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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그늘, 물여울 같은 시를 그리며
김 현 희
겨울 빛 사이로 잠시 소리를 낮추는 산골 물소리에 귀 기울이니 무성하던 성하의 여울소리가 생각난다. 내가 사랑하는 시의 문장도 늘 푸성귀 같고 단어들에선 언제나 꽃향기가 났다. 작은 여뀌풀도 냉이꽃도 시 인에게 붙들리면 대단한 주인공이 되는 언어의 연금술사들. 황금 가슴 을 한 산새가 눈꽃 핀 매화나무에서 노래한다. 시인이 되기 전에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 때문에 배경처럼 돋아나던 가랑잎 속에 겨울 풀들 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작은 꽃도 꽃이지만 시금치, 상추, 무, 배추도 그에게로 가면 격조 높은 명문이 되어 놀라고 설레게 표현하는 시, 눈물겨운 삶의 진실과 사람이 사람 되어 어깨 겨누며 신작로를 노래하듯이 걷도록 하는 것이 시라고 생각한다. 멀고 먼 광야 어디쯤에서 모래바람 같은 말들만 받아썼는지 내 시가 안쓰럽다. 마음은 여린 봄풀 같아서 그러했다고 둘러대지만 다다를 수 없는 높이의 사랑은 작은 산새 같은 가슴으로 어림없는 그릇이다. 마음에 가득한 말들은 거칠고 신산스러워 뒷걸음치다가 다시 걸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다시 사랑해야 다시 시를 쓸 수 있겠다. 내 아는 사람들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여 차고 넘치는 강물 같을 때 그때 시를 써도 감동 한 조각 건질까 말까인데 스스로 들길로 나가 풀꽃 피우는 봄볕에게서 사랑을 배워 인정스런 삶의 노래를 다시 다듬어야 숟가락도 시가 되고 작은 눈동자도 시가 되어 사람들 가슴을 데워 줄 것임을 이제야 알아 낸 것도 천만다행이다. 시란 삶을 사랑하는 것에 다 름 아니라는 눈물겨운 진실을…
수수깡으로 지은 듯한 누옥들을 허물고 산뜻한 봄풀로 언덕 위 양지꽃으로 마음 밝히는 등불이 될 시를 다시 배워서 새로운 시의 집의 설계 는 늘 미완의 그림이다.
개울물이 필통 소리를 내는 것을 문학박사인 그 시인은 어찌 알았을 까? 신기하기도 하다.
호박잎이며 푸성귀, 여인들의 삶의 모퉁이들을 어찌 그리 잘 들여다보는지 서정시를 쓰려면 산골로 가야 하나? 숲에서 여러 해를 보내야 하 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읽어 주는 시 같기도 하고 헤르만 헤세가 보던 구름을 더 깊이 바라보았던 것 같기도 하고 워즈워드의 순한 마음도 바탕이 되길 바랬다. 예이츠의 ‛이니스프리 섬’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로버트 프로스트가 걸었을 노란 낙엽의 두 갈래 길을 걷고 싶기도 했다. 사람을 먼저 사랑했고 나무와 꽃들을 밥과 반찬을 푸성귀와 밥 먹는 식구들과 놀러온 산새들을 사랑했던 시인이 알알이 피워내는 시들을 읽으면 눈 속에서 복수초가 피어나듯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지만 모든 것에서 배워지는 시를 나는 버리지 못한다. ‘윌든 숲’으로 가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그리 세세하게 들판에서 숲에서, 맞구나! 하는 시어들이 즐비하게 한결같이 반짝이며 희망을 노래하는지 서정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눈으로 감사하며 부럽기도 하고 눈물도 난다.
그 시에 숲에서 길을 잃어도 두렵지 않고 그 시의 꽃그늘에서 잠을 청해도 부끄럽지 않고 숲을 헤매다가 다시 샘물 소리 듣고 길을 나서도 나는 지루하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을 것 같다. 나는 펄 S.벅의『생의 한가운데』를 걷는 사유를 사랑하다가 여류화가 고 천경자 씨의 ‘한’을 읽어 내다가 여류시인들의 시들을 읽었고 그들의 얼굴과 삶을 엿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유명한 여류 시인을 갑자기 전철에서 만나, 아는 사람처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날은 내게도 눈 속에 매화 보듯 행운이 가 끔 있어 준다고 여긴 적도 있다.
