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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싸이가 2013년 5월 26일, 이탈리아 로마의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열린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을 앞두고 무대에 올랐다. 이날 그는 현지 일부 팬들의 야유를 받았고 외신은 이를 일제히 보도했다.
가수 싸이가 2013년 5월 26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로마의 올림피코 스타디움에서 열린 코파 이탈리아(이탈리아컵) 결승전 식전 행사에서 현지 일부 팬들의 야유를 받았다. 이 행사에서 싸이는 ‘강남 스타일’을 불렀으나 일부 팬들은 야유를 하거나 폭죽까지 터트렸다. 공연 도중에 싸이는 ‘왓 이즈 잇?’이라고 외쳤는데 오히려 관중은 야유를 했다. 순간 당황했으나 ‘국제가수’ 싸이는 이내 이탈리아어로 ‘이탈리아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며 공연을 마쳤다.
싸이도 사랑하고 축구도 좋아하는 우리로서는 야속한 소동임에 틀림없으나 그들의 야유에는 최소한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우선 유럽의 축구장에서 ‘초청 가수’의 노래를 듣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비단 한국인 가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럽 축구장의 일부 팬들은 축구장에서 자신들의 서포팅이나 관중들의 자연스러운 함성 이외의 다른 요소가 벌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대중문화의 산실인 미국의 경기장(MLB, NLF, NBA 등)에 싸이가 등장했더라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을 것이다.
둘째, 이 연재의 지난 순서에 쓴 것처럼 이탈리아의 축구장이 최근 인종차별 문제로 시끄럽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의 축구장, 특히 로마의 축구장이 무척 위험하다는 것을 지난 연재에서 확인했다. 그러나 그렇기는 해도, 경기가 끓는점을 향해 치솟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유독 싸이를 겨냥하여 뚜렷한 인종차별 공격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번 사건은 한국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나 싸이 음악에 대한 반응의 문제가 아니라, 비중 있는 경기 전에 팬들의 서포팅 대신 가수를 초대하여 노래를 부르는 것에 대한 비난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그들에게 축구는 ‘주말의 여가 선용’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현대사 1백 년이 농축된 문제다. 더구나 AS 로마와 SS 라치오가 맞붙지 않았는가. AS 로마는 2013년 5월 13일 AC 밀란과의 원정 경기에서 관중들이 마리오 발로텔리, 케빈 보아텡 등 상대팀 흑인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내 경기를 중단시킨 적이 있다. 이 일로 AS 로마는 세리에A 사무국으로부터 벌금 5만유로(7천300만원)의 제재를 받았다. 지난 연재에서 확인한 것처럼 라치오는 극우 성향 울트라스로 악명이 높다. 인종차별 응원 때문에 2013년 3월에는 유럽축구연맹(UEFA)으로부터 무관중 2경기와 벌금 4만 유로(5천800만원 가량)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그런 두 팀이 이탈리아의 현대사, 로마의 흑역사, 장기 경제불황, 크고 작은 마찰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로마의 불안정한 상황을 배경으로 마치 압력밥솥의 증기가 터져나갈 것만 같은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는데, 그만 싸이가 원치 않는 잔치의 초청가수가 되어 뜻밖의 야유를 들었던 것이다. 만약 싸이가 4월 21일 로마 건국 기념일이나 5월 1일의 노동절 콘서트, 혹은 6월 2일 공화국 기념 콘서트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경기장에 왔던 수많은 팬들은 그의 이름을 외쳐 불렀을 것이다.
