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고보(安部公房 1924-1993)의 『모래의 여자(砂の女)』는 1962년 발표된 장편으로 그해 요미우리(讀賣)문학상을 수상했으며 64년 영화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37개국에 번역1)되는 등의 화려한 성과를 올린 대표작이다. 작가 아베고보는 국내에는 1968년 처음 번역2) 소개된 이래 미시마 유키오,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겐자부로와 함께 대표적인 일본작가로서 인식되고 있다. 본 작품은 일본경제가 고도성장 사회에 돌입하면서 혁신세력의 영향력이 보수정치체계에 편입되어가는 상황속에서 작가가 공산당탈퇴를 한 시점에 발표되었다.3) 이러한 작가의 경험에 기반하여 본작품을 '자본주의적 현실을 개혁하여 사회주의적 긍정성을 발견해나가는 작품이란 평가'와 '사회주의의 낡은 꿈 쫓기와 결별하고 그 내부에서 희망을 발견함으로써 자본주의적 현실과 화해하여 자본주의적 주체로서 주체적 투쟁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이뤄지고 있으며 혹은 작가가 사상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미국에 대한 반미주의와 결별하여 미국의 그림자와 화해한것으로 볼수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4)
그 밖에 선행연구로는 작가론적 입장에서 아베의 만주체험에 근거한 무국적성의 문제, 고향상실의 아이덴티티를 다루거나. 유사한 작풍을 가진 여타 작가와의 비교 혹은 상징적 입장에서 모래를 현대의 상황, 정치적 상황, 인간소외등과 연결시키거나 모래고장과 도시라는 상이한 두 세계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비교하는 방식의 연구가 행해져왔다.
이에 본고는 방법론으로서 「일본근대소설의 주제도출법」5)을 취해 『모래의 여자(砂の女)』의 기본적 표현구조 파악을 통해 작품의 주제를 규명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본고에서 주인공 니키 쥰페이와 모래의 여자를 각각 「남자」와「여자」대신「男」(おとこ)와 「女」(おんな)로 표기한 이유는 「壁?S カルマ氏の犯罪」에서 주인공이 개별적 존재로서의 이름을 상실한 채 세계의 끝으로 도망간 것처럼 본 작품의 주인공 역시 도시에서 개별적 존재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거부하고 도망친 도망자로 보기 때문이며. 작가가 그런 차원에서 본 작품의 주인공을 「仁木」나 「ぼく」?「私」?「彼」대신 「男」라고 호칭한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임을 밝혀둔다.
1) 이정희. 「아베 고보(安部公房)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일본어문학 2000. 8) 2) 『현대세계문학전집 12』, 유정, 新丘文化社 3) 아베고보는 일본 공산당의 예술창작 활동 간섭등에 반기를 들어 노마 히로시 하나다 기요테루 오니시 교진(大西巨人)등 「신일본문학회」에 소속된 28명의 일본공산당원 문학자들이 당(黨)과의 투쟁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 이로 인해 1962년 2월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4) 小泉浩一郞 「『砂の女』再論-硏究史の一隅から 」(國文學 97. 8) 5) 김채수 「일본근대소설의 주제 도출법연구」(「일본어문학」 제5집 한국일본어문학회, 1998. 9, 83∼225) 6) 安部公房, 『砂の女』(東京, 新潮社, 1995)
Ⅱ본론
1 내레이터의 특징과 시점인물의 검토
작가에 있어서 작품이란 작가가 자신의 현실세계와의 보다 바람직한 관계를 추구해보려는 의지의 산물이며 이때 작가가 자신과 현실세계와의 사이에서 야기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창안한 것이 내레이터이다. 작품의 서술형식을 이해하기 위해 작가가 어떤 내레이터를 설정하였는지 살펴보고 서술형식의 검토를 통해 본 작품의 시점인물을 선정하고자 한다.
(1) "어느 8월의 오후, 커다란 나무 상자와 수통을 어깨에 열십자로 메고 마치 지금부터 등산이라도 하려는 듯 양복바지 가랑이를 양말 속에 포개 집어넣은 회색의 피케모자를 쓴 男가 S역의 플랫폼에 내렸다.7)" 7면
7)ある八月の午後,大きな木箱と水筒を,肩から十文字にかけ,まるでこれから山登りでもするように,ズボンの?を靴下のなかにたくしたこんだ,ネズミ色のピケ帽子の男が一人,S驛のプラットホ-ムに降り立った. p. 7
(2)"비로소 「男」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저고리 소매로 땀을 닦았다. 천천히 나무 상자를 열어젖히고 뚜껑 쪽에서 몇 대의 나무 막대기를 끄집어 내어 맞추니 포충망이 됐다. 자루 끝으로 풀더미를 두드리면서 또 걷기 시작한다.8)" p. 8 はじめて男は,足をとめた.あたりを見まわしながら,上衣の袖で汗をぬぐった. おもむろに,木箱を開けて,上蓋から,たばねた幾本かの棒きれをとりだした.組立てると,捕蟲網になった.柄の先で,草むらを叩いたりしながら,また步きだした
(3)"「男」는 수통의 물을 입에 물고 그리고 입속 가득히 바람을 머금으니 투명하게 보였던 그 바람이 입안에서 버석거렸다.9)" p. 11 9) 男は水筒の水をふくみ, それから口いっぱいに風をふくむと, 透明にみえたその風が, 口のなかでざらついた
(4)"안 됐다는 듯이 웃는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파들어 가 있었다. 눈매를 문제삼지 않는다면 제법 애교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눈매는 아마 눈병때문일 것이다.10)" p. 25 10) 困ったように笑うと,左の頰にえくぼが浮んだ. 目つきをべつにすれば, なかなか愛敬のある顔だと思う. しかし その目つきも, おそらく眼病のせいだろう
인용문 (1)과 (2)에서 내레이터는 자신의 시각으로 「男」의 행동을 서술한다. (2)에서 내레이터는 나무막대기가 포충망을 만들기 위한 것임을 미리 알고 있다는 어떠한 단서도 드러내지 않는다. 이 부분은 내레이터가 「男」의 진행상황을 미리 알고 사건시점 이후에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男의 행동진행과 같은 시간대에서 내레이터가 서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3)에서 여기서 투명하게 본 것은 나레이터가 아니라 男가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 들어와서는 「男」의 감각기관에 잡힌 투명함과 입안에서의 버석거림을 서술하고 있다. (4)에서 내레이터는 「男」에게 시점을 맞추어 「女」의 외양을 「男」의 생각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반면 「女」의 내면을 묘사한 부분은 본 작품에 거의 없으며(31절에서 예외적으로 「女」의 내면을 내레이터가 기술한 부분이 한 부분 있기는 하다.) 女의 생각은 거의 대부분 「男」와의 대사를 통해 서술되고 있다.