살구꽃 핀 마을을 그림처럼 노래한 이호우 이영도 남매 시인들의 삶 과 사랑과 꽃을 보는 맘이 내게는 오지 않으니, 그냥 마음 토로할 아기 별꽃이나 숨고 싶은 봄까치풀이나 여름 숲의 이질풀같이 사람들의 뒤 에서 노래해 주고 싶었다. 아니 나만의 작은 뜰에서 풀잎도 어여삐 보아 주고 제비꽃 사연도 반갑게 읽어 주는 그냥 그런 말을 혼잣말로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밤이, 호박잎쌈이 밥상을, 구두가 남루한 생과 산새 앉았던 자리에 나뭇가지 흔들림을 보면서 그 작은 샛길에서 마른 먼지 나 는 언덕에서도 사람이 귀한 것을, 올곧은 향기가 반짝인다는 것을, 삶은 상처만으로도 아름답고 그 상처가 보석이 된다는 것을 속속들이 짚어 내는 그 어떤 시들 때문에 나도 그립고 따뜻한 시를 조심히 조용히 가만 히 써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저 글씨가 되지 않는 시, 영혼이 목마른 이 에게 샘물 같은 시를 그리워했다. 빅토르 위고는 “시란 덕의 표현”이라 고 했는데 여기서 또 가던 길을 멈추고 싶다가도 디즈데일리는 “시란 정 을 뿌리로 해서 언어를 싹을 틔운 꽃이며 그 의미는 열매”라고도 한다. 그럼 시란 한 그루 나무가 아닌가? 가지와 잎과 수피와 열매와 그늘까지도 아름다워야 하는 나무 말이다. 고달픈 순례의 길을 가며 울어야 시인이란다. 이어령 님은 또 ‘여름바다 같은 시’를 쓰라고 하신다. 내 시가 그에 미치지 못할 것을 안다. 영혼을 흔드는 시 한 줄 생이 다하게 되면 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괴테의 말처럼 “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 니라 시가 나를 만든다.”는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셸리의 말대로 “시는 가장 행복하고 선한 마음의 순간을 기록하는 일”이라고 하니 그렇게 살기를 소망하는 내게 조금의 희망이 비친다. 에머슨은 “교육과 연구를 잘한 시인은 존경을 받고 저절로 시인된 이들은 사랑을 받는다.” 는 말을 했다. 존경도 사랑도 나와는 관계가 없고 “한 줄의 시가 세상을 살린다.”는 거창한 구호에도 못 미치지만 칼릴 지브란이 설파한 대로 시는 번갯불의 섬광이어서 어휘들의 배열로만 끝날 때는 단순한 작문에 불과하다는 말에 다시 아득히 먼 길을 헤쳐가야 한다고 느끼다가 절망하기도 한다. 네루다처럼 시와 삶을 빛나게 한 시인은 많지 않다던가? 휘트먼이든 엘리엇이든 지독한 사랑을 한 랭보나 베를렌 같은 천재들이 아니면 시를 쓰지 말라고 말한 사람이 없음에 그나마 위로가 된다. 워즈워드의 말처럼 “시란 강력한 감정이 자연스레 흐르는 것”이라면 나도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허무도 처연하게 아름답게 하는 두보의 강력함도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께서 들려주시던 한시들이 시를 사랑하는 자양분이 되었지 싶다. 특히 퇴계선생의『도산월야영매』같은 시가 아직 마음에 남아 있다.
한 점의 고서화를 대하듯 전체를 알아듣게 하는 향기 나는 시를 사랑 한다.
세 살 된 남동생에게 명심보감이나 동몽선습을 가르치시는 것을 귀동냥으로 들어서 그 지혜의 말들과 글 읽던 선율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내 시의 기반은 대지이다”라고 김남주 시인이 말했는데 어찌 대지뿐이랴. 조병화 시인은 “자신을 버리고 아름다운 작별을 위해 시를 쓴 다.”고 하는데 나는 그 깊은 철학을 아직도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찰스 램이나 피천득이나 현진건, 안병욱, 정목일, 반숙자님의 수필로 마음의 양식을 삼고 황홀하던 내가 시인들의 산문을 사랑 하던 내가 왜 이리 시에 끌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라는 시처럼 시가 내게 그렇게 오묘하게 오지도 않는데도 마음은 늘 매일 시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먼저 부끄럽지 않은 삶, 부끄럽지 않은 시, 그리고 어렵지만 깊은 사랑과 설렘과 눈물과 따스함과 봄 창가에 햇살 한 줄기 찾아 들듯 전율도 가끔 있는 좋은 시를 쓴다면 정말 좋겠지마는… 빛나고 응축된 메타포의 시라는 나무는 높아서 올려다보기가 때때로 두렵기도 하다.