2007년 2월 11일, 산 필리포 스타디움에서 열린 메시나와 카타니아 사이의 경기를 앞두고 경찰들이 경기장 곳곳에 배치되었다. 시칠리아 더비의 뜨거운 열기는 때때로 폭력으로 얼룩진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탈리아는 지형상 우리와 같은 반도의 나라지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시국가가 군웅할거 해온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19세기 초에 사르데냐 왕국으로 병합되었고, 그런 와중에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 및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계속 받다가 1861년에야 하나의 나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도 승자의 관점이 아니라 패자의 관점, 즉 남부 이탈리아나 시칠리아 입장에서 보면 강제로 복속된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축구장이 여느 나라보다 더 강렬한 지역감정이나 민족주의로 끓어오르는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당신이 시칠리아로 여행을 갔다면, 그곳이 ‘시칠리아’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곳 사람들에게 “이탈리아는 정말 아름답군요”라고 하면 싫어할지도 모른다. 시칠리아는 본토에 강제 병합된 곳으로, 그 과정에서 소수의 독립파와 이들을 강압했던 지주들, 그리고 이를 압도해버린 본토의 군대가 있었다. 여담이지만,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걸작 <대부 2>의 앞부분, 회상 장면은 이러한 정황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더비 중에는 축구특별시 밀란의 더비와 수도 로마의 더비, 그리고 제노아 더비가 꼽히는데 여기에 팔레르모, 카타니아, 메시나 등이 맞붙는 시칠리아 더비도 그 열기와 광기에 있어 다른 더비 못지 않다. 06/07 시즌, 카타니아 홈구장에서 열렸던 시칠리아 더비는 경기 종료 후 카타니아 관중의 무력 행동으로 경찰이 사망하는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이 사태로 06/07 시즌의 세리에 A는 한동안 무기 연기된 적도 있다. 그와 같은 과잉 열기는 시칠리아 내부의 더비만이 아니라 본토의 강호들과 맞붙을 때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주권의 측면에서 이탈리아가 공화제로 거듭나게 된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일이다. 패전 이후 이탈리아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했고, 1946년 6월 총선거 및 동시에 치러진 국민투표로 공화제가 결정되어 마침내 1948년, 오랜 군주제가 종식을 고하고 공화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를 둘러싼 전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교회가 문제였다. 여기서 ‘교회’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권력으로서의 바티칸을 말한다. 1929년 무솔리니 파시즘과 교황청은 라테란 조약(콩코르다 종교협약)을 맺어 일종의 ‘신성동맹’을 유지해왔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교회는 강력한 대토지 소유자이자 영주 이상의 권력 집단이었으며, 근대 이후에도 자본과 대지와 노동의 상위를 점유한 권력으로 작용했다. 그런 바티칸이 파시즘과 손잡고 공생의 관계를 모색한 것이다.
그것도 역사와 정치와 문화의 중심 도시인 로마에서, 권력의 실체이자 상징인 로마를 양분하는 신성동맹이 1929년의 협약이다. 이 맹약은 ‘독립국’ 바티칸과 이탈리아 사이에 체결된 외교조약이므로 패전 이후, 공화제 이후에도 지속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의 축구장이 축구 외적인 감정으로 뒤엉키고 있는 것이다.
기업 또한 복잡한 이탈리아 현대사 내내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19세기 말 거세게 불어닥친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운동은 오늘날까지 이탈리아의 저변에 흐르고 있다. 그들은 1948년의 헌법 1조에 ‘이탈리아 공화국은 노동에 기초를 두는 민주적 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면서 사회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고 있다. ‘사회권’이란 단순히 국가 권력의 간섭이나 억압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도록 하는 적극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는 무솔리니 파시즘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거나 굴절되어 왔다. 기업은 아슬아슬한 평균대 위에서 움직였고 신자유주의 이후 이탈리아의 국가 권력, 미디어, 문화 등은 통제받지 않는 자본으로 넘어갔다. 세 번이나 총리를 지내면서 자본과 미디어와 권력의 추악한 신성동맹을 통해 20여 년 동안 이탈리아를 지배해온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의 경우를 보자. 그에게 축구는 권력, 교회, 자본의 상징이었고 나아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는 이른바 ‘전통 명문’이라고 하는 AC 밀란의 구단주다. 그렇다면 토리노의 유벤투스는 어떨까? 이탈리아 현대사에서 가장 힘겹게 줄타기를 해온 피아트 자동차와 유벤투스는 자웅동체의 역사다.