또한 본 작품의 내레이터의 서술시점은 「男」의 실종이 선고된 1962년 10월 이후로 추정될수 있다. 본 작품에서 내레이터는 1절에서는 1962년의 위치에서 1955년 실종된 「男」의 외적 상황을 서술한후 2절부터는 1955년 8월 18일에서 이듬해 5월까지의 실종된 「男」가 모래구덩이속에서 겪어가는 사건들을 「男」에 시점을 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결말부의 「男」가 모래구덩이 속으로 되돌아간 1956년 5월부터 1962년 10월까지의 사실은 내레이터는 기술하고 있지 않으므로 독자는 그 기간동안의 사실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얻을수 없다는 점에서 내레이터가 전지전능적 시점으로 사건을 기술하고 있지 않고 독자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고 「男」보다 조금 더 적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이상의 서술상의 특징의 검토를 통해 1절 도입부에서 1962년의 시점에서「男」의 실종사건 외부에서 사건의 개요를 서술한 내레이터의 렌즈는 2절부터 1958년의 과거로 서서히 줌인하여 「男」의 외양을 그리고 2절 후반부터는 「男」의 시점에 맞추어져 「男」의 감각과 사고를 통해서만 그가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내면을 사건의 진행에 따라 작품의 결말까지는 일관되게 서술하는 제한적 내부시점을 취하고 있다.
2. 작중세계 구성에 대한 검토
1)작중 세계의 구성요소
이제 내레이터가 男을 시점인물로 설정하여 누구의 무슨 이야기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서술과정과 서술내용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는 중심인물(주인공)을 선정하고, 나아가 작품의 중심사건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작중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작중인물들과 그들이 처해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작중인물들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받아들이게 되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중심인물에 관계되어있는 작중세계의 중심사건을 파악하여 작중세계의 질서가 어떻게 전환되어 결론으로 이르는가를 파악하기 위하여 작중세계의 구성에 대해 검토하도록 하겠다.
2)작중 시공간의 검토
본 작품의 시간적 흐름은 1장 1절에서는 1962년의 「男」의 실종이 7년째 접어든 시점에서 내레이터에 의해 독자에게 제시되지만 2절부터 31절까지는 1955년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연대기적, 물리적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여 진행되어 가며 작품의 공간은 해변에 인접한 모래마을이다.
3)작중 인물의 검토
본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男, 女, 마을노인과 익명의 마을주민들 뫼비우스띠, 아내, 직장동료, 재판관등을 들수 있다. 본 작품에서 「男」의 실종의 경위를 나타낸 1장 1절과 작품 마지막의 실종선고신청과 심판의 첨부를 제외하면 본 작품은 총 3장 31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1절을 제외한 모든 절에 직접 등장하고 있는 인물이 男이며 1절 역시 「男」의 실종에 대한 내레이터의 기술이다.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女는 총 31절중 22절에 등장한다.
본 작품에서는 시점인물인 「男」가 가장 많이 기술되고 있으므로 본 작품은 「男」에 관한 이야기로 파악할 수 있으므로 그를 중심인물(주인공)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심인물 「男」와 그와 관계를 맺는 작중인물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男은 교사로서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곤충채집을 하기 위해 모래 마을에 들어온 존재로 정착을 거부하는 모래의 이미지와 불모의 모래지방에서 살아가는 곤충에 이끌리는 존재이다.
-女는 태풍으로 인한 모래사태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혼자서 모래구멍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男과 함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본 작품에서 「男」 다음으로 많이 서술되는 존재이다.
-마을노인은 「男」과 「女」의 만남의 매개적 존재이자 마을과 男의 대립구도에서 마을의 의견을 대표하고 男의 의견을 들어주는 존재이다.
-반면 익명의 마을청년들은 작품의 대화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 배경적 존재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노동조합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男의 친구로서 의견은 다소 상충되나 男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존재로 작품의 물리적 공간에 등장하지 않고 男의 회상이나 공상을 통해 등장한다.
-아내 역시 男의 회상을 통해 등장한다. 男이 그녀를 떠올릴때는 주로 女와의 관계속에서 비교대상으로 등장하는 존재이다.
-직장동료들은 마을청년과 같이 배경적 존재로서 작품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재판관은 男의 부조리한 상황을 항의하기 위해 상정한 상상의 절대자적 인물이다.
