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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강원수필문학회 원문보기 글쓴이: 蘭谷
한중록(恨中錄)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그러할 제 날이 늦고 재촉하여 나가시니, 대조(大朝)께서 휘녕전(徽寧殿)에 좌(坐)하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드리오시며 그 처분(處分)을 하시게 되니, 차마차마 망극(罔極)하니 이 경상(景狀)을 차마 기록(記錄)하리오. 섧고 섧도다. 나가시며 대조껴서 엄노(嚴怒)하오신 성음(聲音)이 들리오니, 휘녕전이 덕성합(德成閤)과 멀지 아니하니 담 밑에 사람을 보내어 보니, 벌써 용포(龍袍)를 벗고 엎디어 계시더라 하니, 대처분(大處分)이 오신 줄 알고 천지 망극(天地罔極)하여 흉장(胸腸)이 붕열(崩裂)하는지라. 게 있어 부질없어 세손(世孫) 계신 델 와서 서로 붙들고 어찌할 줄 모르더니, 신시 전후(申時前後) 즈음에 내관(內官)이 들어와 밖소주방(燒廚房) 쌀 담는 궤를 내라 한다 하니, 어쩐 말인고 황황(遑遑)하여 내지 못하고, 세손궁(世孫宮)이 망극한 거조(擧措) 있는 줄 알고 문정(門庭) 전(前)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 하니 대조께서 “나가라.” 엄히 하시니, 나와 왕자(王子) 재실(齋室)에 앉아 계시더니, 내 그 때 정경(情景)이야 천지 고금간(天地古今間)하고 일월(日月)이 회색(晦塞)하니, 내 어찌 일시나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으리오. 칼을 들어 명(命)을 그츠려 하니 방인(傍人)의 앗음을 인(因)하여 뜻같이 못하고, 다시 죽고자 하되 촌철(寸鐵)이 없으니 못 하고, 숭문당(崇文堂)으로 말미암아 휘녕전(徽寧殿) 나가는 건복문(建福門)이라 하는 문 밑으로 가니, 아무것도 뵈지 아니하고 다만 대조께서 칼 두드리시는 소리와 소조(小朝)께서,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으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하시는 소리가 들리니, 간장(肝腸)이 촌촌(寸寸)이 끊어지고 앞이 막히니 가슴을 두드려 한들 어찌하리오. 당신 용력(勇力)과 장기(壯氣)로 궤에 들라 하신들 아무쪼록 아니 드시지, 어이 필경(畢境) 들어가시던고, 처음엔 뛰어나오려 하옵시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地境)에 미치오시니 하늘이 어찌 이대도록 하신고. 만고(萬古)에 없는 설움뿐이며, 내 문 밑에서 호곡(號哭)하되 응(應)하심이 아니 계신지라. 소조가 벌써 폐위(廢位)하여 계시니 그 처자(妻子)가 안연(晏然)히 대궐(大闕) 있기 황송(惶悚)하옵고, 세손을 밖에 그저 두어서는 어떠할꼬 차마 두렵고 소마소마하여 그문에 앉아 대조에 상서(上書)하여 “처분이 이러하오시니 죄인(罪人)의 처자가 안연히 대궐 있기 황송(惶悚)하옵고, 세손을 오래 밖에 두옵기 가중(加重)한 몸이 두렵사오니 이제 본집으로 나가와지라.” 하고, “천은(天恩)으로 세손을 보존(保存)하여지라.” 써 가까스로 내관(內官)을 찾아들이라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선형(先兄)이 들어오셔. “폐위 서인(廢位庶人)하여 계시니 대궐 있지 못할 것이니, 본집으로 나가라 하오시니 가마를 들여오니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나가시오리이다.” 