이렇게 하여 이탈리아에서 축구는 신성 권력과 세속 권력, 파시즘과 민주주의, 독자적 지역감정과 패권적 민족주의, 중세 농업 성향의 남부 이탈리아와 근대 산업 기질의 북부 이탈리아, 강압의 본토와 식민의 섬, 로마와 로마가 아닌 지역 등의 복잡한 갈등관계 위에 형성된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이자 문화가 된다.
어느 지역에서, 어떤 계급의, 어떤 욕망을 기반으로 하느냐에 따라 각 클럽의 성격이 달라지고 서포터즈의 성향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현 구단주의 유별난 행동에도 불구하고 AC 밀란은 오랫동안 노동자 계급을 기반으로 해왔다. 이탈리아의 대표 기업 피렐리와 AC 밀란의 역사는 동전의 양면이다. 같은 도시에서 중산층을 기반으로 역사를 쌓아온 인터밀란은 팀 이름에 걸맞게 일종의 국제주의를 천명하면서 멕시코의 저항군 지도자 사파티스타에 연대를 표시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거점인 리보르노의 축구 문화와 보수적인 성향의 도시 나폴리의 축구 문화는 그 색채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렇게 복잡한 역사 속에서 그야말로 피로 얼룩진 삼국지를 써온 세 팀이 있으니, 앞으로 살펴볼 유벤투스 FC, AC 밀란, 인터밀란이 그들이다.
유벤투스의 엠블럼. 열 번의 우승을 달성해야 달 수 있는 금색 별을 두개씩이나 유니폼에 달고 있는 이 클럽의 역사는 피아트 자동차와 무솔리니 파시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물론 유벤투스를 사랑한다. 유벤투스는 우승(스쿠데토)을 10번 달성하면 달 수 있는 화려한 금별을 2개씩이나 유니폼에 달고 있는 클럽이다. 12-13 시즌 이탈리아 세리에 A의 가장 높은 자리에도 유벤투스가 올랐다. 리그 2연패다. 2006년의 추악하고 끔찍했던 부패의 역사를 이제는 말끔히 씻은 듯하다.
부폰 골키퍼를 위시하여 조르지오 키엘리니, 레오나르도 보누치, 안드레아 바르찰리 같은 탄탄한 수비수들이 유벤투스를 지켰고,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와 아르투르 비달은 허리를 책임졌으며, 레전드 안드레아 피를로가 적진을 무참히 패퇴시켰다. 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실력자들이다. 그만큼은 아니라 해도, 우리는 피아트 자동차도 사랑한다. 그들의 자동차에는 절제된 선 위로 흐르는 현대 디자인의 첨예함이 엿보인다. 피아트 500 아바스 혹은 친퀘첸토는 딱 한번 보는 순간에 영원히 심연으로 각인되는 절묘한 차들이다.
그러나 유벤투스의 축구를 풍부하게 알기 위해서는 이 단어들이 얽히고 설킨 그들의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피아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기업 가운데 하나이며, 특히 무솔리니 파시즘 시절에 기업과 국가가 맺을 수 있는 가장 정교한 언약의 증거로 만들어졌다. 봉건 잔재가 뚜렷하고 산업화는 북부에 몰려 있으며 유사 가족주의가 사회 전 분야에 촘촘히 얽혀 있는 이탈리아에서 피아트는 평균대 위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록 그 가문이 일일이 유벤투스의 경영에 개입하지는 않고 있지만, 창립자 조반니 아녤리(Giovanni Agnelli)와 그 후예들에게 있어 유벤투스는 가문의 영광을 빛내는 절대적 존재이다. 1921년 이후 상당한 영향력을 차지한 파시즘과 파시스트를 자유주의 진영은 반사회주의 연합에 끌어들였다. 물론 아녤리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깊은 존중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파시즘의 행동주의는 기업의 목줄을 잡아끌었다. 양차 대전 사이에 아녤리의 피아트는 자사의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인 복지 정책을 실시했다. 그와 동시에 고도의 생산 능력을 요구했다. 곧 다가올 전쟁은 피아트의 새로운 활로가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아녤리는 유벤투스를 인수하여 산업과 축구 양쪽을 완전히 평정했다.