작중사건은 男가 곤충채집을 하기위해 1955년 8월 도시에서 모래고장로 들어옴으로서 성립된다. 즉 男은 그림 1의 그림 1의 오른쪽에서 보여지는 도시에서의 인간관계 그물망에서, 왼쪽 모래고장에서의 인간관계 그물망으로 들어오게 되어 본 작품의 사건은 진행되게 되는 것이다.
좌측의 마을사람들은 실체로서 작품속에 등장하는 반면 우측의 도시 사람들은 「男」의 회상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1장 3절에서 마을사람들 중 ①노인을 만나게 된 男은 노인을 매개로, 4절에서 ②女와 만나게 된다. 2장 14절에서 처음 등장하는 ③아내와 ④메비우스테는 그의 가정과 친구관계의 축이며 ⑤직장동료는 직장관계의 중심축이다. 男과③④⑤의 性的, 사회적 관계는 男에게 있어서 안정을 제공해 주지 못하며 오히려 男에게 있어서 목적이라기 보다는 수단적 대상이라 할수 있다. 반면 좌측의 모래고장의 질서에 편입되는 순간 「男」는 마을⑥⑦⑧의 수단적 대상으로 전락. 모래퍼내기 노동에 이용된다. ②의 女와의 관계와 모래마을에서의 관계역시 도시에 상응대는 가정과 사회관계의 그물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작품의 이야기 구조는 인물적 대립구도는 인물적 차원에서는 「女」를 포함한 마을사람들과 「男」의 대립구도로 볼수 있으며, 시공간적 대립구도는 1955년 8월 18일「男」가 도시라는 작품외공간에서 모래고장이라는 작품내공간으로 들어옴으로써. 「안과 밖」이라는 공간적 대립구도를 형성하게 되며 「男」가 마을사람들에 의해 모래구덩이 아래에 사로잡힘으로서 「안과 밖」이라는 공간구도에 더하여 「위와 아래」라는 또 하나의 대립 구도가 생겨난다.
본 작품에서 男은 모래구덩이 아래에서 모래구덩이 위로 나가고자 하며 모래고장 안에서 모래고장 밖 도시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1962년 10월 5일 현재. 「男」는 도시로 복귀하지 않음으로써 실종이 선고된다. 즉 본 작품을 진행시키는 힘의 방향은, 55년 8월 18일 「男」가 밖에서 들어와 밑으로 내려간 상황에서 男이 모래구멍에 갇힌 시점부터는 줄곧 위로 올라가 밖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만 작품의 결말에서 56년 5월 「女」의 자궁외 임신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계기로 자신에게 주어진 탈출의 기회를 유예함으로서 일단락되고 1962년 10월 5일 실종이 선고된다는 것이 내레이터를 통해 독자에게 제시된 이야기의 전부이다. 7년동안 돌아오지 않은것이 모래마을에 정착한것인지. 탈출에 실패한것인지, 아니면 탈출하여 다른 곳으로 다시 도망쳤는지에 대해서는 제시되지 않는다.
이상에서 살펴본 작중 시공간과 작중인물의 검토를 토대로 인물들이 시공간속에서 받아들여간 사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3. 중심사건의 전개양상
1)중심사건
중심인물에 있어서의 사건이나 의식에 대한 검토는 앞에서 찾아낸 중심 인물인 「男」의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이다.
「男」의 현실세계와 의식세계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본 작품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男」는 곤충채집에 몰입하는 학교교사로서 그의 채집의 목적은 아름다운 곤충의 수집이나 수업교재로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곤충을 사로잡는 데 있다. 그는 새로운 곤충을 잡아 곤충의 학명 뒤에 자신의 이름을 이탤릭체로 명기해 반영구적으로나마 남고 싶어하는 존재로 그는 친지들 몰래 초시목 무당가뢰속 좀길앞잡이의 변종을 찾기 위해 휴가를 이용해 모래마을에 찾아든다.
날이 저물어 모래마을 사람들에게 청하여 남편과 아이를 모래사태로 잃고 혼자사는 「女」의 개미지옥같은 모래속 오두막에 묶게 된 「男」는 밤새 안자고 모래퍼내는 작업에 몰두하는 「女」에 성욕을 느끼지만 그녀의 작업을 거들다가는 제풀에 지쳐 잠들어 버린다.
이튿날 모래 구멍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수단이 사다리가 없어진 것을 알게된 사내는 자신이 마을사람들에 의해 모래퍼내기 노동력이자 「女」의 남편감으로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고는 분노하여 모래사면을 삽으로 무너뜨려서 비탈을 딛고 나가고자 벼랑을 허물다 급기야 무너져내린 모래더미에 깔려 혼절한다. 이상이 1장의 줄거리이다.
몇일간 기절했던 「男」자는 「女」의 간호속에 기력을 회복하나 꾀병을 부려 「女」의 수면을 계속 방해하여, 자신이 모래노동에 전혀 도움이 안될뿐 만 아니라 「女」의 노동력에도 지장을 주는 불필요한 존재임을 마을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 노력한다. 반면 「女」는 피곤한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모래 퍼내기 작업을
계속한다. 한편 「男」는 「女」에게 성욕을 느끼지만 추문으로 발목잡히는 것이 두려워 단념한채 여행을 떠나올때 친지들에게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온것을 후회하며 조합운동하는 친구 뫼비우스띠와, 2년 4개월간 함께 살았던 아내와의 애정이 없다고는 할수 없지만 어딘지 얼어붙은 관계를 회상한다.
