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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때 한양은 북경이였다..
충격적인 역사의 사실을 접하기 전에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글들
India 타고르 시인의 동방의 등불 이라는 시입니다.
동방의 등불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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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따라 강남간다 라는 속담속에 숨어 있는 우리의 역사는
장안의 화제라는 속담속에 숨어 있는 우리의 역사는
타고르가 왜 동방에 작은 나라 보잘것 없는 우리나라를 두고 왜 이토록
사랑의 노래를 했을까요? 그 실마리가 밑에 내용에 숨겨져 있습니다.
자 그럼 이제 부터 놀라운 우리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 봅시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지식은 잠시 벗어 두고 열린 맘으로 여행을 떠나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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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정통역사를 밝히며...
중국은 한민족의 역사를 통채로 도둑질하였으며 일본은 일제시대 사서 20만권을 불태
우며 한국으로 하여금 우리의 역사를 모르게 하고 왜곡시켰으며
구한말 중국과 일본에 의하여 만주와 요동에 있는 대규모 한민족을 이주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한반도에서 삼국이 일어나고 조선시대까지 피지배와 조공을
하는 역사가 아니며 황제국으로 황제를 모시면서 사는 천자국이였다.
기원 이후 동아시아에서 펼처지는 웅온한 고려와 조선의 대륙지배시대가 펼처진 것이며
임진왜란(일본-남지나)과 병자호란(중앙아시아)에 의해 동쪽 조선으로 쫓기면서 만주국
(한반도와 북부만주)으로 전이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울은 한번도 한양으로 불리운 것이 없고 후대에 역사가 왜곡
되어 부르고 있다.
서울은 한성도호부이며 동쪽에 존재하는 지방사령부이자 직할시 개념의 분할통치 행정
조직인 것이며 임진왜란 이후에 한성도호부에 한양이 된 것이다.
즉 고려시대 개성은 사천성이며 조선시대 한양은 북경이다.
조선역사실록에 나온 8도의 자세한 역사는 중국전체를 다스린 지명에 불과하다.
(후일 중국에 공산당이 건립되면서 문화운동으로 모든 본토조선의 잔재를 없앤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역사실록은 전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고려를 세운 태조의 묘가 한반도에는 없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수도가 황해도 개성이 아니라 중국의 사천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는 사천성 일대가 고려의 중심이며 중국 전체의 나라를 다스린
것이다.
현 지나족은 변방에 머물면서 화적때의 족속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중국사람을 때놈이라는 것은 때(무리)로 몰려다니면서 약탈을 했기 때문이다.
원 중국은 바로 중앙에 있는 천제가 있는 나라인 것이다.
대대로 서역에 있었으며 타림분지에 있었다.
주변 유목족에 의해 침탈되면서 중국 본토에 들어오기도했으며 다시 강성했을 시는 서역
으로 다시 옮기기도 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전 모든 역사지명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 팔고에서 찾아야 한다.
후일 일제에 의해 한반도 내에 중국지명이 그대로 옮겨지게 되었고 중국은 지명이 바뀌
었다.
일 예로 장계석이 독립군에게 비아냥 거리면서 하는 말이 있다.
중국 전체가 당신들 역사무대인데 역사도 모르고 독립운동을 한다고 비아냥 거렸다.
고대가 아닌 최근 조선중기까지 중국 전체가 고려-조선제국이며 이후 여러갈래로
갈라지고 직할통치 영역이 축소되어 한반도로 넘어오는 중간과정이 간도의 역사이다.
이 이후 완전히 축소되어 한반도에 왕의 수도가 정착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중국측 당나라의 왜곡된 지도이나 실제 한민족 영역임)
한국에 있는 지명을 본다면 중국에도 그 흔적이 있다.
한국 호남은 호남성이며 둘다 곡창지대이다.
호남에 군산이 있다면 중국에도 호남섬에 군산이 있다.
호남위에 충청도 공주가 있다면 중국에도 공주가 있다.
경기도 하남이 있다면 산동성에 황하강이 흐르는 하남이 있다.
한강은 원해 황하강을 부르는 말이며 한양은 황하강의 수도이다.
