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5기 의장이었고 지금 현재는 사회적 기업 ‘녹색친구들’의 대표이고 녹색당의 평당원으로 있는 김종식씨를 만났다. 전대협이나 한총련의 의장 같은 과거 학생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은 대부분 ‘정당’에 몸을 담고 있다. 민주통합당의 386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나 통합진보당의 구 당권파 인사들 중 많은 이들이 전대협이나 한총련의 간부 출신들이다. 최근 ‘변절자’ 막말 파동으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임수경씨도 89년 전대협 대표로 북한에 밀입국하여 논란이 되었고 ‘통일의 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더더욱 전대협 의장 출신이면서도 정치활동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았고 그래서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행로를 걷고 있는 김종식씨에게 관심이 갔다. 녹색당은 김종식씨가 생애 처음으로 몸 담은 정당이라고 한다. 레디앙이 김종식씨를 만나 그이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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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권 : 성북구에 이런 사회적 기업들(‘녹색친구들’ 등)이나 지원 센터가 생긴 것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새로운 구청장이 당선되고 난 이후의 일인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김종식 : 2010년 지방선거에서 김영배 구청장이 당선되고 난 이후에 생긴 것이다. 제가 전대협 의장할 때 김 구청장이 서총련 중앙집행위원장이었다. 그 인연으로 성북으로 왔다. 그 전에는 녹색연합에서 사회적기업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상근자로 잠깐 일했었다. 저는 정당보다는 시민의 힘을 강화시켜 나가자는 생각이 강했다. 정당활동이 87년 이후에 많이 강화되고 인재들이 그쪽으로 많이 갔는데 저는 부정적으로 본다.
비유를 하자면 시민이 물이고 정당은 그 물 위에 떠있는 배인데, 지금 상황은 배는 항공모함인데 물은 연못인 기형적인 꼴이다. 서구사회가 민주주의를 200년 걸쳐 이룬 것을 우리는 50년만에 해냈다고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도 자본주의도 50년만에 해냈다고 자랑을 하는데, 저는 다르게 생각한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맞다고 본다. 200년 걸린 만큼의 경험과 내공과 힘이 있는데 그것들을 흉내내면서 건너 뛸 수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껍데기와 외양은 갖추었지만 그 시간에 걸맞는 내용을 갖추지는 못하고 있다.
정종권 : 돌아가서 질문을 차근차근 해보자. 전대협 의장을 하고 난 이후 김종식씨의 삶의 궤적에 대해서 간략하게 이야기를 해달라.
김종식 : 91년 전대협 5기 의장을 했다. 감옥 생활을 좀 오래한 편이다. 4년 2개월 징역을 살았고 만기를 딱 22일 놔두고 광복절 특사로 나왔다. 그래서 저는 ‘광복절특사’라는 영화를 아주 싫어한다(웃음). 제 어머니가 당시 민가협 활동을 하셨는데, 아마 최초로 출소 반대 투쟁을 하기도 했다. 자식 출소할 때도 안오셨다. 그래서 95년 8월 15일 출소했다.
감옥 나오고 학교에 가니 남은 학기가 생각보다 많았다. 3년 정도 다녔는데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점수도 잘 받았고, 재미도 있었다. 노자, 실용영어, 필수과목 등 이수하고 3년 지나서 99년에 졸업했다.
출소하고 1년 뒤에 당시 활동하던 친구들과 함께 ‘한국정보통신센터’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임종석씨가 했던 청년정보문화센터하고는 다른 것이다. 그 단체는 청년단체 성격이 강했고 우리는 약간 전문적인 단체였다. 그 당시 ‘온라인, 오프라인’이라는 말을 우리 단체에서 처음 썼다. 정보화라는 것이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의제와 이슈가 되고 파급력이 있는 운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몇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재정적 도움도 제법 받았다. 아마 그것이 제가 갖고 있는 사회적 자본을 알게 모르게 다 썼던 것 같다. 그래서 나중에 제가 본격적으로 사업이라는 것을 하면서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그 때 다 도와줬다고 하더라.(웃음)
그 다음에는 직장에 취업을 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취업해서 직장 생활한 경우일 거다. 지금은 유명한 정봉주씨가 하던 외대어학원이었다. 정봉주씨를 그때 처음 만났다. 그 때 학원에서 처음으로 온라인 교육시스템을 만들었고, BtoB 시스템도 만들어서 기업 온라인 영어교육도 했다. 그 때 정봉주씨라는 사람을 겪어봐서 그런지, 요즘 정봉주씨에게 열광하는 것이 저는 전혀 이해도 안되고 동의도 안되더라. 그 이후에 또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해서 IT관련 실무경험을 쌓았다. 2,3년 정도를 그렇게 직장생활을 했다.