사로잡힌지 일주일여 지난 어느날 「男」는 「女」를 덮쳐 결박하고 모래퍼내기용 두레박을 붙잡고 마을사람들과 협상을 하나 실패하고 모래구덩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男」의 반항과 더불어 마을로부터의 물배급은 중단된다. 갈증에 견디다 못해 오두막 판자벽을 뜯어 사다리를 만들려 하다 이를 말리는 「女」와 결투하던 중 두사람은 끌어안은채 쓰러지고 두사람은 모래범벅이 된채 정사를 나눈다.
결국 갈증에 못이긴 사내는 삽을 쥐고 모래를 퍼내기 시작하고 이내 마을로부터의 물배급은 재개된다. 억지로 하게된 노동에 조금씩 친밀감을 느껴가기도 하나 10월 2일경 피곤해하는 「女」에게 술과 아스피린을 억지로 먹인후 격렬한 정사를 나눈다. 「女」가 깊이 잠든 후 준비했던 밧줄로 탈출에 성공한 「男」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새삼 감동해 시간의 가로성과 세로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마을밖으로 도주 중 마을사람들에게 발각되 추격 당하던 끝에 모래로 된 늪에 빠진 「男」는 오히려 마을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아 구덩이 속에 도르레를 통해 내려진다. 모래 구덩이로 돌아온 사내는 거미와 나방을 바라보며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에 대해 공상한다. 이제 익숙하게 자신을 목욕시켜주는 「女」를 바라보며 옛아내는 뭐하고 있을까 하고 아득한 옛일처럼 그녀를 떠올린다. 이상이 2장의 줄거리이다.
3장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수면용 모래 천막이라든가 모래를 이용한 물고기 조리법등을 고안한 「男」는 까마귀 발목에 편지를 묶어 구조요청을 하고자 까마귀 덫을 만들고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女」에게 마을이 염분섞인 바다모래를 공사자재로 내다판다는 사실을 듣고 분노를 느끼나 한편 자신에게 장애물일 뿐이 모래가 「女」와 마을사람들에게는 생활의 도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도 적응해보고자 한다. 나무를 키워보려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때로 청산가리의 유혹을 느끼며 나가 걷고 싶다고 갈망한다.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마을 밖을 걷고 싶다는 충동에
마을사람들에게 탈출하지 않을테니 나가 걷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마을사람들은 자신들 앞에서 「女」와 정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준다며 가능하다고 반농담조로 말한다. 이에 「男」는 「女」에게 부탁하나 거절당하자 힘으로 덮치지만 결국 「女」에게 실컷 얻어맞고는 쓰러진다.
그해 10월말에서 11월초 까마귀?이 애초 목적과 달리 물을 끌어올리는 유수 장치의 역할을 함을 알게되고 「男」는 마을사람들에게 대항할수 있는 수단으로 물을 만드는데 정성을 기울이지만 「女」와 함께 모래를 열심히 퍼내며 여자의 부업을 도우면 살아가던 중 이듬해 3월 「女」는 임신하고 5월의 어느날 「女」가 하혈을 하여 마을사람들이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간 후 남겨져 있는 사다리를 발견한 사내는 구덩이 밖으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나 갈망하던 바다도 풍경도 그를 감동시키지 않는다. 헤어지기 전에 덫의 정체도 안 가르쳐준것이 마음에 걸려 모래구멍 밑을 들여다본 사내는 유수장치가 망가져 있음을 발견하고 서둘러 수리하러 내려간다. 수리를 마친 사내는 한동안 웅크리고 앉아있다가 당분간 남아 사람들이 돌아오면 이야기 해주마고 생각한다. 도망하는 책략은 그 다음날에 생각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에...그리고 7년의 시간이 지나 「男」의 실종이 선고된다.
이상을 다시 간략히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 1 모래의 여자의 줄거리
본 작품에서 장의 구분은 표를 통해 알수 있듯 「男」의 탈출시도의 좌절 혹은 유예로 인해 구분되어 지고 있다. 다시 말해 작품의 진행사건은 「男」가 작품의 시작과 함께 이 마을에 들어옴으로써 야기되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탈출의 기회를 포착한시점 탈출을 유예함으로써 종결된다. 따라서 본 작품의 중심사건은 「男」의 탈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2)진행사건과 완료사건
작품의 사건에 내레이터가 개입되는 동안. 즉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진행되어가는 사건을 진행사건이라 하며, 진행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시작하여 내레이터가 개입하기 이전 시점에 완료된 사건을 완료사건이라 부른다. 소설에 있어서 진행과정상 진행사건의 문제의식의 성립은 완료사건을 배경으로 성립되어 나오는 것으로, 완료사건에 대한 고찰은 진행사건 이해의 필요한 근거들을 제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男」는 왜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인가?라는 진행사건의 계기가 완료사건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나이의 처로부터 「男」의 여행의 목적이 곤충채집 이라고 듣고는 경찰 당국과 근무처의 동료들도 약간 어리둥절한 심정이 들었던 것이다." p. 6
"어느날 집 근처의 개울가에서 초시목 길앞잡이 속의 좀 길앞잡이를 닮은 작디 작은 연복숭아빛의 벌레를 발견한 것이다. (중략) 만약 그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이것은 대단한 발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놓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11)" pp. 12-13 11) ある日?家の近くの河原で?翅目ハンミョウ屬のニワハンミョウ(Cicindela Japana, Motschulsky.)に似た?小っぽけな薄桃色の蟲を見つけたのだ?(中略) もし?彼の見間違いでなければ?これは大變な發見になるはずのものだった? ただし?殘念なことに?とり逃してしまったのである?