후일에 한국에 있는 한성도호부를 한양으로 부르고 현 한강을 한강으로 부른 것이다.
지금도 서울홈페이지에는 한성부로 표현하고 있으며 한성의 도호부 시장역대기가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착각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환구.원단.천원단의 큰 규묘의 종각을 세우면서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원단은 불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북경에 있는 천원단이며 삼성조를 모시고 있다.
청나라 시대에 모시지 못하게 한 것은 그 당시 청은 몽고족으로 중국 본토에 있는 것이
아닌 중앙아시아 타림분지를 위시한 위쪽 전체 땅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선정벌을 하기 위해 동시에 동원하면 국경이 흑해일대에 이르기 때문이다.
나선은 러시아를 말하며 그 당시는 동유럽 북부에 있다.
즉 북쪽나라와 남쪽나라가 합치면 동아시아 전체 나라가 되며 이웃 국경이 러시아에
접하기 때문이다.
위는 왜곡된 당나라 당시 지도가 있다.
그 당시 안서도호부-안동도호부-안남도호부가 있으며 안남은 배트남을 안남이라고 하며
안서는 아랄해 일대 사마르 칸트지방에 존재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안시성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안시가 아니라 안서지방인
서안평(아랄해)을 지키려는 싸움인 것이다.
즉 유럽서부에 위치한 말갈족과 그 후손인 로마잔병과 스키타이의 국가간에 벌인 전쟁인
것이다.
그 당시 흑해일대에서 벌어진 것이다.
한반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안동사람이며 옛부터 안동사람이 고집이 세고 유교적
전통이 가장 강하여 힌옷을 입고 있다고 하는 것은 이를 말함이지 영남지방이 아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대동여지도라고 하는 것은 동려인 동쪽의 고려지방인 것이며
한성도호부가 있는 안동지방인 것이다.
안동을 지키는 성이 한성도호부인 것이다.
고려시대 묘청의 난으로 서경으로 천도하였다고 하는 것은 묘청이라는 사람은 청나라
사람으로 몽고족이다.
그래서 중국 서북부 서경은 서안지방이나 돈황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는 것이지 황해도로옮기는 것이 아니다.
즉 북경에서 서경(장안-돈황-낙양)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민요에 낙양성 십리하에라는 구절이나 장안의 화재라는 말이 나온다.
고려에 삼경이 있는데 남경(서울)- 중경(개성)-서경(평양)이 아니다.
후대에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역사지도에는 그런 지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 남경대학살이 있는 지역이 남경이며 북경은 베이징이며 서경은 낙양과 장안인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의 지도
영문지도이다.
그 당시 대조선제국의 영토를 표시하고 있다.<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전교회장(후간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 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 년 일본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었다.
즉 kbs프로인 불멸의 이순신에서 소서행장의 군대가 있는데 십자가 표시를 하고 있던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바로 그 당시 그 군대를 따라다니는 신부다.
그가 본 목격담을 보면 명과 조선의 경계가 나온다.<강하류의 넓이가 10레구아(1레구아
1.6킬로-->16km)나 되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와 명이 나뉘어져있다>
라고 언급한다.
바로 황하강을 말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江南은 황제가 계신 나라라고 나온다.
그 당시 강남이 서울 강남구 역삼동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지리적으로 황하이북을 치기 위해서는 조선을 건너지 않고 갈수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명이 중국 본토라면 일본에서 바로 중국으로 갈수 있는 구조이다.
왜냐하면 고대에도 해상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충분한 바닷길이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보고 들은 목격담이다.
우리의 생각에 충격을 주는 대목이다.
그 외에 더 황당한 것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중앙에 엄청남 큰 사막이 있는데 몇날
몇일을 가도 끝이 없다고 나온다.
한반도에 이런 지역이 존재하던가.! 있다면 강옆에 200~300미터가 존재한 백사장
정도다.
압록강을 건너지 전에 엄청남 고원이 있다고 나온다,그리고 그 넘어 압록강이라고
나오는데 우리는 개마고원이라고 알고 있으나 파미르고원이며 압록강은 아랄해 일대
아무다리아 강이 되는 것이다.