출소하면서 정치보다는 경제가 먼저라는 생각에 경제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경험들을 나름대로 해왔다. 물론 인영이형(이인영)과 영식이형(오영식)이 정치하자고 제안했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DJ 정권 시절에도 출범 이후 청와대에서 일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91년 5월 투쟁에 대한 경험과 그에 대한 나름의 개인적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개인 사업을 했다. 무역회사를 만들어서 러시아와 비철 고철 임산물을 수입하는 일을 했고 그 때 약간 돈을 벌어서 핸드폰 부품회사를 만들었다. 당시 신기술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받아내고 했지만 글로벌 경제위기가 오고, 환율이 급등하면서 결국 청산했다. 1000원 팔면 900원이 원가인데, 환율이 갑자기 1400원까지 뛰니까 감당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큰 빚은 지지않고 회사를 정리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했던 이철상씨가 당시 VK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상당히 잘되고 있었는데, 우리 회사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는 VK가 망해버렸다.(웃음)
그렇게 10년 비즈니스 활동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그때부터 사회적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지금은 ‘사회적 경제’라고 많이 표현하는데 4,5년전에는 ‘대안경제’라고 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시민의 힘이 강한 곳에서 사회적 경제는 비중은 큰 편이다. 영국의 경우에도 사회적 경제의 비중이 GNP 기준으로 10% 정도를 차지한다. 고용율로 치면 그보다 좀 더 클 비중이다. 한 1년 회사를 접고 쉬었다. 사회적 경제 관련 자료와 녹색 관련한 자료를 읽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녹색연합이었다. 녹색연합을 하면서 환경 관련한 사회적 기업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시민단체의 훌륭한 자산들이 재정문제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혼을 하거나 하면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시민단체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활동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기업을 스스로 만들어보자고 제안을 한 것이다. 다행히 결론은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회적기업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이 분야 관련 일을 시작한 것이다.
정종권 :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은 성북구 사회적기업 지원센터 일을 하고, 또 스스로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서 일을 하게 된 것인가? 지금 하고 있는 ‘녹색친구들’의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김종식 : 김영배 구청장이 새로 취임하면서, 녹색연합 간부들과 사회적 기업 등과 관련하여 구청과의 미팅을 준비했다. 신임구청장이 들어서면서 이전에 없었던 ‘맑은 환경과’라는 부서도 신설하고, 도시농업 사회적기업 녹색성북 등 파트별로 담당자를 준비하여 성북구 관계자와 협의하고 조율을 했다. 그리고 성북구청에 ‘사회적기업 육성위원회’을 만들었다. 송경용신부가 위원장인데 아마 전국에서 최초의 일일 것이다. 그 이후에 ‘성북구 사회적기업 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제가 아이디어를 내서 지금 구청과 함께 하고 있는 일은 유휴 국공유지 땅에 친환경 주택(Passive House)을 짓고 그것을 임대 주택으로 분양하는 일이다. 국공유지 땅을 2,30년 무료로 임대를 받고 민간은 자본을 조성하여 주택을 건설하여 30년 운영하는 것이다. 왜 이걸 하냐면 우리나라의 에너지 문제가 심각한데, 주거에서 소모되는 에너지 비중이 28% 가량 된다. 그래서 박원순 시장도 에너지를 절약해서 ‘원전 하나’를 줄이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이렇게 친환경 도시형 생활주택을 추진하는 것은 최초이다. 단독주택은 농촌지역에서 몇군데 있고 대기업에서도 연구용으로 일부 운영하고 있지만 실제로 수백명이 직접 거주하고 생활하는 친환경 저탄소 녹색 생활주택을 추진하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아직은 상징적 시도라고 하더라도.
