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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奇參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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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1.18~1908.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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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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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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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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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은 1851년 1월 18일 전남 장성(長城)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4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이 전통적인 유가(儒家) 가문으로서 기정진(奇正鎭) 기 재(奇宰) 기우만(奇宇萬) 기산도(奇山度)와 함께 한말 의병운동에 관계된 인사가 배출된 집안 출신이다. 일찍이 종조숙(從祖叔)인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에게 글을 배웠는데 하루에 수백 글을 읽고 한 번만 읽으면 외고 그 뜻을 해득하였으므로 노사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병서(兵書)를 겸해 공부하였으며, 문장에 능하였고, 필법(筆法)이 독특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2월 장성(長城)에서 삼종질(三從姪)인 기우만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는 스스로 군무(軍務)를 담당하여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백마 장군(白馬將軍)이라고 하였다. 처음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는데 놀랍게 능숙하여, "글이나 읽던 선비가 어느 겨를에 군사의 일을 익혔을까?" 하고 감탄하였다. 장성에서 나주로 행군하였다가 다시 광주로 가서 회합할 때 성재가 300명의 장성의병을 거느리고 회맹소에 도착하니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거사하려 할 즈음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사령관 이겸제(李謙濟)와 관병 5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선유(宣諭)하게 되어 의병 해산을 선언하게 되었다. 성재가 성을 내어 말하기를,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은 것이며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랴. 이 군사가 한 번 파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
하고 돌아와 다시 거의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일진회원의 밀고로 탄로되어 결국 전주 진위대에 체포되었다. 그 날은 딸의 초례 날이었다. 하객들이 모두 동요하였으나 본인은 오히려 태연히 체포당하였다. 전주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평리원(平理院)에 이감되었다. 머리를 깎이기 직전 평리원 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4개월만에 탈옥하였다. 잠시 은신생활을 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가족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은신하였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9월에 영광 수록산(隨錄山) 석수암(石水庵)에서 다시 의병을 모아 훈련시킨 후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여 재기를 꾀하였다. 이 때 편성된 의진의 진용은 다음과 같다.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대장 기삼연(奇參衍) 통령(統領) 김용구(金容球) 선봉(先鋒) 김 준(金準 泰元) 참모(參謀) 김엽중(金燁中) 중군(中軍) 이철형(李哲衡) 김수봉(金樹鳳) 김봉규(金奉奎) 종사(從事) 김익중(金翼中) 후군(後軍) 이남규(李南奎) 서석구(徐錫球) 군량(軍糧) 김태수(金泰洙) 전수용(全垂鏞) 총독(總督) 백효인(白孝仁) 이석용(李錫庸) 감기(監器) 이영화(李永和) 김치곤(金致坤) 좌익(左翼) 김창복(金昌馥) 박영건(朴永健) 우익(右翼) 허경화(許景和) 정원숙(鄭元淑) 포대(砲隊) 김기순(金基淳) 성철수(成喆修) 박도경(朴道京)
이상 17인의 이름으로 격문을 지어 사방에 돌려 대중의 협력을 촉구하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을 몰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격문 끝에 평민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100냥을 주고, 순검 일진회원이 일인 한 사람을 죽이면 죄를 면해 주고 두 사람을 죽이면 상금 100냥을 준다고 첨가하여 포고하였다. 이같이 봉기한 성재는 그 후 무장(茂長) 법성포(法聖浦) 고창(高敞) 장성(長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전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9월 23일 고창 문수암(文殊庵)으로 진군 중 접근해 오는 적을 맞아 교전하여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때 모양(牟陽)의 이민(吏民)들이 의병에게 적극 협력하여 기밀을 알려주었을 뿐 아니라 군기와 군량을 공급해 주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특히 김 준의 공이 컸으며, 아군의 군사 3, 4명이 전사하였다. 다시 많은 적군이 내습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군사들이 흩어지고 무기를 버리고 탈출하였으나 고을 사람들이 무기를 수습해 두었다가 틈을 타서 보내 주고 군사도 점차 모여들어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듯 주민들의 협력을 적지 아니 받았지만 모여드는 군사들의 식량과 닥쳐오는 추위에 대비해야만 했다. 