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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담양군 ▒ 남원 풍악산 ▒ 여시골 너머 이승골은 어디쯤에 있는가 |
이른 아침도 잠시, 해찰하다보니 시간은 금새 지나가 회문산 자락 섬진강을 지나 담양에 들어선다. 시간은 열시가 가까워진다. 담양의 명물은 죽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메타세퀴아 가로수 길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순창에서 담양 땅에 접어들면 눈에 먼저 띄는 메타세퀴아 나무숲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충북 영동의 감나무길, 청주의 프라타너스 길과 더불어 아름답기로 소문난 메타세퀴아 가로수길은 이국적인 풍경으로 다가오지만 천천히 걸으며 잃어버린 자아를 찾으려는 사람들이나 낭만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아무런 도움을 줄 수가 없다. 길이 비좁고 그나마 인도조차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큰 맘을 먹거나 목숨을 걸고 걷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정은 드디어 담양읍 객사리에 있는 삼거리에 접어들고 김현준 기자를 비롯한 광주사람들과의 반가운 해후가 이루어진다.
이곳 객사리에서 담양 읍내리 당간지주를 만날 수 있다. 장방형의 단층기단 위에 장방형의 굄을 둔 후 그 위에 당간과 지주를 세운 당간지주는 보물 제 50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당간의 바로 옆에 세워진 비석의 뒷면에 이 당간의 유래가 적혀있는데 비문의 내용은 1938년 큰바람에 넘어졌던 것을 1839년(현종 5년)에 중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당간지주가 이곳에 세워진 연유는 담양읍의 지형이 행주형(行舟形)이라서 배의 돛을 상징하는 당간을 세웠으며 고려 명종 2년(1172)에 읍지를 담주로부터 지금의 담양으로 옮겨올 때 세웠다는 말이 전해온다. 우리나라 대개의 절터에 당간만 남아 있고 지주는 볼 수 없는데 청주 용두사 터와 안성 청룡사와 공주 갑사에서만 볼 수 있다.
당간지주에서 길 건너편을 바라보면 논 가운데에 고려시대에 세웠을 것이라는 담양 읍내리 오층석탑이 서있다. 탑이 있기 때문에 고려시대 이 부근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만 추정되는데 높이가 7미터이고 보물 제 50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탑은 단층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형성하였고 1층 탑신의 몸돌이 특히 높으며 5층까지 모두 우주가 새겨져 있다.
나는 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탑돌이를 권하고 한쪽 귀퉁이가 깨어진 탑이지만 그래도 성찬 채 서있는 탑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다. 길은 담양읍을 지나 추월산으로 향한다. 멀리서보면 흡사 누운 소나 사자처럼 비스듬한 자세로 솟아 있는 추월산으로 가는 길에 푸른 호수인 담양댐은 푸르게 휘돌아가고 담양 호반에 위치한 월계리 국민관광지에 이른다.
날이 쌀쌀한 탓인지 등산객이 많지는 않고 여장을 준비하고 산행을 시작한다. 훈현이네 가족들과 오랜만에 산행을 나선 은미자, 양화연 선생까지 27명쯤 되는 일행이 모두 오를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서지만 설마 두세 시간 산행을 못할까? 보리암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고 날은 제법 쌀쌀하다.
드문드문 소나무들이 푸른 기상을 잃지 않고 서있는 사이 우뚝 우뚝 서있는 잡목들의 잔해물인 나뭇잎들이 수북히 쌓여 있고 길 가운데 나뭇잎들은 발에 밟혀 부스러지고 있다. 오고 가는 것들이여, 나도 그래서 이 겨울 이렇듯 산으로 들어가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나올 것이다.
제 1 등산로 3km 제 2 등산로 4.1km. 사람이 많기 때문에 가파른 제 1 등산로를 피하고 제 2등산로 길로 향한다. 문득 마른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들리고 보리암에서 목탁소리 불경소리가 뒤섞여 들어온다. 가파른 산길에서 나는 숨이 가쁘고 눈을 들어보면 깎아지른 벼랑에 흘러내리던 물길이 얼음기둥으로 변한 채 매달려있으며 곧바로 올라가면 지척인 보리암을 바라만 보고 산길은 휘돌아간다.
바위 벼랑 아래 큰 굴이 나타나고 쓰러진 나무를 베어 만든 나무의자에 앉아서 보면 담양호가 한 폭의 그림이다. 진재언씨가 건네주는 감귤 하나에 목을 축이고 벼랑 아래에 만들어진 산길을 내려가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지원이가 고드름을 따서 건네준다. 김현주씨와 함께 얼음과자를 닮은 고드름을 사탕처럼 깨물어 먹고 그 여력으로 산길을 오른다.
길이 있을까 싶었는데도 큰 벼랑 가운데로 길은 이어지고 바로 머리 위에는 금세라도 굴러 내릴 듯 싶은 집채만한 바위가 가까스로 걸려 있다. 그 아래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나는 문득 섬뜩해지고 도스또예프스키가 인간의 공포에 대해서 한 말이 생각난다.
