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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講義 - 법륜 스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이 경전은 줄여서 『般若心經』이라고 한다. 이 경전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다. 모두 260자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우주를 망라하고도 남을 만큼 넓고 깊다. 몇 년 전에 도올 선생의 저서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를 읽고나서 ‘이것이 부처님 말씀이구나, 이것이 불교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이제 법륜 스님의 『반야심경』강의를 듣게 되면, 대승불교에 대해, 불교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마음을 다잡고 강의실로 들어가 본다.
제목처럼 경전의 이름이 한자로 되어 있어서 호락호락하지 않다. 般若, 波羅密多, 心經 이런 말들은 쉽게 접하는 우리말이 아니다. 하나씩 뜯어보기 전에 스님이 서문에서 밝힌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이유부터 읽어보자.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이유는 편안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공부는 절에 오래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경전을 많이 읽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예요. 성냥개비를 살살 문질러서는 백 번을 문질러도 불이 일지 않습니다. 한 번이라도 세게 당겨야 단박에 불이 일어납니다. 몇 번을 시도했느냐 하는 횟수와 관계없이 반드시 일정한 강도가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해야 하는데,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받아들이면 사로잡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 불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자기가 옳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집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내세워 자기가 옳음을 고집하는 것이 바로 我執이고 法執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들을 타파해야 함을 염두에 두고 『반야심경』을 공부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흔히 불자들이 간과하는 것이 五蘊, 十二處, 十八界, 十二緣起, 四聖諦, 八正道에 대해서 소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것을 잘못 받아 들여온 소승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반야심경』의 ‘以無所得故에서 菩提娑婆訶(이무소득고 모지사바하)’까지 대승의 깨달음인 般若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것은 관자재보살을 비롯한 모든 보살들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열반을 증득하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 위 없는(가장 높은)도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반야심경』은 그 어떤 믿음이나, 앎이나, 실천보다도 그 어떤 증득보다 뛰어나고 진실하여 헛됨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으로 돌아가 ‘마하’는 무슨 뜻일까? 摩訶(마가)로 쓰고 마하로 읽은데, 어려운 글자다. 이는 산스크리트어를 중국말로 번역할 때 뜻이 아닌 소리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인도 사상이 중국으로 건너갈 때 특정 단어의 개념이 없거나, 전달이 제대로 안 될 경우에는 인도말, 즉 음을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확히 옮길 단어가 없으면 음을 음역하여 이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글자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발음만 따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하’는 범어에서 무슨 뜻일까? ‘크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어 ‘大’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상대적인 개념의 크다가 아니라, 무한히 크다는 절대적 개념의 크다이다. 무한히 크다는 어떤 상상력도 미치지 못하는 큰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것을 ‘세계’또는 ‘우주’라고 한다면, 그것의 천 배가 되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小千世界’라고 하고, 소천세계 천 개가 모인 것을 ‘中千世界’, 중천세계 천 개가 모이면 ‘大千世界’또는 ‘三千大千世界’라고 한다. 마하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번뇌가 사라진다고 하기도 하는데, 마하를 이해를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면,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봤을 때 인류의 역사는 5분도 채 되지 않는다. 고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이 30만 년 전에 나타났다가 3만 5천 년 전에 멸종하고, 현생인류는 7만 년에서 9만 년 전 사이에 나타나 현재에 이른다. (이 부분에서 스님은 현생인류를 1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려다 보았다)
이렇듯 지구에는 인간의 조상인 유인원이 태어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빙하기를 거치기도 했지만, 지구 자체가 망한 적은 없었다.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인간의 지구파괴로 인해 인류가 멸망하는 길로 가고 있으니 이를 막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멸망의 길로 간다면 우리가 고통받게 되니까 그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기도, 남도 행복하기를 바라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려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좀 더 큰 눈으로 보아야 한다. 큰 눈으로 보는 것이 摩訶다.