정종권 : 지금 건설을 하고 있는 중인가?
김종식 : 지금 단계는 민간자금을 모으는 중이고 ‘녹색친구들’의 역할은 건설에서 시행사의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 부지는 1년전에 확정되었고 구청에서도 의지를 갖고 있다. 사업타당성 조사를 하기 위한 예산도 작년 구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자금을 조성해 오면 사업타당성 조사를 하고 의회 승인 받으면 3자든 4자든 사인하고 곧바로 들어간다. 설계는 55세대로 했는데 친환경적으로 추진하다보니 전용률이 낮은 편이다. 그런데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집 짓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가 없으면 소용 없다. 그런 집(친환경 저탄소 생활주택)에 살면 전기세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데 비용이 적게 들어간다고 오히려 더 큰 냉장고, 더 큰 TV를 사용하려고 하면 다 꽝이다. 그런 경향들이 해외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신재생 에너지로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너지를 덜 사용하고 에너지가 필요 없는 삶을 추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저도 차 없앤 지도 오래되었고 걸어다니고 건물의 12층까지는 걸어다니고 손수건 갖고 다니면서 휴지 사용 안하려고 하고, 일회용 컵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들 집에서 하기가 어려운데 이것을 할 수 있는 일관된 구조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서울시와 협의해서 확대할 계획도 있다.
정종권 : 그런데 구청 차원에서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유휴 국공유지가 있는 곳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서울시 차원에서는 있을 수 있겠지만.
김종식 : 구청 차원에서는 별로 없죠. 서울시에는 유휴 국공유지 좀 있다. 이번 성북 친환경 주택 사업의 규모는 500평인데, 정릉 4동인데 아파트단지를 재개발하면서 남아 있는 짜투리 땅을 기부체납한 것이다. 몇 년 나대지로 있었던 것이고 원래는 청소년수련원으로 기부체납한 것이다. 그래서 용도가 바뀌었다고 민원들이 제기될 수 있다. 아니 벌써 일부 민원이 제기되기도 한다. 우리가 추진하려는 것이 임대주택이니까 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친환경 도시형 생활주택의 의미에 대해 홍보로 하고, 책도 만들고 다큐도 찍어볼 생각이다. 입주자도 모집해야 한다. 진보신당에도 녹색당과 성향이 가까운 사람이 많으니까 많이 알려주고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정종권 : 진보신당에서도 당원들이 자체 모금을 통해 태양광발전소를 만들고 나름의 고민과 실험을 하려고 했다. 이번의 성북 친환경 생활주택 건설은 규모가 훨씬 크고 파급력도 있을 것 같다.
김종식 : 다시 말하지만, 집 그 자체도 의미 있지만 그것보다는 소프트웨어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55세대의 주택이지만 주차 규모도 5대 전후로 줄이려고 한다. 카쉐어링이나 자전거 또는 걸어서 다니는 삶을 강조하고, 쓰레기도 양을 줄이는 것을 넘어서 쓰레기가 배출되지 않도록 시스템과 구조를 만들고 의식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들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정종권 : 전대협 의장이라는 지위가 특별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았던 전대협 의장이나 학생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독특하게 다가온다. 사실 이것도 이전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만들어 놓았던 허상이고 하나의 왜곡된 이미지일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학생운동 지도부에 대해 갖는 이미지가 ‘정치인으로 가는 프로세스’ 뭐 이런 것 같다.
