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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 🌟
2024년 9월 1일 주일 예배
( 인도,설교: 정성욱 선교사 )
🌟 다 같이 기도함으로 9월 1일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9월
첫째 주 주일을 허락해 주시고 전국
각지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에 다 함께
모여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시간 저희들에게 임재하여 주셔서
저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저희들이 주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시는 말씀의 은혜받게
하옵시고 저희와 가족들에게 주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찬송가
https://youtu.be/TO0y8-Kj-NQ?si=jm4EOQWK0NnAfnyF
https://youtu.be/KiPmKrKZRUw?si=j1dAJRKXHuvIjKy4
🌟 교독문입니다.
시편 42편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 한 주간도 주 안에서 평안하셨는지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긍휼하심이
있으시길 축원드리겠습니다. 아멘
오늘 주일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사도행전 하반절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은혜받길 원합니다.
본문 하반절 말씀은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전개되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아래의 주석은 개역한글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16절은 아시다시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휴거가 나오는 구절인데 우연히도
사도 바울은 생명의 위협을 겪으며
오랜 시간을 여행을 하였고 로마에
가까이 와서는 마치 천사들의 환대를
받듯이 14,15절에서 로마 성도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면서 목적지인 로마에
도착합니다.
이것은 마치 마지막 때 천사들이
방문하여 우리가 휴거 되어 천사들의
환영을 받으며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갈 날이 가깝다는 사인으로 다가옵니다.
로마에 들어가니 - 드디어 바울이 로마에 당도했습니다. 오래된 서방 사본에는 "백부장이 죄수들을 시위 대장에게 넘겨주었"다는 문구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항소를 하였으므로(25 : 11) 황제 휘하의 부대 책임자에게 넘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한 군사와 함께 따로 - 누가는 중간 과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 없이 바울이 한 군사에 의해 따로 감시를 받게 되었다는 결과 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몸센(Mommsen)에 의하면 군인에 의해 따로 감시받게 하는 것은 감옥에 감금시키는 것보다 가벼운 형벌이었습니다.
아마 거기에는 베스도의 긍정적인 조서(25: 25; 26: 32), 그리고
호송 책임자였던 율리오가 바울에 대해
경험한 대로 작성한 긍정적인 보고서 등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로마법에 의해 군인의 한 손과 바울의
한 손이 사슬에 묶인 상태였는지 아니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사람들을 초청하여 대화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자유가 허용된 것은 사실입니다(17-23절).
17.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사람들을 청하여 - 바울이 로마에 도착 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지도자급 되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하나의 통합(統合)된 공동체 기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보며, 따라서 바울이 초청한 이들은 개별적 공동체들의 장로, 지도자, 회당장과 같은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Wendt).
유대인들이 로마에 거주하기 시작한것은 마카비 시대(B.C. 166-63)부터 였고, B.C.63년 에는 폼페이가 유대의 독립
운동을 진압한 후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오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에는 제법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실례로 B.C. 6년 유대인들이 헤롯
아켈라오의 폭정을 로마에 고소하기
위하여 50명의 대표를 파견 하였을 때
그곳에 거주하던 유대인이 무려
8,000명이나 동조하였다는 기록이있습니다 (Josephus. Anitp. xii. 1 ).
바울이 유대인 지도자들을 자기의 숙소에 초청한 것은, 그가 죄수의 신분으로서 활동 공간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고, 그들을 초청한 목적은 대략 다음의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자신을 변호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로부터는 자기에 대해 어떤 소식을
전해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적절히 대응하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에 대해 부정적인
소문을 듣고 그것을 사실로 판단하여
황실(皇室)에 뇌물을 주면서 부정적인
내용의 고소를 한다면 바울로서는 여간
괴로운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23절).
바울 자신으로서는 개인의 일신상의 안전을 염려하는 것보다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중거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전파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습니다.
"형제들아...배척한 일이 없는데" - 바울은 정중한 태도로 자신이 로마에 재판을
받기 위해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가 동족인 유대인을 거스리
거나 유대의 관습을 반대한 일이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없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기에게 허위의
누명을 씌워 사형(死刑)을 가하려 했으나 로마 군사들이 구해준 일(21: 32, 33)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무죄하게 로마인의 손에 넘겨졌다고만 진술함으로써 가능한 한 반유대 감정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18.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로마인은...놓으려 하였으나 - 로마인이라 함은 천부장 루시아의 총독 벨릭스 및
베스도를 가리키며 그들은 모두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습니다(23 : 29; 24: 22-26).