「男」의 아내도 그렇게 알고 있고 男스스로 곤충채집을 하기 위해 이 마을로 들어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초시목(梢翅目)의 무당가뢰를 사로잡기위해 이 모래고장에 들어온 인물로 본 사건의 진행사건은 「男」가 곤충채집을 위해 모래고장에 들어옴으로서 시작되어 오히려 곤충처럼 사로잡혀서 탈출을 시도하게 되는 과정을 거쳐 도시로의 복귀를 유예함으로써 종료된다.
여기에서 본 진행사건은 「男」가 곤충채집을 위해 마을에 들어옴으로써 성립하며, 男가 모래마을로 찾아오게 만든 원인은 1장 2절에서 제시된'과거의 어느날 집 근처의 개울에서 초시목의 무당가뢰속의 좀길앞잡이를 닮은 벌레를 발견하였지만 유감스럽게 놓쳐버린 사건'으로 볼수 있다. 따라서 男은 변종 좀길앞잡이가 좋아하는 모래고장을 찾아 작품내 세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즉 본 작품의 완료사건은 그가 다 잡았던 좀길앞잡이를 놓친 사건으로 볼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본 작품은 「男」의 탈출이야기라 할수 있는데. 그렇다면 「男」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였는가. 그리고 곤충채집은 본 작품의 진행사건과 어떠한 연관을 갖고 있는지 보다 면밀히 살펴보기 위하여 중심인물의 의식과 그 의식의 대상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4. 중심인물의 의식 검토
중심인물의 문제의식은 작품의 1장에서 시작되어 종장에서 끝나는 사건이나 문제의식을 말한다. 이에 대한 고찰은 사건이나 문제의식의 발단과 결말에 이르는 중간과정 그리고 결말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본 작품에서 중심인물의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출하고자 하는 「男」의 내면적 움직임은 이것은 미시적인 관점에서보면 「男」의 사회로부터, 관계(communication)로부터의 도피와 자아(자폐)로의 몰입이라는 형식을 띄고 있는데 이것은 거시적인 차원에서 시간의 종적흐름 즉 죽음앞에선 인간이라는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이는 중심인물의 관심대상과 그에대한 의식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1)가정에 대한 의식
14절에서 「男」는 아내와의 사이에 애정이 전혀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서로 비꼬는 것으로 밖에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불투명한 사이이며 현실적인 아내와 이상적인 「男」 두 사람의 관계는 정열을 잃었다기 보다는 정열을 지나치게 이상화한 결과 얼어붙은 것이라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성관계는 20절에서 동물은 죽음의 위협앞에서 맹렬히 성교를 거듭하는데 반해 현대 도시인의 성은 여러가지의 사회적 증명서의 망토속에 파묻혀 결혼이란 제도로서 흥정의 대상이 됨을 비판하고 있는데 19절에서 임질의 경험이 있지만 치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의 성관계는 늘 콘돔을 매개로 이뤄지고 있으며 위축된 「男」는 제대로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 존재다. 그런 그를 아내는 '정신의 성병환자'라고 부른다. 그런 그는 20절에서 모래의 「女」와 제도로서의 성이 아닌 종(種)으로서의 성욕에 근거한 원초적 정사를 나눈다. 도시에서의 가정에서의 관계와 다른 보다 본원적인 관계가 모래구덩이 속 오두막에서 맺어지게 되는 것이다.
2)사회에 대한 의식
동료교사들과의 관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자폐적 상태인 「男」는 가족과 동료 몰래 도시의 일상에서 탈출하여 모래마을차원에서 감금, 도시 차원에서 실종된다.
애타게 사회로부터의 구조를 기다리지만 사회는 실종자를 찾아내지 못하고 「男」가 제외된 신문 사회면에는 전혀 다른 기사가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 도시와 타인들과의 관계속에서 소외된 「男」와, 자폐의 상태에서 타인과 도시를 소외시켜온 「男」의 사이에는 특별한 연결의 끈은 부재하게 되는 것이다. 하기에
"나는 학교 교사요.. 동료들도 있고 조합도 있고, 교육위원회와 P.T.A도 도사리고 있는거요. 내가 행방불명이 됐다는 사실을 세상이 잠자코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12)라고 항변하나. p. 143 12)ぼくは學校の敎師なんですよ…仲間もいれば?組合もあるし?敎育委員會や?PTAだってひかえている…ぼくが行方不明になったことを?世間が默っているとでも思っているんですか? "뭐라는지? 그로부터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도 별로 지서에서 나온일도 없고…"라는 노인의 답변을 들을수 밖에 없는것이다. 13)p. 143 13) なにね?あれから十日も經ってが?べつに駐在からの?沙汰があったわけじゃなし…
3)자연에 대한 의식
무당가뢰속 좀길앞잡이의 변종을 놓친이후 「男」의 관심은 그 곤충의 서식처를 사막으로 추정되는 모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데, 유동하는 모래의 이미지는 일체의 정착을 거부하는 불모성으로서 「男」 를 사로잡는다. 사나이가 선택하는 삶의 자세는 정착을 거부하고 유동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은 절대적 존재이고 그 앞에서 「男」 은 다음과 같은 감상을 토로한다.
"이 아름다움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영토에 속하는 것이다. 거대한 파괴력이나 폐허의 장엄에 통하는 죽음의 아름다움이다.14)" p. 173) 14) この美しさは?とりもなおさず?死の領土に屬するものなのだ? 巨大な破壞力や廢虛の莊嚴に通ずる?死の美しさなのだ?