마침 법성포(法聖浦)에 근군(近郡)에서 거둔 많은 세곡(稅穀)이 적재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12월 7일(양력) 백여 명이 먼저 법성포 순사 주재소를 기습 공격하여 소각시킨 후 창곡(倉穀)을 탈취하고 남은 것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장성 무동촌(舞童村)에 이르러 적을 만나 격전을 벌여서 적 5, 6명을 살상했으나, 아군도 흩어졌다. 이 때의 전투양상은 소단위의 유격전이었다. 특히 김 준의 유격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날씨가 점차 추워지자 도망병이 생긴 것이다. 다시 흩어진 군사들에게 연락하여 동짓날에 영광을 공격하려는데 기밀이 누설되었으며, 추위로 병든 군사들이 많아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서우산(犀牛山)속에서 군사를 휴식시킨 후 나주(羅州)의 고막원(古幕院)을 공략하려다가 중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성재는 의진을 이끌고 담양(潭陽) 금성(金城)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험준한 곳이었으므로 이곳에서 설을 지낸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밤에 큰 비가 내려 노숙하는 사졸들의 옷이 젖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있을 때 수비의 허술함을 틈타 적이 불의에 내습 공격하였다. 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완전 포위 당하여 피아간에 사상자가 4, 50명이나 난 격전을 치렀다. 성재는 최후를 각오하고 의관을 정비하고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안개가 내려 깔려 요행히 의진을 이끌고 북문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곳을 탈출한 성재는 순창 복흥산(淳昌 福興山)으로 들어갔다. 부상으로 의병활동의 한계를 느낀 성재는 장졸들에게 각각 집으로 돌아가 설을 쇠고 정월 보름에 다시 모이도록 해산명령을 내렸다. 성재는 구수동(九水洞) 촌가에 잠복하여 설을 쉬면서 정월 초하룻날 아침 설 상을 받을 때 적 수십 명이 들어와 성재를 찾으며 집주인을 해치려 하였다. 성재는 창을 열고 큰 소리로, "내가 여기 있으니 주인을 해치지 말라." 고 하면서 순순히 체포되었다. 포박되어 교차(轎車)로 담양(潭陽)으로 압송되었다. 담양 군수가 거만한 언사로 농을 하자 크게 꾸짖기를,
"너는 선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지금 왜놈의 종노릇을 이렇게 심하게 하느냐."
하였다. 담양에서 다시 광주(光州)로 압송되어 가는데, 길에서 보는 이들이나, 교차를 메고 가는 이들이나 눈물을 흘려 길이 지체되었다. 호송하는 왜병들은 생변(生變)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칼날을 휘두르며 재촉하여, 그날로 광주에 이를 수 있었다. 수감된 성재는 자신의 참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출사하여 이기지 못하고 먼저 죽으니 일찍이 해를 삼킨 꿈은 또한 헛것인가 (出師未捷身先死 呑日曾年夢亦虛)"
이 시를 미루어 보아 그는 자신의 의병활동이 끝내 성공하여 일인들을 한반도 밖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한 확신이 꺾였을 때 그의 비통한 심회를 이상과 같이 담담하게 노래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때 마침 김 준은 창평(昌平)에서 일군 연대장 길전(吉田)를 죽이고 그 잔졸을 추격하다가 성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병 30명을 이끌고 탈환하고자 추격하였으나, 이미 경무서에 수감된 뒤였다. 길전 이하 다수의 일병이 사상한 것에 대한 복수로 일인들은 성재를 무수히 난자하였으며 결국 이튿날인 1908년 1월 2일(음력) 광주시 서천교(西川橋) 밑 백사장에서 적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시신의 형세가 너무 참혹하여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에 광주의 선비 안규용이 관을 갖추어 염하여 시의 서쪽 서탑등(西塔嶝)에 빈(殯)하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니 일인들도 의롭게 여겨서 문책하지 않고 목비(木碑)를 세우고 '호남 의병장 기삼연'이라고 썼다. 성재 사후에는 그의 산하에 있었던 부장들이 독립된 의진을 형성하고 의병장이 되어 호남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서 김 준 전수용 이석용 심남일(沈南一) 김봉규 박도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지휘하에서 전략을 수행하다가 검거되어 형을 받은 인물들로 박도경(朴道京, 慶 ) 김공삼(金公三, 奉奎) 이중백(李仲栢)은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으며, 그밖에 오성현(吳成玄) 박재두(朴在斗) 등은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항일의병장열전(김의환) 198 199 20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96 597 59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11 613 623 626 627 628 630 631 633 634 63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00 301 55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712 713 739 776 777 778 779 780 819 820 8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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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金聿,金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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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27세~1908. 