다음 般若는 팔리어 ‘빤야(panna)’와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의 음역으로 ‘깨달음, 지혜’라는 뜻이다. ‘마하반야’는 커다란 깨달음이고, ‘금강반야’는 굳은, 강한 깨달음이다. 또 波羅密多는 산스크리트어 ‘파라미타’의 음역으로, ‘저 언덕을 건너가다’는 뜻이다. 저쪽과 이쪽 언덕을 구분한 것으로, 이쪽 언덕이 此岸, 즉 사바세계를 말하고, 저쪽 언덕은 彼岸, 극락세계를 말한다. 이쪽은 괴로움의 세계, 괴로움이 소멸 된 저쪽 세계는 열반의 세계다. 무명·무지·어둠인 이쪽을 떠나 광명·지혜·밝음의 저쪽으로 간다는 뜻이다. 중생의 세계인 이쪽과 부처의 세계를 저쪽을 말하기도 하며, 사바세계와 정토세계로 구분하기도 한다. 정토세계는 서방정토라고 하는데, 인도의 지정학적 영향과 관련이 있는 말이다.
경전 제목 마지막인 ‘心經’은 ‘부처님의 가장 요긴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心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핵심이라는 뜻으로 핵심이 되는 부처님 말씀이(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반야심경』첫 문장은 이 경의 전체를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대승 보살인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 수행법을 닦아서 제법이 공한 이치를 깨달으니,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완전한 자유, 행복의 경지인 해탈과 열반을 얻었다’라고 한다. 관자재보살로 대표되는 보살이 이 경의 주인공인데, 보살의 원어는 ‘보디시트바’로 발음을 따서 옮기면 보리살타(菩提薩埵), 즉 보살이다. 보리는 밝음을 상징되는 깨달음·부처라는 뜻이고, 살타는 어둠으로 상징되는 무지·무명·중생이다. 둘을 합쳐서 보디시트바, 즉 깨달은 중생이 되는 것이다. 중생은 중생이되 깨달은 중생이 보살인 것이다. 불자라면 아는 지장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서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 있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내고,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 있는 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한 그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부처가 되지 않고 보살로 남은 것이다. 반면에‘법장비구’라고 있었다. 그는 신체장애가 없는 세상, 여성 차별이 없는 세상, 전쟁이 없는 세상 등 48가지 조건을 정하고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였고, 마침내 그런 세계를 이루어내고는 부처가 되었다. 그 세계가 ‘극락세계’다. 그 극락세계에 남아 그곳을 관장하는 부처가 아미타불이다. 수행해 부처가 되기도 하고, 지장보살처럼 서원을 이룰 때까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보살도 있다. 어쩌면 불교만의 특이한 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아무튼 수많은 보살 가운데 『반야심경』의 주인공은 관자재보살이다. 그의 이름은 범어로 ‘아바로기테스바라 보디사트바’로 ‘지켜본다’는 뜻이다. ‘본다’는 한자는 見, 看, 視, 觀 등 여러 글자가 있지만, 관은 겉으로 드러난 모양과 색깔뿐 아니라 그 본성을 꿰뚫어 본다는 것을 뜻한다. 구마라습은 아바로기테스바라를 ‘관세음’으로 번역하였고, 현장은 ‘관자재’로 번역하였으나 그 뜻에는 차이가 없다.
千手千眼이라고 하고, 이름도 관음, 관자재, 관세음 등 여러 가지인 이 보살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언제, 어디서나 중생을 도와준다고 하였다. 절에 가서 법당에 들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면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때가 많다. 좀 길지만, 관음보살의 緣起를 살펴보자.
