이민술 형사가 코스모폴리터니스트(사해동포주의자) 같은 말을 했다.
“살인범이 살인미수범으로 한 단계 내려가서 우리도 마음이 편하요. 일단 목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소? 그렇다고 해서 살인미수죄가 결코 가볍단 뜻이 아니오. 그 동안 방예준 씨가 당한 고통, 충격의 아픔은 필히 보상 받아야 할 거요. 법적 처벌을 통해서 말이지. 범인의 집과 직장을 알아냈으니 체포는 시간 문제요. 협조해 줘서 고마워요.”
“송정아 씨가 범인 처벌을 원치 않으니 어쩌면 좋아요? 그들의 관계를 법적으로 비화시키고 싶지 않대요.”
“형사 사건은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 없이 경찰이 처리하게 돼 있소. 그 아가씨 의사를 존중해서 되도록 법정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이 없도록 하지요. 그렇게 하는 방법이 있소. 방예준 씨까지 피해자가 두 사람이니까 한 사오 년 간은 교도소에서 살아야 할 거요. 그보다 더 중형을 받을지도 모르지. 상습 폭행죄까지 합하면……”
“송정아 씨가 살았으니까 저도 그 사람을 용서해 주고 싶지만 형사님 판단에 따를래요. 교도소로 보내든 석방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용서한다고 그 사람이 저를 안 괴롭히진 않을 테니까요.”
“물론! 나는 곽신훈을 정식 재판에 회부할 거요. 피해자의 의사와 상관 없이.”
예준 쟈신의 일이었다. 꺽다리가 노리는 건 예준이다. 세디즘의 상대를 송정아에서 방예준으로 바꿨기에 정아의 적이 아니고 예준의 적이었다. 범인은 체포하여 처벌하더라도 그 문제는 미결로 남아 있다. 신훈이 예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예준이 경찰서에서 나와 승용차로 황혼이 물드는 거리를 달려올 때 그녀를 뒤따라오는 승용차가 있었다. 그 하얀 승용차를 본 순간 심장이 뛰고 머리칼이 곤두섰다. 두근두근 쿵쿵쿵쿵. 기관차의 연료 탱크처럼. 어둠 속에서도 뒤차에 탄 남자의 안경 낀 얼굴이 불빛 속에 뚜렷이 보였다. 꺽다리는 낄낄낄낄 웃고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내 집과 직장 주소를 경찰에 밀고했어? 사랑하는 애인의 신상명세를 수사기관에 공개하다니 너무하군. 내가 교도소에 가면 누가 널 즐겁게 해 주지? 히히히히”
꺽다리의 음성이었다. 예준도 지지 않았다. 호호호호 간드러지게 웃으며,
“그렇게 내가 좋으냐? 오늘 밤 네 구멍이 돼 줄까?”
“지금 당장 하자.”
“난 작은 사이즈는 싫어. 최소한 이십 센티는 돼야 되는데.”
“직경이 그 정도는 된다. 걱정 마라.”
“병신 같은 새끼! 엿이나 먹어라!”
눈을 딱 감고 차를 급정거했다. 쿠당탕 뒤차와 추돌하는 소리가 뇌를 진동했다. 예준의 상체가 핸들 위로 엎어지며 가슴에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경찰이 달려오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꺽다리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다. 예준은 경상이었다.
“아하하하 통쾌하다. 나쁜 자식!”
옆과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빵빵 들렸다. 공상이었다. 뒤따라온 하얀 차는 꺽다리의 차가 아니고 다른 차였다. 꺽다리는 지금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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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들
방예준(29)……수입품 가게 점원(실질적인 사장)
곽신훈(32)……정아의 애인, 예준을 미행하는 살인범
송정아(26)……신훈에게 살해당함
이민술 형사
여사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