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전진 기지이며 박씨 3형제 순교자 등 스물 세분의 순교자 묘석을 모신 곳
공세리(貢稅里) 성당은 40개 고을의 조세를 쌓아 두던 공세곡 창고지가 있던 곳에 세워진 대전교구 두 번째 성당이다.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으며, 박해를 겪는 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선교의 전진 기지이며 박씨 삼 형제 순교자 묘를 모신 곳이다.
충청도 내포 지역에 위치한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1759~1801,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박해를 겪는 동안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이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에 나오는 박의서(1808~1867, 사바스), 박원서(1817~1867, 마르코)와 박익서(1823~1867, 세례명 미상) 삼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이들은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 집안에는 이미 《치명일기》에 기록된 이 세 분의 순교자 말고도 이 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흥갑(박의서 사바스의 아들),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일곱 분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에서 살던 순교자들이 12명이나 더 있다.
공세리는 충청도 일대의 공세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나루였기 때문에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고 또 번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걸매리는 물이 얕아져 공세 나루가 폐쇄되고 아산만에서 삽교천에 이르는 방조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공세리 앞 방조제 공사는 걸매리에서 살다가 순교한 박씨 삼 형제의 증조부인 박만선(朴萬善)이 통진 부사에서 물러난 뒤 시작하여 준공하지 못하고 1782년에 돌아가자, 그의 아들 박종학이 1784년부터 뒤를 이어 계속하여 준공했다. 그리고 유민들을 모아 개간한 논을 나누어 주고 살게 함으로써 모원리, 신성리, 신밀두리, 서강리, 신원리, 걸매리의 여섯 마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주변 40개 고을의 조세를 쌓아 두던 공세곡 창고지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 본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성당은 대전교구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다.
초대 본당 신부이었던 드비즈(Devise, 成一論, 1871~1933, 에밀리오)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현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 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다. 그는 지역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 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하였으며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1890~1952, 요한) 씨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시켰다.
◆ 박물관
공세리 성당 박물관은 도지정 문화재 제144호인 구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봉헌된 것으로, 대전교구 최초의 감실을 비롯한 1,500여점의 유물을 모시고 있다. 박물관의 구성은 한국천주교회의 태동에서부터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교우촌 생활 모습과 신유,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성직자들의 활동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공세리 성당 초대 신부인 에밀 드비즈 신부의 유물과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땅 신부의 유해와 성녀 루이스 마릴락의 유해뿐만 아니라 32위 순교자 유해를 모시고 있다.
[박물관 관람 안내]
화요일~주일 : 오전 10시-오후 4시(매주 월요일 휴관)
단체(20인)관람시 성지 사무실에 미리 예약 바라며, 관람료는 무료
▒ 이명래(李明來) 고약
아산 공세리 성당 사목을 담당했던 드비즈(한국명 성일론) 신부는 자신이 직접 조제하여 그의 한국 이름을 딴 ‘성일론 고약’을 만들어 그 비법을 이명래 요한에게 전수하였다. 이명래 고약은 1906년 충남 아산에서 개업하여 날로 번창하는 여세를 몰아 1946년 서울 중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일찍이 두 아들을 잃은 창업자는 세 딸을 두었다. 6·25 전쟁 때 이명래 씨는 타계하고 이명래 고약은 사위인 한의사 이광진과 고려대 총장과 신민당 총재를 지낸 유진오(1906~1987, 토마스) 박사의 부인인 막내딸 이용재(마르티나) 씨에게 대물림 되었다. 바로 명래 한의원과 명래 제약이다. 3대에서 명래 제약은 경영난으로 2002년 문을 닫았고, 명래 한의원은 사위인 한의사 임재형씨에게 이어졌다. 이용재 여사는 2009년 11월 12일 향년 88세로 별세하였다.
▒ 여기 침묵으로 앉아 (공세리 성당에서) <김영수> ▒
'마음의 입' 열어야
당당히 하늘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산만 보이는 언덕
대지에 차오르는 촛불 보이는 언덕
성당 첨탑이 느티나무 숲을 뚫고
흰 구름에다 비밀 풀고 있습니다
외로운 것들 저마다 눈을 들어
한 점 바람 쯤으로
한 점 파도 쯤으로 흐르다가
이곳 공세리언덕 무덤들에 닿아
결 고운 기도로 서성이고 있습니다
내 오래도록 여기 침묵으로 앉아
가슴 설레며 죽음 기다릴까요
나못잎들 무수히 몸 흔들며
나에게 '마음의 입 열라'
우짖습니다 꾸짖습니다
■ 순교자 < 박씨 3형제의 순교 >
◆ 박의서 사바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없이 깨끗하게 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박의서 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있는 밀양 박씨 집안임을 알 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 박원서 마르코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정리 중인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 제3부>에 의하면 그는 본디 태중 교우로되 마음이 우람하기로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하고, 서털구털 지내므로 그 형님이 항상 걱정하며 살다가 병인년에 3형제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갈 때 말하기를, “내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고 즐거워하며, 장차(將差)더러 “나를 이번에 올려 가거든 갑작스럽게 하지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님께로 가서 살겠다”하며 오히려 그 형님과 아우를 권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순교하였다.
◆ 박익서 (세례명 미상)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 8일 순교하였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이시다.
◆ 신유⋅병인박해 공세리 32위 순교자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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