인도 남쪽 바닷가에 아내와 아들 둘과 행복하게 살던 長者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아이들을 위해 새 아내를 맞기로 했다. 돈은 많았으므로 ‘아이들을 자기 아이처럼 사랑하고 보살펴준다면 신분을 가리지 않겠다’는 소문을 듣고 한 여자가 찾아왔다. 여자은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살았는데, 장자의 집으로 오니 처음으로 넉넉한 생활에 만족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처음에는 보모쯤 유모쯤으로 생각하던 장자도 아이들의 새엄마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둘 사이에도 아이가 태어났다. 장자는 아내가 전처의 아이들을 학대할까봐 불안했지만, 아내는 전처의 아이들도 한결같이 사랑해 비로소 안심했다. 그래서 그는 집안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남편 없이 집에 홀로 남은 아내는 많은 하인들을 부리고, 너른 집안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전처의 아이들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아이들이 자라 내가 필요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하게 되고, 모든 것이 저 아이들에게 상속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는 전처의 아이들만 없다면, 하고 생각하게 되고 계획을 짜 아이들을 데리고 무인도로 여행을 떠난 뒤 혼자 배를 타고 돌아와 버림으로써 아이들은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큰아들은 숨이 끊기기 전에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새엄마도, 아버지도, 친엄마도 나의 고통을 모르고 내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구나. 나처럼 혼자 괴로워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겠는가?’그의 생각은 비로소 남의 고통까지 이해하게 된다. 그는 자기 고통에만 머물지 않고 타인의 고통에도 연민을 느낀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 생에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사바세계의 원한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다음 생에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이 되리라’는 서원을 세우고는 죽었다. 이 발심이 씨앗이 되어 사람들은 그를 관음보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인생을 苦라고 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즐거울 때도 있다. 그래서 인생은 苦樂의 연속이다. 고락이 五感을 윤회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윤회 자체도 곧 고다. 지금 이순간 낙을 얻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바뀌면, 고가 된다. 낙의 본질이 고다. ‘一切 苦’라고 할 때, 고는 苦와 樂을 윤회하는 것이다. 중생은 고를 싫어하고 오로지 낙을 구하지만, 낙은 쉽게 구해지지 않으며 구해진다 해도 지속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늘 고에 빠져있고, 그에 허덕인다. ‘일체가 고’인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4苦, 8苦, 108煩惱, 八萬四千 번뇌를 ‘一切苦厄’이라고 한다. 오온이 모두 空함을 알면 일체고액에서 벗어난다고 하는데, 여기에 ‘건너다. 깨닫다’등의 의미를 지닌 度를 더해 度一切苦厄이라고 한 것이다. 공한 것을 알면 모든 괴로움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괴로움이 없는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 피안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바라밀다로 인해 마침내 열반을 증득했다는 뜻이다. 일체고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고, 諸法이 空함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괴로움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각고의 노력으로 千辛萬苦 끝에 이르는 힘겨운 목표가 아니다. 누구나 이를 수 있는 경지다. 다만 우리가 괴로운 것은 착각 속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착각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눈을 떠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인도 하는 것이 佛法이다. 오늘날 불교가 다른 종교와 비슷해진 것은 이런 불교만을 특성을 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를 도와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 종교라면, 불교는 눈뜨는 소식 그 자체, 잠에서 깨는 소식을 전해 주는 것이다.
부처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불교를 후세에 전하는데 기여한 십대제자가 있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舍利子는 ‘사라푸트라’의 산스크리트어 음역으로 ‘智慧第一’이라고 한다. 그는 부처님이 교화 활동을 펴는 동안에 교단 조직을 운영하는 일을 맡아서 초기 교단이 자리 잡는데 기여했다. 목갈라나(마하목건련, 목건련)는 ‘神通第一’로 불리나, 부처님은 그에게 신통력을 쓰지 말라고 했다. 무지를 깨치는 것은 신통력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마하가섭은 ‘頭陀第一’로 그는 검소한 생활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고, 아니룻다(阿那律)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 ‘天眼第一’로 통하는데, 눈병이 날 정도로 정진하자, 부처께서 “아니룻다야, 눈은 잠을 먹이로 하니 잠을 좀 자도록 하라”고 하자 “부처님 그러면 깨달음은 무엇을 먹이로 합니까?”하고 묻고 “깨달음은 정진을 먹이로 한다”고 답하였으므로, 눈이 멀더라도 정진하겠다고 한 제자다.
