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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에서 두 번째 맞이하는 아침이 밝았다. 아씨시에서의 시간은 물 흐르듯 지나가는 것 같다. 오늘 첫 순례지인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순례하고 나면 아씨시를 떠나게 된다. 중세 시대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아씨시의 고요하면서도 평화로운 아침 분위기를 이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함이 밀려왔다. 아침 식사 후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회칙을 만들고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조직하고 처음 수도 공동체를 시작하셨던 작은 성당 ‘포르치운쿨라’가 있는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으로 갔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포르치운쿨라'는 '작은 몫'을 뜻하는 말로, 예로부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의 몫으로 떨어진 땅'을 의미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지향대로 가난하고 작은 이들이 모여 사는 집이었던 것이다. 포르치운쿨라를 가기 위해서는 아씨시의 아랫동네로 내려가야 한다. 방어의 목적으로 높고 깨끗하고 안전한 곳에 지은 성안에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살았다. 아래 동네 즉 변두리에는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살아야 하는 비천한 사람들이 살았다. 바로 성안에 살던 부잣집 아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비천한 동네로 내려와서 수도회를 여셨던 것이다.
폭 4m, 높이 7m의 ‘포르치운쿨라’라고 불리는 작은 성당 위에 덧씌워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라고 하는 큰 성당과 수도원을 지었다. 수도원은 성인이 돌아가시기 전에 프란치스코회 운동의 확산 속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미 그곳에 수도원이 지어지게 된다. 교황 성 비오 5세는 프란치스코회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이 작은 성당을 보존하기 위하여 큰 성당을 덧씌워서 짓도록 명령하였고, 이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모든 프란치스칸 성당의 모 성당으로 선포하였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정면 양쪽에는 천사상이 서 있다. 그리고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는 양손을 벌리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전구하는 성모 마리아상이 우뚝 솟아있다. 우리가 찾아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안의 포르치운쿨라는 2025년에 올 희년 준비와 2026년 프란치스코 성인 서거 800주기 기념 준비 공사 중으로 철근 프레임에 쌓여 있어 내부는 물론 외부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대성당 내부는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해서 대성당 안의 중앙에 자리한 작은 성당인 포르치운쿨라가 공사 중임에도 눈에 돋보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의 영성을 따르는 초기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며 힘을 얻었던 포르치운쿨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큰 성당을 지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가 스며있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라 살았던 성인의 흔적이 담겨있는 포르치운쿨라의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내부 중앙 제대 뒤 포르치운쿨라
2013년 사진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옆 복도를 따라가면 대성당과 붙어있는 수도원의 장미정원 입구에 성 프란치스코 상이 있다. 2013년도에 순례를 왔을 때 순백색의 비둘기 한 쌍이 프란치스코 성인 상 손 위에 앉아서 우리를 반겨주었는데, 11년이 지난 지금도 흰 비둘기 두 마리가 여전히 성인상 주위에 앉아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늘 흰 비둘기 한 쌍으로 몇백 년째를 이어오며 성인 상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작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며 함께 주님을 찬미했던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성인의 사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또 성인상 옆에 있는 장미정원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이 심한 육체적 유혹을 이기기 위해 장미 가시덤불에 알몸으로 뒹굴었는데, 이후로 이 정원의 장미에는 가시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의 장미를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다시 가시가 난다고 한다. 사진을 찍으며 자세히 보니 정말 가시가 보이지 않았다. 성인의 거룩한 열정에 하느님께서 감동하여 가시를 없애주신 것 같다.
장미정원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늑대 상
장미정원
장미정원을 지나면 성인이 머물며 기도하고 주무셨던 움막이 있다.
성인이 떠나신 지 800년이 넘었지만 그의 존재는 아직도 이곳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씨시를 찾는 이유는 진정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과 삶을 닮고 싶고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작은 움막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 휴식을 찾을 수 있었다는 건 행복해지는 데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씨시를 뒤로 하고 이탈리아 마르케 주에 있는 로레토로 향했다. 로레토는 현재 인구가 13,000명이 조금 안 되는 아주 작은 도시다. 로레토에는 이스라엘의 나자렛에서 성모님이 태어나시고 사셨던 성가(聖家)가 보존되어 있다.
성모님의 집(성가)이 보존되어 있는 로레토의 성가 대성당
전승에 의하면 십자군이 팔레스티나에서 철수를 하던 1291년에 천사들에 의해 나자렛의 성모님 집(성가)이 통째로 일리리아(현재 크로아티아)로 옮겨졌고, 1294년 12월 10일 현재의 로레토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시행된 나자렛의 성모님 집과 로레토 성가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과 여러 문헌자료들을 통하여 1291년 팔레스타인 지역의 성지를 지키던 십자군이 나자렛에 있었던 성가(聖家)의 벽체 부분을 뜯어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성모님의 집 형태는 바위를 파서 만든 동굴이었고, 벽돌을 동굴에 이어 붙여서 삼 면으로 된 ㄷ자 형태의 테두리처럼 쌓아서 만들었던 벽체를 뜯어온 것이다. 천연동굴은 뜯어올 수 없어서 이스라엘의 나자렛에 그대로 남아있지만 동굴에 붙어있던 석재들은 뜯어올 수 있었다. 십자군이 전쟁에서 비록 이교인들에게 땅은 빼앗겼지만 옮길 수 있는 거는 절대 뺏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다 가져왔던 것이다.