이 강을 넘으면 아슬람 문명권인이 나오며 더 진행하면 흑해와 이 지역이 살수강,
대동강,청천강이 있다.
즉 드네프르-돈강-볼가강이 각각 해당되며 그 일대에서 러시아 수군과 싸운 것이
고구려 수당전쟁의 본질이다.
중국 본토에서 만주를 치려면 반드시 수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가 없게 된다.
육지로 가면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서쪽으로 차지한 영역이 부산을 지나 염수로 표현한다.(어떤 이는
부산을 현 경상도로 알고 그 지방에 부여가 있다고 오역하기도 한다)
염수는 바로 사해일대를 말한다.
이잔국은 서아시아 바다 일대를 거주한 아라바이 반도사람이며 왜국은 동아시아 일대를
거주한 인도차이나반도를 말한 것이다.
이나 왜나 아시아 바닷가사람이나 섬사람을 말하는 통칭인 것이다.
전체 중심이 인도인데 옛날에 일본으로 부른 것이고 지금 일본과 전혀 다른 명칭이다.
천축이라 하고 일본이라고 한 것이다.
두서없이 글을 쓰다보니 시공을 뛰어넘어 중구난방이 되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선조대왕이 피신을 가는 것을 역사에는 <서행피난>이라 한다.
왜구를 피해서 한양(서울)을 버리고 서행길에 올라 중경(개성)을 거쳐 더욱 서쪽으로
평양으로 가서 의주에 멈추었다라고 나온다.
만일 한양이 서울이라면 서쪽으로 인천을 넘어서 바닷가를 걸어갔다고 해야한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야 정상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가 왜곡된 것이다.
즉 한양(북경)에서 서행하여 중경(사천)에 도달하고 다시 중국 서북부 끝에 의주로
피난 간 것이다.
의주는 신의주 넘어의 지명도 있지만 중국 서북부도 있다.
의주는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 동북이다.
즉 그 지방 의주를 옮겨서 사용했기 때문에 새로운 의주가 신의주가 되는 것이다.
의주에는 의주강이 흐른다고 되었는데 의주가 압록강이라고 하는 지도는 단 한장도
없다.
그래서 선조가 서행했다는 것이다.
만일 한양이 서울이라면 북행이라고 기록되어야 옳다.
일본이 명을 친다는 명분과 선조의 피난을 조합해 보면 결론이 나오며 그 당시 외국
신부의 목격담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도 한성이 한양으로 불린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북경은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에 조선도 다시 그 장소에 도읍을 세운 것이다.
계백장군이 싸운 백강구 전투와 황산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백마강이라는 금강으로 오해하지만 역사 기록에는 백강으로 표현하였고 황산으로
표현하였다.
중국 지도에 보면 황하강 백강이 나오며 황산이 나온다.
현 후대에 나오는 묘나 사당은 후대에 한반도에 후손이 만들었다.
청국 만동묘가 총청도에 있다고 청국 황제가 묻힌 곳이라 할까? 아니다.
후일 안동사람(한반도)이 한반도 충청도에 묘를 세운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풍습을 보면 호남지방에 메뚜기 피해가 커서 걱정을 하는 왕의
회상이 많이 나온다.
지금도 중국 호남성은 메뚜기 피해가 있다.
우리나라에 메뚜기 피해가 있다는 호남지방의 소식을 보지 못했다.
조선실록에 나오는 메뚜기 피해는 한반도 호남인가.. 중국호남성인가!!!
상식으로 판단하면 된다.
중국지명에 서경-남경-중경이 나온다.
남경의 북쪽에 서경을 세운 법이 없다.
마지막으로 조선은 7명의 조를 쓴 왕이 있다.
나라를 세로 개창하거나 세운 왕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기에 한반도 수도를 이전하거나 나라를 세운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많다.
종은 조의 왕을 이은 것이며 군은 정통이 아닌 왕을 말한다.