이탈리아에서 창단된 최초의 축구팀은 1893년의 제노아 팀이다. 곧이어 토리노, AC 밀란, 유벤투스가 창단되었다. 그 초창기인 양차 대전 사이에 유벤투스는 아녤리 가문이 인수하여 30-31시즌부터 1934-35시즌까지 이탈리아 최초의 리그 5연패를 이룩한다. 창단 때부터 이탈리아 순혈주의를 바탕으로 외국인 선수는 물론이고 가급적 토리노 출신 선수들을 주전으로 앞세운 까닭에 유벤투스는 인종적 민족주의를 앞세운 무솔리니 파시즘(이탈리아어 ‘파쇼(fascio)’는 하나로 묶는다는 뜻이다)의 외연기관처럼 되었다. 피아트라는 막강한 자본과 그 공장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관중은 유벤투스의 자산이었다.
창립자의 아들 에도아르도 아녤리가 1923년에 구단주를 맡았고 이후 그의 후손들이 역대 구단주 자리를 역임했으며, 지금도 구단의 책임 있는 자리에서 수많은 후손들이 일을 하고 있다. 라치오와 AS 로마에 이어 이탈리아에서는 3번째로 주식시장에 상장된 축구 클럽이지만, 팀의 운명과 경영을 좌우할 만한 주식은 여전히 아녤리 가문의 몫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탈리아 축구는 곧 유벤투스의 역사였다. 49-50 시즌 우승을 포함하여 유벤투스는 57-58 시즌에 이탈리아 클럽 최초로 10회 리그 우승을 이룩한다. 그리하여 유니폼에 큰 별 하나를 먼저 달게 된다.
60년대에 밀라노 축구에 잠시 밀리는가 싶더니 다시 유벤투스는 7,80년대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써나갔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축구는 세계 최강의 리그였다. 지오바니 트라파토니 감독(2002한일 월드컵 때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은 무려 9번의 리그 우승을 일궈냈다. 84-85년에는 클럽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뤘으며 특히 78-79 시즌으로 또다시 10번째 우승을 하며 가슴에 별을 하나 더 달게 된다.
80년대 중반 이후로 마라도나가 활약한 나폴리나 베를루스코니가 인수하여 축구장 안팎에서 공격적 스타일로 변모한 AC 밀란에 의해 또 다시 중원에서 패퇴하는가 싶었지만, 90년대의 유벤투스 스쿼드는 역시 맨 윗자리에 올라서고자 하는 팀의 DNA를 버리지 않았다. 유벤투스는 챔피언스리그에서 95-96 시즌 우승을 하였고, 그것을 포함하여 이후 세 번 연속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벤투스는, 그리고 이탈리아 축구는 변화된 축구 산업 지형에 맞춰 새로운 모색을 감행했다. 그러나 방향이 틀렸다. 호나우두, 셰브첸코, 말디니, 지단, 인자기, 바티스투타, 부폰, 튀랑, 베론, 네드베드 등 수많은 선수들이 이탈리아 리그에서 뛰었지만 방만한 경영, 구단 중심의 경영, 팬을 외면한 경영, 승점 쌓기에 골몰한 경영, 패장의 목을 무참히 베어버리는 경영, 세계 축구팬들의 관심을 차단해 버리는 경영 등으로 각 클럽은 재정 위기의 벼랑으로 치닫게 된다. 피오렌티나는 파산하였고 라치오, 파르마 같은 팀들도 그런 위기에 봉착했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기업 피아트(오른쪽)의 창립자 조반니 아녤리(왼쪽). 아녤리 가문은 1923년 유벤투스를 인수해 현재까지도 구단주를 맡고 있다. 이를 두고 “유벤투스는 아녤리 집안의 장난감”이라는 의견도 분분하다.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의 저자 프랭클린 포어는 “유벤투스는 피아트의 소유주이자 밀란 주식 거래액의 지분을 상당 부분 가지고 있는 아녤리 집안의 장난감”이라고 묘사한다. 그에 따르면 이 가문은 토리노와 피아트, 밀라노의 주식 시장과 유벤투스를 ‘조용히 지배’했는데 그 형상은 마치 ‘중앙아메리카의 대토지 소유자’ 같다. 이탈리아의 자동차, 은행, 보험, 화학, 섬유, 군수, 시멘트, 출판 등을 거느린 이 가문은 막강한 돈과 세습 권력, 그리고 거미줄처럼 얽힌 사회 관계망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해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총리의 임무는 아녤리 집안의 문고리를 닦는 일”이라는 절망적인 농담을 할 정도다.