하시니 서로 붙들어 망극 통곡(罔極痛哭)하고, 업히어 청휘문(淸輝門)으로서 저승전(儲承殿) 차비(差備)에 가마를 놓고, 윤 상궁이란 나인이 안 타고, 별감(別監)이 가마를 매고 허다(許多) 상하(上下) 나인이 다 뒤를 따라 쫓으며 통곡(慟哭)하니, 만고 천지간에 이런 경상이 어디 있으리오. 나는 가마에 들 제 막혀 인사를 도르더니,윤 상궁(尹尙宮)이 주물러 겨우 명(命)이 붙었으나 오죽하리오. 집으로 나와 나는 건넌방에 누이고, 세손은 내 중부(仲父)와 선형(先兄)이 모셔 나오고, 세손 빈궁(嬪宮)은 그 집에서 가마를 가져와 청연(淸衍)과 한데 들려 나오니 그 경색(景色)망극함이 차마 어찌 살리오. 자처(自處)하려 하다가 못 하고 일이 하릴 없으니, 돌아 생각하니 십일 세 세손에게 첩첩(疊疊)한 지통(至痛)을 끼치지 못하고, 내 없으면 세손 성취(成就)함을 어찌하리오. 참고 참아 완명(頑命)을 보전(保全)하고 하늘만 부르짖으니, 만고(萬古)에 나 같은 완명이 어디 있으리오. 세손을 집에 와 서로 만나니, 충년(冲年)에 놀라고 망극한 경상을 보시고 그 서러운 마음이 어떠하리오. 놀라 병(病)날까 내 망극함을 서리담아, “망극망극(罔極罔極)하나 다 하늘이시니, 네가 몸을 평안(平安)히 하고 착하여야 나라가 태평(太平)하고 성은(聖恩)을 갚사올 것이니 설움 중이나 네 마음을 상(傷)해오지 말라.” 하고, 선친(先親)께서는 궐내(闕內) 떠나지 못하시고, 선형(先兄)도 벼슬에 매이어 왕래(往來)하시니, 세손 모시옵고 있을 이가 중숙(仲叔) 두 외삼촌(外三寸)이니 주야(晝夜)로 모셔 보호(保護)하고, 내 계제(季弟)는 아시(兒時)부터 들어와 세손을 모시옵고 노던지라, 그 아이가 작은 사랑에 모시고 자고 있어 팔구 일(八九日)을 지내니, 김 판서(金判書) 시묵(時黙)과 그 자제(子弟) 김기대(金基大)도 와 뵈옵는다 하여, 내 집이 좁고 세손궁(世孫宮) 상하 나인이 전수히 나왔는지라, 남장(南墻) 밖 교리(敎理) 이경옥(李敬玉)의 집을 빌려 김 판서 댁(金判書宅)이 그 며느리를 데리고 와 빈궁을 모시고 있게 하니 담을 트고 왕래(往來)하니라.
▶ 줄거리 요약 ‘한중록’은 모두 네 편으로 되어 있다. 제1편은 혜경궁 홍씨의 어린 시절과 세자빈이 된 이후 50년 간 궁궐에서 지낸 이야기를 하는데, 사도 세자의 비극은 말하지 않고 넘어간다. 제2편과 제3편은 천정 쪽의 누명이 억울함을 말하는 내용이다. 제4편에서 비로소 사도 세자 참변의 진상이 기록되었다. 영조는 그가 사랑하던 화평 옹주의 죽음으로 세자에 무관심해지고, 그 사이 세자는 공부에 태만하고 무예 놀이를 즐기는가 하면, 서정(庶政)을 대리하게 하였으나 성격 차이로 부자 사이는 점점 더 벌어지게 된다. 마침내 세자는 부왕이 무서워 공포증과 강박증에 걸려 살인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여기에 영조 38년(1762) 5월, 나경언(羅景彦)의 고변과 영빈의 종용으로 왕은 세자를 뒤주에 유폐시켜 9일 만에 절명하게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영조가 세자를 처분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었고, 뒤주의 착상은 영조 자신이 한 것이지 친정 아버지인 홍봉한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한다. 여기 실은 것은 사도 세자가 뒤주에 들어 절명하는 처분이 내리는 과정과, 그 이후 자신의 처지를 기록한 부분이다. 이 글을 쓴 혜경궁 홍씨의 당시 나이는 71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