須菩提 즉, 수부티는 『금강경』의 주인공으로 법이 공한 이치를 가장 밝게 안다하여 ‘解空第一’로, 그는 사위국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성질이 포악하여 동물을 살생하는 등으로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이웃 코살라국에 왔을 때 큰아버지가 세운 祇園精舍에서 부처를 만나게 되고, 이때 ‘참된 예불이란 空임을 깨닫아 해탈하는 것’이라고 하신 부처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귀의해 수행자가 되었다. 가트야나(迦旃延)는 부처님 말씀을 논리적으로 설하는 능력을 지닌 ‘論議第一’이라 칭해지고, 푸르나(富樓那)는 ‘說法第一’로 통하며, 우팔리는 이발사 출신으로 ‘持戒第一’로 통하며, 라훌라는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낳은 아들로 ‘密行第一’로 통한다. 대부분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자 출가한 경우지만, 라훌라만은 부처님의 강요에 의해 출가한 경우다. 라훌라가 출가하자 정반왕(부처의 아버지)는 아들에 이어서 손자까지 출가하자 큰 상실감에 빠져 스무 살 이하의 미성년자가 출가할 때는 반드시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부처께 건의해 그렇게 했다. 그러나 라훌라는 부모의 동의하에 출가했으니 계율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었다.
아난다는 ‘多聞第一’로 부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듣고 그것을 모두 후대에 전한 제자다. 대부분 법문은 ‘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데, 이 말이 모두 아난다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제자들은 부처님에게 侍奉을 두기를 청했으나, 거절하다가 성도 20년 후 나이 55세 되던 해 부처님은 침묵으로 그것을 승낙했다. 사리푸트라, 목갈라나, 마하가사파 등이 시봉되기를 자원했으나, 결국 부처님의 4촌인 아난다가 천거되었다. 그는 부처님 열반 때까지 25년 동안 부처님의 설법을 다시 듣고, 그림자처럼 따랐다. 아난다는 머리가 매우 총명하여 부처님 말씀을 녹음하듯 기억했고, 오늘날 우리가 듣는 불경의 대부분은 그가 기억했던 것을 비구들의 검증하고 정리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것은 변한다. 그것이 변함에도 변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 데서 괴로움이 생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갖고, 죽지 않기를 바라니 괴로울 수밖에 없고,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니, 괴롭지 않을 수 없다. 항상하다는 常見과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는 我見에 사로 잡히면, 괴로움이 된다. 무지에서 깨어나 눈을 뜨고 세상 모든 존재가 無常함을 알고, 無我임을 알고, 空인 것을 깨닫는다면, 괴로움이 없는 涅槃寂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만드는 마음의 작용과 법칙을 확연히 알게 되면 괴로움을 일으키는 요인이 사라지고, 그것이 소멸될 것이다. 물질세계든, 생명세계든, 정신세계든, 우주든 육신이든 마음이든 변하지 않는 것은 마무 것도 없다.
옛사람들은 양반과 상놈의 존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종자의 실체가 있다는 믿음 속에서 수백 수천 년을 우리는 살아왔다. 그렇지만 그 종자는 몸뚱이가 아니라, 마음에 있으며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바다. 오늘날 양반과 천민이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아는 것이 무아의 의미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개가 새끼를 낳으면 반드시 개가 태어난다. 그러나 오늘날 감자와 토마토의 유전자를 조작하면 줄기에서는 토마토가 달리고 뿌리에서는 감자가 달리는 새로운 식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런 변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생명체의 존재란 불변의 존재가 아니며, 어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질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경우라도 단독으로 존재하는 물질의 실체는 없다. 오랫동안 원자는 변하지 않고 쪼개지지 않는 단독의 존재로 알고 있었지만, 이제 원자 역시도 소립자의 결합이 만들어낸 변화하는 물질이라는 것을, 소립자의 존재까지를 밝히고 있다. 간단한 원자 수소 2개를 융합시켜 헬륨을 만드는 실험도 성공했다. 태양이 엄청난 열을 뿜어내는 것이 바로 핵융합의 결과다. 세상 만물이 탄생하기 위해 창조주가 필요하다고 믿는 시대는 지났다. 원자 또한 소립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무엇이 무엇을, 어떤 물질을 창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소립자를 누가 창조했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립자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연구할 뿐이다. 소립자는 ‘쿼크’라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쿼크가 결합해 소립자가 생성되어 이른바 물질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분해되면 물질 현상은 사라진다. 존재는 끊임없이 결합을 통해 이루어질 뿐이고, 결합의 가장 근원이 되는 알갱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이것이다’라고 단정할 만한 불변하는 알갱이인 我는 없다. 無我다.