산 그리메 내리고 비바람이 불더라도 나는 뜨거운 태양을 견디게 해주는 숲 그늘이나 먼 길을 먼지바람과 걸어가는 목마른 생에 맑고 소백산 주계구곡 물여울이나 옹달샘 같은 그런 시가 좋다. 나도 겨울 지난 움파 같고 통통한 꽃다지에 작고 노란 꽃송이들 도란대듯 미소 짓게 하는 시를 쓰고 싶다. 지용이나 다형, 청록파 시인들은 멀고 큰 산이었고 그분들의 노래로 나도 기쁨을 얻었지만 내가 시를 쓰는 일은 어린 시절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다 하던 문학소녀, 친구들의 연서를 써주던 따위는 빛나는 모국어를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권일 뿐이니까. 여류시인들의 물빛 고뇌와 옥양목 같은 시어들이 언제나 부러웠었다. 그래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자작나무 바라보듯 시를 바라보기만 하려고 했었다. 수필을 짝사랑해서 수필을 썼고 늘 내 주변에서 맴도는 좋은 시 한 편이 주는 전율과 설렘은 시 또한 사랑하게 했다. 자작나무를 볼 때처럼.
한국가곡에 있는 시라는 시들은 모두 노래 부르고 작시가로서 노래 시를 많이 써서 연주되었지만 말 그대로 노래를 부르기 위한 가사라고 생각했다. 운율과 보편성에 대한 노래시의 제약도 있다. 유년시절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르시던 가곡은 정말 비 온 뒤 무지개 같고 밝아지는 하늘같은 쨍한 감동을 받아서 어려서부터 가곡을 정말 사랑하고 지금도 나의 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러나 마음속 말들이 자꾸 움직이고 시를 만들어 키워주길 바라는 것만 같다. 오래 도리질을 했다. 가령 좋은 수필의 씨앗을 품고 있는데 콩 심은 데 팥이 나려고 하듯 시를 쓰라고 마음이 시킨다.
수필과의 갈림길에서 서성이기도 한다. 너는 왜 시가 되려고 하니 그런 마음으로 끊임없이 만나지는 시.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이 시와 시인들의 춘추전국시대에 많이 모자란 나까지 보탤 필요가 있을까 고민되기도 해서 머뭇거린 수많은 시간들, 인생의 계절을 이만큼 지나오면서 철 따라 구름이 일고 하늘 푸르기도 한 날들에 나를 위로해 주고 그 시간을 다독여 주고 오래도록 써 둔 시들은 수십 년 전 친구들의 편지를 모아둔 장롱 속 상자처럼 차곡차곡 잠자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계에서 나무와 숲과 꽃과 국경 없는 바람과 대양과 창공에서 삶을 사랑하고 삶을 매만지고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는 그 어떤 언어들을 짝사랑하는 것이다. 봄이 되면 개마고원 같은 백두산 같은 신춘문예의 시들이 꽃 사태처럼 밀려오는데 잘 알아들을 귀와 눈을 가지지 못한 나는 여전히 시를 대하기가 지체 높은 고관대작을 대하듯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마음 한 쪽 주머니에는 내가 담고 싶은 고운 숨결로 일상의 자잘한 숨겨진 것에서 보석 같은 말들을 찾아내어 빛나게 마름질한, 반들거리고 매끈하여 마음 순해지는 시들이 더 많다. 물론 그런 시들도 내겐 아주 먼 수평선에 떠다니는 연락선이나 자식들이 사는 호주의 광활한 대륙에서 본 끝없는 지평선의 노을처럼 닿을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황홀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행복으로 산다. 오래 전부터 시사랑은 커져가고 혼자만 부르던 나의 노래를 뉘겐가 들려도 주고 싶은 마음이 얼음 밀고 나온 1월의 1일의 탄생화인 스노우드롭(설 강화) 봉오리같이 수줍게 올라와 시를 쓰게 된 것일까?
대지는 아직 차갑고 갈 길이 멀다. 그래도 걸어가 보고 싶다. 시에 길 을 헤매며 시에서 길을 찾기도 하며 봄꽃 필 날을 기다리는 산하가 침묵하는 것 같아도 얼마나 많은 소원을 가지고 숨죽이고 있을까? 내가 존경하는 시인들과 함께하는 많은 시인들은 정갈한 걸음과 빛나는 예 지를 가진 듯하다. 곁눈질하며 배워지면 좋겠다. 그러지 않더라도 나는 시라는 숲길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찾기도 할 것이다. “한낮이 다 가도록 기척 없는 오솔길 조그만 산길을 나 혼자 오고 갈 적에”란 표현을 한 송문헌 시인의 시로 작곡된 가곡이 있는데 그처럼 아지랑이가 떠다니는 봄날 언덕에서 시가 내게 오기를 기다리면서 기척도 없는 먼 길에 서 있었다. 시가 내게 오면 어떻게 맞을 것인가 미루다가 맞으러 가다가 하는 식으로 머뭇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아직 사람을, 인생을 덜 사랑 하는구나. 아직도 내 사랑은 이기적인 걸까 생각이 많다. 내가 부른 노 래가 다른 이들에게 내가 그랬듯이 삶의 윤기를 주고 상처 위에 새살이 되어 줄까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까닭이다.
