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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과 그 백서 1.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산더 황사영 알렉산더는 1775년(영조51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그는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정2품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대가 출신이다
1790년(정조 14년) 황공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고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중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에게 급양비를 하사하며, 정승도 잡을 수 없는 임금님의 손!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는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고 한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어린 나이로 경기도 마재에 사는 정란주와 결혼하였다. 정씨 집안과의 이 인연은 황사영이 유복자로 그 토록 염원하던 부귀영화의 꿈을 접게 된다. 그는 왜 세상 사람들이 염원하는 부귀영화를 던졌을 가? 그 이유는 정씨 집안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정씨 가문도 11대에 걸쳐 연속 벼슬을 지냈다한다. 부인 정란주 마리아의 할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하였고, 그 아버지 약현은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벼슬길에 나서지는 안했다. 그의 작은 아버지 약전은 병조좌랑, 둘째 작은 아버지 약종은 열심히 봉사하며, 일반 대중을 위한 최초의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를 저술한 학자로, 명도회 회장으로 조선교회의 대들보 역할을 한 순교자이며, 그의 아내 유소사, 아들 하상, 딸 정회는 성인이시다. 막내 작은 아버지 약용도 형조참의를 지냈고, 정조에게 중용을 강의한 임금의 스승이시며, 실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순교 학자이시다. 성조 이벽선생이 외삼촌이고. 평택현감이며 조선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은 정란주의 고모부이다.
우리 조선에 유교가 통치의 근간이 되어 당쟁과 파벌로 정권을 장악하고자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이루어지고 그 집권자들의 핍박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 사회가 혼란하였다. 정치에 염증을 느꼈던 선각자 선비들이 스스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았다. 사영공이 정씨 가문에 사위가 되어 정약종 이승훈 등을 통해 세상을 평화롭고 아름답게 사는 길이 천주교를 믿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통감하고 약속된 부귀영화를 접고, 그 도 뛰어난 지혜와 용맹을 하느님께 바쳐 찬미와 영광을 돌리며 하느님의 참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고자 다짐하며,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알렉산더란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니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요즈음 흥미진진하게 방영되는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이 정조 대왕이죠.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하던 정조 왕이 1800년(정조 24년) 6월에 승하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음흉하고 악독하여 사도세자를 음해하고 그 아들 세손까지 살해하려던 계비 정순왕후가 섭정하게 되자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노론에 속했던 왕대비는 정조의 사랑을 받아온, 정의로운 천주교인들이 속한 정적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하여 1801년 초부터 신유박해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많은 교우들이 검거되는 대 소동이 벌어졌다. 신유박해는 한국 교회가 겪게 된 최초의 국가적 규모의 전국적인 박해였다. 전국을 휩쓰는 검거 선풍 가운데 이승훈,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죽어도 같이 죽기로 한 황사영의 이른바 사우 혈당 등 한국 교회의 지도적 교우들이 모두 순교하게 되었으며, 한국 교회가 모시고 있던 오직 한분의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도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천주교 신자의 씨를 말리려 달려든 박해 당국자의 광란 속에 한국 교회는 엄청난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다. 대표적 신자로서 교우들 사이에 영향력을 가졌던 황사영이 제외 될 수 없었다. 그는 화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2.황사영 백서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도 바꾼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찢어지는 심정을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특히 낮선 조선에 최초로 어렵게 숨어 들어와, 우리말을 배우며 7년간 성교를 가르치고 성무를 돌보려 밤잠을 설치던 주문모 신부는 자신을 잡으려 박해가 천지를 뒤흔들자, 이를 피해 중국에 가면 박해가 사라질 거라 생각하고, 두만강까지 갔으나 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생각되자, 발길을 돌려 관가에 찾아가 자청하여 순교하였다. 이 땅의 새남터에서 “나는 천주교를 위하여 죽습니다.”라고 군중에게 크게 외친다음 참수형을 받았다. 황사영은 유일한 영신의 아버지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다.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다.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빈사위기에서 교회를 재생, 재흥할 방책으로서 당시 조선 성교회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그야말로 울음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며(飮泣含聲:백서3행) 구구절절이 피눈물로 이루어진 탄원으로 일관한 진정서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 글씨, 122줄 1만3384자 는 한권의 책 분량이다. 지난 200여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게 한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한다. 이 백서는 1925년 79위 복자 시복에 즈음하여 로마 교황에게 헌상되어 교황청 국무성 고문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백서는 1894년 고문서를 정리하면서 발견되어 천주교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그분의 친구인 이건영 요셉에게 넘겨져 그 당시 조선교구장 민덕효 주교에게 전해져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黃嗣永)의 체포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황사영은 이미 2월11일에 체포령이 내렸으나,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황사영은 황심과 상의하여 자주 북경을 왕래한바 있는 교우 옥천희를 보내기로 하였으나 살벌한 박해로 중국에서 귀국중인 옥천희가 붙잡혀 그의 자백으로 황심이 잡히고, 황심이 자백하여 황사영도 9월 29일 은신처인 충청도 제천(堤川) 배론[舟論]에서 체포 되어 웅대하고도 착실한 교회 부흥책이 무산되었다. 함께 피신 중이던 김한빈(金漢彬)도 같이 잡혔다.
