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까지는 멀었다. 더군다나 걸어가기에는 먼 길이었다. 서울까지 걸어보자고 생각한 것은 3년 전의 일데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언제부터인가 걷는다는 것은“불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서서히 스며들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버스 한정거장도 차를 타고 가야하는 것으로 아는 것과, 걷기는“시간낭비(?)일 뿐”이라는 현실이 안타깝게 여겨지면서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동의 주된 방법인“걷기”를 시도해 본 것이다. 일종의 모험이었다.
프랑스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스트롱(David Le Breton)은 『걷기예찬』에서「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 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 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 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현대 생활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삶의 여유를 걷기에서 얻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걷기를 통한 문제해결
여러 해 전 일이다. 대학 문제로 아들과 의견 상 차이가 있었다.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어서 궁리하던 중, 대전을 걸어가자고 제안하였다. 아들도 좋다고 하였고 그래서 같이 전주에서 출발하여 대전까지 3일을 걸어간 적이 있다. 대둔산 계곡 풀 섶에서 고개를 내민 산딸기를 보면서“만약 차를 타고 갔다면 저렇게 빨간 딸기 볼 수 없었을 거야, 빠른 속도는 아름다움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지!”禪問禪答 경지(?)에 이르는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걷는 동안 아들과의 의견 차이는 좁혀 졌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의견의 차이라는 문제점은 나와 아들이 함께 걸었기 때문에 쉽게 합의점에 도달 했다고 믿어지며,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듯 걷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원래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게 해 줄 뿐 만 아니라 마음을 열어준다. 따라서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걷기가 나의 일상생활이 된 것이다.
이번의 도보 여행은 과거 선조들이 밟았던 우리의 땅을 원 없이 밟아 보자는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하였다. 물론 걷는 중에 만나게 될 역사 유적에도 관심이 있었고. 특히 한 가지 念願이 있었는데 위로 한분 남은 형님과 형수님의 건강을 기도하는 것이었다. 걸으면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레베카 솔닛의『걷기의 역사』와 다비드 르 브르통의『걷기예찬』을 읽고서다. 이 두 책에서 같은 얘기가 나오는데, 존경하는 사람이 병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의 뮌헨에서부터 프랑스 파리까지 11월의 겨울 날씨에 눈보라를 맞으며 걷기를 시도한 내용이다.
유비무한
아내와 나는 평소 삼천川을 걷는데, 출발 일주일을 앞두고는 김제까지 걸어 보았다. 하루 종일 걸었을 때 어떤 신체적인 변화가 오는지? 무릎이 아프거나 발에 물집이 생기는지? 신발의 적합성 여부 그리고 하루에 몇 시간을 걸을 수 있는지 등을 사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와 아울러 옛길에 관한 지식이 필요했다. 옛길에 관련된 자료를 찾기 위해 책꽂이를 뒤지니 마침 이 지역에서 지리와 향토사학에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신정일씨의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고을을 가다』,『다시쓰는 택리지』,『영남대로』,『삼남대로』등의 서적이 나온다. 영남대로(嶺南大路)는 경상도 지역에서 옛날에 과거보러 가던 길이고 삼남대로(三南大路)는 호남지역에서 과거보기위해 걸어갔던 길이다.
이 책들은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터라 구입해 놓았던 것인데 금번 도보 여행에 요긴하게 쓰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책들의 저자인 신정일씨를 만나 자문을 구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드디어 1월 5일 아침 삼천동에서 출발하였다. 빙상경기장을 지나 롯데 백화점 근처에 있는 전주川을 건너 팔복동으로 해서 동산촌에 들어섰는데 여기까지 3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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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례교에서 바라본 전주 팔경의 하나인 비비정. 개신교 선교사들이 다닌 나룻터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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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팔경 비비정, 선교사들의 나들목
우석고등학교를 지나 삼례로 향했다. 전주를 벗어나면 비비정을 만난다. 비비정은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한양 갈 때 쉬어가던 옛길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다. 이곳은 전주팔경의 하나인 비비낙안(飛飛落雁)으로 알려진 곳인데, 이는 옛날 한내천 맑은 물에 황포 돛단배가 오르내리는 풍경이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고 백사장에 기러기 떼가 날갯짓하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광경이 장관이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비정은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 선교사들이 19세기 말 인천을 출발하여 군산과 목천포 다리를 지나 이곳 비비정 나룻 터에 내려서 전주로 들어오곤 했던 곳이기 때문에 전주 선교 역사에도 소중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때의 선교사들의 열정을 생각하며 삼례교를 건넜다. 삼례읍에 들어서니 시장기가 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왠지 맛있을 것 같은 중국집이 눈에 띈다. 들어가서 자장면과 짬뽕을 시켜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 우리는 평범한 것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배고프면 무엇이든 맛있다.’는 것이다.