자연이란 거대한 존재를 갈망하여 도시로부터 탈출한 20세기의 프론티어는 모래구덩이에 사로잡힌 이래 더욱더 자연을 갈망한다. 「女」을 강간하려고 까지해서 그 자연을 향유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女」의 자궁외 임신을 계기로 만나게 된 자연은, 이상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평범한 자연에 다름아님을 「男」는 느끼게 된다.
4)곤충과 물에 대한 의식
男의 곤충채집은 아름다운 곤충을 수집하기 위해서라거나, 수업교재로 쓰기위한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곤충을 사로잡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 욕망은 지금껏 남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룬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든. 그리고 별 의미가 없는것이든 상관없이 '열심히 날아간다고 생각하나 사실은 창유리에 콧등을 부딪혀 댈뿐인 왕파리'일지라도 중심인물의 관심사는 새로운 것, 남들이 못한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며 신종 곤충을 발견하여 곤충의 학명뒤에 자기이름을 붙여 반영구적으로라도 남길 원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의 여행 목적으로서의 곤충채집은 모래구멍에 사로잡힘으로써 좌절대고 16절에서 「女」를 결박하고 탈출을 시도하던 중 구덩이에 곤두박질 치면서 곤충채집상자마저 박살나고 만다. 사로잡기 위해 모래고장에 온 男가 사로잡혔음을 절감한 순간이다. 여기서 「男」는 "분노와 굴욕이 한 대의 철심이 되어 사나이의 몸을 빳빳하게 만드는 느낌을 받는다."
곤충과 「男」라는 도식은 「男」와 마을혹은 도시 인간과 자연이라는 도식으로 확장될 수 있는 비교쌍일 뿐만 아니라 「男」가 벌레에게 포충망, 채집상자, 청산가리라는 절대적 도구를 사용할수 있듯 「男」 역시 도시, 모래마을, 태풍, 모래사태, 부조리 앞에 노출되어있는 존재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대비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도식이다. 이때 「男」의 탈출이야기는 달리 표현하면 한 「男」가 곤충이 되는 이야기 혹은 곤충이 아니고자 하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곤충이 도시에서 소외된 「男」의 자폐적 현실도피수단이었던 것처럼 까마귀 덫을 통해 우연히 발견하게 된 물은 모래고장에서 「男」의 자기 실현 수단이자 현실도피수단이기도 하다. 「男」는 물을 발견함으로써 더이상 마을의 물배급에 통제되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지만 이것을 「男」는 「女」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폐적으로 물을 만드는 행위에 몰입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고자 한다.
아내가 미키 쥰페이의 곤충채집을 단순한 곤충채집취미로 파악하고 있고 그가 현실도피나 자기실현으로서 곤충채집을 하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女」역시 「男」의 유수장치가 물을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은 커녕 까마귀 ?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男」의 곤충과 물에 대한 의식의 자폐성, 반사회성, 반 가정성을 독자는 엿볼 수 있다.
5)자기실현으로서의 창조에 대한 의식
일반적으로 창조는 기존의 요소 혹은 소재(素材)의 독창적인 편성에 의한 새로운 타입의 사물의 산출에서부터 완전 무(無)에서의 세계 그 자체의 창출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쓰이는 말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고, 완전무결한 것으로 인간이 범접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때 인간은 신의 영역인 이데아를 모방함으로써 창조의 영역에 다가가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야말로 가장 창조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갖고 있는 존재에 다름아니다.
결국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존재는 한계의 벽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 작품의 중심인물인 男 역시 신종 곤충을 발견하여 곤충의 학명뒤에 자기이름을 붙여 반영구적으로라도 남길 원하는 존재다. 그의 이와같은 사고는 「男」의 아래와 같은 독백에서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작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은 요컨대 꼭두각시 놀이꾼이 되어자신을 인형들로부터 구별하려고 하는 에고이즘에 지나지 않는 거요. 여자의 화장과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다른게 없소.15)" p. 108 15) 作者になりたいっていうのは?要するに?人形使いになって?自分を人形どもから區別したいという?エゴイズムにすぎないんだ?女の化粧と?本質的には?なんの變りもありゃしない "그렇죠? 그래서야 말로 나는 작자가 되고 싶었던 거요.16)" p. 108 16) でしょう? だからこそ?ぼくは?作者になって見たかったんですよ?
중심인물 男의 탈출에 대한 열망은 처음 도시에서 교사라는 비창조적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만들고 존재한다는 근거가 없는 무당가뢰 변종을 찾아 헤메게 되지만 마을사람들에게 사로잡혀 모래퍼내기라는 비창조적 작업에 참여하게 되자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당신도 아들의 어버이가 아니요? 그렇다면 교사의 의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오!"17) p. 146 17) あんたたちだって?子の親何でしょう? それなら?敎師の義務というものが?分からないことはないはずだ!
이부분은 男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일로 생각해온 자신의 직업에 세속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장면이다. 결국 이곳도 저곳도 男이 원하고 갈망하는 창조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 또 다음과 같이 중얼댄다.
"미친놈의 짓이다… 제 정신이 아니요… 이런 모래 퍼내기 같은 건 훈련만 하면 원숭이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니오… 나에게는 보다 보람있는 일 이 있을 거요. 인간에겐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쓸모 있게 발휘할 의무가 있는거요."18) p 147 18)氣違いじみている…正氣じゃないよ…こんな?砂搔きなんか?訓練すれば?猿にだって出來ることじゃないか…ぼくには? もっと?ましなことが出來るはずだ…人間には,自分のもっている能力を?じゅうぶんに役立てる義務があるはずだ…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소숫점 이하 몇백까지 계산하는 사람이나, 원숭이와 다른 존재이고 싶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 일상을 움직이는 톱니의 하나로서 부분품의 대장에 등록되는 것을 부인하는 그에게 있어서 돌아갈곳은 고향이 아닌 비소외의 공간, 자기실현의 계기로서의 발견이나, 창조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물의 발견은 곤충이 자신에게 있어서 그러했듯이 자신을 자연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모래마을 주민들과 구분지을수 있는 창조적 수단인 것이다.