유벤투스를 포함한 각 클럽의 검은 거래는 결국 세상에 밝혀졌다. 선수는 감독만 바라보고, 감독은 심판만 바라보고, 심판은 단장을 바라보고, 단장은 이사진을 바라보고, 이사진은 구단주를 바라보는 위계질서는 결국 리그 수준의 하향 평준화, 경기장 내 폭력과 인종차별, 그리고 마침내 2006년 ‘칼치오폴리’라고 하는 축구계 전체의 검은 거래와 음모와 비리로 얼룩지게 된다. 승부 조작을 포함한 다양한 유형의 검은 비리로 인해 유벤투스는 세리에 B(2부리그)로 강등 당했으며 AC 밀란, 피오렌티나, 라치오 등은 승점 삭감 처분을 받았었다.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던 선수들은 그 거래의 말단에서 상처를 입었으며 결국 팀을 떠나기도 했다. 결코 고액 연봉에 취해서 그들의 실력이 녹이 슬었던 것은 아니다. 2006독일 월드컵의 우승컵을 누가 차지했던가. 바로 이탈리아 선수들이다. 그 이후 월드컵과 유로 대회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은 합리적인 수비와 정열적인 공격을 만들어냈다. 다만 그들이 클럽으로 돌아가면 먹이사슬의 하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타원형의 AC 밀란 엠블럼 속 십자가는 십자군 원정 때 밀라노 사람들의 활약을 담고 있다. AC 밀란은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유럽 축구를 이끈 명문 클럽이었다.
아녤리 가문와 유벤투스의 중원 지배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였다. 막강한 미디어 재벌이었던 그는 1986년에 AC 밀란의 구단주가 되면서부터 이탈리아 축구계를 대혼돈 속으로 몰아넣었다. 아녤리 가문이나 여타의 구단주들이 겉으로 전문 경영인을 내세우며 은밀한 지배를 행했다면, 이 희대의 정치가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축구의 정치화를 추진했다. 그는 자신과 AC 밀란을 동일시했으며 바로 그런 차원에서 선수들에게도 강한 소속감을 심어주고자 했다. 그는 AC 밀란을 인수한 후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유명한 ‘발퀴레의 비행’을 배경 음악으로 깔면서 선수들을 헬리콥터에서 경기장으로 내려보내는 특별한 세리머니를 할 정도였다. 이 음악은 역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지옥의 묵시록>에서 섬찟한 공습 장면에서 활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AC 밀란의 엠블럼은 타원형이다. 방패를 뜻한다. 그 안에 또 하나의 원이 있다. 10세기 말 제 1차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의 성벽에 가장 먼저 올라가 십자가를 세웠다고 하는 밀라노 사람을 상징하는 도안이 새겨져 있다. 처음 팀이 만들어질 때 잉글랜드 사람들도 동참했기 때문에 밀라노가 아니라 밀란으로 불린다. 그러나 선수단 구성만큼은 밀라노 사람으로만 했기 때문에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따로 팀을 꾸린 것이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인터나치올레 밀란, 즉 인터밀란이다.