그러나 이들이 바울을 석방하고자 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의 무죄를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적극적으로 바울을 놓아주고자 한 일이 없고 베스도 같은 경우에는 도리어 바울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25 : 9).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진술이 결코 허위는 아닙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려 했던 것은, 자기가 지금 재판을 받기위해 로마에 이송되어 온 것이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의 적대감 내지는 오해 때문이었다는 것 즉 유대인들이 원인 제공자라는 것과 거기에 비해 로마인들은 부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로마인들은 바울을 놓아주려 했으나 유대인들이 방해했기 때문에 석방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예수의 모형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바울의 유사성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사도성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신학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3: 13 참조).
19.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마지못하여...아니로다 - 본절에서도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유대인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적대 의식 때문에 불가피하게 가이사에게 상소(上訴)하기는 했지만, 조금도 동족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고백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반대하여 그로 하여금 가이사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지만 바울이 자신을 살해하려 한 동족을(23 : 2-15 ;25 : 3) 송사할 의사가 없다고 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한 동족을 용서하신 사실을 연상시킵니다 (눅 23 : 34)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 이것은 공의회 에서도(23 : 6), 벨릭스 앞에서도(24 : 15),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26 : 6) 증언 했던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소망' 이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이 예수그리스도에게 완성되었다고 하였으나 정치적이며 현세적 메시야를 기다렸던 일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차이 때문에 바울은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때 우리들도 사도 바울처럼
부활과 휴거를 우리의 소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소위 깨어있다고 하는
사역자들이 유력한 적그리스도인
트럼프를 마치 정치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현세적인 메시야같이 믿고
따르고 있기에 안타까운 따름입니다.
속히 그들의 눈과 귀가 열려서
미혹에서 벗어나길 기도합니다.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 편지에 해당하는 혤라어 '그람마' (*)의 본래적의미는 '그려지거나 씌어진 어떤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산헤드린에서 발송한 바울에
대한 공식 고소장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누가 와서...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 앞에서는 문서를 통한 연락이
없었음을 말했고 여기서는 사람을 통한
정보의 전달도 없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고하든지 ' 의 '아펭게일렌' (* )은 공식적인 알림을 뜻하고 '이야기한'의 '엘랄레센' (* )은 사적인 알림을 나타냅니다.
결국 유대인 지도자들의 말은, 공식적인 문서를 통해서나 혹은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온 사람을 통해서나 도무지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는 것이고, 또한 여행객을 통해 사적으로도 들은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말대로 하자면 바울은 그들에게
베일에 싸인 인물인 셈입니다.
만약 이들이 실제로 바울에 대해서 전혀 아는바가 없었다면 그것은 아마 다음의
이유때문일 것입니다.
(1) 예루살렘의 반(反)바울적 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로마에 미리 연락하지 못했습니다(Meyer).
(2) 연락을 하려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바울의 이송이 거의 마지막 항해 시기였기 때문에(11절 주석 참조) 교통원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Alford, Lumby).
(3)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이후 다시 로마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멀리 본국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가까운 지역에 흩어져 있다가 돌아오는 것이었으므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바울사건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었을 것입니다(Olshausen, Hervey).
이 가운데 첫번째 견해는 타당성이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하더라도 반(反)바울적 유대 주의자들은 바울이 항소할 때 현장에 있었으므로(25 : 11), 그 때에라도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공문을 띄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번째와 세번째의 견해가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자는 로마의 유대 공동체 지도자들이 바울에 대해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다고 한 것은 단지 외교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도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와 동방 간에는 정규적인 왕래가 있었고, 바울이 연루된 문제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초의 관심사인 종교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그런 소문은 당연히 로마까지 퍼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모른다고 한 것은, 아무런 유죄 증거가 없는 바울의 상소건에 대하여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자기들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Bruce).
종교적인 문제로 분란을 일으켜 로마로부터의 추방령을 받았던 쓰라린 경험(18 :2)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 - 유대인 공동
체의 지도자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단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일음을 말해줍니다.
본문에서 '파'(* ,하이레시스)는 '이단'으로도 번역되며(24 : 5), 이에 의거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유대인들에 의해 이단시 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도 있으나(Bronhauser), 본문에서 보여진 유대인들의 태도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기독교에 대하여 '듣고자' 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기독교를 이단이라고 여겼다면 바울에게서 무엇을 듣고자 했을 리가 없습니다.
