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8 08:00 by 김삼웅
재야 인사들이 온갖 고난을 겪으며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인 1975년 10월 8일 제94회 정기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에 나선 신민당의 ‘남장의원’ 김옥선이 신랄한 어조로 유신독재를 비판하였다.
“오늘 우리 의회는 1인 통치를 합리화 시켜주는 한갓 장식물에 불과하게끔 되어버린 정치적 현실을 통탄하며 … 누가 우리 보고 독재국가의 국회의원이라고 낙인을 찍을 때 우리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라고 질타했다.
김옥선은 공화당 정권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결국 의원직을 사퇴하고, 김 의원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던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 의원들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동료의원이 국회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 봐야했다. 정일형 의원이 박 정권을 공격했다가 국회에서 쫓겨난 이후 두 번째 희생자였다.
3ㆍ1 명동사건이 터지고 재야 인사들이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을 때, 즉 1976년 5월 신민당은 정기전당대회를 열었지만 김영삼의 주류와 이철승 연합세력의 비주류간에 각목대회의 난투극이 벌어져 양분되었다. 비주류측에 의해 전당대회장을 빼앗긴 주류측은 당사에서 별도의 전당대회를 열어 김영삼을 총재에 재선출했다.
비주류측도 집단지도체제 당헌을 마련하고, 이철승 등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양측은 서로 합법성을 주장, 중앙선관위에 당대표 등록을 신청했지만, 중앙선관위는 양측의 당대표 등록 신청을 모두 각하하였다.
4개월 뒤에 열린 수습 전당대회에서 신민당은 이철승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이철승은 이른바 ‘참여하의 개혁’과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며 유신체제를 수용하는 대여 온건노선을 취하였다 이같은 신민당의 이철승 체제는 반유신 투쟁에 나선 재야에는 걸림돌로 인식되었고, 유신체제의 ‘제3중대론’이 제기되면서 국민의 불신의 대상이 되었다. 공화당 1중대, 유정회 2중대에 이은 제1야당의 3중대론은 치욕적이었다.
재야세력과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에서 신민당 해체론이 터져 나왔다.
반유신 투쟁의 한쪽 축이 ‘연체화’되면서 재야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다. 밖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김대중의 힘겨운 옥중생활은 계속되었다. 신문 구독과 라디오 청취가 금지되고 책도 월간지나 시사적인 것은 차입이 금지되었다. 그래서 주로 교양서적과 종교관련 책을 읽게 되었다.
1977년 10월 31일 김수환 추기경이 형무소로 면회를 왔다. 정치활동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잘알게 된 사이였지만 먼 길을 직접 찾아오실 줄은 미처 몰랐다. 중앙정보부도 추기경의 면회를 막지는 못했다. 추기경의 면회는 김대중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다. 신앙적으로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2009년 2월, 김 추기경이 선종하였을 때 김대중은 명동성당의 추모제에서 김 추기경께서 면회와서 100만 원의 영치금을 넣어준 사실을 공개하면서 추모의 염에 목이 매었다. 이철승 신민당 대표가 난로를 보내주어 추위에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유난히 추위에 약한 체질이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박 정권은 투옥 1년 9개월이 되는 1977년 12월 22일 신병치료라는 명목으로 김대중을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시켰다. 3ㆍ1 명동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사람은 그 이전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모두 석방되고, 김대중이 가장 나중에 그것도 병원 이송의 명목으로 새로운 연금조치를 취했다. - "독재자가 친절을 베푸는 것은 누구의 인격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지조와 정기를 꺾으려는것이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나오는 말 그대로였다. 국민과 세계의 여론으로부터 눈가림을 하려는 연막전술이었다.
‘3ㆍ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된 지 약 1년 9개월이 되는 1977년 12월 22일 나는 신병 치료라는 명목으로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상 이유였고, 진짜 이유는 국내외의 비난을 막으려는 박 정권의 고육지책이었다. 서울대병원에는 신병을 치료하는 수감자를 수용하는 ‘특별감(특별감방)’이란 곳이 있었다. 서울대병원 201호실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교도소보다 더 엄중하게 내 신변을 감시하고 면회를 제한했으며 외부와의 접촉을 아내 한 명으로 제한시켰다.
이 병원 특별감방 생활은 교도소의 2년간 수형생활보다 훨씬 엄했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외로웠다.
결국 1년간 여기 있었지만, 무엇보다 참기 힘든 건 한 발짝도 밖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교도소에서는 벽이 두꺼워서, 외로울 때는 큰소리로 성경을 읽는다든지 찬송가를 부르고 때로는 판소리 민요 등을 부르기도 했다. 특별감방에서는 이러한 일조차 일체 금지되었다.
병원에서는 베니아판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간수가 있어서, 종이 한 장 넘기는 소리까지 전부 감시당했다. 유리창문은 이중의 불투명 유리에 철창으로 꾸며놓아 하늘은커녕 단 한 줄기 빛조차 볼 수 없었다. 아울러 칠흙 공간을 밝히기 위해 병실안은 24시간 전구를 켜놓고 있었으며 앞방은 정보부 직원과 교도관들이 사용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을 완전 통제했다. 말하자면 겉으로는 ‘병원’생활이었지만 안으로는 교도소보다 더 지독한 ‘특별감옥’이었다. 그런 괴로운 나날은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었다. (주석 14)
정부가 신병치료의 명목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치료는커녕 어떤 형태의 진찰도 하지 않고 매일 체온을 재는 정도일 뿐이었다. 말이 좋아 병원이지 특수감방이었다. 입구에는 매일 교도관 10여 명과 중정 요원, 정보과 형사 등 20여 명이 감시하고 있었다. 독방 창문은 모두 폐쇄하여 햇볕이 들지도 않았고 하늘을 바라볼 수도 없었다. 서신도 제한되고 운동도 금지되었다. 잔학한 인권탄압이었다. 그래서 부인을 통해 관계 기관과 법무장관에게 진주교도소로 다시 보내 달라는 이감신청을 내도록하였다.
나는 서울구치소장과 법무부장관에게 원래 있던 교도소로 돌려보내 달라고 신청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밖에 나가거나 운동을 할 수도 없었고, 편지를 쓰는 것도 제한받아 몽당연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메모한 것을 간수에게 맡기고 출옥할 때 받겠다고 했지만 그것마저 거절당했다.
나는 다시 9월 6일을 기해서 “교도소로 보내달라”는 요구를 법무장관에게 속달로 부치고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산 채로 관에 들어간 듯한 그런 비인간적인 처사에 항의하는 것 외에, 이제 더 이상의 정치적 속임수를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정부는 나를 교도소에 가둔 일에 대한 세간의 비난을 뒤집기 위해 인도적인 입장에서 병원으로 옮겼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속임수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교도소로 돌려보내 달라고 단식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주석 15)
주석
14) <김대중자서전(2)>, 83~84쪽.
15) 앞의 책, 84 ~ 85쪽.
첫댓글 "독재자가 친절을 베푸는 것은 누구의 인격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지조와 정기를 꺾으려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