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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 영조의 아들 사도(장헌)세자
정조: 22대 정조(이산)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28세)사이 에서 태어났다.
정조나이 11세때 아버지 사도세자(27세때)가 영조에 의해 뒤주
안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사건)임오화변이다.
1792년(정조.16)에 영남 유생 1만 57명이 연명해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그를 모해한 무리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다.
아버지에 대한 애통함을 30여 년간 간직해 온 정조는 비답(批答)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임오 의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소극적 으로 나마 밝혔다. 이에 벽파는 크게 동요했고 이후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奎章閣)설치를 준비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기반을 확보하는 첫 단초였다.
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와 어필 등을 정리, 보관하고
서적을 수집하거나 편찬하는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규장각은 단순히 왕실 도서관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규장각이 측근 세력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길 바랐다.
1781년(정조.5)에 그 기능이 재정비된 규장각은 정조의 복안대로 승정원이나 홍문관을 대신해 국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다.
정조는 왕이 되자 자신의 어머니 홍씨를 혜경궁으로 높이고 지극
정성으로 효도하고 혜경궁 홍씨가 환갑이 되던해에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 한다. 32년 만이다.
평생을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한탄으로
"산" 정조는 그 애틋한 마음을 정치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당쟁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영조와는 달리 확고한 탕평의지로
일관된 통치원칙을 고수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학식과 문장을 지닌 왕으로서 스스로의 역량으로
왕권 강화를 꾀한 점도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정조는
1794년 화성 축조 책임자로 임명 하고 정약용을 설계 책임자로
삼아 1796년 수원 성곽 완성 했다.
세계 문화 유산으로 1797년 지정되었다.
정조는 화산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 참배를 위해 이곳을 수시로 방문했다.
하지만 1800년 조선의 개혁 바람을 몰고 온 정조가 49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독살설)을 당함으로써 화성은 오랫동안 잊혀진 도시가
되고 말았다.
정조의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고,
능은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한 건릉(健陵)이다.
노비제 페지를 시행한 정조는. 정조 24년6월28일 승하.(독살설)
개혁 군주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變)했을까?
2교시 강사: 이동일님(전 은행 지점장)
서원은 선비들의 강학 공간이다. 중심부에 강단이 있다.
상덕사: 배향공간이다. 병산서원엔 만대루가 있다.
초하루 보름엔 서원을 점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