또한 '하이레시스'의 보편적 의미는 '이단'이 아니라 ' 종파'라는 점에서 이 단어를 반드시 '이단'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로마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다만 유대교의 많은 종파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일자를 정하고...많이 오니 - 본문의 상황은 22 절에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왔던 사람들이(17절) 바울에게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더많은 사람들을 데려왔는지 아니면 처음 만났을 때는 상견례(相見禮)만 하고 날짜를 따로 정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한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하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숙소에 모여왔고, 이렇게 하여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바울의 숙소를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처음부터 많았거니와 점차 더욱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상당히 넓은 집을 얻었을 것이라 보기도 합니다(Zahn).
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하나님 나라와 예수로 요약하며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핵심적이고 정확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며 그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현되었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되었으며 그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주석에서는 그냥 재림으로 얘기를 하고
있지만 재림에는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이 있습니다.
본절에서 바울이 먼저 증거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지상 사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막 1 : 15) 당연히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기대해 왔던 유대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통해 보여진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요 18 :36 ; 고후3 : 17 ; 계 21 : 1).
다음으로 바울이 증거한 것은 예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메시야 예언과 약속이 예수에게서 성취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독교적 메시야관은 유대인들에게 낮선 것이었고 이해하기도 힘든 것이었으므로 그는 단지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해시켜 설득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하더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돈'(* )이 '설복하다'는 뜻을 갖는 단어라는 점에서 분명해집니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믿는 사람...믿지 아니하는 사람 -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행한 바울의 증언은 노력에 비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사람의 믿는 사람을 얻었습니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때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라고
봅니다(26, 27장).
유대인 동족(同族)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극히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던 경우는
본서에 여러 차례 기록된 바이며 (14 : 4 ; 17 : 4 ; 19 : 9)
그것에 대해서 바울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았고 동족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롬9-11 장).
이처럼 마지막 때를 맞은
우리들도 복음을 전파하면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않고
특히 가족 구원을 포기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25.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 - 바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마의 유대인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고 마침내는 집회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고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23 : 10에 있었던 유대인들 사이의 분쟁을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 사 6 ; 9, 10의 인용으로, 이곳 외에도 신약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인용된 말씀입니다(마 13 : 14, 15; 막 4:12 ; 눅 8 : 10; 요 12 : 40 ;롬 11 : 8).
본래 사 6 : 9, 10은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바울은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의 본래적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일렀으되. 들어도" 바울은 예수님이
유대인을 꾸짖기 위해 직접 사용한(마 13:14; 막 4:12; 눅 8:10; 요 12:40) 사 6:9) 성경을 인용합니다.
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이 백성에게...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 70인 역의 사 6 :9, 10과 내용이 일치하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본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실 때 그가 어떠한 말을 하여도 백성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완악하여 이사야의 말을 청종(聽從)치 아니함으로써 마침내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말씀을 이사야 시대 백성의 후손들에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과 그에 따른 심판을 말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구원의 복음을(24절) 거부하였기 때문에 그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28절).
그러나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 있듯이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유대인들도 구원에 참여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롬 11: 1-12).
28.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구원을 이방인에게로...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 하나님의 구원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시 되었으나 그들이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구원은 이방인들에게 보내어졌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는 논리이며(13: 48 ; 18:6),
자신의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22 : 18, 21).
유대인들은 '듣지 않을 것이나'(22: 18), 이방인들은 '들을 것이다'. 그 결과 유대인에게 주어져야 할 구원이 이방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서에서는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 퍼져 나가는 과정과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역하는 것이 평행을 이루면서 기록되고 있는데, 26-28절에 이르러서는 그것이 결정적으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결론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29. (없음)
몇몇 유력한 사본에는 본절이 빠져있으나 (* , A, B, E 등), 어떤 서방 사본에는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논쟁을 하며 물러가더라" 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의 삽입으로 추측됩니다.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온 이태 - 누가는 구원이 이방인 에게 확산됨을 선언하는 것으로 본서를 종결짓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의 바울의 상황을
간단하고도 대략적인 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25-31절).
본절에 의하면 바울은 만 2년동안 로마에 머물렀는데, 본문의 2년은 석방되기 이전 연금된 상태로 있었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16절)
이것은 바울에 대한 재판이 2년 동안이나 열리지 않고 연기되었거나, 판결이 지연(遲延)되었음을 뜻합니다.