우석고등학교를 지나 삼례로 향했다. 전주를 벗어나면 비비정을 만난다. 비비정은 옛날 수많은 사람들이 한양 갈 때 쉬어가던 옛길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다. 이곳은 전주팔경의 하나인 비비낙안(飛飛落雁)으로 알려진 곳인데, 이는 옛날 한내천 맑은 물에 황포 돛단배가 오르내리는 풍경이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고 백사장에 기러기 떼가 날갯짓하며 힘차게 날아오르는 광경이 장관이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비정은 태평양을 건너온 미국 선교사들이 19세기 말 인천을 출발하여 군산과 목천포 다리를 지나 이곳 비비정 나룻 터에 내려서 전주로 들어오곤 했던 곳이기 때문에 전주 선교 역사에도 소중한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때의 선교사들의 열정을 생각하며 삼례교를 건넜다. 삼례읍에 들어서니 시장기가 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왠지 맛있을 것 같은 중국집이 눈에 띈다. 들어가서 자장면과 짬뽕을 시켜 먹었는데. 맛이 있었다. 우리는 평범한 것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것은 ‘배고프면 무엇이든 맛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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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이 겨울바람을 견디며 서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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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다시 걷기 시작하여 우석대 정문을 지나 5층탑이 있는 왕궁리 유적지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현재 백제의 역사를 찾기 위한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발굴 현장 뒤로 보이는 5층탑이 겨울바람을 견디고 있다. 한때 찬란했던 백제의 그때를 상상하며 5층탑 등을 사진에 담았다. 유적 발굴 현장을 벗어나 금마를 지나는데 안내판에 거리 표시가 없다. 첫날 일정은 여산까지 인데 도로 표시판으로는 거리를 알 수 없어서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4km 가면 된다고 한다. 그 말만 믿고 4km 면 천천히 걸어도 1시간이면 도착하겠다 싶었는데 웬걸 1시간을 걸어도, 산을 돌아도 여산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 경운기를 몰고 오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물어 보았더니 6km는 더 가야한다는 것이다. 시골사람들의 거리 감각은 완전 자유다. 날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는데 첫날부터 시행착오가 생긴 셈이다. 할 수 없이 오늘의 예상도착지까지 가는 것은 포기하고 어디든 숙박업소만 있으면‘들어가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가도 가도 그 흔한 모텔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히 산허리를 돌아가니 모텔이 하나 보인다. 여산은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할 것 같아서 여산 초엽인 이곳에서 묵기로 하였다. 아내가 발가락이 좀 이상하다고 하면서 양말을 벗어보니 두 번째 발가락에 물집이 크게 잡혀 있다. 이런, 벌써 물집이 생기다니! 이제 겨우 하루를 걸었을 뿐이고, 앞으로 5백리 길을 가야하는데, 갑자기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얼른 카운터에 가서 바늘을 빌려다가 물집을 찔러 물을 빼내고 대일 밴드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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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의 천주교 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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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9시 경에 길을 나서서 여산 쪽을 향해 옛길을 따라 걸었다. 여산 어귀에 들어서니 양철 지붕과 벽을 적기와 색으로 칠한 방앗간이 눈에 들어온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허름하지만 주위의 소박한 한옥들과 어우러져 고향의 경치 같은 포근한 느낌을 준다. 옛길 주변은 역시 옛날을 간직하고 있다. 우체국 뒤편에 있는 여산 동헌을 찾기 위해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깔끔한 양복 차림의 신사가 동헌을 구경하려면 면사무소에 가서 얘기하면 안내해 줄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 해준다. 그의 말대로 면사무소 직원이 직접 나와서 동헌 대문을 따주고 구경할 수 있도록 친절을 베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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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산 동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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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헌은 텅 비었지만 옛날 여산부사의 호령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동헌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지사지(白紙死地)라는 이름의 순교 터가 있는데, 이곳은 대원군에 의해 병인교난(丙寅敎難)이 일어났을 때 천주교인을 붙잡아 얼굴에 백지를 덮고 그 위에 물을 뿌려 숨지게 한 장소이다. 이곳에서 논산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천주교 성지가 또 하나 있다. 이곳 역시 병인교난 때 금산, 고산 그리고 진산 등지에서 붙잡혀 참살 당한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여산은 또한 동학혁명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의 절규와 동학 혁명의 함성을 뒤로하고 연무대로 향했다.