AC 밀란의 전성기는 1980년대. 그때 유럽 축구의 시계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회전했다. 그 초반을 유벤투스가 장식했고 후반은 AC 밀란이 휩쓸었다. 베를루스코니가 구단을 장악했던 때가 바로 이 시점이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은 AC 밀란의 전성기였다. 마르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레이카르트가 중심이었고 프랑코 바레시가 이를 떠받쳤다. 훗날 AC 밀란 감독을 맡게 되는 카를로 안첼로티도 이 세대의 주축이었다. 그 아랫세대가 되는 파올로 말디니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가 수비를 맡았다.
한편 그 무렵 인터밀란 또한 로타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안드레아스 브레메 같은 독일 선수에 더하여 쥬세페 베르고미 같은 선수가 활약하며 밀라노의 경기장(동일 경기장을 양 팀이 함께 홈구장으로 쓴다)을 달궜다. 바레시, 베르고미, 말디니 같은 역대급 최고 수비수들은 자국에서 치러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장식했다. 물론 결승 무대는 독일과 아르헨티나 차지였지만, 이 철옹성의 카테나치오는 4강까지 단 한 점도 내주지 않는 실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90년대 이후 이탈리아 축구는 그들의 후진적 정치성과 궤를 같이 하며 퇴보하기 시작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축구장의 구호를 그대로 옮기다시피 한 당파 ‘전진 이탈리아’를 결성하여 축구장 안팎을 장악했다. 그는 거대 미디어 소유자이자 재벌인 자신의 정치적 앞길을 방해하는 언론인에게는 무시무시한 앙갚음을 했다. 물론 자신에게 유리한 경우는 적극적으로 환대했다.
이 점이 유벤투스의 아녤리 가문과 다른 방식이었다. 유벤투스를 출입하는 기자들은 구단주 인터뷰는 고사하고 선수들과 인터뷰할 때도 구단이 정한 규칙과 시간을 엄수해야만 했다. 아녤리 구단은 근대 이후의 전통적인 지배세력답게 조용한 방식을 선호했다.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이자 AC 밀란의 구단주이며, 이를 바탕으로 총리가 된 베를루스코니. 그는 축구장에서의 인기가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다.
신흥 재벌 베를루스코니는 그 반대로 치달았다. AC 밀란의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자들에게 다양한 선물 세례를 하면서 얼마든지 선수들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그 자신이 주인공이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정치부 기자들과는 말싸움을 하거나 대답을 회피하지만, 축구 전문 기자들과는 터놓고 지냈다. 자신과 자기 구단을 마음껏 개방한 것이다.
이로써 AC 밀란의 인기는 국제적으로 상승되었다. 그는 그러한 인기가 어떤 정치적 효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다. 유벤투스의 아녤리 가문은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사 내내 이탈리아의 가장 막강한 집단이었다. AC 밀란의 베를루스코니는 반대로 행동했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이탈리아의 기이한 열병은 개방적이며 세련되고 부자이면서 축구 구단주인 베를루스코니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그는 ‘전진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1994년 총리에 출마할 때는 정치 광고 전문회사 ‘퍼블리탈리아(Publitalia)’를 만들었다. 이 회사는 AC 밀란의 수많은 팬들을 대상으로 정치 광고를 시작했고, 지역의 서포터즈 클럽을 당사로 만들었다. 당의 이름은 축구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구호 그대로 ‘가자! 이탈리아, 전진하자! 이탈리아’가 되었다.