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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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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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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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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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나주에서 형인 김태원(金泰元;金準)과 더불어 거의한 뒤 기삼연(奇參衍)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후 분진(分陣)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같은 시기인 1906년 10월 5일 김 률은 형인 김태원과 함께 나주에서 봉기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기삼연의 문하생으로, 1907년 9월 기삼연을 중심으로 김용구(金容球)·김태원·이석용(李錫庸)·전해산(全海山)·심남일(沈南一)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에 가담하여 주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태원과 함께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0월 29일에는 고창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그곳 사창(社倉)을 점령하여 저장되어 있던 양곡을 압수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1월 3일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평(咸平) 순사주재소를 공격 점령하여 무기와 금품을 노획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월 22일에도 그는 기삼연 의병장과 합동하여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재차 함평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파다야(波多野) 순사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피체되어 순국한 뒤, 그는 김태원과 함께 기삼연 의진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며 광주 일원 곳곳에서 일본군을 유격전술로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는데, 특히 창평(昌平)에서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의 기병대를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3월 30일 그는 광산(光山)군 송정읍(松汀邑)에서 피체되어 4월 25일 전사한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도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73·76·77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1권 647∼650면 ·전남폭도사(전남경무과, 1913) 8·14·15·33∼35·45면 ·죽봉청봉사적(필사본, 작성년도 미상) ·나주군지(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0) 150면 ·나주군인물지(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1) 132면 ·함평군사(함평군사편찬위원회, 1984) 403·404면 ·나주목지(정윤국, 1989) 67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37·61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639∼64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3집 312·343·555·55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693면 ·대한매일신보(1908.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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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金容球,金有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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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11.1~1918.1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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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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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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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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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은 상산(商山)이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의 문인으로서 전라남도 영광 출신이다. 1907년 8월 8일 한문 수학(漢文修學)하던 중에 구한국군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해산되었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성재 기삼연(省齋 奇參衍)과 함께 비밀히 국사를 도모하여 무기를 운반하여 두었다가 일이 누설되어 성공하지 못하고 수련산(秀蓮山)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모든 의사들을 모아 놓고 피를 뿌리며 단에 올라 천지에 맹서하고 호남 창의 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설치하였다. 성재가 대장에 추대되고, 통령(統領)에 김용구가 임명되었다. 그 구성은 대략 다음과 같다.
참 모 김엽중(金燁中) 후 군 이남규(李南奎) 김봉수(金鳳樹) 운 량 김태수(金泰洙) 종 사 김익중(金翼中) 총 독 백효인(白孝仁) 서석구(徐錫球) 감기(監器) 이영화(李英華) 전수용(全垂鏞) 좌 익 김창복(金昌馥) 이석용(李錫庸) 우 익 허경화(許景和) 선 봉 김 준(金 準) 포 대 김기순(金基淳) 중 군 이철형(李哲衡)
이들 중 상당한 수의 인물이 후에 개별 의진을 구성하여 호남 의병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호남 창의 회맹소의 역사적 의의는 적지 않다고 하겠다. 이들은 격서문(檄書文)을 작성하여 각 지방으로 돌려서 의병운동에 동참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전하였다. 격서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임금은 어디 있는가. 28대의 현성(賢聖)이 서로 계승하였으며, 본국이 비록 쇠하였다 하나 3천여 리의 산천이 고쳐지지 않았네. 대신의 직을 맡은 자는 적의 앞잡이 노릇하는 자 아님이 없고, 머리 깎고 얄궂은 말을 하는 놈은 모두 왜놈의 창자를 가진 자들이다. 비록 천벌에는 오랫동안 빠졌으나 어찌 잠깐인들 사람의 베임에서 벗어나랴."