여산을 출발할 때 사람들은 공주까지 하루에 충분히 간다고 호언한다. 그러나 사람들 얘기를 유심히 들어보면, 차 속도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차로 1시간이면 가는 거리이므로 충분히 잡아서 7시간이면 된다는 추측성 발언이다. 차 속도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말을 믿었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하루면 충분하다는 그 길을 실재로는 이틀이 걸렸기 때문에 그 후로는 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우리가 걷고 있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격려를 하기도 한다. 연무대 근방을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손짓하며 오라고 해서 같더니 약방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고는 자기도 철인 경기에 연속 출전하고 있다면서 자기가 ‘척 보니 먼 길을 가는 것 같아서’불렀다며, 피로회복제 음료수를 권하고 목적지까지 잘 다녀오라고 격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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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주교의 순교터 '백지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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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무대와 은진미륵이 있는 관촉사를 지나 부적으로 향하는데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다. 하루 만에 간다던 공주는커녕 그 절반도 못 왔는데 어두워지는 것이다. 아픈 다리와 노곤한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부적면 근방의 모텔에 도착하였다. 배낭을 내려놓고는 은진에서부터 이상했던 발바닥을 얼른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내 발바닥에 물집이 생긴 것이다. 마침 그때 하상명에게서 전화가 와서 물집 얘기를 했더니 군대에서의 경험이라며, 해결방법을 알려준다. 하상명은 서울에 살고 있는 경상도 사천시 남양초등학교 동창이다. 서울 도보여행을 말했더니, 친구들에게 알려서 김종배와 정철구 세 친구가 매일 번갈아가며 확인 내지는 안부 전화를 해 온다.
정다운 옛길을 걸으며
다음 날 아침이 되니 힘들었던 어제의 일이 생각나고 또한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무리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느지막하게 출발하였다. 부적면에서 노성면으로 향하고 있는데 보니 마치 큰길이 옛길을 처내버린 것 같은 형국이다. 그러나 옛길이 훨씬 정겹다. 옛길은 사람을 맞이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새 길은 빨리 가라고 독촉하는 것 같다.이 지역에는 옛길이 많이 남아 있다. 차량 통행이 적은 옛길은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여유 있게 걷고 소나무 숲에 들어가 솔 향을 맡으며 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침의 시골길을 즐기며 걷고 있는데 노성면 두사리가 나온다. 이곳은 큰 형님이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한 곳이다. 4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교회 이름이‘두사교회’였고 길옆에 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그래서 인근을 지나면서 유심히 살펴보았더니 두사교회가 눈에 띈다. 물론 교회 건물은 바뀌었지만 교회 이름은 그대로 여서 마치 큰 형님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웠다.
두사교회에서 사진을 찍고 노성면 소재지에 도착하였다. 노성면에는 조선 중기 학자 윤증(尹拯)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윤증의 아버지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사상적 대립 관계였던 윤선거(尹宣擧)이다. 윤증 고택 입구에는 단아한 형태의 烈女비각이 있는데, 이 열녀는 윤증의 어머니로서 병자호란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그곳에서 자결하였다. 이곳과 가까운 교촌리에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궐리사(闕里祠)”가 있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은 한국에서 노성면과 경기도 오산 두 군데 뿐이다. 한국의 유적을 카메라에 담느라 시간이 걸렸고 공주에는 힘들게 도착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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