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부모님 묘소에 국화가 놓여있다, 누군가가 앞서 다녀 간 것이다. 며칠 후 작은 누님께 꽃 이야기를 했더니 빙긋이 웃으시며 ㅈ가 두고 간 것이라 했다. ㅈ는 친척이지만 연을 끓은 사람이다.
ㅈ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친 외가를 오가며 어렵게 살아가던 중 청년을 중매로 만났다. 그들이 우리 동내에 신방을 차리면서 왕래가 시작됐다. ㅈ는 청년을 홀어머니가 정해주신 배필을 연분으로 알고 자기를 신부로 맞이한 효자요 성실한 지아비라 했다. 청년은 명절이 아니어도 좋은 술과 과일을 들고 아버지를 뵙곤 했다.
청년은 수년 후 퇴직금을 활용해 보려는 아버지를 꿰어 어망용 연사(聯絲)공장을 차리도록 권했다. 공장을 얻고, 동력을 끌어오고, 여공과 작업반장을 스카우트해왔다. 숙소가 모자라 내 방까지 내어주고 어머니는 그들 식사를 날랐다. 내가 공고를 가게된 것도 이 공장 때문이다. 당시 큰형은 교사였고 작은 형은 수험생으로 공장은 나름 무던한 막내가 이어갔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람이 있었었다.
어망용 실 생산은 지역성 사업이다. 서울선 전문 인력도 귀하고 중개상을 거쳐야 되는 영업방식이여서 이문이 박했다. 와중에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지면서 면세로 들어오던 원료마저 끓기는 악운이 겹쳤다. 공장은 두 해를 넘기지 못했고 남은 실은 헐값에 넘겼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연사 기계를 되팔아 준다던 청년은 매각 대금을 들고 다니던 회사의 여직원과 함께 미국으로 도주했다. ㅈ는 또다시 홀로 됐고 후유증으로 종암동에서 변두리 장위동으로 이사한 것 말고도 여러 해 고통을 남겼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ㅈ와의 관계다.
작은 누님은 ㅈ는 삵 바느질로 시작해 지금은 종로에서 한복집을 하는데 주변에 가계를 알려 도왔다 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미국간지 얼마 되지 않아 청년이 사고로 죽자 여직원은 아기를 한국으로 보내고 행방을 감추었는데 ㅈ가 그 아기를 키워 시집보냈다 했다. 이제 그녀는 또다시 식사 나눌 가족이 없는 홀로가 됐고 특히 가장 외로운 시간은 명절일 것이라 했다.
작은 누님은 이해타산적인 삶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아픔을 순수한 사랑으로 아니 운명처럼 간직한 채 살아가는 ㅈ에게 더 이상의 고독과 소외는 당치 않다했다. 외로운 사람이 널렸지만 더 많이 외로운 사람이 보호받아야 한다 했다. 퇴직금을 늘려보려는 아버지의 의중이 없었다면 돈을 챙겨 도주할 것도 ㅈ가 혼자 될 이유도 없었겠지 않느냐는 연계성을 결과에 앞세웠다.
분노는 다 허망한 것이라 했다. ㅈ의 화해가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라 했다, 결국 ㅈ도 우리 가족이라 했다.
작은 누님은 뜬금없이 "요즈음 먹 자주색 옷고름 아닌 한복은 어쩐지 촌스럽게 보이지 않니" 라 하신다. 아마 ㅈ께 새 한복을 지우려나 보다. 흰머리가 눈에 뜨일 나이가 되면 두루마기 정장 한 벌쯤은 갖고 싶었던 나다. 꼭 맞추지는 않더라도 구경삼아 작은 누님을 따라 나서야겠다.
2015년 10월11일
첫댓글 친구의 가슴아팠던 가족사보다 글 제목 " 먹자주 옷고름 " 이 기가 막힙니다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고 했습니다. 과거 잘못을 빌었다 이해하고 베풀고 가십시요
잘 생각했습니다 - 한복입고 폐백받을 중후한 친구의 모습이 기대됩니다
그 공장이 우리들을 만나게 한 중계역활 할 줄 왜 몰랐을까?
그나저나 관절염으로 다리가 아픈 ㅈ가 산에 올라온 의중을 파악중이여
48년전 우리의 인연은 전지한장 ( 합격자 발표 )으로 부터 시작 되었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