1대 태조(太祖, 1392∼1398),
7대 세조(世祖, 1455∼1468),
14대 선조(宣祖, 1567∼1608),
16대 인조(仁祖, 1624∼1649),
21대 영조(英祖, 1724∼1776),
22대 정조(正祖, 1776∼1800),
23대 순조(純祖, 1800∼1834),
특히 선조는 나라를 왜에 빼앗긴 왕인데 조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보면 조선은 서양 선교사의 지적대로 여러 국가레 나누어진
연방제 국가인 것이다.
크게 7번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즉 만주국.타타르국.동시안국.만주국으로 분할통치를 했던 것이 조선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심을 북경과 타림분지로 오가면서 북방족과 남방족이 혈투를 한 것이며 조선시대
까지 한번도 내준 적이 없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안동지방으로 권력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즉 당파싸움에서 동인지역이며 이는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남한과 북한
영역이 되는 것이다.
즉 한성(Seoul)은 안동세력의 구심점이며 후대에 조선은 약해져 안동사람이 권력을 잡아서 후일 한성부가 수도로 되었기 때문에 선조이후 정조과 순조가 새로운 조종이 된 것이다.
즉 한반도는 안동사람이며 가장 유교적 전통이 강하다.
다만 남인(남한)과 북인(북한)으로 갈라진 것이다.
오죽했으면 조선말 중앙아시아 청나라에 제사를 지낸다고 만동묘를 세웠을까..
즉 후대에 황하를 중심으로 돈황지방을 명과 청에 내준 것이며 후일 명과 청이 세력이 강대해 중국 본토까지 남하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중국 지나족의 조작이며 일본의 역사왜곡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계석의 명언이 진실인 것이며 선조의 서행이 진실인 것이다.
일제 36년 동안 조선사편수사에서 엄청남 역사왜곡과 지명왜곡을 한 것이며
똑같이 중국도 한 것이다.
황제국의 정통역사를 왜곡한 것이니 어찌 퉁탄치 않겠는가.
일제 시대 만주국(한반도와 북만주일대)을 세웠지만 조선의 동쪽인 것이다.
일제시대 상해가 임시정부인 것은 중국에 활동한 독립군이 만주가 아닌 중국 동부(상해)에 위치한 것이다.
그 많은 200만이 넘는 만주와 조선 동부사람이 아시아 일대로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
것이다. 필자의 주장이 한치의 과장이나 민족주의 발로로 인한 억지주장이나 뻥튀기
이론이 아니다.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중국의 역사왜곡과 동북아 공정에 분개하여 역사의 진면목을 알리고자 또 하나의
책이 나온다.
실제 내용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실이 많다.
위에 공개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 중에 일부를 이 곳에 쓸 것이며 년말에 짧지난 4개워집필을 마칠 것이고
9000년 정통 세계사를 제시 할 것이다.
재야의 민족사관은 오히려 진실에 접근하지만 더 큰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조선은 아시아 전체를 말하며 다만 서융(게르만)과 남만(왜와 이-남지나해,
아라비아 반도)와 북적(몽고족)그리고 도둑때(중국 서부 도적때)에 피해를 본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바로 잡고자 한다.
조선은 1500년까지 북경이 중심지였으며 정치세력에 따라 1700년 이후에
안동지방(한반도)으로 넘어온 것이다.
동쪽 도호부의 한성이 세력의 중심지로 이전된 것이 조선 중기의 본질이다.
다시 1900년에 간도까지 빼앗긴 것이다.
간도는 안동세력과 안서세력의 절충지 말 그대로 사이섬인 것이명 안동사람 중에서 북인이 지배한 지역인 것이다.
이 마저도 빼앗긴 것이다.
중국의 역사 왜곡을 보고 한마디 한다면 전체 중국 땅을 내 놓고 고려시대 수도(남경)
와 조선시대(북경)수도를 내 놓아애 한다고 해야 한다.
지나는 역사를 아에 가지지 않았으며 때놈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이라는 차이나(china)는 신라(진국)를 말한다.
즉 진국은 황하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려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이 중국을 볼때 중국은 남쪽과 북쪽으로 크게 나누어졌다고
한것이다.
남인과 북인의 본질이다.