‘천정에 큰 바위가 매달려 있다고 하자. 굳건히 매어 놓아서 떨어지지는 않을 바위 아래 사람이 가서 앉아 있다고 하자.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자꾸 바라보게 되면서 혹시나 저 바위가 떨어진다면 하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죽음과 같은 공포가 엄습해올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 아래를 걸어갔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바위가 오늘 이 시간 내가 걸어가는 순간 떨어진다는 예고도 없는데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난다. 죽음을 항상 준비하고 산다고 자처하는 나는 왜 이렇듯 가끔씩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서두르고만 있는 것일까? 밧줄을 붙잡고 조금 오르자 전망이 좋아 거풍하기 알맞은 바위가 나타나고 멀리 우리가 올라가야 할 바위능선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제 정상이 멀지 않다.
헐벗은 진달래 나무숲을 헤치고 올라서자 697봉에 이른다. 먼저 온 일행들이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는 바위 위에 올라서자 담양호 너머 너른 평야 뒤로 구름 속에 우뚝 솟은 무등산이 보이고 “백리 담양 흐르는 물은 구부구부 만경이네”라는 호남가의 한 구절처럼 실핏줄 같은 영산강이 구불구불 흘러가며 우측으로 백양 입암의 연봉들이 보인다. 그리고 뒤돌아보면 내장산이 첩첩한 산 속에 포개어 있고 푸른 호수 너머로 금성산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추월산은 가을이면 산봉우리가 맞닿을 정도로 높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힌다. 추월산(731m) 정상은 삼십여 분쯤 더 가야할 듯싶고 시간이 너무 흘렀기 때문에 내려갈 수밖에 없다. 보리암은 직선거리로 400미터쯤 아래에 있는데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힘들게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은 훨씬 수월한 것이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일행들은 아무 탈없이 보리암 입구에 다다른다. 보리암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 장군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젊은 시절 이 추월산에서 무예를 닦았다고 전해지며 왜군을 만난 그의 부인은 이곳에서 순절했다고 한다. 또한 금성산성에서 왜군이 조선 민간인들을 학살하자 용면 도림리 마을 사람들이 이곳 보리암 근처 절벽 밑의 동굴로 피난을 왔었다고 한다.
빙판이 된 바위 길을 건너 보리암에 이르자 대웅전에선 관세음보살이 새어나오고 난간에 몸을 기대자 담양호의 푸른 물살이 가슴 안에 가득 차는 듯하다. 보리암(菩리菴)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의 말사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리암은 고려 신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리산 천왕봉에서 나무로 깎은 매 세 마리를 날려보냈는데 한 마리는 장성 백양사 터에, 한 마리는 송광사 터에, 마지막 한 마리는 추월산 보리암 터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그 터에 절을 지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는데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절벽의 끝에 위치하고 있다. 그 뒤 이 절은 영험한 기도터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었으나, 중창 및 중건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절 건물은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다.
내놓을 만한 문화재는 없지만 이 절 대웅전 앞 오른쪽에는 지름 1.2미터, 깊이 0.7미터 정도의 큰 가마솥이 있는데 그 솥이 이곳에 있게 된 전설이 재미있다. 순창에 살았던 기생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절 아래에 있는 굴까지는 운반하였으나 절벽 때문에 더 이상 옮길 수 없어 애를 태웠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와서보니 불력으로 솥이 절에 옮겨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절은 바위 꼭대기 가까운 절벽에 위치해 있음에도 많은 샘물이 솟아나 물 걱정은 없지만 이 샘들은 부정을 타면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몇 년 전에 파계승이 샘가에서 닭을 잡아먹는 일이 있고부터 석 달 동안 물줄기가 끊어져 아랫동네에서 물을 길어다 먹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보리암을 나와 신선대에서 배낭에 싸온 음식물들을 꺼낸다. 자상하기도 하지.
광주 마운틴클럽 회장은 고추전, 고추, 홍어젓, 파김치에 막 담은 김치에다 무우떡까지 진수성찬이다. 거기에다 손동명씨가 싸 가지고 온 오이에 오징어, 캔 맥주까지 배고픈 일행들은 너무 맛있다며 배를 채우고, 나는 담양댐 부근 이곳저곳을 둘러다 본다. 과녁판처럼 생긴 가낙바우 동쪽에는 꽃밭등이라는 등성이가 있고 돼야지 둠벙 남쪽에는 나막신박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마운데미 북쪽에는 물통골이 있고 구복리 서북쪽에는 여시가 살았다고 해서 여시골이다. 병풍을 친 것처럼 생겼다 해서 핑퐁바우 뒷골 서쪽에 있는 이승골, 그리고 참시암 차돌때기는 어디쯤에 있는가? 사자바위를 지나 가파른 산길을 곧바로 내려섰고 우리가 출발했던 관광단지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2시가 넘어서였다. 지체하지 않고 무등산 자락으로 향한다.
