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인물열전1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앙드레 김(André Kim), 김봉남
한 벌밖에 없는 듯 언제나 똑같은 하얀색 옷과 검게 칠해 붙인 헤어스타일, 웃을 때면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는 모습, 개그맨들이나 뭇사람들의 개인기 소재로 이용했던 음~ 어~ 하는 감탄사와 스스로 ‘옥스포드 스타일’
이라 밝힌 영어발음을 섞은 말투, 유명 스타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패션쇼와 신랑신부가 이마를 맞대는 피날레는
많은 사람들이 디자이너 앙드레 김 하면 떠올리는 것들이다.
앙드레 김, 김봉남(André Kim, 1935년 8월 24일~2010년 8월 12일)이 이곳 신도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1935년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현재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서
태어났다. 1999년 옷 로비사건 청문회로 세상에 알려진 그의 본명은 김봉남(金鳳男)이고, 신도초등학교(18회)와
고양중학교(1회)를 졸업했다.
고양중학교를 다니던 1947년 삼송리와 구파발 오가는 길에서 뛰어놀던 김봉남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기차였다고
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꿈을 싣고 달리는 기차는 그를 영어공부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런 김봉남은
선구자적인 기질을 타고난 것으로 보였단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동창과 후배들이 있다.
현재 4~5통 노인회장 김창선씨(신도초등학교 2년 후배)를 비롯한 동문들은 “앙드레 김은 그때도 여자 같았던지
계집아이라고 놀림당하기 일쑤였다”며 “놀림을 당해도 부끄러워 피하기만 했던 내성적인 친구였지만
영어시간만큼은 당당하게서서 책을 읽었다”고 회상했다.
6·25한국전쟁 중인 1951년 1·4후퇴 때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가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산피난시절 수많은 외국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아름다운 의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오드리 햅번의 영화
〈파리의 연인〉에 등장하는 디자이너와 모델 들을 보면서 영화배우와 패션디자이너를 꿈꾸게 되었다고 한다.
1959년 제작된 〈비오는 날의 오후 3시〉란 영화에서 당시만 해도 큰 키와 이국적인 얼굴 덕분에 프랑스인
종군 기자 역할을 맡기도 했으나, 이후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여류디자이너 최경자와 인연을
맺으면서 그녀의 양장점 일을 도왔고, 1962년 최경자가 운영하는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졸업하면서
데뷔하였다. 소공동에 ‘살롱 앙드레’를 열어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디자이너가 되었다. 이때부터 사용하게 된
'앙드레'라는 이름은 당시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던 외교관이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외국인에게 친근한
이름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지어준 것이라 한다.
‘앙드레 김(André Kim)’이 유명해진 것은 1964년 영화배우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하면서 부터다. 1980년 미스유니버스대회의 주 디자이너로, 88서울올림픽 우리나라 대표팀의 유니폼을
디자인했다.
2000년대 이후 ‘André Kim’은 모든 산업분야에서 한국의 최상급 브랜드가 되었다.
삼성물산의 앙드레김 아파트, 삼성전자의 앙드레김 가전, 그리고 국민카드는 앙드레김 카드를 최상급 제품으로
내놓았다. ‘앙드레김’은 이제 의상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앙드레김 브렌드 제품’들은 한국의 대표 문화상품으로도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남성디자이너에 대한 편견 속에서도 개성 있는 디자인과 노력으로 패션디자인계를 스스로 개척하였다.
1966년 파리에서 최초의 해외패션쇼를 가졌을 때 ‘르피가로’지는 그의 패션쇼를 ‘선경(仙境)의 마술’ 이라고
표현했다. 그만의 독창적인 언어와 손길로 지휘하고 그려내는 그의 패션쇼는 머리끝에서 가슴까지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마법의 성(城)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세계 곳곳에서 200여 회의 패션쇼를 열었다. 특히 올림픽위원회의 초청으로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개막 패션쇼를 연데 이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또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집트 피라미드 앞에서 패션 디자이너로는 세계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던
그는 2006년 12월에도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세계 최초로 패션쇼를 열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서울에서는 '문화재환수 기금마련을 위한 패션쇼'를 열어 해외유출문화재의 반환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그의 패션쇼가 열렸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는 두 번씩이나 ‘앙드레김의 날’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지난 40여 년간 세계 각국에서 가진 패션쇼를 통해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당당하게 세계에 알린
명실상부한 세계적 패션 아티스트였으며, 해마다 유니세프 패션쇼 등 여러 자선 행사를 통해서 그는 조용히
자선을 실천하고 후원한 공로로 2001년부터 유니세프친선대사를 지냈다. 인천국제공항 명예홍보대사,
제주특별자치도 홍보대사 특히 고양시 행사라면 등을 역임하기도 한 앙드레 김은 아직도 '한국을 알리고 있는
홍보대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는 1982년 이탈리아 산드로페르티니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공로훈장, 2000년에는 프랑스 예술문학훈장을
받았고, 2005년에는 한국복식학회 최고디자이너상과 2007년 한국언론인연합회가 수여하는 제7회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을 수상하였다. 정부로부터는 1997년에 문화훈장 화관장(5등급)을 수상, 2008년에 문화훈장 보관장
(3등급)으로 훈격이 승급되었다.
앙드레 김은 뚜렷한 직업의식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유명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상징하기 위해 흰색 옷을
고집한 것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대신 저녁시간엔 문화예술 공연장의 앞자리를 지켰다. 그랬던 그는
아쉽게도 2010년 8월 12일 저녁 7시40분경,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숙환인 대장암과 폐렴이 악화되어
당시 74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났다. 생전에 독실한 불자였기에 장례식도 불교방식으로 치른 후 천안
공원묘원에 묻혔고, 정부는 그에게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1등급)을 추서하였다.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은 그저 한 패션디자이너를 일컫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패션의 역사를 대변하는
‘보통명사’이자 선구적이며 모범적인 문화예술인으로, 민간문화외교사절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이름이며,
우리지역의 큰 자랑이자 세계적인 문화아이콘이다.
특히 앙드레 김의 고양사랑은 각별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었던 옛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가 70년대
서울시 은평구로 편입된 상태임에도 평생 ‘내 고향은 고양’ 이라고 밝혀왔다. 모교인 고양중학교에 앙드레 김
장학금과 발전기금을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고양시와 인연이 있는 행사라면 그 어떤 일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5년에는 행주문화제를 위해 국제적인 규모의 패션쇼를 개최해 주었고 고양시 홍보대사로도 활동했다.
장미란 선수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고양으로 달려와 축하해주기도 했다.
그의 고양사랑은 지역주민과 후배들의 가슴에 남아있을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 우리가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야 될 때가 되었다.
제안하건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앙드레 김 그가 어린 시절 꿈을 가꾸고 다녔던 이 거리,
현 ‘송현로’를 ‘앙드레김路(金鳳男路)’라고 불러주길 제안하며, 옛 고양중학교 자리도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게 조성하고,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는 거리, 젊은이들이 찾고 문화와 예술을 느낄 수 있는 고양의
새로운 명소로 다시 태어났으면 한다.
글 : 김훈래_신도동 주민자치위원회 부위원장
사진제공 : 앙드레 김 아뜰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