조선과 명-청은 남동과 서북으로 갈라진 형국을 말하는 것이다.
copied from "Daum cafe "GukickSuhoyonhap"....
hansa83 06/10/05 10:09
한국의 한 국립문화재연구원은 “한국의 문화재를 연구하려면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렵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19세기말부터 일본의 패망 때까지, 특히 1910~1945년 일본 강점기에 한국의 문화재 대부분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일본의 도굴꾼과 일본정부의 지원를 받은 고고학자들은 한국의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마구 파헤쳐 이들에 의해 금세공품, 옥 목걸이, 백자, 석조물, 탑, 사찰의 사리함 등 각종 보물, 고대장서들이 약탈되었다고 합니다.
일본 궁내청에 있는 오대산 사고 소장본의 경우는 주권이 없었던 식민지 강점기에 총독부가 합법기증형식을 빌어 1922년에 반출한 것으로 71종의 의궤가 조사되었고 유일본은 3종이나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철종 이전에 만들어진 90여 종의 의궤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일본의 경우 조선에서 약탈해간 문화재가 궁내청에서만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보유하고 있는 약탈 및 불법 반출 문화재의 전면적인 연구 조사가 이루어져야하는 이유도 바로 이점입니다.
사실 기록을 중시하는 일본이 한반도 강제점령 초기에 우리 역사서 20만권을 태웠다고 하는것도 의심스럽습니다. 역사서의 완벽한 일본소유와 완벽한 역사조작을 위해서 거짓으로 역사서소각을 대내외에 알렸을 겁니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정치적 고려에 따라 약탈문화재 반환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기록을 통해드러났다고 밝히고있습니다.
이외에도 일본과 英·美·獨·佛 등 을사늑약 배후국과 조선분할관련 서방국들 20여국에 우리나라도 확인할 수 없는 경로로 약 75,000 점의 약탈 및 유출된 문화재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도 조사·연구보다는 신문자료와 해외공관의 자료 수집을 종합한 결과라고 합니다
프랑스의 외규장각 도서의 불법 약탈과정은 프랑스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인 로즈제독이 강화도를 일시 점령하고 외규장각을 불태워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책의 국가문서를 약탈하는 불법을 자행했고 후에 프랑스는 이들 조선의 문서와 책들을 국가재산으로 편입해 버리는 2차 불법을 자행함과 동시에 원산국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목적으로의 접근까지 막아버리고 말았는데, 프랑스 소장본은 174종 297건으로 이중 31종은 우리나라에도 없는 유일본이라고 합니다.
규장각 장서가 중요한 이유는 특히 의궤(儀軌)의 경우 근세를 통칭해서 600여 년 동안 꾸준히 기록된 예가 전세계적으로 오직 조선왕조뿐이며1900년대 초기까지 제작되어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도 매우 유익한 자료라고 합니다.
그러나 외규장각 도서 단 2권만이 1993년 TGV도입의 대가로 국내에 돌아왔습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이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민간 차원에서 노력하고 있는 여러 사업의 조사연구에 국가 혹은 국가로부터 예산을 조달받는 기관은 연구성과와 자료들을 공유해야한다. 또한 약탈, 불법거래 문화재의 반환은 기존 국제협약인 '원산국으로의 반환 결정 원칙'을 따르며, 약탈 문화재의 소유국은 원산국의 민간인과 학자의 접근을 허용해야한다 등의 유네스코의 권고 안을 토대로 해서 프랑스로 약탈된 문화재와 65년 이후 일본과의 협정에서 누락된 약탈 문화재 반환을 위한 문화적, 도덕적 차원에서 꾸준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그의 기고 글에서 밝혔습니다.'
치우님의 귀한 글 감사히 읽었으며, 다음 글을 벌써 기다립니다 조회 257 06.10.08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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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몇번을 읽어도 이해가....
이런 것은 지명이 같은데서오는 오해인데, 우리나라 지명이 거의 중국에 있어요.
그렇다면 중국이 우리지명을 가져갔을까요, 우리가 중국지명을 가져왔을까요?
우리 지명이 중ㄱ구에서 온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