6)죽음에 대한 의식
그런데 왜 「男」는 그토록 창조를 열망하는가. 그 근거를 171면의 뫼비우스띠와의 대화에서 찾아볼수 있다.
"..아무려면 시간을 세로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라는 것은 원래 가로로 흐르는 것으로 시세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뫼비우스띠)
"그것을 세로로 살아본다면 어떻게 될까?" (「男」)
"미이라가 되도록 정해져 있지 아니한가."(뫼비우스띠)19) 19)「まさか時間を縱に暮したりするわけにはいかないだろう? 時間ってやつは本來橫に流れるものと相場がきまっているんだ?」
「そいつを縱に暮してみたら?どういうことになる?」
「ミイラになるにきまっているじゃないか!」
곤충대도감에서 이탤릭체 활자로 곤충의 학명뒤에 붙어서라도 반영구적으로 남고자 하는 인간을 짓누르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은 그 영구적으로 살수 없다는 현실의 제약. 시간을 종적으로 살아갈수 없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할수 있겠다. 그에게 있어서 이와같은 공포는 편도열차표(oneway ticket)밖에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는 자기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인간이 거대한 자연앞에서 "이 아름다움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영토에 속하는 것이다. 거대한 파괴력이나 폐허의 장엄에 통하는 죽음의 아름다움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다.
결국 「男」의 문제의식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모래구덩이라는 물리적 공간이지만 작가가 부딪히는 진정한 벽은 시간의 벽이었던 것이다. 시간을 횡적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종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인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이 「男」를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짓고자 자폐의 상태로 들어가게 한것으로, 본작품에 있어서 「男」는 모래구덩이에 감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자신 스스로 감금한 자폐상태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의 「男」의 의식검토를 통해 본 이야기의 탈출시도의 근원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짓고자 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의식의 실현을 추구하고자 하는 「男」의 자폐상태 달리말하면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한다는 자기인식에 있음을 알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男」문제의식과 탈출시도는 어떻게 전환되어 결말로 이어지는가를 살펴보자.
5. 전환점과 그 전환양상에 대한 검토
1) 전환점의 위치
전환점이란 사건레벨에서는 결말의 계기가 되는 지점이며 인물레벨에서는 중심인물의 기존의 의식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의식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을 말한다.
본 소설에서 중심인물 「男」는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로부터 계속 탈출하고자 애쓰는 존재이다. 그가 탈출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소설구성상 그에게 다시 한번 탈출의 기회를 부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기회를 「男」의 의식이 받아들여 선택하는 양상에 따라 작품의 결말은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은 본 작품에서 「男」에게 탈출의 계기가 부여되는 계기가 되는 지점을 본 작품의 사건레벨에서의 전환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女」의 자궁외 임신으로 탈출의 사다리가 놓여지는 지점을 들수 있다. 이때 모래마을에서의 삶으로부터 다시한번 탈출의 기회가 「男」에게 놓여진 것이다. 인물레벨에서의 의식의 전환점은 모래구멍밖으로 나갔던 「男」가 탈출을 포기하는 마지막 순간, 정확히 모래 구덩이로 돌아간 「男」가 유수장치를 수리하고 나서 가만히 웅크리고 고민하는 장면(p. 227)으로 잡을수 있다. 20)
20) そのまま,うずくまって,身じろぎしようともしなかった
2)전환점의 구성요소와 기본구도
전환점의 구성요소는 기본적으로 둘 이상의 대립되는 인간들의 충돌과 그 충돌사건을 접한 중심인물의 정신적 자각이라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 작품에는 크게 두가지의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모래구멍에 갇힌 「男」가 모래구멍으로부터 탈출하려는 흐름이다. 이것은 마을사람들과 「男」라는 대립구도를 낳고 있다. 또 하나의 흐름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탈출또는 자기실현을 하고자 애쓰는 자폐아「男」의 내면적 움직임이다. 이것은 시간과 죽음앞에선 인간 구체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와 자기실현사이에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해 갈등하는 인간이라는 대립구도를 이루고 있다.
3)전환점의 전환양상
전환점의 전환양상중 행위상의 전환은 두 사람이상의 대립군이 어느 시점에 대충돌을 일으켜 한쪽이 깨짐으로서 대립관계를 통해 발전해 나온 사건이 하나의 결말로 방향을 잡는 현상이며 의식상의 전환은 중심인물이 그러한 행위상의 전환현상에 대한 체험을 계기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게 됨으로써 의식이 전환되어 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위에서 살펴본 전환점의 구성요소인 마을사람들과 「男」와의 투쟁은 결국 「男」가 마을에 남기로 결심함으로써 해소된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사건레벨에서보다 의식레벨에서 전환양상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男」의 내면의 변화는 기존의 가치관의 지속적인 역전을 배경으로 점차 전환되어 나온다. 최초의 역전은 2장 26절에서 「男」가 마을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추격을 당하던 중 모래로 된 늪에 빠져 죽을 지경에 처했을때 마을사람들에게 구원을 받은 상황에서 발생한다. 즉 자신의 억압자로서의 마을사람상이 구원자로서의 상과 오버래핑 되면서 「男」의 내면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사로잡힌 「男」는 이제 도망치지 않고 모래구덩이 속에서 얌전히 모래를 퍼내면 살겠노라고 결심한다.
