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1주일 강론 : 목자 없는 양/ 추수할 일꾼(마태 9,36-10,8) >(6.18.일)
* 하느님 은총 안에서 그분의 충실한 도구가 될 수 있기를 청하며 오늘 미사를 봉헌합시다!
1. 작년 11/8(화)부터 매월 1회, 국내 성지순례를 통해 많은 것을 공부하고, 느끼고 배우게 됩니다.
6월 12일(월)-13(화) 서울대교구 1박 2일 성지순례 때 처음으로 갔던 성지는 명동성당이었고, 10시 미사를 드렸는데, 명동성당 미사에 처음 참석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회의 첫 번째 본당이며, 신앙공동체가 최초로 탄생한 곳입니다.
2. 조선왕조는 개국하면서부터 중국을 섬기며, 매년 사신을 보내는 사대정책(事大政策)과 함께, 주자학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지배자 양반계급은 사당을 세워 4대조까지 제사를 엄격히 지내게 했고, 1,000여 년간 국교로 믿어온 불교를 탄압하면서 유교를 숭상했습니다.
불교라는 정신적 지주를 잃은 국민은 원시적인 신앙생활로 돌아갔고, 정감록, 토정비결 같은 미신서적을 믿었습니다. 또한 위정자들이 사화와 당쟁으로 분열되면서, 외세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사람들은 새로운 신앙 대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북경에서는 예수회 신부 마태오 리찌 등이 서양 학술서적을 편찬하면서, 천주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전했는데,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을 통해 그런 책을 얻게 된 조선 선비들은 ‘실학운동’을 일으켰고, 또 천주교를 믿는 ‘서학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우리나라 실학운동 선구자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이었는데, 태조 이성계의 8대 후손으로 3명의 왕 치하에서 높은 벼슬을 했고, ‘지봉유설’이라는 백과전서를 편찬했습니다. 그 안에는 마태오 리찌가 만든 세계지도인 ‘만국여도’, ‘천주실의’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중국밖에 모르던 조선 선비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은 그 책 덕분에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들 중에 뜻있는 석학들은 1777년부터 천진암 주어사에서 본격적으로 서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없이 책으로 공부하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천주교 교리, 전통 관습과의 불일치, 천주교 사회와 옛날 사회의 모순 등에 관한 의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북경에 있는 신부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세례”를 받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아주 총명한 27세 이승훈을 동지사 일행 수백 명 중에 포함시켜, 1783년 10월 14일 서울을 떠나,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지금은 비행기로 서울에서 북경까지 1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두 달 걸렸습니다. 중국에 두 달쯤 머무르면 우리나라에 돌아오는 데 총 6개월이 필요했습니다.
동지사 일행이 북경에 머물던 40여 일간 이승훈은 불란서 출신의 예수회 그라몽 신부와 만나, 교리를 배운 후, 1784년 2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권일신, 권철신 형제가 이벽을 지도자로 주일 행사를 하면서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성직자가 와서 전교하지 않고, 신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천주교 공동체를 세운 것은 세계교회사상 한국교회가 유일무이합니다.
한국천주교회 창설자들은 참되고 올바른 종교를 정립하고, 온갖 미신행위를 물리치며, 서로 “교우(敎友)”라고 부르면서, 그 당시의 엄격한 계급제도와 일부다처제를 타파하며, 기도문을 국문으로 만들어 쓰는 “한글전용 운동”을 시작했고,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문호개방을 하면서 우리나라를 근대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이벽은 수십 명의 교우들과 함께, 1784년 겨울부터 중인계급의 중국어 통역관 김범우의 집에 모여 주일행사를 드림으로써 자발적인 천주교회를 창설했습니다. 또 1785년, 김범우의 세례 이후 교회예절과 교리 강좌를 열면서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785년 3월에 이 모임이 관헌들에게 들켰습니다. 양반들은 훈방조치되었지만,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엄한 문초 후, 감옥에 갇혔다가 밀양 단장으로 귀양 갔는데, 태형으로 인한 상처로 객사했습니다. 그는 한국천주교회 첫 번째 순교자였습니다.
1786년 봄부터는 교회운동을 다시 일으켜, 북경교회처럼 권일신이 주교(主敎)가 되고, 이승훈, 정약전, 최창현, 이존창, 유항검 등 10여 명이 신부가 되는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돌아가면서 강론하고 세례를 주며, 고해성사와 견진성사를 베풀며, 미사를 지냈습니다.
2년간 그렇게 하다가 1788년 의문이 생겨, 권일신은 교회서적을 재검토한 결과, 그것을 중지하고, 북경에 밀사 윤유일 바오로를 보내 정확히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상황이 적힌 편지에 감탄하며, 가성직제를 할 수 없고, 세례 외에는 거행할 수 없다고 답서를 만들어 윤유일을 통해 권일신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성무를 중지하고, 사제파견을 요청하면서 조상제사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래서 최초로 파견된 사제가 중국인 주문모 신부였습니다. 명동성당 미사 후 갔던 곳이 “가회동성당”이었는데, 주문모 신부님이 1794년 밀입국해서, 1795년 4월 5일 부활절에 최인길 마티아 집에서 첫미사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입니다.
여성회장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6년간 숨어 살며 사목하던 주문모 신부님이 1801년 4월 19일, 순교한 이후 성직자 영입운동이 시작되었고, 빠리외방선교회에서 사제들을 보냈습니다. 아울러 사제양성이 시급했기 때문에, 모방 신부님은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신학생을 선발해서 마카오로 보냈습니다. 김대건 신학생이 첫 사제, 최양업 신학생은 두 번째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 후 한국천주교회는 수많은 박해 속에 꾸준히 성장해왔습니다.
3. 올해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을 맞은 동기신부들과 함께 지난 6월 1일, 모교인 유스티노 신학교에 가보고 너무 많이 변한 현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에는 한 학년 입학정원이 50명이었는데, 이젠 대구교구, 부산교구 합쳐 75명뿐이라고 했습니다. 가정마다 하나둘뿐이고, 요즘처럼 아주 편리해진 시절에 사제성소가 급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위기상황 속에서 목자 없는 양들이 생기지 않도록 사제성소를 지원하고, 충실한 일꾼을 키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