하였다. 8월 11일 동지 박용근(朴溶根)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자 수백 인의 자원병이 그를 따랐다. 그날 밤으로 그들을 무장시켜 가지고 다음날 영광읍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 적병과 접전하였으나 불행히 병기가 좋지 못하여 적에게 패하였다. 그 후 가르침을 받기 위하여 여러 곳으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를 찾아다녔는데, 담양(潭陽)으로 가서 고녹천(高鹿川)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이어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에 가서 탐문한즉 그가 지리산 상봉 토굴사(土窟寺)에 있다 하므로 곧 석벽과 밀림을 헤치고 찾아 뵙고 토적 구국의 방략을 의논하고 행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8월 26일 화개시(花開市)에서 왜적 10여 명을 포살하였고, 이튿날 다시 칠불사(七佛寺)에서 적 수 명을 포살하였다. 9월 6일에는 연곡촌(連谷村)에서 적병 10여 명을 포살하니 나머지 적병은 모두 도망하였다. 9월 16일 문수사(文殊寺)에서 적 10여 명을 사상시켰고, 9월 25일 무장(茂長)읍내에서 적병을 무찌르니 적은 모두 놀라 도망하였다. 9월 26일 고창(高敞) 읍내에서 2차에 걸쳐 적과 접전하여 30여 명을 사살하였다. 11월 3일 법성포(法聖浦)에서 적 10여 명을 살해하고 왜적이 살던 집을 방화하였으나 그들의 재화(財貨)는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11월 5일 장성(長城) 오동촌(梧桐村)에서 적병 20여 명을 포살하였고, 11월 7일 백양사(白羊寺)에서 30여 명의 적을 살해하니 적이 물러갔다. 11월 19일 함평(咸平) 선치(蟬峙)에서 적 10여 명을 살해하였다. 12월 2일 내원리(內院里)에서 적 15, 6명을 포살하였고, 13일 고부 인촌리(仁村里)에서 적병 40명을 사살하니 적이 물러갔다. 15일 죽림리(竹林里)에서 적 15, 6명을 포살하였고, 27일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적 1백 여명을 포살시켰으나, 아군의 사망자 또한 30여 명이나 되었다. 12월 28일 행군하여 순창(淳昌) 복흥면(福興面 社倉里)에 이르러 유진(留陣)하고 성재 기삼연과 서로 동서로 나뉘었다. 성재는 발을 다친 까닭에 걷기가 불편하여 더 이상 종군할 수 없었다. 성재는 김용구에게 후임을 맡기면서
"나는 지금 발을 상해서 종군하지 못하겠으니 군중의 제반 일을 그대가 모두 맡아서 신중히 처리하여 끝을 마치어 국가의 원수를 갚도록 하라."
하고 인(印)과 칼을 맡겼다. 김용구는 군병(軍兵)을 대신 거느리고 행군하여 장성 조양리(朝陽里)로 갔다. 한편 기삼연은 순창 흥복산(興福山) 속에 사는 재종제인 구연(九衍)의 집에서 치료하면서 재기를 꾀하고 있었으나 음력 정월 초하루에 적의 포위를 받아 결국 체포당하여 음력 1월 2일 광주시 서천교(西川橋)에서 적의 흉탄에 해침을 당하고 순국하였다. 그 후 김용구의 의진은 성재의 중군장이었던 김태원·김 율 등과 연합 의진을 구성하기도 하면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1908년에 들어가면서 적의 공격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908년 1월 19일 탑정리(塔丁里)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반나절을 항전하여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2월 19일 고창 읍내에서 세무주사 서상달을 포살하였으며, 이튿날 장성 토정리(土井里)에서 적병 50여 명을 포살시켰다. 2월 24일 장성 송치(松峙)에서 적 10여 명을 사살했고, 3월 2일 영광 오동리(梧桐里)에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나머지 적은 도망하였다. 3월 12일 구수산에서 적의 마병(馬兵) 10여 명 보합(步合) 20여 명을 사살하였다. 3월 23일 영광 홍농면 대덕리에서 적과 접전하여 수명을 사살하였으며, 28일 무장 상리면 마래촌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4월 11일 무장 선운사(禪雲寺)에서 접전하여 적 수십 명을 포살시켰으며, 17일 무장 와공면 유동(儒洞)에서 적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에게 패하였고 김용구는 부상을 당하여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김용구는 군권을 박도경(道京)에게 맡기고 장성 백암산중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3, 4년을 숨어서 치병하는 가운데 병은 좀 나았으나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경술국치를 당하자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후사를 도모할 목적으로 보다 깊은 산중인 금산(錦山)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울분과 노병이 첨극(添劇)한데다가 고종(高宗)이 승하하였다는 변고를 듣고 음독하여 1918년 12월 21일(음력) 절사(節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81·20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14·615·61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611·612·651·685·68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57·741·771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87·8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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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홍(金致洪,金致弘,金東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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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1910. 