김종식 : 그 사람들이 애국심이 많은데 저는 딸리는 것 같다.(웃음). 유가협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한국전쟁 이후부터 87년까지 보다 87년에서 91년 사이에 생긴 열사들이 훨씬 많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모른다. 이전에는 개량의 여지가 있었는데, 90년을 전후해서는 그런 개량의 여지가 없고 그 상황은 지금까지 더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현장과 시민의 힘이 강화되야 하고, 그것이 운동의 근간이 되고 피라미드 형이 되어야 했다. 학생운동을 한 역량들이 시민단체나 현장으로 더 많이 갔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도 아니고, 나 스스로 그런 곳에 있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출소한 이후의 저의 각오와 결심이라는 나침반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사회적 경제도 자본주의를 잘 알아야 하고, 협동조합 운동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원주나 홍성 등 전국 곳곳을 다녀봤다. 이 정권처럼 ‘사회적 경제’를 청년 실업의 임시 대책이나 주변부 경제로 생각한다면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종권 : 사회적 기업에 대해 개인적 관심이 있는데, 한국에서 사회적 기업은 대부분이 복지 관련한 분야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기업이라고 하지만 정부의 지원으로 유지되는 것이 대부분이고, 기업이라고 할 때의 자생력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회적 기업과 사회단체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김종식 : ‘작은 정부, 큰 사회’ 얘기를 많이 하는데, 작은 정부는 결국 공공의 역할을 일부 민간에 넘기자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넘기느냐, 사회적 기업을 매개로 넘겨주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벤센이라는 사회적 기업이 있다. 노인들이 쇼핑하거나 자기 일을 하려고 할 때 벤센에 속한 젊은이가 운전이나 안전 등을 도와주며 보살피는 일을 한다. 노인들은 한달에 2,3만원의 비용을 낸다. 이 비용이 벤센의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 정도이다. 수입의 10% 정도는 사회적 기금이나 모금을 통해 얻고 나머지는 정부 지원이다. 공익적 성격을 하는 사회적 기업, 시민 영역으로 규정하는 것이고 돌봄 중심의 사회적 기업은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한다.
미국의 이익형(자립형) 사회적 기업은 좀 다르다. 파이어니어 인더스트리라는 사회적 기업이 있는데 매출이 700~800억 가까이 된다. 생산물 전부를 보잉사에 납품하는 보잉사의 자회사이다. 이 회사에 대해 보잉사가 기술지도나 경영지도를 하고, 비용도 비교적 낮게 책정한다. 그런데 이 회사의 직원 80%가 약물중독자이다.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사회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고 회사의 수입구조는 보잉사에 100% 의존하는 형태이다. 그 회사의 CEO가 다른 회사에서는 수백억 연봉을 받다가 이 회사에서는 수십억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들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전혀 이해가 안될 것 같다. 그런 점이 미국의 특이성이기도 하다.
하여튼 한국의 사회적 기업, 특히 돌봄형 사회적 기업에 대해 3년간 인건비 지원하고 그 이후에는 알아서 해라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대부분 지속될 수 없고, 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정종권 : 그래서 사회적 기업이 오히려 시장이나 구청장 등의 선거와 더 연관되는 경향도 있다. 특정 후보가 당선될 때는 관계가 좋다가 다른 후보가 당선되고 자치단체의 집행부가 바뀌면 그 사회적 기업은 망하거나 다른 길을 찾게 되고, 그런 점에서 오히려 사회적 기업이 선거 정치와 연계되고 정치화되는 경향이 나타나는 모습도 일부 보인다는 생각이다.
