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
이 그림은 2012년 10월 KBS 진품명품 지방 출장 감정에서 발견되어 본 방송으로 이송 방영되었으며, 감정가가 무려 10억이나 책정되어 세간을 놀라게 했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느티나무와 살구나무로 추정되는 정원수가 집을 에워싸고 있고,
집안엔 새싹이 돋아난 대나무 지팡이가 보이며, 집 뒤뜰 언덕엔 대나무 숲이 있다.
그 숲에서 소복을 입은 여인이 대나무를 부여잡고 먼 산 밑 소나무가 있는 묘지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고 있다.
그리고 그 여인 주변으로 흰 대나무가 환영처럼 여기저기 솟아있다.
이 그림이 바로 시대가 강요한 회생을 감내한 열녀서씨(烈女徐氏)의 한 많은 삶이 담겨있는 그림이다.
먼저 이 그림을 감상하기에 앞서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적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가 그려진 시대적 배경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선 건국과 함께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으며 모든 사회제도가 개혁되면서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남녀노소와 신분에 따른 인간의 가치를 차등적용 시키면서, 유교 이념을 확대 해석해 권위주의와 심각한 남녀 차별을 조장했다.
정절 이데올르기가 사회 깊숙이 스며들며 여성에 대한 각종 비인간적인 억압과 통제가 당연시됐다.
여성의 바깥출입과 활동이 통제되었고 출가외인의 개념이 도입되었으며 효부 열부로 살도록 강요되었다.
여성의 몸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수단에 불과했다.
정절을 여성의 최고 가치로 삼는 환경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남자의 손길만 스쳐도 죄의식을 느껴 피부가 벗겨지도록 닦아내는 시대가 됐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살다간 열녀서씨(烈女徐氏)의 한 많은 삶이 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젠 남존여비 사상이 이 땅에서 잠들고 여성이 국가수반에 오르기도 하는 세상이 됐으니, 다시는 여성이 사회적 회생 물이 되는 비극은 없을 것 같다.
-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의 사연과 내력
세종대왕 때 대구 군위에 도운봉(都雲峯) 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결혼 후 약 1년 정도 지난 어느 날 2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병을 얻어 그만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 후 꽃다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부인 달성서씨가 매일 남편이 심어놓은 뒤뜰 대나무 숲에 올라 대나무를 부여잡고
먼 산밑 남편의 무덤을 향해 애절하게 슬피 울며 죽은 남편을 그리워한다.
그러한 일이 17년간이나 계속되던 어느 날 홀연히 대나무 숲에서 흰 대나무 몇 그루가 솟아올랐다.
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를 향당에서 경상도 감사에게 알리고,
다시 경상도 감사가 세종대왕에게 장계를 올리자 왕이 그 흰 대나무를 그려 올리라 명한다.
경상도 감사는 그 흰 대나무를 그려 올렸고,
그 백죽도(白竹圖)를 본 왕이 크게 감동하여 서씨(徐氏)에게 열녀의 증표인 정문(旌門) 및 복호(復戶)를 명하고 어제시(御製詩)를 지어 하사한다.
이러한 사연이 세종실록과 속상감행실도 등에 실려 있다.
- 다음은 세종대왕이 하사한 어제시(御製詩)다.
號天抱竹涕渙瀾(호천포죽체환란) 가신님 부르며 대를 안고 눈물 흘려
一夜新篁白數竿(일야신황백수간) 어느 날 밤 흰 대가 몇 그루 돋아낫네
高節凜然驚世俗(고절늠연경세속) 고절한 절개의 의연함에 세상이 놀라니
九重描上畵圖看(구중묘상화도간) 궁궐에서도 그려 올린 그림을 감상 하네
天古瀟湘怨不窮(천고소상원불궁) 그 옛날 소상강에 맺힌 한 다 함 없어
年年竹上見班紅(연년죽상견반홍) 해마다 대 위에 붉은 무늬 드러나네
須知素節無今昔(수지소절무금석) 모름지기 깨끗한 절개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어
白笋新生一两叢(백순신생일량총) 한두 그루 하얀 대가 새로 돋아낫네
세종대왕이 내린 작첩이나 문서 및 사적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멸실된다.
이후 도씨 문중에선 선조비(先祖妣)이신 서씨(徐氏)의 행적을 기려 포죽도(抱竹圖)를 제작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그림이 낡아 정조 19년(1795)에 영천 지역 찰방(현 우체국장)으로 재임하던 당대 대표적인 초상화가인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에게 부탁해 새롭게 그린 것이 열녀서씨포죽도(烈女徐氏抱竹圖)다.
다음은 화산관(華山館) 이명기(李命基)가 포죽도를 중모(重募), 즉 다시 그릴 때 포죽도(抱竹圖) 중모기(重募記)를 남겼는데 그 전문이다.
- 포죽도(抱竹圖) 중모기(重募記)
영남은 본래 학문과 예절을 숭상하는 고장으로 일컬어져 예로부터 정승 판서 등의 이름난 높은 벼슬아치와 도학, 충의, 절효(節孝)의 선비가 전후로 계속 배출하여 빛나는 전적(典籍)과 현자가 많은 최고의 고장이 되었다.
나는 지난 계축년 여름에 역참을 관리할 것을 명받았지만, 역의 공무가 쌓여 단 한 걸음도 문밖을 나가 아름다운 명승지를 구경할 겨를이 없었으나,
때때로 시골 선비들한테 새로운 것을 많이 듣게 되었는데, 감동할 때가 많았다.
이번에 석사 도필구(都必九)가 두루마리 한 폭을 갖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다시 모사하는 일을 부탁하므로,
삼가 받들어 펼쳐 보았더니, 곳 그의 선조비(先祖妣) 정부인 달성서씨(達城徐氏)의 포죽도(抱竹圖 )였다.
장헌대왕(莊憲大王:세종)의 어제시(御製詩)도 기재되어 있어 두 손으로 받들어 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리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라에서 절의를 장려하고 교훈과 가르침을 붙들어 심어 백세에 없어지지 않는 덕을 드리운 것을 볼 수 있었으니,
그것이 어찌 도 씨 한 집안만의 영광이겠는가!
아마도 세상의 도리를 위해 다행한 일이니, 아~ 훌륭하여라!
그 흰 대와 눈 속의 붕어가 정성스러운 효도의 감동으로 인한 것이니, 이 사실이 모두 삼강행실도에 실려 있으므로 지금 감히 글을 덧붙일 수 없도다.
훌륭하도다. 도 씨의 집안에는 어쩌면 그렇게 절의가 많았던가!
이 일에 나도 참여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니, 어찌 감히 거절하겠는가!
즉시 일어나서 손을 씻고 삼가 모사하여 돌려주며 드디어 이를 위해 중모기를 쓴다.
- 통운대부 행 장수도 찰방 이명기 삼가 씀.-
2013년 2월 7일 열운(洌雲)이 쓰다.
첫댓글 봄 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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