무등산 북쪽 원효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이룬 광주호 변에는 16세기 사림문화가 꽃을 피웠던 곳으로 식영정, 소쇄원,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풍양정 등의 정자들이 있다. 기름진 들이 넓었던 담양에는 큰 지주가 많았고 그 경제력에 힘입어 봉건시대의 지식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그들은 중앙정계로 진출했다가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 곳에 터를 잡고 말년을 보내며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 지역에서 그들이 활동을 하게된 연유는 16세기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사화에 의해서였다. 늦은 점심을 이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담양 숯불갈비로 맛있게 먹고 바람에 일렁이는 푸른 광주호를 바라보며 소쇄원으로 향한다.
신영주씨와 양화연씨는 소쇄원 들목에 기립한 병정들처럼 서있는 푸른 대나무숲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대나무 숲을 지나자 소쇄원의 전경이 드러난다. 몇 년 전에 왔던 때와 달리 아랫부분에 세워져 있던 다리가 사라졌고 물이 줄고 겨울 풍경이라선지 정원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전남 담양군 남면 지석리 광주댐 상류에 위치해 있는 소쇄원은 남쪽으로는 무등산이 바라보이고 뒤로는 장원봉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이 터를 처음 가꾸었던 사람은 양산보였다.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간 양산보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 신진사류의 등용문이었던 현량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받지는 못했다. 그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고 조광조는 화순 능주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상에 환멸을 느낀 양산보는 고향으로 돌아와 별서정원 소쇄원을 일구면서 55세로 죽을 때까지 자연에 묻혀 살았다.
흐르는 폭포와 시냇물을 가운데 두고 대봉대에서 외나무다리를 지나 그 주위를 한바퀴 돌면서 감상하도록 만들어진 소쇄원에는 열채 쯤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만이 남아있다.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계곡, 담벼락, 연못, 폭포, 계단, 다리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자연스러움을 연출한 소쇄원을 우리나라 정원문화의 최고봉, 원래 건축의 백미라고 일컬어진다.
여름이라면 광풍각에 단정히 앉아보거나 잠시 드러누워 흐르는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깊어 가는 겨울이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식영정으로 향한다. 세월의 흐름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식영정 근처에는 그 사이 가사문학관이 들어섰지만 식영정으로 오르는 돌계단만은 옛날 그대로다. 성산 자락에 자리잡은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 임익령을 위해 1569년에 지은 정자이다.
식영정은 장자의 고사중에서 ‘도를 얻은 뒤 제 그림자마저 지우고 몸을 감춘다’는 식영론을 인용한 것인데 이곳의 경치와 주인인 임억령을 찾아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송순,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백광훈, 고봉 송익필, 고경명 등이 그들이었다. 그 중 김덕령, 김성원, 정철, 고경명을 식영정의 4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식영정은 스승의 자취보다 제자 송강의 터로 더 유명해졌다. 서하당 김성원의 가계가 몰락한 후 성산별곡을 지은 송강의 후손들이 이 정자를 사들여 관리해 온 탓에 정자마당에는 송강문학비가 들어서 있고 입구에도 송강 가사의 터라는 기념탑이 서 있다.
식영정에서 자미탄을 건너 마을길을 버리고 산길을 올라가면 환벽당이 있다. 서화당을 세운 김성원과 환벽당을 세운 김윤제는 자미탄 위에다 다리를 놓고 서로 오가며 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취가정 명옥헌은 오늘 우리와는 인연이 멀어 미루고 귀로에 오르며 나는 송강정을 떠올린다.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은, 정철이 율곡이 죽은 1584년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을 그만두고 돌아와 초막을 짓고 살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우의정이 되어 조정에 나가기까지 4년 동안을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정철은 가사문학에 뛰어난 업적을 남겨 그의 〈관동별곡〉,〈성산별곡〉,〈사미인곡〉은 오늘날까지도 한국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그러나 당쟁 속에서 서인 편에 섰던 정철은 동인의 영수 이발과의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정여립 사건 당시 위관을 맡게 되면서 조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악역을 담당하게 된다. 4대사화보다 더 많은 천여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 이후 정철은 정적들로부터 ‘동인백정(東人白丁)’,‘간철·독철’ 등의 칭호를 얻었다.
송강의 제자였던 사계 김장생이 어느날 제자에게 “군은 정 송강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고 묻자 제자는 “제 부형이 일찍이 그는 청백·강직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김장생은 “옳다. 그 분이 청백하고 티가 없음을 스스로 믿고 안하무인이어서 마침내 온 세상의 미워하는 바 되었으니 정자가 말씀하기를, ‘식견이 높으면 양(量)이 크다’ 하였는데 이 분도 식견이 높지 못한 소치이다”하였고 이이 역시 정철을 평하여 “정철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굳세고 개결(介潔)했으나, 술을 좋아하여 취하면 반드시 실수를 하니, 식자들이 부족하게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숨어 살 계획 이미 정해져 세모엔 장차 내 떠나가리라 항상 원하기는 물고기 되어 깊은 물밑에 잠기고 싶다 이렇게 노래한 송강 정철의 진면목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는 사이 어둠은 온 세상을 까아만 천으로 덮고 있었다. <글|신정일 사진|김현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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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