가득찬 것이 色이라면 텅 빈 것이 空이다. 가득 찬 것이 변하여 텅 빈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찬 그대로 텅 비어 있음을 卽是라 한다. 같은 사람을 두고 누구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누구는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나쁜 사람이 성품이 변하여 좋은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곧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변했기 때문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두고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가득 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는 이치가 ‘무아’다.
양반, 남자, 가진 사람, 높은 사람은 관계가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에 기득권을 가진 자는 깨닫기가 어렵다고 한다. 부처님이 왕위를 버리듯 기득권을 버려야 진리를 보는 안목이 열린다. 종이 ‘나는 종이다’라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깨달을 수 없고, 양반이 ‘나는 양반이다’하고 우월의식을 가져도 깨달을 수 없다. ‘나는 중이다’하는 생각을 가져도 마찬가지다. ‘나는 불교신자다’라고 생각해도 그렇다. 피해의식과 우월의식을 갖고 있으면 깨닫는데 장애가 될 뿐 아니라, 남을 깨닫게 하거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도 장애가 된다.
흔히 새해가 되면 부정을 막는다고 符籍을 써 붙이거나 三災를 막는다고 대장군에 祈願을 드리기도 한다. 부정을 피하고, 삼재를 막는 것은 모두 淨과 不淨을 분별하는 데서 나온 행동이다. 어리석은 중생의 세계에는 정과 부정이 존재하지만,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顚倒夢想에 불과한 것이다. 정과 부정은 본래부터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숱한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인식의 오류에서 빚어진 일이다. 不淨不垢, 不增不減의 이치를 알아야 시비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성스러움과 부정함은 옳다거나 그르다가 아니다. 그것이 ‘照見五蘊皆空’하면 ‘度一切苦厄’이 되는 것이다.
순자와 맹자는 性惡說과 性善說을 주장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그들보다 먼저 태어난 부처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틀렸다고 보았다. 사람에게는 악과 선, 이 두 가지 성질이 동시에 작용할 수는 있지만, 처음부터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마음이 때에 따라 선과 악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구분할 수는 있겠으나 선과 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과 악은 사람의 의식으로 형성되는데, 사람의 본성에 따라 선과 악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 계율이 있다는 것에 대해 그것을 속박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라고 강요한다고 여기는 경우다. 하지만 계율을 지키는 것은 억압이 아니다. 손해를 미리 막고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술을 마셨다면 운전을 하지 말아야 하고, 운전해야 한다면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남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지켜야 할 도리고 계율이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내 문제를 아는데 나만 내 문제를 모른 채 살아서는 안 된다. 남이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먼저 더 자세히 나를 알아야 한다. 남이 나를 칭찬하거나 비난해도 내 업보를 내가 알고 있어야 칭찬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禪定을 닦아야 한다.
선정은 계율을 지키고, 지혜를 證得해서 戒定慧, 三學을 얻어야 한다. 원하는 대로 되면 즐겁고 그렇지 않으면 괴롭다. 苦의 원인은 욕망이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執着이다. 근본적으로 무지, 무명이다. 무지를 타파하면 괴로움이 소멸된다. 무지는 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일어난다. 캄캄한 밤에 목이 말라 바가지에 있는 물을 마시면 달콤하기 그지 없을 것이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그것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구역질이 날 것이다. 더럽다는 생각은 바가지나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골바가지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내 마음에 있다. 더러움이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은 더럽다는 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서 이리저리 도망 다닌 것과 같다.