황사영은 곧 서울로 압송되어 황심, 김한빈, 그리고 곧 이어 잡혀 들어온 옥천희와 현계흠(玄啓欽) 등과 함께 문초를 받았다. 그 중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그 이튿날 참수되었다. 황사영만은 <백서> 작업과정에서 정약용, 정약전 등과의 공모 여부를 가리기 위해 정약용과 정약전 등이 다시 잡혀 왔으나, 황사영의 단독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공모에 대한 증거가 없어, l1월 5일 황사영에게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가 선고되어, 그날로 능지처참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옥천희와 현계흠도 함께 참수되었다. 황사영의 가산은 몰수되고, 어머니 이윤회는 거제도로 그의 아내 정난주는 제주도 모슬포로 귀향 보내 노비가 되었고, 그의 아들 황경헌은 나이가 어려 사형을 면했으나, 노비의 신분이 안 되도록 정난주가 추자도에서 사공을 꾀어 살려두어 가족이 모두 흩어진 귀양생활을 합니다. 실로 천주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순교하였다.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자들을 신문하고 있는 동안 동지사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박해에 저명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국인 주문모를 처형한 사건을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윤대)를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임명하는 동시에 가지고 갈 <토사주문>(討邪奏文 :1801년 신유박해를 일으킨 조선정부가 그 전말과 청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대한 변명을 적어 청의 인종(仁宗)에게 보낸 일종의 진정서.)의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토사주문>은 대제학(大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작성하였고, 주문내용의 증명으로 <백서>의 사본도 갖고 가기로 하되, 그 중에서 불리한 내용은 이를 삭제하여, 그 내용을 대폭적으로 축소시킨 소위 <가백서>(暇帛書)를 가지고 갔다. 그 가백서는 16행 923자로 15분의 1정도로 대폭적으로 줄여 혼란스럽게 변명만 나열함
2.황사영(1775-1801) 백서(帛書) 요약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 글씨, 122줄 1만3384자 한권의 책 분량이다.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빈사위기에서 교회를 재생, 재흥할 방책으로서 당시 조선 성교회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그야말로 울음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며(飮泣含聲:백서3행) 구구절절이 피눈물로 이루어진 탄원으로 일관한 진정서이다.
첫째.신유박해로 처형당한 허다한 순교자들 중에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여명 순교자들의 사적, 즉 순교자의 열전(6~86행) 둘째.신유박해의 동인인 당쟁, 벽파, 시파의 골육상잔(17~18, 93, 113행) 셋째.신유박해로 빈사위기의 교회의 재기, 재흥과 당쟁으로 미약해진(108행) 국세가 위급하여 지탱하기 어려 운(現今國勢危急不絶如縷決難久支:104행) 국가의 안정과 회생을 절실히 염원하는 사영공의 착상과 고안 으로 구상해낸 종행 무진한 5기책(3~5, 96~114행)
종횡 무진한 5기책 1.박해로 쑥대밭이 된 교회와 기사지경에 신음하는 동족 동포의 만회와 재생을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국 제적 재정원조의 요청. 2.박해로 두절된 북경교회와의 새로운 연락방안의 제시. 3.상기 1.과 동일한 목적 아래서 선교자유 획득을 위하여 청국 황제 앞으로의 로마교황의 유서환발(諭書 渙發)의 간청. 4.상기 1.과 동일한 목적 아래서 청실 황권에 의한 조선 감호 및 정책적 국제결혼의 제의 5.상기 1.과 동일한 목적 아래서 종교자유의 보장을 위한 선교사 한분의 영입책으로 국제연합군의 허장 성세 지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게 하는 이백서!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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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사영의 백서 원본이 교황청에 있는것이 맘에 걸립니다.
우리가 보관해야 하는데... 수고 많으셨습니다.
빨리 돌아와 그 진가를 한국에 와서 현장에서 느끼도록
했으면 좋겠지요. 우리는 사본으로....
네 좀 안타갑습니다.
黃嗣永님은 정순왕후의 당쟁으로 시작되어 초대 한국천주교가 지리멸렬된 신유박해를 경험하고 중흥 소생을 도모하시던 말하자면 우리나라 2대 聖祖이시군요.
장란주님의 마지막은 마치 드라마 대장금의 제주도 유배를 연상케 합니다.
치열한 믿음의 삶을 사셨던 성조의 발자취와 飮泣含聲의 혈서(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느껴집니다.)로 쓴 백서에 관한 공부, 잘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뿌리를 지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1801년 신유 대박해가 4대박해중 제일 먼저지만 초기 1785년 양반계급의 가문박해인 이벽선생 순교와
중인 계급의 1785년 을사추조사건인 명례방천주교집회 사건으로 김볌우의 1786년 순교,
1791년 제사문제로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자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한 후,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여 전주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하신후
10년만에 1800년 크게 부흥하려던 차 정조의 승하로 영조의 후처 정순왕후의 폭악한 수렴첨정으로
우리교회가 존폐 위기에 놓여지자 토굴에서 7개월간 숙고 끝에 쓰여진 13.384자의 백서는
장시간의 혈서이고 2대성조라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