총리가 되어 축구장을 찾은 베를루스코니는 일반 시민(혹은 유권자)을 만날 때 구단주가 서포터즈를 만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언제나 축구를 화제로 삼았고 큰 경기가 있을 때마다 축구장을 찾았으며 때로는 총리보다 구단주의 일에 더 열심이었다. 프랭클린 포어에 따르면, 그는 총리에 출마하면서 “경제가 위기다. 현 상황은 미드필드가 텅 빈 상태로 페널티 지역 두 곳에서 경기를 하고 있는 상황과 같다”는 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이러한 수사법은 곧장 인기몰이의 자극제가 된다. 그는, 혹은 그가 소유한 미디어는 축구장의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점점 줄여나갔다. 과거에는 경기 생중계나 스포츠 뉴스에서 이같은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발언이 있었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의 시대에 그의 축구장과 그의 미디어는 이에 대해 우려하기보다는 조용히 넘어가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 이는 어느새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양상이 되었다. 그래도 이를 제지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극적으로 편집했다. 아니, 본질적인 측면에서 베를루스코니와 이탈리아 극우파의 정치적 자원이 바로 이러한 광기였던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이탈리아 축구의 아름다운 역사를 써온 유벤투스와 AC 밀란은 칼치오폴리, 즉 축구계 검은 비리의 썩은 상자가 되었다. 지난 2006년에 그 빙산의 일각이 드러나서 두 팀 모두 수모를 겪었다. 엄밀한 조사에 따라 05-06 시즌 유벤투스와 밀란의 승점은 삭감 당했고, 그 바람에 당시 리그 3위 인터밀란이 우승을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이 틈을 타서 최강자로 우뚝 선 인터밀란 역시 이 검은 거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2003년 5월 28일, AC 밀란의 선수들이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직후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한때 유럽 축구를 아름답게 수놓으며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탈리아 프로 축구는 지금 몸살을 앓는 중이다.<출처: (cc) Soccer illustrated at en.wikipedia.org>
결국 가장 큰 피해자는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뛰었던 경기의 내막을 알고는 경악했다. 알고 뛴 선수나 모르고 뛴 선수나 모두들 검은 비리의 어릿광대요 허수아비 노릇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게다가 이 추악한 축구장은 사회적인 노력에 의해 개선되기보다 극우적 인종차별로 더욱 얼룩졌다.
사건 이후 극우 파시스트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뛰다가 AC 밀란으로 이적해 온 골키퍼 크리스티안 아비아티는 “나는 온건 파시스트”라고 밝혔다. ‘온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그 어떤 파시스트도 ‘나는 타인종에 불타는 적개심을 가진 강경 파시스트‘라고 말하지 않는다. 더욱이 실제로 ’온건‘이라고 한다면 축구장 안팎에서 공공연히 파시스트적인 발언이나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사상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온건과 강경 사이에 흐르는 물길은 작은 실개천에 불과하다. 특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온건 파시스트는 움켜쥐었던 손을 주머니에 넣고 귀가하기보다는 그것을 불끈 쳐들고 공격할 대상을 찾기 쉽다. 지금 이탈리아 축구장이 그렇게 변질되고 있는 중이다. AC 밀란에서 뛰다가 지금은 피오렌티나에서 활약하고 있는 미드필더 알베르토 아퀼라니는 아예 “나는 무솔리니를 존경하며 이탈리아 내 외국인들은 문제거리”라고 발언한 적 있다.
몇몇 선수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선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AC 밀란에서 뛰던 카카는 2008년 한 인터뷰에서 “이탈리아 축구는 현재 신뢰를 잃고 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여기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폭력은 선수들을 떠나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래도 사태는 진전되지 않았다. 결국 카카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났다.
이탈리아 축구는 이성이 필요한 순간이다. 광기로 스탠드를 불 지피고, 외국인 선수들에 대해 으르렁대며 노골적으로 인종차별 구호를 외치는 것은 이탈리아 축구 100년사를 모욕하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이탈리아 사회 전반의 이성의 회복에 따라 진행될 과제이긴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탈리아의 축구인들이 축구장의 문제를 사회의 문제라는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발로텔리처럼 인종차별을 일삼는 파시스트 팬들에게 엄중히 항의하는 선수도 늘어나야 한다. 또한 그러한 선수를 보호할 줄 아는 감독이 필요하다. 승리를 위해 쓰고 버리는 감독은 아마도 저 높은 곳의 구단주 눈치만 살피는 인물일 것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사회는 보호되어야 한다. 그렇기 하기 위하여, 우선 축구장이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