몸이 아플 때는 내 몸에 어떤 병이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것이 集이다. 병의 원인이 무엇이고, 그 원인을 정확하게 찾아내야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병을 치료해 완치된 것이 滅이다. 건강했던 사람에게 병이 생겼다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 이제 병을 완치했으니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꾸준히 재활치료 하는 것이 道다. 사성제인 苦集滅道는 어떤 상황에서든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알고, 그 현상의 원인을 진단하여 원인을 소멸하고 다시는 그런 원인이 생기지 않도록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짚을 것은, 소승에서는 괴로움이 있어서 괴로움을 소멸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대승에서는 본래 괴로워할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도를 찾는 사람을 道師라고 하는데, 우리는 도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도를 올바르게 보고, 도를 따라야 한다. 도는 길이기도 하지만, 바른 길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八正道라고 하여 여덟 가지 바른길을 말하는데, 모르긴 해도 이 여덟 가지를 잘 실천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말 같이 들린기도 한다. 바르게 있는 그대로 본다는 正見, 바른 생각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定, 正念이 그것인데, 정어, 정업, 정명, 이 3가지는 지계, 즉 계율을 지키는 일에 속하고, 정정진은 바른 노력, 정념은 바르게 깨어 있음, 정정은 바른 집중과 안정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선정에 해당한다. 계를 지키고 선정을 닦아야 하는 것이 팔정도의 길이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 중에 간혹 ‘깨달음’이라는 ‘도그마’(절대적 진리라는 집착)에 사로잡혀 그것을 얻겠다고 안달하거나 목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돈을 못 벌어서, 명예를 못 얻어서, 출세 못 해서 한탄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 말이다. 『반야심경』에서는 깨달음이라는 실체를 정해놓고 그것을 얻으라고 하는 생각을 부정한다. 깨달음이 어떤 실체가 있어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無我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참자유 참행복은 무엇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는 데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불성이 있다는 생각으로 眞我를 찾으려 하는 것은 유아사상이지 무아가 아니다. 깨달음이라 할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 할 것도 없다.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한 생각 사로잡힌 데서 벗어나면 그것이 곧 깨달음인 것이다.
이상 1,2,3장을 통해서 『반야심경』의 제목과 대승보살(관자재보살)의 사상, 소승과 대승의 차이에 대해 살펴봤다. 이제 4장 대승보살의 수행에 대해, 그리고 『반야심경』의 마지막 주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걸림이 생긴다. 얻으려는 생각이 없으면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그냥 지나간다. 얻으려는 게 없다면, ‘아무 목적의식 없이 사는 게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집착에서 나온다. 집착이 없으면 인연을 따라 적응하므로 바로 해탈의 길로 갈 수 있다. 중생은 욕망에 집착하므로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轉倒夢想이란 꿈속의 생각이 거꾸로 됐다는 말이다. 거꾸로 아는 것,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하는 것, 환상에서 벗어난 그 자리, 전도몽상에서 벗어난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다. 착각으로부터 깨어나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에 이를 수 있다.
『반야심경』본문 중에서 가장 신묘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라면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는 부분일 것이라는생각이 든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으로 직역하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는 말이다. 무상은 그보다 높은 것이 없다는 뜻이고, 정등정각은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란 뜻이다. 바름은 객관적이고 타당함이며 평등은 보편성이다. 객관적이고 타당하면서 차별이 없는 보편성은 진리의 조건으로, 보편타당한 깨달음은 이보다 더 높을 수 없는 최고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모든 대승 보살은 물론이고, 모든 부처도 반야바라밀다 수행을 통해 무상정등정각, 즉 위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 어떤 수행보다 반야바라밀다가 위대한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잘 먹고, 잘 입고, 큰 집에 산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을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 기본적 의식주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환영을 쫓으며 어리석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貪瞋痴 三毒을 버리고 부처님 말씀을 따라 깨달음의 길로 가야 한다. 그 길이 수행자가 가야할 진정한 행복, 자유의 길이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서 ‘아녹다라삼먁삼보리’만큼 신묘한 구절이 있다면, 마지막 주문이 아닐까 싶다. ‘揭諦 揭諦 婆羅揭諦 婆羅僧 揭諦 菩提 婆羅訶(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이것은 인도말 음역으로 ‘가자 가자 저 언덕으로 가자, 저 언덕에 도달했다’는 지시형과 과거 완료형 주문이다. ‘모지 사바하’는 ‘보디 스파하’의 음역으로 ‘깨달음을 이루자’는 뜻이다. 삶의 궁극적 목표가 깨달음임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고 명확하게 요약한 것이다.
깨닫고 나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관자재보살이 오온 모두 空함을 밝게 비춰 깨달음을 얻고서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듯 모든 보살들도 전도몽상에서 멀리 떠남으로써 괴로움이 사라지고, 진정한 행복을 얻었듯 깨달음은 자유와 행복을 주는 길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8.19 오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