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여름, 부산 백병원
부모님 소생 2남 4녀의 맏이인 큰오빠가 큰 수술을 받았다.
명절이라야 한자리에 모이는 형제들이 병원에서 (재미있게)자주 만났다. 수술은 성공해서 여지껏도 무탈한데다, 워낙에 재미있는 양반이었는지라 길다랬던 입원 기간동안도 들려오는 얘기들하며…,
한 번은 네 자매가 다 모였다.
진지지키듯 병실을 사수하던 올케언니는 좀 쉬라고 보내고, 작은 오빠의 자리가 비었긴해도 침대의 오빠 주위로 네 자매가 올망졸망 앉아서 통조림 까먹고, 빵이랑 과자에다 뽀시락 거리면서, 몇 번이나 들었던 오빠의 수술날 풍경을 재탕 삼탕을 했어도 더웠던 그 여름날은 참 따뜻했다.
특히 그날은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과 에반더 홀리 필드의 타이틀 매치 덕분에 더 재미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서는 여동생들에게 경기보다 더 실감나게 녹화중계를 해대는 오빠바람에 어찌나 웃어 대었든지…
좀 있으니 오빠랑 동갑인 외사촌 오빠가 와서 또 왁자지껄, 지금 생각하면 다른 환자들께 폐가 되지 않았을까 하면서도 그 때는 다들 그랬지 않았나싶다. 그러고 있자니 올케언니가 와서 우리는 또 오겠다하고 병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는 인상이 좀 험악한 환자들 보며 우리 네 자매가 속닥거렸다.
‘조직에서 나왔나보다’
‘조직의 쓴맛을 봤나보다’
‘아니야, 혹시 조직의 뜨거운 맛…?’
혹시 그 양반이 진짜 조직에서 나왔다면 재미가 적었을텐데.
그 날 사촌오빠가 사 주셨던 가야밀면을 생각하니 입안에 침이 괸다.
2002년 봄, 부산 침례병원
부산에서는 대학병원보다 더 역사가 있던, 동구 수정동에 있던 그 병원이 우리 동네로 이사왔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리도 자주 갈 줄이야 몰랐다. 조그만 시골 교회였고 이름만 대면 사통팔달 다 연결되던 동네였는지라 매주마다 병원갈 일이 있었던게다. 교회 마치고 찬양연습까지 마치고는 직행하는 병문안이었는데 그 동안은 잘 피하고 다녔음에도 그 때는 뭔 맘인지 묻어서 다녔다.
누군가? 하고 들어보면 사돈의 팔촌이라. 정작 지금은 이사가고 없는, 몇 년전에 주일학교 출석했던 아무개의 옆집 사람, 누구누구의 이모 등등, 정작 나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음에도 같이 끼어서 병원다니는 재미가 없지 않았다. 아니, 꼭 재미라기 보다는 사람사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다들 제각각 손에 하나씩 들고가서는 침대를 사이로 죽 둘러서서 어떠시냐는 등, 인사끝나면 그 앞의 방문객이 들고왔던 쌕쌕이랑 주스랑 까서 마시고, 비슷한 사연꺼내서 잠깐은 숙연했다가는 또 사람사는 이야기하다가 또 다음에 뵙겠다는 등하고는 나왔던 그 모습들이 참....
꼭 소풍같았던 병문안이 끝나면 길고긴 하루가 지났고 해산이지만, 우리 집이 가까웠던터라 친하게 지냈던 두어가정과는 집까지 연결되고 자연 저녁시간이니 밥먹으며 또 시끌벅적. 그러노라면 다음주에는 다른 집에서 또.
첨에 이민와서 고향생각을 하노라면 (잠간이었던 그해 봄)그 병원의 풍경이 자주 생각났다.
병원이란 데가 사람 기죽이고 외롭기가 한량없는 곳이니만치 환자들이나 가족들에게는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사돈의 원수라도 반갑지 않았을까 한다.
2012년 겨울, 크라이스트처치 호스피털
메리가 얼굴이 빨개져 갖고, 남편 트레버가 심장 수술을 받느라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를 할 때는 잠간은 말문이 막혔다. 몇초가 흐르고 '이러면 안되는데...'하면서도 나도 따라 눈주위가 붉어지는 걸 느꼈다. 60대 중반의, 네 따님이 제각각 둥지를 찾아 떠나간 초로의 부부에게 닥치는 어려움이란게 맘이 짜안하니.
놀랐겠다, 병원에는 같이 있어야 하느냐, 집에 같이 있어줄 사람이 있으냐, 무엇이건 부탁할 거 있으면 해라….
병원에는 굳이 같이 있지 않아도 된다, 애들이 오기로 했다. 고맙다…. 이런 얘기들을 두런두런 주고 받았지만, 매사가 부부 중심인 이 동네에서 배우자가 겪는 어려움은 온전히 다른 배우자의 몫인지라 내내 맘이 아팠다. 게다가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것이 맘을 짓눌렀다. (시원찮은 영어로 환자랑 뭘 하노 하는 맘에…)
꼭 숙제하는 기분으로,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안나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병원엘 갔다.
정작 환자는 음악듣고, 환자복이 아닌 평상복으로 편안히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처음에야 놀랐을테고 수술이 기다리고 있으니 맘이 영 편하지는 않았을테지만, 자신에게 네 사람이나 전담되어 있어 휴가를 보내는 기분이란다. 옆에 놔두었던 차트보면서 자신의 상태를 일일히 설명도 다 해주고…. 이제 의사 다 됐다고 농담도 했지만 당최 무엇도 할 게 없어서 참 난감했다.
영어 잘하는 사람에게 이야기는 전담시켜 놔도 하도 막막해서 이렇게 속닥거렸다.
"뭐, 간즈메(깡통을 뜻하는 일본말?)도 하나 안까묵고 이렇게 서 있어야 되는 건가"
침대를 빙 둘러서서 띠엄띠엄 이야기 하다가, 입다물고 있을 때는 아주 좀이 쑤셨다. 겨우겨우 시간은 보내고는 병원을 나서자니 무엔가 그리도 허전한지. 병실을 나설 때는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와서 (머리털 뽑아서 제 구멍에 넣을 고지식한 트레버가)일일히 허그도 하고 고맙다고 반갑다고 인사를 다 받자니 미안할 지경이었다.
“도대체가 병원에 와서 요강이라도 한 번 비워줘야지, 이러고 그냥 가는거야?”
다들 웃었지만 못내 아쉬워 구시렁거렸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아파도 안될 것 같애, 허긴 그게 맘대로 되나’ 해가며.
한국서는 병원에서도, 병원 갔다가는 길에서도 뭐건 먹은 기억덕분에 입이 근질거렸다. 시간도 저녁이고 날도 일찍 저물어 긴긴 밤이 기다리는데, 일행중에는 뭐 좀 먹자고 해야할 분이 암말 안하시니 그대로 해산해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꼭 헛발질한듯 했다.
아, 아, 정말 촐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