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정 닮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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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다섯 딸. |
1948년 크리스마스 이브, 어머니 오 아녜스가 선종했다. 사별한 전처 소생인 두 형을 소리 없이 키워낸 분이었다. 해바라기인 양 평생 나만 바라보며 살았다. 늘 환하게 웃으며 시시콜콜한 일들을 맛깔나게 들려주었다.
일본에서 귀국해 중국으로 간다고 하자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마침내 할머니가 됐다며 아이들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뻐했다.
우리 집안에서 제일 먼저 가톨릭에 귀의했다. 성당 지을 땅을 기증하고, 그 아래에 살 집을 짓자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미사 드리러 갈 때마다 습관처럼 말하곤 했다.
“이 오솔길이 마치 천당 가는 길 같구나.”
그런 어머니가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과 평화를 맛보고 세상을 떴다. 그처럼 다행스런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장례를 치르자마자 그동안 가슴에 품었던 일을 실행하기로 했다. 언제부턴가 장성을 떠나고 싶었다. 대동아전쟁 (태평양전쟁)때 꿈의 터전을 빼앗긴 아픔을 잊고 싶었다.
그때 일제의 주구 노릇했던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또한 내가 땅을 나눠준 농민들의 칭송도 부담스러웠다.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미련 없이 떠나자.’
이왕이면 선조들의 고향으로 가고 싶었다. 마침 두 달 전에 결혼한 맏딸 우영이가 대구에 신접살이를 차리고 있었다. 사위 이철환은 경북 칠곡 신나무골 교우촌 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였다.
결혼선물로 안팎에서 땀 흘려 일하라는 뜻으로 괭이와 빗자루를 줬다. 몹시 실망스럽고 서운했을 것이다. 하긴 둘째 딸 정영이가 시집 갈 때는 사위 김길수에게 덕담을 담은 <제우귀(題于歸)>라는 글만 주지 않았던가. 맏사위를 불러 일렀다.
“다 처분하고 이 돈만 남았네. 대구에 집 한 채 사놓게.”
280만 환을 건넸다. 대부분의 땅은 소작농들에게 나눠주고, 자투리땅은 광주교구에 봉헌한 뒤였다. 1949년 8월에 우리 식구는 그렇게 대구시 남산동으로 이사했다.
대지 80평에 건평 40평의 아담한 한옥이었다. 나와 아내, 그리고 2남 5녀의 자식들이 살기엔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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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아들 효신과 둘째 아들 충신. |
1926년 겨울에 혼인한 아내 이두필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선생의 후손이었다. 경북 영일군 신광면의 만석꾼 집안 막내딸이었다.
고생이라는 말조차 모르던 여인이 나를 만나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과 중국 유학에 이은 홍군 입대로 소식마저 끊기기도 했으니 얼마나 속이 탔을까.
그러다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생면부지의 대구로 이사하자고 했으니 오죽이나 당황스러웠을까.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넘어서자 뒤주의 양식이 떨어지는 지독한 가난을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내 뜻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나와 마찬가지로 대식구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지 걱정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루카 12,28-29).
우리 부부는 늘 단둘이 차를 마시며 사랑을 나눴다. 자스민차나 홍차의 달착지근한 향과 함께 속마음을 나눴다. 오랫동안 집안을 버리고 떠돈 것에 대한 참회의 시간인 셈이었다.
당면한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는 시간이기도 했다. 비록 단칸 사랑방이었지만, 고대광실 부럽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셋째 딸에게 그런 은밀한 시간을 들키고 말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던 모범생 화영이가 몰래 극장에 갔다가 정학을 맞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꾸지람 대신 우리 부부의 다과 자리에 끼워주었다.
화영이가 그날 마신 차의 맛과 향을 못내 잊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실 나는 아이들을 편애했다. 두 아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다섯 딸들에게는 자애로웠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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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딸과 둘째 사위. |
“아들은 나라의 자식이고, 딸은 내 자식이다.”
아들은 크고 강하게 커서 나라의 동량이 되길 바랐다. 반면 딸은 곱고 어여쁘게 자라서 현모양처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던 하느님 자녀의 참모습이었다.
장성에서 살던 어느 날이었다. 맏아들 효신이와 작은아들 충신이가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나는 둘을 마당 옆에 있는 커다란 곡간에 들어가게 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아이들에게 서릿발 같이 말했다.
“잘못을 뼛속 깊이 뉘우치기 전에는 나올 생각도 하지 마라.”
나는 큰 자물쇠로 곡간 문을 걸어 잠갔다. 눈이 휘둥그레진 일꾼들에게 큰소리로 명령했다.
“절대로 먹을 걸 넣어주지 마라. 내 말을 어기는 사람은 같은 꼴이 될 게야!”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감히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꾼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한없이 자비롭던 평소의 내 모습이 아니었다.
그날 밤늦게 곡간 문을 열어주었지만, 끝내 저녁은 주지 않았다. 형제의 우애와 사내의 책임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내가 마냥 모진 아버지는 아니었다. 일제 말 효신이가 열서너 살 나던 무렵이었다. 세상을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해 일본에 잠시 보내기로 했다.
이불과 작은 책상을 한데 묶어 어깨에 걸어 메게 했다. 봇짐에 일본도도 꽂아줬다. 나는 짐짓 태연한 체하며 일렀다.
“이제 너 홀로 설 나이가 됐다. 칼도 지니고 있으니 자신감을 가져라. 도쿄에 도착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마라. 전보치는 거 잊지 말고.”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효신이가 큰 짐을 지고 집을 나섰다. 아내는 뒤돌아보는 아들을 향해 연신 손을 흔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일꾼들과 동네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효신이의 뒤를 밟았다. 시모노세끼로 향하는 배도 따라 탔다. 물론 효신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항구에 도착해 전보취급소를 찾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먼발치에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효신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내게 다가왔다. 마침내 나를 발견하곤 놀라며 울먹였다.
“아버지? 아, 아버지…….”
효신이는 여린 팔뚝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나는 그제야 달팽이집만한 짐을 벗겨 내 어깨에 짊어졌다. 땀에 흠뻑 젖은 짐이 꽤나 무거웠다.
아들의 온기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괜스레 콧등이 찡해져 먼 하늘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도착한 도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화창하고 아름다웠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 아이들은 내 의중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스무 살 난 효신이가 학도지원병으로 입대하겠다고 했다.
이듬해에는 열일곱 살 먹은 충신이도 해군에 입대하겠다고 했다. 아이들을 크고 강하게 키운 보람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아휴! 어쩜 자식들에게 저리 혹독하게 하는지 몰라.”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쟁터에 자식을 보내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자식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숨기는 부모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럴 마음만 먹었다면 당시 미군정에서 통역하고 있던 내게는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사사로운 짓은 하느님의 정의가 아니었다. 나라가 없다면 자유와 평화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들의 등을 억지로 떠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국심으로 기꺼이 나섰던 아이들이 대견했다. 전선으로 가는 날,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였다. 목이 멨다. 어금니를 악물었다. 수저를 내려놓을 무렵에서야 비장하게 당부했다.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꼭!”
두 차례에 걸쳐 두 아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때마다 온몸에 전류가 흘렀다. 부모 자식의 끈끈한 정이 그런가 싶었다.
다행히 두 아들은 전선에서 무사히 돌아왔다. 혼란기를 지나며 아내와 일곱 자식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게 기적이었다. 아니,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주님께서 주신 생명, 주님께서 거두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