특히 최근에 발견된 1294년 9월에 기록된 한 문서에는 에피로(Epiro:그리스 서북부 지방)의 군주 니체포로 안젤리(Nicefori Angeli)가 자신의 딸을 나폴리 왕국의 왕 넷째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며 보낸 혼수품 내역 속에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 하느님의 모친 집에서 가지고 온 성스러운 돌들”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안젤리(Angeli 천사) 가문이 성모님의 집 벽돌들을 로레토까지 배로 실어 왔다고 한다. 안젤리(Angeli)는 이태리어로 "천사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천사들이 로레토로 옮겨왔다고 하는 전승과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1294년 나폴리 왕국에서는 이 귀한 석재들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장소가 로레토다.
성가 대성당
로레토의 성가 벽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현재 나자렛에 남아있는 성모님의 집 동굴에 벽돌을 "ㄷ"자 형태로 이어 붙였던 이음새와 로레토 성모님의 집 이음새 부분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벽돌을 나자렛에서 가져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로레토 성가에 사용된 석재들은 이탈리아에서는 볼 수 없는 석재이다. 벽돌 형태와 흙의 성분이 2천여 년 전 나자렛 주변 지역 즉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로레토 성가의 벽돌들을 보면 나자렛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60여 개의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또 벽돌과 벽돌 사이에서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붉은색 천들이 발견되었다. 그 당시 성지를 지키고 있던 십자군들이 지녔던 것으로 예수님과 성모님께 기도하면서 십자가 문장을 돌 사이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현재 로레토 성가의 세 벽면은 제대가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제대를 향하고 있는 동쪽 부분이 나자렛 성가의 동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원래의 성가 벽은 뜯어 온대로 기초 없이 지상에서 약 3미터 높이이며 그 위에 추가로 쌓은 벽과 반원형 천장은 16세기에 새로 쌓아 올린 부분이다. 토대 없이 그냥 쌓아 올린 성가벽은 여러 번 지진 속에서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로레토의 성가(성모님의 집)
제대 위의 성모 조각상은 1921년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가 교황 비오 11세의 주문으로 로마 바티칸 정원의 레바논 삼목으로 조각하여 새로 제작되었다. 아기 예수님을 안고 계신 검은색의 성모상은 오랜 세월 동안 촛불의 그을음으로 인한 것으로서 흔히 말하는 블랙 마돈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한다.
성가를 옮겨올 당시 로레토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지역이다. 이 성가를 보존하기 위해서 로레토로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요새의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성가를 성당으로 만들고 15세기 때 성가를 보전하고 기념하기 위해 성가 위에 큰 성가정 성당을 지었다. 대성당 정면을 보면 일반적인 성당의 모습인데, 성당 뒤쪽에서 보면 요새화된 성당이다. 외부에는 웅장한 대성당이 요새처럼 지키고 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작은 성가성당(성모님의 집)을 보게 된다. 작은 성가성당 외관도 르네상스 시기 때 당대 최고의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장식을 했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화려하다.
작은 성가성당(성모님의집) 외관
작은 성가성당(성모님의 집) 외관
성가 대성당 내부. 중앙 제대 뒤 작은 성가성당(성모님의집)이 있다.
성가 대성당 뒤쪽으로 가는 길
성가 대성당 뒤쪽. 요새처럼 성모님의 집을 지키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로레토의 성가를 마리아 성지라고 여기는 성지 중에서 ‘최초의 마리아 성지이고 가장 거룩한 마리아 성지’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는 성모님 성지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장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성가는 성모님께서 태어나서 사셨던 집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던 장소이며, 성령이 임하시며 성자가 잉태되신 거룩한 장소다. 또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어머니 마리아와 양부이신 성 요셉과 함께 생활하시며 성가정의 모범을 보여 주셨던 지상에서의 예수님 집이다. 성가에는 순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었다.
성모님의 집을 순례한 5월 13일 여섯째 날이 마침 1917년 5월 13일 파티마에서 성모님이 첫 번째 발현하신 날이다. 여행사에서 일부러 이날에 맞춰 로레토 성가를 일정에 계획한 게 아니었다. 파티마의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를 기억하는 날인데, 우리가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성모 신심의 중심이 되는 로레토 성가를 순례한다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여행사 팀장의 말에 공감이 되었다. 성모님께서 파티마의 세 어린이에게 발현하셔서 세계평화를 위해 나와 함께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자고 하셨다. 나도 성모님의 집에서 묵주기도 환희의 신비 1단을 봉헌했다.
점심식사 하러 가는 수도원 식당 엘리베이터 안의 33명의 순례단. 내 핸드폰이 맨 앞에서
성모님의 집 순례를 마치고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이 모셔져 있는 마노펠로의 카푸친 수도원으로 갔다. 마노펠로의 성면(거룩한 얼굴)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베로니카라는 성녀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렸는데 그 얼굴이 천에 찍혔다고 한다. 토리노의 성의와 함께 그리스도교에 가장 값진 유물이 바로 마노펠로의 성면이다. 400여 년 전부터 카푸친 수도회 성당에 보관되고 있다.