그러나 적극적인 탈출은 포기했지만 소극적인 탈출은 계속 꿈꾼다. 아직 이곳에서의 존재의 이유를 「男」는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男」는 마을에서 살것을 결심한 후 나무를 키워볼 마음을 갖는다. 즉 사로잡힌 자 스스로 또 하나의 대상을 관리함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극복 혹은 역전 시켜보려는 발상으로 이는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별짓고자 하는 꼭두각시 놀음인 것이다. 이 나무키우기와 여타의 발명품(수면천막, 조리법 등)이 모래마을 정착을 전제로한 행위라면 소극적인 탈출 즉 도시로부터의 구원의 기대를 염두에 둔 행위가 바로 희망이란 이름의 까마귀덫 만들기이다.
어느날 등불 주변에서 사는 거미와 나방을 지켜보던 「男」는 여전히 꼭두각시 놀음의 연장선상에서 나방을 담배불로 지져 거미에게 던져준다. 그 때 거미의 목적이 등불에 불타죽는 나방을 잡기위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男」는 헛된것을 쫓는 나방과 주어진 현실을 이용하는 거미를 통해, 꼭두각시처럼 보이던 거미가 사로잡혀 헛된꿈을 꾸는 마치 나방과 같은 존재인 자신보다 잘 적응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또한 마을사람들이 공사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바다모래를 내다 판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에게는 방해물이기만 했던 모래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삶의 도구일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혼돈스러운 사고의 역전의 과정에서 마지못해 현실을 받아들여가려 노력하던 사내는 그해 11월 혹은 12월 초 모래에서 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을 억압하던 장애물로서의 모래가 자기 실현의 공간으로 인식되게 된다. 그 이후 부질없어 보이던 「女」의 라디오 구입준비를 위한 부업도 그에게는 물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파악하기 위한 일기예보의 필요요소로서 새롭게 인식된다.
즉 도시생활에서의 소외를 곤충채집으로 해소하던 사내는 모래마을에서의 소외를 유수장치로 해소하며 자기실현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男」는 더이상 마을의 물배급에 통제되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지만 이것을 「男」는 「女」에게도 마을 사람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폐적으로 물을 만드는 행위에 몰입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던중 이듬해 3월 임신한 「女」가 5월 자궁외 임신으로 추정되어 외지의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 「女」를 배웅한 후 「男」는 그대로 놓여져 있는 사다리를 타고 구덩이 밖으로 올라선 사내는 애타게 그리던 자연이 별다른 감흥을 자신에게 전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女」를 싣고 병원으로 달리는 마을 자동차를 바라보며 도시마을로 돌아가기 전에 물의 의미라도 「女」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을 후회하던 사내는 자신의 유수장치가 망가진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내려가 그것을 수리한다. 그리고 고민끝에 이 마을에서의 생활을 결심한다.
이는 자신의 유수장치 작업이 의미 있는 공간이야말로 바로 이 모래마을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벌이 없'기 때문에 '도망칠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헛된 것을 갈구하며 도망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아내와 새로운 사회를 선택함으로써 「男」의 유수장치는 자폐적, 반가정적, 반사회적 도피수단에서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서 의미 지어지게 된 것이다.
Ⅲ결론
위와 같은 고찰을 통해 본 작품은 '자기실현으로서의 곤충채집, 유수장치라는 개인적 도피를 반복하던 「男」가 결국 절대적 존재, 시간, 죽음 , 사회, 모래마을 앞에서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해 탈출하고자 하는 자폐적 태도를 버리고 현실을 수용함으로서 헛된 것을 쫓기보다 모래구덩이의 집에서 「女」와의 가정과 생활을 위한 노동 그리고 마을사람들, 즉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선택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男」가 도피를 포기한 근본적 이유는 현실로부터 소외되어 탈출하고 싶다는 의지를 더 이상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자신이 타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실수로서의 사다리 제공이 아니라 의도적인 사다리제공이라고 볼 경우)을 깨닫고 자신 역시 타인들을 받아들이기를 선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와 작품 가정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던 남성이 그것들과 관계를 회복하고자 갈망하며 존재의 이유를 모색한다는 구성은 작가의 64년도 작품 타인의 얼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과제로 남긴다.
참고 安部公房, 『砂の女』(東京, 新潮社, 1995) グリゴ-リ-· チハルチシビリ 「ソ連文學の古典としての安部公房」(新潮 93. 4) 小泉浩一郞 「『砂の女』再論-硏究史の一隅から 」(國文學 97. 8) 沼野充義 『世界の中の安部公房」(國文學 解析と敎材の硏究 1997. 8) 立川洋三 「カフカ」(歐美作家と日本近代文學 第四卷. ドイツ篇. 東京. 敎育出版センタ 1975) 小山鐵郞 「安部公房の試み」(文學界 1993. 3) 강형선 「아베 고보(安部公房)의 『모래의 여인(砂の女)』에 있어서의 모래의 의미」1998 한국외국어 대학교 대학원 일본근대문학회 「일본근대문학산책」제5호 김채수, 『가와바타 야스나리硏究』(고려대학교 출판부, 1989), p. 50 이정희 「아베 고보(安部公房)의 작품에 나타난 여성-『砂の女』를 중심으로-일본어문학회「일본어문학」 2000. 8 趙千枝子 아베 고보(安部公房) 『모래의 여자(砂の女)』에 나타난 두 세계에 관하여-한국일어일문학회 제 23집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