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하심
1.왜? 무신정권인가? 1170년 당시 고려 인종(제18대)에 일어났던 시기이다. 당시 집권초기까지만 하여도 무신들을 중용하고, 문무를 겸비하며 나라를 이끌던 최고 지도자로 자임하였다. 하지만 집권 중후반으로 가서는 자신을 견제하고 무시하는 경향에 당시 환관과 내시들을 정치에 중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왜 무신들을 버리고 문신과 환관, 내시만으로 정치를 하려고 애섰을까? 당시 예상한다면 아마 무신들은 무식하니 정치에는 무식하게 칼만 들이댄다 생각하여, 문신과 내시 환관이 책도 읽고 세상도 잘 알아서 정치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의종은 날마다 유흥과 항응을 즐겼다. 그러면서 정치나 논쟁에 무조건 문신들만 정치에 참여시켰다. 이에 따른 문신들은 각각 권력기반으로써 각 부서마다 자리잡았으며, 무신들에게는 심지어 놀리기도 하였다. 거기에다 내시나 환관들에게 정치 권력을 부여시켜 정치에 참여시켜 어느 부처라든지 어느 궁궐 내에 마져도 다니기도 하였다. 결국 무신들은 자신의 부처와 일할 자리가 문신들과 환관 내시들에게 뺏기고 만 셈이다. 이에 불만이 많았던 무신들은 당시 상장군이 었던 정중부 상장군에게 말을 한다. '우리가 차별받으니 반란 일으키자'제안하였다. 나례행사당시 정중부에게 다가와 김돈중이라는 사람이 정중부를 모든 문무가 보는 앞에서 그의 수염을 태우게된다. 문신들은 당시 정권에 핵심주역이자 정치,경제,사회를 모두 총망라 관료직에서 이루었고 자신들의 향유와 풍요로운 삶을 살기도하였다. 반면 무신들은 차별만 받았다. 이에 무신들은 보현원에 인종이 갈때 도착쯔음, 반란을 일으키자고 모두 한 뜻을 모았다. '무인시대'라는 드라마를 보신 분들 계실 것이다. 정중부를 통하여 이의방,이의민, 경대승 등 각 무신들 중 최측근들이 한마음으로 문신과 환관, 내관, 그리고 인종을 죽이고 자신들의 정권을 잡겠다는 의도었다. 이에 혁명을 일으키고, 중방(고려시대의 무신 최고권력통치기관)을 만들어 정중부가 제1대 무신 중방 집권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이때부터 100년간 무신들은 정권을 유지하기에 이른다.
2.무신정권 당시 고려의 경제와 국제관계
정중부를 시작으로 중방이라는 체제하여 무신들은 정치를 하게된다. 무신들은 문신들이 가진 권력기반도 하나하나씩 자기 부처에 권력을 자기게 된다. 하지만 그 밑 농민이나 하층민 백정들에게는 경제상황이 피폐해졌다. 개혁이 없었다. 궁핍, 민중의 성장, 중앙통제력의 약화 등을 들 수 있다. 처음의 민란은 1172년 서북면의 창주(昌州)·성주(成州)·철주(鐵州)에서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차츰 전국에 미쳤다. 대표적인 민란으로는, 76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난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의 난, 82년 전주 관노들의 난, 최충헌 집권기에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진주민란과 동경(東京;지금의 경주)민란, 운문(雲門;지금의 청도)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지금의 울산) 효심의 난, 98년(신종 1) 개성에서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 등을 들 수 있다. 효심과 김사미는 신라의 부흥을 표방하였고, 만적은 신분해방과 나아가 정권을 탈취하려 하였던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이러한 무신정권기의 반란은 그 전과 후의 양상이 달라, 전기에는 대개 단독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후기에는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그 규모와 세력이 비대화되었다. 무신정권시대의 반란으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승려들의 반란이다 토지는 뺏겨지고, 결국 농민들은 화전민, 신집권기에는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농장이 발달하였으며, 전시과제도가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하급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수탈을 자행하여 하층민의 항거와 지배질서로부터의 이탈이 이어졌다 3. 고려 무신정권 국제관계 다들 아시다시피 거란과의 전쟁, 삼별초, 몽고침략, 여진과 전투, 왜구 등 모두 무신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권을 일으켜 일어난 전쟁들이다.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력을 키워 중국북부까지 지배한 뒤에 나라이름을 요 라고 하였음.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 싫어하여 따돌리거나 거부하여 물리치는 것)함. 다들 아시다시피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일어났으며, 심지어 개경마저 돌아온 곳이기도 하다 . 거란은 고려에게 고구려 고토회복과 고구려의 계승,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어 달라고 요구하면서도 친선관계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조건에 불쾌한 고려는 반대한다며 거란과 외교를 무시했다. 이에 거란은 불쾌하자, 대군을 이끌고 전쟁을 이끈다. 의주를 거쳐, 서경을 쳤지만, 고려는 끝까지 맞서며 승리를 하였다. 거란과 1차전쟁 942년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 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 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 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 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진화(振化)·내원(來遠) 등 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제1차 침략】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朴良柔)·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 (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소손녕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든지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나왔고, 후자가 유력했으나 서희·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기로 하였다. 여기서 소 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 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 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東京)도 고려 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 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 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응 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 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려는 흥화진(興化鎭)·통주(通州)·구주(龜州)· 곽주(郭州)·용주(龍州)·철주(鐵州) 등을 획득하여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국 요의 제1차 침략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 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예를 받아 침략의 목적 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북진정책의 일환으로서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에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요는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거란과 2차전쟁 1010년(현종 1) 11월 요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母后)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는데, 요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이다. 이는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침략의 실제적인 목적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요는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곽산·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자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요는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구주·통주·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거란3차전쟁 거란의 고려침공도 3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흥화진에서 소배압의 군대를 막아내자 이를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다음 해 정월에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다가 구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구주대첩이다.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1019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치고, 요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으며, 요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 여진족은 고대에는 숙신, 위진 남북조 때에는 물길, 수.당대에는 말갈로 불리웠으며, 송화강 이동 장백산과 압록강 상류에 걸쳐 살고 있었다. 거란이 세운 요가 이 지역을 점령하자 길림성 이남의 여진은 요의 지배하에 편입되었는데, 이들을 숙여진이라 했고, 요의 지배에 들지 않은 여진은 생여진이라 하였다. 만주에서 일어난 민족으로, 함경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일찍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면서 말이나 모피등을 바치고 식량과 옷감, 농기구 등으로 바꾸어갔습니다. 세력이 커지자 국경을 위협하고, 고려의 국경을 침략하였습니다.
고려와 몽골과의 관계 몽고는 중국 대륙을 정복한 후에 고종 18년(1231년) 8월에 고려를 침범하였다. 몽장 살례탑은 고려의 북방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고려 조정에 사자를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고하였다. 조정에서는 갑작스러운 전란을 피하기 위하여 예물을 후하게 보내니 살례탑은 이듬해 정월에 요동으로 물러갔다. 심지어 고려조정에 몽고에 간섭을 받았다. 황후나 권력 국내사정마저도 몽고 원나라 왕에게 통치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몽고가 멸망할때, 이성계를 통해 최영장군이 요동을 치자했지만, 끝내 위화도에서 리씨가문 리성계가 반란을 일으켜 결국 477년만에 고려는 멸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