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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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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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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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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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靈巖) 사람이다. 1908년 10월 심남일(沈南一) 의병진에 가담하여 기군장(起軍將)에 선임되어 약 6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영광(靈光)·능주(綾州) 등지를 무대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09년 1월에는 박민홍(朴民洪) 의병부대의 제1초십장(第一哨什長)에 임명되어 총기 15정을 갖추고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여 나주(羅州)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같은해 4월에는 박사화(朴士化) 부대의 제1초십장에 임명되어 총기 12정으로 무장한 부하 26명을 거느리고 영암 일대에서 역시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9월 영산포(榮山浦) 일제헌병대에 피체되어 1910년 6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강도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며 같은해 7월 23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梅泉野錄(國史編纂委員會) 520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2輯 573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812·813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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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원(姜震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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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7.30~191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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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승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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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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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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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승주(昇州)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불행한 가정환경속에서 자라면서도 일찍부터 서당에 나아가 구학문을 수학하였으며 26살 때에는 자신이 직접 서당을 열어 구국항쟁에 투신할 때까지 후학(後學)양성에 헌신하였다.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退位)되고 이어 군대도 강제 해산됨에 통분하여 각지에서 다투어 의병이 분기하자 이에 호응하여 창의의 기치를 들고자 결심한 뒤 제자를 키우던 생활을 청산하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들었다. 드디어 1908년 같은 고향의 우국지사인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炳學) 및 곡성의 감양화(金良化) 등과 더불어 결의하고 의병의 소모(召募), 무기구입, 적의 움직임에 관하여 밀의(密議)를 거듭하면서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이어 창의계획을 구성하였다. 그해 6월에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승주군의 조계산(曹溪山)으로 나아가 유진(留陣)하면서 훈련하였으며, 7월에는 죽음을 맹세한 동지 33명이 이 의병진에 합세 가담하였다. 그후 보성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규하(趙圭夏)와도 동맹하니 그 휘하의 의병군 40여 명이 다시 합류한 뒤 조규하와 더불어 작전전술을 숙의하였다. 1908년 8월 곡성군 석곡면의 조지촌(鳥枝村)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접전하였는데 불행히도 조규하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후 목사동(木寺洞)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교전(交戰)하였으며, 8월 25일에는 곡성의 통명산(通明山)에다 진을 쳤다. 또한 9월 23일에 적을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전과(戰果)를 거두었고 10월초에는 남해 장도(樟島)에서 전개된 해전(海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어 10월 5일 전남 고흥군 과역면(過驛面) 과역리 시장에서도 일본군과 접전하여 적 수명을 사살하고 무기 등 다수를 노획하였다. 그러나 그 달 9일에 여수 화양면 원포리(遠浦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의병진을 수습한 뒤 승주군 쌍암지역으로 회군(回軍)하게 되었다. 그후에도 부하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지시하면서 자신도 승주 곡성 및 화순 등지에서 산병전(散兵戰)을 펼쳐 관내를 휩쓸면서 적을 교란시켜 격파하니 전라도 일대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이듬해 1909년 1월부터 4월에 걸쳐 승주군 서정(西亭)병참소를 습격하는 등 많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나서 4월에 남원으로 의병진을 이끌고 진격하여 곡성부근 섬진강의 지류인 압록강(鴨綠江)에서 적군 병참소를 습격하였다. 4월말에 곡성의 서순일(徐淳一) 의병부대가 이에 합류하니 총 240명 정도의 병력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어 5월에 석곡(石谷)의 일본군 병참소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월 11일 강진원 의병진이 승주군 서면 당천리(堂川里)의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노숙하던 중 일본군의 앞잡이 김원학(金源學)이 인솔하던 구례군 헌병대의 기습을 받게 되어 참패하고 퇴각하였다. 그런데 1909년 일제의 의병초토화작전으로 인해 많은 의병항쟁이 중과부적으로 쇠퇴됨에 따라 강진원의 의병진도 6월의 패전 이후 활동하지 못하다가 그해 말경에 해산된 듯하다. 즉 강진원은 1909년 8월 중순 남해의 통영 연내도(蓮內島)로 일단 피신하였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두모리 오성산(五聖山) 외딴 동굴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자결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취웅록(강진원 저) 진중일기 강진원의병장략전(민족문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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