정종권 : 좀 다른 이야기를 나눠보자.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1기~3기 의장이었던 이인영 오영식 임종석씨는 민주당의 국회의원이거나 의원이었다. 4기 의장이었던 송갑석씨도 이번에 민주당 광주 국회의원 공천을 신청했다가 전략 공천에 밀려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반면에 하태경씨나 최홍재씨처럼 비슷한 시기에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들이 ‘뉴라이트’로 전향하여 또 다른 정치적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심지어 최홍재씨의 경우는 2011년 진보신당 당사 앞에서 ‘주사파(민주노동당)과 통합하지마라’ 고 하면서 108배 이벤트까지 하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
김종식 : 하태경씨는 자기 말로는 뉴라이트 운동은 한 적이 없고 북한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했다고 한다. 하태경씨는 제가 전대협에 있을 때 조통위원회의 정책실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알고 있다. 전대협 나와서는 통일맞이에서 문목사와 일을 했고 자기는 주사파 아니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는데 이전의 사고방식과 철학이 확 바뀐 것은 맞다. 어떻게 백성을 저렇게 굶주리게 하고 죽게 만드냐고 하면서 북한 민주화와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운동을 했다고 하는게 하태경씨의 주장이다. 주사파 입장에서는 변절일거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변화를 이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조금 다르다고 본다. 뉴라이트는 기본적으로 한나라당과 같은 학살자의 정당이고 보수매판 정당, 반통일세력의 정당인 한나라당에 기생하는 세력이라고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내 시각에서는 하태경과 최홍재, 두 사람을 달리보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뉴라이트나 하태경이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 386에 대해서는 아까도 얘기했지만 정당에 과잉 편향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영이형(이인영)이 전국연합이나 시민사회에 남아 있었다면, 한국의 시민사회의 힘이 그래도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인영이 개인적으로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전대협 초대 의장이고 한국전쟁 이후 80년대 학생운동이 가졌던 역할, 조직력과 사회적 힘을 봤을 때 이인영의 행보가 상징적이지만 의미있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시민사회라는 저수지를 더 넓고 풍부하게 만드는데 조금이라고 일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정종권 : 시민사회라는 우리 사회의 기초체력을 탄탄하게 만들어야 되었다, 그런 의미인가, 그래서 이인영 등의 행보에 아쉬움이 많다는 것인가?
김종식 : 그렇다. 그래서 지금 그 사람들 만나면 서로 소 닭보듯 한다. 그런데 그 세대는 그 세대의 논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종권 : 최근 논란이 갈수록 지속 심화되고 있는 임수경씨의 ‘변절자’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김종식 : 저는 임수경씨에 대해 개인의 인격이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오래 전 부터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내세우는 정당, 민주당의 사고에 대해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그 사람이 ‘통일의 꽃’이라는 23년전의 상징 이외에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일을 했나? ‘통일의 꽃’이라는 상징 외에 한국사회에서 무엇을, 어떤 의미있는 일을 했길래, 비례후보로 내세웠는지 궁금하다. 솔직히 민주당 안의 계보나 그룹들이 서로 자기 사람 심으려고 조정 협의하면서 나온 결과가 임수경 비례대표 의원 아닌가? 그런 식으로 계파들이 담합한 것이라고 본다. 임수경씨를 아는 사람 중에 임종석씨 빼고는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정종권 : 그럼 임종석씨는 왜 ?
김종식 : 사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전대협 의장을 할 때 전대협 대표로 방북을 시켰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을거다. 아무리 술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할 수 있나? 동네시장에서 술을 먹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해 더 얘기할 게 없다.
정종권 : 임수경씨의 그 멘탈이 잘 이해가 안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태경을 보고 변절자라고 했는데,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하태경을 변절자라고 할 무엇인가에 임수경씨가 집착하고 열중하고 실천하고 있다는 의미일텐데, 임수경씨가 그런 일을 하거나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없는 것 같다. 20년전의 그 정서, 감성, 멘탈이 그냥 유지되는 것이고 그 기준에서 벗어나고 떠난 하태경씨를 변절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 같다.
김종식 :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 사람들도 바로 그런 상태같다. 세상이 변하는데 그대로 있는 거다. 그런데 이전에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변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 되어 버렸는데 우리는 그걸 몰랐던 것이다. 정당이니까 치열한 곳이고 또 지역구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진짜 많다. 그 사람들이 다 넋이 빠져 있다. 열심히 살았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리더십에 대한 책임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난 총선에서 관악구의 부정문자 사건에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사건들이 일회성 사건일까? 빙산의 일각처럼 거대한 빙산의 일부분만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계속>
첫댓글 정당이든 시민단체이든 사회를 움직이려는 단체입니다. 문제는 올바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제대로된 팀플레이를 보여줄 효율적이고 강력한 단체를 만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