수많은 시작집들이 있지만 임보 교수님의 『시와 시인을 위하여』를 교과서처럼 자주 펼친다.
“당신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부제가 늘 용기를 갖게 한다.
21페이지에 조지훈 시인의 『시의 원리』라는 책에서 빌린 금언을 읽었다. “시는 우주의 생명적 본질이 인간의 작용을 통하여 표현되는 통일한 구상이다.”
다시 정독하여 몽매한 의식을 깨워야겠다. 삶의 성찬에 차려내는 푸성귀 같은 오늘 아침 쑥 향기와 어린 미나리 향내 같은 좋은 시를 읽으며 숲 그늘, 여울 물, 그 풍경 같은 시를 쓰고 싶다. 금과옥조의 말들이 마음에 박히더라도 여전히 궁구하여야 하는 아득한 길이지만. 새로운 해가 떠올랐으니 새로운 책을 받아든 입학생의 초심으로 설원 같은 원고지에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말들을 벼려서 시라고 하는 향기 나는 꽃이 피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리라. 봄이 오면 다투어 꽃들이 눈물 나게 아름다이 피어나겠지. 그 고운 빛깔들을 만들기 위해 긴 겨울 칼바람 지나고 뿌리들은 숨죽여 살아 내었을 터이다. 그 긴 겨울을 잘 견 뎌 고운 꽃을 피울 수 있을지 염려 가득한 얼굴을 하자 산새들이 일제히 산등성으로 넘어온다. 어디서 들었는지 힘내라고 드보르작의 ‘신세계’ 같이 힘이 나는 교향곡 선율을 들려준다. 바람은 곧잘 지휘를 하는데 들판은 웃으며 관람하고 있다. 긴 방황이 수필과 동시에 시를 사랑하며 걸을 수 있을까? 문득 앞뜰에 피던 물음표 같은 수선화가 빛나고 튜립이 분홍 앞치마를 입은 어린아이 미소처럼 벙그는 날을 기다린다.
어이 할거나? 사랑하면 닮아 간다는데 내 사랑이 남루하여 영 닮아 지지도 않고 깊은 시의 산맥을 가늠할 수도 없지만 돌이켜보면 내 사랑은 바래지 않았었고 한결같이 점진적이었다. 아버지께서 사다 주신 박목월의 동시의 세계와 아버지의 시사랑이 내 시의 촉매제였으나 참 오래된 일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흑백사진 속의 강원도 산골 학교복도에 늘 내가 쓴 동시가 걸렸다. 내가 사는 고장 영주 출신 삼봉 정도전이 설파한 말이 마음에 닿는다. 해와 달과 별들은 하늘의 글이요. 산천과 초목은 땅의 글이요. 시서와 예악은 사람의 글이다. 하늘의 글은 위대하고 땅의 글은 아름다우니 어찌 우주와 자연의 순리와 조화를 따라가겠는가? 사람의 글이 아무리 위대한들 하늘과 땅의 글을 또한 따라 가겠는가? 그러나 서로를 우러르며 살기에 서로를 아우르며 살기에 우주와 자연에서 비롯된 사람의 글 또한 대단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고 메모를 해두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읽으시던 산맥 같고 강물 같은 시를 들을 때도 두 명의 동생들이 시인이라서 시를 가르치며 아프게 써내는 시들을 보아도 나는, 아직 그들에게도 내 시를 보여 주지도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작은별 같고 조그만 꽃씨 같은 시의 꿈을 잉태하여 기르며 가꾸는 연정으로 살아간다. 시의 물방울이 자라는 비밀한 삶의 강물이 기쁨으로 흘렀으면 좋겠다. 잔잔하고 고요하나 견고하고 단단한 생의 편린들을 반짝 이게 하는 열쇠를 찾아 간다는 소망으로 마르지 않아 둥근 조약돌 굴리며 끊임없이 흘러내리리라 짐작한다. 좀 있으면 서서히 푸르러 오는 대 지에 꿈결같이 조화로운 꽃들이 피어나겠지.
“시란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라는 아버님의 말씀이 가지에 내린 흰눈 스치고 가는 솔바람 사이로 들리는 듯하다. 봄비 내린 뒤 엷은 춘광이 얼치는 안개 속같이 마음이 아득해 지는 오늘 같은 날, 스스로 산으로 가, 숲이 된 나무그늘과 생명을 키우며 매일 길 떠나는 여울소리 같은 시를 그린다
ㅡ『우리詩』2017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