마노펠로의 성면(예수님의 거룩한 얼굴)
전승에 의하면, 이 베일은 예수님의 제자로 바리사이 가운데 최고 의회 의원인 니코데모가 성모님께 선물한 것이고, 정통 유대 장례식 관례에 따라 성모님이 당신 아들 얼굴에 이 천을 덮었다고 한다. 574년에 이 베일은 콘스탄티노플로 이동되어 전쟁에서 군인들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기 위한 깃발로 이용되었다. 8세기 초기에 우상 파괴자들이 모든 종교적 이미지를 부수기 시작하자 비밀리에 교황에게 보내어 로마 성베드로대성당 베로니카 경당에 보관됐다. 1527년 스페인군으로부터 도난당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1638년 어느 날 한 공증인이 베로니카 수건을 가지고 마노펠로 수도원을 찾아와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기증을 해서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
마노펠로의 카푸친 수도회 성당 내부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이 그려진 천은 족사(조개에서 얻어지는 섬유)로 방수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염분을 함유하고 있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천은 너무나 투명하여 반대편에 책을 두면 글자를 완벽하게 볼 수 있을 만큼 투명하다. 그 천에 예수님의 얼굴 형상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고 앞뒤 얼굴 모습이 완벽하게 동일하다. 이는 현대의 기술로도 그리지 못한다고 한다.
최첨단 장비로 조사한 결과, 천은 1세기 때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와 동일하며 사람이 손으로 그린 흔적이 전혀 없다. 하지만 더 과학적으로 조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천을 보관되어 있는 유리관에서 꺼내면 그림이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에 넣으면 그림이 다시 생기는 기적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고 한다.
요한복음에 보면 두 개의 천이 거론된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요한 20, 6~7)
여기에 요한은 몸 전체를 감쌌던 큰 아마포와 얼굴을 감쌌던 작은 천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 있다. 토리노의 성의는 거의 세계적으로 성서에 나온 큰 아마포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작은 천은 두 개가 서로 예수님의 얼굴을 덮었던 천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스페인의 오비에도(Oviedo)의 주교좌 성당에 보관되어 온 성물로써 예수님의 얼굴을 감쌌던 수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 수건에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없고 피 얼룩이 많이 묻어 있을 뿐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 허파에서 역류하는 피를 막기 위하여 예수님의 입을 막은 천으로 여겨진다. 이 수건에서 채취한 피와 토리노 성 수의에서 채취한 피는 같은 AB형이다. 다른 하나는 굉장히 얇고 손상되기 쉬운 베일에 예수님의 얼굴이 찍힌 바로 마노펠로의 성면이다. 그런데 위 세 개의 천을 하나가 되게 겹쳐놓으면 얼굴과 상처의 흔적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마노펠로의 성면(중앙) 토리노의 성 수의 얼굴(우) 오비에도의 성수건(좌)
위 세 개의 얼굴을 하나가 되게 겹쳤을 때의 모습(완벽하게 일치)
직접 본 마노펠로의 예수님 얼굴은 그동안 사진이나 그림으로 보고 생각해왔던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얼굴은 멍들고 피 흘린 상처로 부어있으며, 동공은 불완전하게 열려있고, 입은 약간 벌린 채로 너무나 초췌한 모습이다. 인류의 죄로 인해 살이 찢어지는 수천 번의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며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의 얼굴에서 평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났다. 예수님의 두 눈에는 원망과 분노가 전혀 없이 연민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예수님 얼굴을 본 후 카푸친수도원 성전 경당에서 감사의 미사를 봉헌했다.
주임 신부님 강론
예수님의 얼굴이 나를 따라다니며 바라보고 계셨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순간 평범하고 내세울 것 없고 내세우고 싶지 않은 예수님의 삶 전체를 얼굴에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엇을 이렇게 해야 되는 삶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의 말씀과 뜻 안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한 삶을 보여주는 듯한 얼굴이셨다.
무언가 욕심 때문에 바둥대는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저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그저 평범하게 주어지는 것들이 아버지의 뜻이면 되고, 아버지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다가가면 되는데, 그 안에 머물기보다는 나의 생각과 원의에 자꾸 끌려다니고 하느님마저도 내 뜻을 강요하는 저의 모습을 부끄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만 찾고, 언제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삶으로 우리의 남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했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늘 바라봐 주시고 격려와 위로를 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기에 오늘 우리의 결심이 하느님께 받들어 봉헌되는 우리의 서약이고 약속일 것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약속이 우리의 삶을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은총의 삶에 우리가 함께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감사하는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를 이 거룩한 삶으로 초대해 주시고 우리 마음에 감격의 축복을 쏟아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이렇게 여섯째 날 순례를 마치고 내일 순례 예정인 ‘성체와 성혈 기념 성당’이 있는 란치아노로 이동을 해서 휴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