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는 디카이오쉬네 테우(δικαιοσύνη θεού)로서 율법 행위나 윤리적 행위나 종교적 행위에 의한 인간의 의와 구별되는 것이다.
여기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1) 하나님의 본성으로서의 의(롬 10:3, 사 5:16, 45:23, 24, 46:13, 51:5, 신 32:4, 시 71:15-16, 119:142)라는 설(J. Calvin, J. Barmby), (2) 하나님의 본성이 구원에서 나타난 것,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롬 4:13, 10:6, 10, 사 45:25, 51:5, 시 98:2, 빌 3:9, 히 11:7)이라는 설1) (3) (1)설과 (2)설의 종합, 즉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구원 역사라는 설(롬 3:21, 22, 26, 사 51:5)2) 등0이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 시 14:1-3과 53:1-3의 인용)는 말씀을 볼 때, 인간을 의롭다고 하실 분은 “영원한 의의 본성”(시 119:142)을 지니신 하나님밖에 없으므로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은 계속되는 표현으로도 뒷받침된다.
“나타나서”는 아포칼뤼프테타이(ἀποκαλύπτεται)로서 ‘둘러씌웠던 보자기를 벗긴다’는 뜻으로 숨겨져 있는 것을 밝히 드러낸다는 말이다. “현재형이 의미가 있다. 말씀의 설교에서 되는 현재적 실현을 지시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의 놀라운 실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사건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이 주어져 있다. 복음 없이는 감춰져 있던 것이 복음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계시되었다”(전경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란 구약 시대의 아브라함과 족장들에 의해 희미하게나마 이해되었다(히 11장). 그러나 그 충분한 방법과 방식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뤄지기까지는 계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H. A. W. Meyer, Godet, Zahn”(in 黑崎幸吉), M. Henry, A. Clarke, E. F. Scott, A. B. Mickelsen, W. M. Kroll, A. Barnes, 이상근. 2) “Lietzmann”(in 전경연), J. Wesley, C. R. Erdman, W. Sanday & A. C. Headlam, W. M. Greathouse, W. T. Dayton, 黑崎幸吉, 전경연, 조선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의 에크(ἐκ)는 대개 ‘출처’를, 에이스(εἰς)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믿음에서(으로부터) 믿음으로(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표현에 대해 (1) 구약성경의 믿음에서 신약성경의 믿음으로,1) (2) 낮은 믿음에서 높은 믿음으로(M. Luther, “Malancthon, Shaff”2)), (3) 복음을 받는 믿음에서 하나님의 의를 소유하는 믿음으로,3) (4) 고백하는 믿음에서 하나님께 복종하는 믿음으로(Augustine),4) (5)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믿음으로(“Ambrose”,5) K. Barth), (6) 믿음을 통해서 모든 믿는 자에게(E. F. Harrison, p. 52), (7) 강조적인 의미에서 처음도 그리고 마지막도 믿음뿐, 즉 ‘하나님의 의’에 응답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6) 등0의 견해가 있다. 본서나 갈라디아서 등0의 바울 서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관계를 보아 (7)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케제만(E. Ka"seman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표현이 셈어적이요 수사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Lietzmann, J. Weiss, Ridderbos)은 “악에서 악으로”(ἐκ κακών εἰς κακά:렘 9:3), “죽음에서 죽음으로”(ἐκ θανάτου εἰς θάνατον: 고후 2:16), “영광에서 영광으로”(ἀπό δόξης εἰς δόξαν: 고후 3:18) 등0에서 드러난다.······이 어법은 그 위치상 주어는 될 수 없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Tertullian, Origen, Chrysostom”(in 이상근), A. Clarke. 2) in 이상근. 3) “Theophylact, Clement of Alex., Beza, Locke”(in 이상근), J. Calvin. 4) in 이상근. 5) 상동. 6) C. R. Erdman, A. B. Mickelsen, E. Ka"semann, 조선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또한 사실상 동사와 연결될 수도 없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앞의 말들과는 다만 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의 의미에서 ‘깨뜨려지지 않은 연속성’ (Fridrihsen)을 분명히 드러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세계의 차원’(Stuhlmacher)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복음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실현된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 바울 자신은 빌립보서 3:9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라고 설명하였다. 즉, {율법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비록 의롭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신 것이다”(R. C. H. Lenski). 이것이 바로 칭의이다.
칭의의 사상적 배경은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법적인 의미를 갖는다(출 23:7, 사 5:23). 다이스만(A. Deissmann)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소를 당한 인간에 대한 고소가 취하된다. 그는 정죄가 아니라 자유로 판정된다. 이러한 무죄 석방이 바울의 칭의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칭의란 죄가 없는 자에 대한 무죄 석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으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M. Luther).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다(롬 3:12, 22, 26). “이것으로 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간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즉 생명에의 참여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J. S. Stewart).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의, 혹은 선포한 의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J. S. Stewart, J. Knox, H. A. A. Kennedy). 이 선물은 과거에 주어진 것이거나 미래에 주어질 것이 아니라 현재에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의롭다는 무죄 선포도 현재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칭의의 완전한 소유는 미래의 영역에 놓여진다. 이 점에 대해서 다이스만(A. Deissmann)은 “우리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사상에서 현재적 소유의 의식과 미래의 충분한 소유의 기대 사이의 역동적 긴장을 본다.”라고 하였다.}1)
바울은 이제까지 해 온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하박국 2:4을 인용하여,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였다(참조: 갈 3:8-9). 이 예언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3:11과 히브리서 10:38에도 인용되었는데, 본래는 이스라엘 민족이 갈대아인들의 침략으로 극심한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근거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재 확증한 것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생활의 유일한 원리와 방법은 자신의 의지나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는 믿음인 것이다.
바울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언자를 통해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대한 진리에 대한 예언을 읽어 낼 줄 아는 영적 지각의 소유자이었다. 즉, 그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 말씀에서 보다 깊고 오묘한 영적 의미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필자의 갈 3:6의 주석.
<필자의 www.newrema.com의 ‘난해 성구 사전 2권’, '로마서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