유대인 고소자들은 재판의 승산이 없고
더구나 재판 과정에서 구체적인 증거없이 사람을 괴롭히기 위한 고소로 여겨질 때는 그에 대한 응징을 받아야 했던 로마법정의 절차가 두려워 법정 고소 만료일인 18개월이 지나도록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결석(缺席) 재판으로
진행되어 바울이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Ramsay, Bruce).
이 때는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61년 중순부터 63년 까지의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셋집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스도마티' ( * )는 '삯'을 의미하는 '미스도스'(* )에서 온 말로 바울이 머문 집은 무료 교도소가 아니라, '세'(hire)를 내는 집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집세를 어떻게 부담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1)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돈으로 지불했다(Ramsay),
(2) 장을 만드는 일을하며 번 돈으로 지불했다(Bruce),
(3) 빌립보교회에서 헌금을 보내주어 지불할 수 있었다(빌4:18, Knowling) 등의 견해가 있으며 이중 세번째 견해가 가장 타당성을 갖습니다.
영접하고. - 이에 해당하는 혤라어 '아페데케토(* )는 '아포데코마이( * )의 미완료
과거형으로 바울을 찾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고 계속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때 찾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주종을
이루었으리라고 추측됩니다(Wendt).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담대히...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 바울은 자기를 방문 하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여 복음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습니다
(23절 주석 참조).
그리고 로마 당국은 바울의 그러한 선교 행위를 방해 하지않았습니다.
누가는 복음이 로마 당국의 방해을 받지
않고 계속 전파 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Haenchen).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하고 방해했던 반면(21 ;27-36; 23:1-15), 로마에서는 복음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주어진 소명과 주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22:21 ;23 : 11).
당시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복음이 성공적으로 전파되기 시작 했으며, 누가는 본서를 매우 간략하게 끝을 맺고 있지만, 마침내 복음은 로마와 전세계에 퍼져나가게 될 것을 내다보는 원대한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들 사도행전은
미완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누가는 바울의 로마 감옥 생활이나
그 이후의 생애를 언급하지 않고
단지 바울이 2년간에 걸쳐 셋집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과 아무도 복음
증거를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로
본서를 마무리 짓습니다.
따라서 본서는 복음서나 서신서들과
달리 결론을 맺고 있지 않으며
바울의 선교 행적도 미완성의 형태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기록 목적이 사도 바울의 전기를 소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누가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
증거 사역이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까지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함으로 본서의
기록 목적을 완수한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제가 선교갔었던
서바나(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했으며,
네로 황제 때 재차 투옥되어 로마에서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세상의 중심 로마에 입성함으로써
드디어 또 다른 땅 끝이 열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은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성령행전은 종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바울처럼 내 삶의 흔적이 기록에 남을 수도 있고, 잠시 등장했다 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수가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
자애로우신 그분 앞에서
내 이름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으며,
이 땅 나그네 길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날,
천사들을 앞세워 기쁨으로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이 나지만 29장부터는 후대에 믿는
사람들이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믿음의 선조들과 마지막 때를
맞이한 우리들이 성경을
써 내려가고 있다니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제일 부러운
사람들이 복음의 황무지였던
우리나라의 선교를 하러 오신
초기 선교사님들입니다.
그분들이 세운 교회 터 위에서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분들의 상급은 무수히 많은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 26장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또한 세상 마지막 때를 맞아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 예수님의
초림을 예비하였듯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예비하고
평탄하게 하는 우리들에게도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러한 가운데서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종교통합으로
짐승의 표가 될 수 있는 백신으로
사람들을 멸망으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이번 9월 달에 우리나라에서 소위
세계 선교를 위한 복음주의권의 올림픽이라는 제4차 로잔대회가 열립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제3차 대회에 이어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에서는 우연히도
오늘 살펴본 사도행전을 본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잔대회는 WCC WEA처럼
마지막 때 종교통합하는 집단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들도 세상 마지막까지
온세상을 미혹을 하여 사람들을 멸망으로 데려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그러나 우리들은 대환난 전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맡겨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대환난 전에 휴거되는 성도들은
복 됩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하옵시고
때가 되어 거두게 하옵소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모두가
한 몸이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맡겨주신 사명 감당하다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휴거 되어 영원토록
별처럼 빛나는 상급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아뢰지 못한 것도 주님 아시오니
그것까지도 응답하여 주옵소서!
응답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